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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5. 8
<내 나이를 묻지 마세요>
레이디 조이는 잔꽃 무늬 가득한 PVC 크로스백을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메고 왼손엔 흰색 에코백을 들었다. 무거워 보였지만 발걸음이 가볍다. 왕복 8차선 넓은 도로로 달리는 차들은 씽씽, 6월의 햇살도 쨍하니 경쾌하다.
정수리까지 치켜 올려 묶은 머리는 걸을 때마다 좌우로 흔들거렸다. 초여름 바람이 들락날락하여 시원할 얇은 면과 폴리의 혼방 짧은 원피스는 입은 듯 입지 않은 듯 가벼웠다. 바람에 날리는 치맛단 아래로 약간의 팔자걸음이 나왔다가는 다시 제대로 일자 걸음, 어느새 팔자걸음이었다가 다시 일자 걸음으로 돌아왔다.
차도만큼 넓은 인도에는 심은 지 오래된 가로수들이 무성했다. 크게 자랄 것을 생각하고 적당한 간격을 두고 심은 나무들은 옆 나뭇가지들 조심할 것 없이 원하는 만큼 높고 넓게 쭉쭉 가지를 뻗치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들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끊이지 않고 달리는 차 소리로 시끄럽고 그 많은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과 자연히 일어나는 먼지로 가득했을 도시 한복판은 이 큰 가로수들 때문에 숲속을 걷는 기분이 들게 해 주었다.
깨끗한 통유리 안에서 물건들 중심으로 웅성웅성 모여 있는 사람들과 평소에 좋아하던 온갖 애플 제품들이 눈길을 잡아 끌었다. 1층이지만 천정이 높아 2층 같이 높고 넓은 매장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와 햇빛에 취해있던 레이디 조이는 건물들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는 바람에 이마가 닿거나 코가 닿을 뻔했다. 매장 안, 인조인간인 듯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하고 규격이 딱딱 맞는 얼굴과 체형을 한 남자와 여자가 코를 박고 있는 레이디 조이를 쳐다보았다. 눈으로 물건들을 빼돌릴 수 있을 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그 남자와 여자가 보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크로스백을 반대쪽 어깨에 돌려 메고, 에코백은 그대로 왼손에 들었다. 남은 한 손으로 기기들마다 돌아가며 작동시켜본다. 최신 사양들을 만지작거린다. 주로 카메라의 기능을 보는데 실제 사물들이 보이는 그대로이면서 또 얼마나 예쁘게 찍히는가를 확인하고는 내려 놓았다. 방해받지 않고 한참을 보던 레이디 조이는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의자가 없구나.’
투명인간으로 들어갔다가 투명인간으로 나오는 일, ‘안녕하세요.’ 웰컴 인사 나눌 것도 없고, ‘안녕히 가세요’ 굳바이 인사도 받지 못하고 나오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인사에는 대가가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문명의 기기로 가득했던 그의 눈 안으로 길 따라 쭉 이어지는 가로수들의 초록잎들이 들어왔고, 머릿속, 몸속, 영혼까지 곧장 파고 들어와 최신형 아이폰 14에 대한 잔상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에잇, 에잇으로도 충분해. 인생은 그런거지, 어떻게 다 갖고 살아. 그게 그거겠지, 뭔 차이가 나겠어. 14나 8이나...’
크로스백을 다시 바꿔 메고, 에코백도 바꿔 들었다. 틈틈이 팔자걸음이 의식되었던지 신경써서 발바닥을 긴장시켰다.
‘발들아, 정면을 향해 걸어. 자꾸 바깥쪽을 향하지 말고! 벌어지지 말라구. 모으고 걸어!’
이번에 눈길을 끈 물건은 매장 밖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
여전히 가로수 가까이 걷던 레이디 조이는 무엇인가 보고 싶어서 상가 건물들 앞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행거에 길게 걸려 있는 옷들을 하나씩 밀며 살펴보았다.
‘입은 듯 안 입은 듯 시원한 바지예요. 곧 여름이잖아요~ 원플러스 원 아니고 원 플러스 투예요, 투!!’
