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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국시인선 08. 김수영
뜨거운 안광眼光, 시대를 밝히다 김수영 시인
(1921.11.27.-1968.06.16.)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해방과 6·25사변, 그리고 4·19의거와 5·16혁명 등 민족사의 격랑을 성장기의 한복판에서 겪은 그는 초기에는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하는 순수 주지주의 작가로 활동하다가, 4·19의거를 계기로 억압과 거짓을 거부하고 자유를 노래하는 참여 시인으로 거듭났다. 날카로운 시대적 통찰로 부당한 권력에 대한 고통과 저항의지를 불태운 그의 작품은, 후일 신동엽시인과 함께 참여시의 선구자로 불리게 된다.
1. 출생과 성장
1921년 11월27일 서울에서 지주였던 김해 김씨인 아버지 김태욱金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 그의 집은 아버지가 친구에게 서준 빚보증이 잘못되어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지만, 김수영의 백부 김태흥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집안의 장손과 다름없이 자라 비교적 유복하게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유치원과 서당을 거쳐 8살이 되던 해 어의도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중 6학년 때 갑자기 급성 장티푸스와 폐렴과 늑막염을 앓아 중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선린상업학교 전수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선린학교 재학시절에도 오스카와일드를 외워 암송할 정도로 영어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1년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선배 이종구와 함께 도쿄 나카노에 하숙하며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조후쿠 고등예비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그만두고 연극연구소에 들어가 연출수업을 받았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가족들이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했고, 1943년 겨울에 귀국한 그는 종로3가에 있는 고모집에 잠시 거주하다가 징집을 피해 가족들이 있는 만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길림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있던 임헌택, 오해석 등을 만나 「춘수와 함께」라는 3막 극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2년 뒤 해방이 되면서 귀국하여 1946년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에 편입했으나 등록금 마련 등의 어려움으로 중퇴했다.
초창기의 그는 주로 연극인으로서의 삶을 추구했지만,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삶도 시작하였다. 1946년 본격적으로 시 창작에 몰입한 그는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합창』을 발표하여 모더니스트로 주목을 끌었다. 1946년에 이종구와 함께 성북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활동하였고, 잠시 간판을 그리다가 통역을 하는 등 생활전선을 전전하다가 1950년 김현경과 결혼한 후 돈암동에 살림을 차렸다. 이후 서울의대 부설인 간호학교에 영어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점령되자 김수영은 사전에 월북했었던 임화, 김남천, 안희남의 권유를 받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고 9월에는 ‘문화공작대’라는 이름으로 북한 의용군에 강제동원되어 평안북도 개천에서 1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10월 20일 UN군이 평양을 점령했고, 김수영은 불과 2개월만에 혼전을 틈타 목숨을 걸고 탈출했지만, 돌아온 서울에서 인민군 입대 사실이 확인되어 경찰에 체포되었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간다.
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끼리도 좌와 우로 갈라져 서로를 극단적으로 린치 했으며 한쪽으로 몰렸던 사람은 다음날 화장실에서 시체가 되어 떠오를 만큼 처참했다. 다행히 그는 수용소 생활 중에도 능통한 영어실력으로 인해 미 야전병원의 통역업무를 보며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수영은 이렇듯 극단적 좌·우 대립의 현장에서 2년여를 버티고 경험하며 진저리를 치게 된 것이다. 역사의 질곡에서 받은 커다란 상처, 특히 포로수용소에서의 경험은 ‘자유’에 대한 뼈저린 열망을 갖게 했다.
동료문인들의 적극적인 탄원과 여러 지인의 도움을 받아 1952년 11월 석방된 시인은 가족들과 경기도 화성군 조암리로 피신하여 생활했고 12월 28일 피난지에서 장남 ‘김준’이 태어났다. 김수영은 이후 통역일과 잡지사, 신문사를 전전하며 통역과 시작에 전념하였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해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 「폭포」 전문
2. 문학과 삶
초기의 김수영 시인은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전통적인 시 형식에서 벗어난 도전의식을 지닌 전형적 모더니즘 작가였다. 하지만 당시 정치권력의 지나친 부패를 보며 4·19의거를 기점으로 현실비판적인 참여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푸른 하늘을」, 「4·19」, 「하 그림자가 없다」등의 시들이 그 때의 글들이다. 그러나 그를 뜨겁게 했던 4·19혁명의 푸른 기운은 390일 만에 막을 내리고 통제와 금기의 시대가 찾아온다. 끝없는 자기 검열의 시대가 펼쳐지며 상황은 더욱 나빠졌지만, 김수영 시인은 부정한 권력과 사회적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소시민의 자세와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시를 통해 통렬히 고발한다. 그는 노동하듯 시를 썼고 시가 밥값을 못해 번역을 했고, 글이 제값을 못해 닭도 키웠다.
그런 와중에도 김수영은 1958년 제 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고, 1959년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했다. 이는 시인이 발행한 생전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으로, 이 시기의 시들은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 사이의 갈등과 슬픔의 극복이 중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억압과 모진 압제 속에서 진정한 ‘자유’가 그리웠던 시인은 본의건 아니건 때로는 거칠었고 본인의 의견과 다른 것에 불처럼 분노했다. 모더니즘의 동지이며 함께 삼인 동인지를 냈던 박인환과의 관계마저도, 4·19의거 이후 김수영이 문학 노선을 급격히 바꾸면서 자주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로인해 이후 김수영은 박인환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증오하였으며, 결국 그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문학과 사상에서도 서로의 천품天稟을 존중하지 못하고, 깊은 애증을 느끼면서도 등을 돌려야 했던 시대의 아픔이었다. 질곡의 역사, 극단의 시대를 넘어서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지금까지도 대립의 각을 매섭게 세우고 있는 한국문학의 안타까운 현실, 언젠가는 풀려야 할 거대한 장벽이며 크나 큰 숙제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선지자가 언제쯤
세계로 향한 한국문학을 이끌 것인가......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푸른 하늘을」 전문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풀」 전문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눈」 전문
암울한 시대의 중심에서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며 뜨거운 안광眼光 만큼이나 치열한 삶을 살았던 시인, 삶의 굴곡만큼이나 술을 가까이하던 시인은 부인과의 삶 또한 순탄치 못했다. 시인의 제자이며 독자이며 비평가였던 아내 김현경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수학한 재원이었고, 시인이 일본유학시절 학교선배인 이종구의 하숙집에서 얹혀살던 시절 만나게 되었다. 둘은 연예 끝에 1950년 결혼하였다. 대학에서 정지용에게 사사 받았고 프랑스문학에도 심취해 있던 아내 김현경은, 당시 문단에서 현대의 아이돌처럼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김수영이 의용군으로 끌려간 후 생사를 모르는 고통에 시달렸고 폭음과 독설, 광기와도 같은 자의식에 헤매던 그녀는 자식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떠나 이종구와 살림을 차리는 등 커다란 굴곡의 시기를 가졌다.
1952년 김수영은 포