레이디 조이는 머리를 찰랑거리며 행거 사이로 왔다갔다하며 뒤적거렸다. 한손으로 보자니 속도가 나지 않아서 에코백마저 한쪽 어깨에 메고 양손으로 뒤적거렸다.
‘엄마에게 어울릴 색, 언니에게 어울릴 색, 내가 좋아하는 것, 원플러스 투, 좋네.’ 레이디 조이는 꼼꼼히 골라 직원에게 건넸다. 엄마는 검정과 흰색의 기하학적 무늬가 인쇄되어 있는 것으로, 언니에게는 터키블루와 지중해 오렌지색의 유럽풍으로, 자신을 위해서는 올리브색과 노랑의 작은 꽃으로 가득한 것으로 골랐다. 만원에 세장. 큼직한 종이 가방에 담아 주시며 중년의 여성이 말했다.
‘눈썰미가 좋으시네. 시원하게 입으세요. 원플러스 원이 아니라, 원플러스 투예요. 투!!!’
이미 돈을 치른 레이디 조이는 직원의 눈 밖으로 밀려났고 새롭게 눈썰미 좋게 고르러 다가오는 또 다른 여성과 대화가 시작되었다.
얄팍한 여름용 바지 3장만 달랑 담기에는 큰 종이가방을 접어서 어깨에 멘 크로스백에 함께 넣을까 하다가 그냥 남은 손에 들고 다시 가로수 쪽으로 걸었다. 해는 중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팔을 들어 올렸다. 팔뚝에 여름바지가 들어있는 종이가방이 대롱대롱 매달려 바스락거렸다. 손가락을 쫙 펴서 햇빛을 가린 채 목을 뒤로 젖혀 보았다. 뻐근하다. 왼쪽으로도 꺽어 보고, 오른쪽으로도 꺽어 보았다. 어린 시절 친구네 집에 가던 밤길, 이렇게 고개를 뒤로 젖히고 별에 홀려 걷다가 개울에 빠질 뻔했던 일이 생각났다.
약속 장소에 제 시간에 도착했다. 노랑 바탕에 올리브색의 깔끔한 한글 정자로 ‘브런치 카페 올리브나무’라고 적은 이탈리아 음식점이었다. 시원하게 에어콘이 돌아가고 있었다. 레이디 제니와 레이디 애니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레이디 조이는 자연스레 테이블 건너편으로 가서 손을 흔들었다. 의자에 가방들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한숨과 인사가 섞여 나왔다. ‘안녕.’
레이디 제니가 말했다. ‘걸어오셨어요?’
‘걷는 거 좋아해요.’
‘우리는 택시타고 왔어요. 전철 역부터 걷기에는 좀 멀지요?’
‘오면서 구경도 하고, 바람도 좋고 해서 걸을 만 했어요. 오다 보니 애플매장이 큰 게 있더라고요. 그림의 떡이지만 그래도 구경은 재밌어요. 스마트폰 쓰기 시작할 때, 어찌어찌하다 아이폰을 쓰게 돼서인지 내내 아이폰을 쓰게 되더라고요. 참 매력있어요.’
‘저두요.’ 레이디 제니가 말했고 애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애니씨는 별 관심 없죠?’
‘네, 저는 조이씨나 제니씨보다는 기기에 관심이 없어요. 이번에 단톡도 어쩔 수 없이...’
레이디 조이가 애플, 아이폰, 여름용 바지 얘기하면서 꺼내서 보여주고 만져 보고 하는 중에, 레이디 제니가 말했다.
‘배고프네요. 주문할까요. 뭐로 할까요. 골고루 시켜서 나눠 먹을까요.?’
레이디 조이가 대답했다. ‘네 좋아요. 저는 일단 봉골레 좋아해요. 각자 좋아하는 거 한가지씩 골라봐요.’
레이디 애니는 해물 리조또, 레이디 제니는 루꼴라 잎이 많이 들어간 핏자, 소고기를 살짝 구워 올린 샐러드, 음료는 자몽 에이드, 레몬 에이드. 골고루 주문했다. 레이디 조이가 계산했고 제니와 애니는 바로 n분의 1로 나눠 레이디 조이의 계좌로 송금했다.
음식들이 나올 때마다 레이디 조이와 제니는 약속한 듯이 핸드폰 카메라를 갖다 대었고, 레이디 애니는 웃으며 기다려 주었다.
봉골레에 들어있는 조개는 통통하게 살이 많았고, 해감을 잘해서 으직거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짜지 않았고 올리브유의 향도 잘 살아 있고 조개향도 살아 있어서 가끔 생각날 것 같은 맛있는 파스타였다. ‘재구매의사있음.’이라고 말하며 레이디 조이는 엄지척을 해 보였다.
자몽 에이드도 자몽청이 아니라 막 껍질을 까서 간 자몽을 사용한 것처럼 싱싱하고 싱그러웠다. 루꼴라 잎은 메뉴판에 소개한 사진보다 몇배는 더 많았다. 광고 사진 보다 더 풍성하게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은 처음이라며 레이디 애니가 말했다. 세 여자는 배가 불렀다. 음식 접시들을 한곳으로 치워 두고 음료 잔만 각자 붙들고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조사들을 잘 해오셨어요?’ 레이디 애니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레이디 조이가 말했다. ‘리꾀르는 읽어도 읽어도 모르겠어요. 사르트르의 현상학 이해를 거부하고 종교적인 영역으로 연결시킨 것은 알겠어요. 의식이라는 현상 뒤에 신이라는 실재가 있다는 거죠? 진리탐구, 현상학적인 탐구를 종교적인 질문과 연결시켰다는 거네요.’ 역시 어렵다고 중얼거리며 레이디 애니가 말을 이었다. ‘제가 맡은 부분은 포스트모더니즘인데, 저는 규칙이 있으면 좋겠어요, 진리가 하나였으면 좋겠고, 예측가능한게 좋거든요. 포스트모더니즘은 저에게는 약간 공포예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정답이 없는 것, 이럴 수도 있다, 저럴 수도 있다는 그런 거거든요. 그게 포스트모더니즘인거죠?’
‘프로이트, 소쉬르, 레비-스트로스는...’ 레이디 제니가 말을 이었다. 세 여인은 아무래도 지도 선생님이 있어야겠다고 결론짓고 다음 공부모임 일정을 의논했다.
‘남은 건 어떡할까요?’ 테이블 한쪽에 남겨진 핏자를 들고 레이디 조이가 일어나 직원이 있는 카운터에 갔다. ‘호일이나 박스 좀 주세요. 저희가 배가 불러서 남겼네요.’
직원은 포장해 주겠다며 조이의 손에 들려진 핏자 접시를 건네 받았다.
‘아효, 박스가 너무 아깝네요. 겨우 한조각인데...’하며 박스를 받았다. 레이디 조이는 ‘남은 핏자 가져갈 사람?’ 하며 물었고 제니와 애니는 서로 손사래를 치며 자기들은 필요없다고 눈짓을 했다. 레이디 조이는 ‘아까워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 번 묻지 않고 여름용 바지가 담긴 쇼핑 봉투에 넣었다. 레이디 조이는 뭘 더 마시겠냐고 제니와 애니에게 물었고 그녀들은 다시 한번 손사래를 쳤고, 레이디 조이만 카페라떼 아이스 사이즈업을 주문하였다.
‘고생하셨어요. 다음에 만나요.’ ‘고생하셨어요.’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돌아가는 길에는 버스를 타겠다는 두 여성을 뒤로하고 레이디 조이는 왔던 길로 가서 전철을 탈 것이다. 8차선의 넓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돌아갈 때는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야 다른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건너편 길의 가로수도 같은 종류로 크기도 비슷했다. 이제 해는 기울어가고 오전에 찬란했던 그 빛은 아니다. 오전, 앳된 6월의 태양으로 빛나던 가로수들은 지는 햇빛을 받아 여전한 아름다움, 다른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레이디 조이는 아침에 지났던 건너편 길을 바라보았다. 중년여성 대신 중년의 남성이 행거를 붙들고 ‘입은 듯 입지 않은 듯할 가벼운 여름용 바지’를 판다. 애플 스토어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오고, 오전보다 북적거린 것 같아 보였다.
‘저 길은 나의 과거구나, 저기를 걷던 나는 이제 여기에 있네. 나의 더 지난 날 더더더 지난 날들도 이렇게 눈 앞에서 볼 수 있으면 재미있겠네.’ 중얼거리며 레이디 조이는 아침보다 좀 무거워진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맞은 편에서 학생들이 횡으로 늘어져 오다가 레이디 조이의 커피를 든 손을 쳤다. 커피가 쏟아졌다. 여름용 바지들과 피자 한 조각이 담긴 박스가 든 하얀 종이 가방에 커피가 튀었고, 다른 손에 들려있던 흰색 에코백과 하늘하늘한 원피스에도 튀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밀려오던 사람들이 한번 더 커피 든 손을 쳤고 더 많은 양이 새로 산 바지들 위로 흘렀고 종이 가방은 순간 수십번 들고 다녔던 것처럼 낡고 낡은 쇼핑백이 되었다. 일단 앉아서 정리할 곳을 찾아 보았다. 다행히 가야하는 길 방향으로 대리석 벤치가 있다. 큰 길 위의 벤치는 먼지가 가득했다. 이 길에서는 머물거나 쉬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오래도록 누군가 앉은 적이 없어 보이는 벤치였다. 가방들을 내려놓고 휴지를 꺼내어 닦았다. 이미 커피가 깊이 밴 에코백과 옷은 닦기를 포기하고 배지 않고 흐르는 데는 휴지로 꾹꾹 눌러 닦아 내었다.
내친 김에 대리석 바닥을 닦고 앉았다. 너무 차가워 한쪽 엉덩이를 들고 앉아 에코백에 담긴 물건들을 꺼냈다. 반쯤 남은 커피를 마시고 한쪽으로 치운 후에 물건들에 묻은 커피를 닦아 냈다. 연필이 담긴 필통, 볼펜이 담긴 필통, 칼, 작은 가위, 사혈침, 면봉, 수정테이프가 담긴 파우치, 하롱베이 배에서 사온 미니 괄사 마사지나무, 이어폰 지갑, 카드지갑, 혹시 필요할 수도 있을 반짇고리, 심심할 때 간절할 수도 있는 뜨개질 거리, 혹시 돈을 주고 받아야 할지도 몰라서 편지봉투세트, 스카치테이프, 꽃무늬가 들어있는 포장용 테이프, 쓰는 내용이 다른 미니 공책들, 손수건 두장, 물티슈, 마른 티슈, 손소독제, 마스크 여분, 갑자기 뭐가 먹고 싶을 수도 있을 때 당황하지 않기 위해 사탕, 작은 쿠키들. 한두 방울 튄 커피를 닦은 후에 다시 집어 넣었다. 다행히 크로스백은 겉 재질이 PVC여서 안의 내용물들은 말끔하여 겉만 닦아 내면 되었다.
무릎 위로 쑥 올라간 스커트를 다시 끌어 내리다가 무릎을 살살 치기 시작했고, 종아리를 주물렀다. ‘내가 다리가 아팠구나.’ 레이디 조이는 중얼거렸다. 종아리를 한참을 주무른 후에 어깨로, 목으로, 허리로, 날개죽지로 골고루 주물러 주었다.
도로의 차들은 더 많아지고 더 씽씽 바쁘게 달리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더 빨라진 것 같았다. 낯선 땅에 떨어진 듯 휘 둘러보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시간과 조이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조이의 시간은 잠시 멈췄을 수도 있다.
충분하다. 다시 크로스백을 가로질러 메고, 에코백은 왼쪽 어깨에 메고 남은 커피를 들었고, 한 손은 얼룩진 종이 쇼핑백을 들었다.
전철 안 핑크핑크 임산부용 자리에 가방을 내려 놓고 쇠기둥을 붙잡은 채 섰다. 어르신 한분이 가방을 내려 놓고 서있던 조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살펴보셨다. 뭘 알아내고 싶으셨던 걸까. 임신여부를 알아내려고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가방이 쉬는 것보다 내가 앉는게 낫겠네’ 하면서 가방을 치우라는 눈짓을 하셨다. 레이디 조이는 뭔가 생각하고 말하기 전에 이미 손에 가방들을 들고 있었다. 안전을 위한 쇠기둥을 잡을 손이 없다. 무의식 적으로 가방을 들고 나서야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가방이 쉬는게 아니고 제가 쉬고 있는 거예요.’
기차에 타자 마자 잠에 빠졌고 한시간쯤 지나서 깨어 알람을 맞춰 놓고 다시 잠이 들었다. 컴컴한 밤, 차갑지 않은 밤공기에 편안함을 느끼며 집에 도착하였다.
작은 마당을 지나 유리 미닫이문을 열자 온실처럼 훈훈하다. 아직 밖에 나오지 못한 화분의 꽃나무들이 숨가빴던 것 같다.
무장했던 무기들을 내려 놓듯 차례로 가방들을 내려 놓고 미닫이문을 닫고 도로 대문밖으로 나왔다. 오면서 청년의 집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던 레이디 조이는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청년이 나왔다.
‘인제 왔나보네.’
‘네 안녕하셨어요. 잘 지내셨어요?’
‘재밌게 잘 다녀온거지? 유럽냄새가 나네, 유럽냄새.’
6개월 연수를 다녀온 청년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하하.’
‘나 화분 좀 마당에 꺼내 놔줄 수 있어? 벌써 나왔어야는데 화분을 들어 줄 사람이 없잖아. 내가 저 정도는 들었다 놨다, 일도 아녔는데. 들어보려고 해도 화분들이 꼼짝을 안하네.’
‘네, 바로 갈게요.’
착한 얼굴을 한 청년이 방문을 닫고 따라 나오기 전에 레이디 조이는 먼저 돌아서 나왔다. 미리 가서 끌어내기 좋게 정리할 요량이었다. 도와준다고 하는 사람 있을 때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자주 와서 도움을 주던 청년이다. 수국이며 장미며 마당의 꽃나무들을 본 청년은 ‘올해도 레이디 조이 덕분에 꽃 구경하네요.’ 열린 미닫이 문으로 고개를 먼저 밀었다. 나란히 놓여 있는 가방을 보며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 장정도 어려워요. 이렇게 다 들고 다니지 마시라니까요.’
마루에 가득 널려있는 화분들을 보면서 ‘화분이 더 늘었네요. 너무 많은거 아녜요?’
‘응? 과하다고?’
‘아니요. 흐흐흐 많다고요. 많은 것 같다고요.’
‘엄마, 엄마는 20대 장정도 아니고, 이게 왠일이야. 엄마, 엄마가 콘트롤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엄마, 좀 줄여. 너무 과해. 엄마, 기분은 20대라 이걸 다 할 수 있을 거 같지만, 그게 안되서 매번 나를 부르시잖아. 나도 내 할 일이 있는데. 나도 기운 떨어질 나이 올 거고. 엄마 플리즈... ’
‘아 내가 과하구나. 우리 엄마에게 내가 했던 말인데. 요양원으로 들어가시기 전 몇 년 동안 내가 입만 열면 했던 말인데. 엄마 좀 쭐여. 엄마 몸에 맞게, 엄마 나이에 맞게, 엄마 기운에 맞게 좀 줄여야, 엄마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흐흐흐 과하다는 것보다 너무 많으니까 몸 생각해서 줄이시면 어떠실까 말씀드리고 싶네요. 흐흐흐 장정도 못해요 이 정도면. 그리고 이렇게 다 들고 다니시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뭐든 급하게 필요하면 요즘은 편의점에 다 있잖아요.’
착한 청년은 화분을 마당으로 다 내 주고 큰 것은 뒤로, 작은 것은 앞으로, 레이디 조이가 원하는 대로 배열해 주고 ‘안녕히 주무세요’ 다정한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레이디 조이는 흐믓하게 마당의 꽃들과 화분들을 바라보았다. 더 바랄 것이 없다. 꽃들이 나왔다.
손을 씻으며 계속 엄마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엄마 과해. 엄마 나이를 받아들여야지, 그게 자연스러운 거잖아. 늙음이 죈가. 약해진 대로 고만큼만 하며 사는게 믿음이지.’
방으로 들어가 바로 잠에 빠졌다.
미닫이 문앞에 나란히 있던 가방 셋과 남은 커피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내내 그 자리에서 푹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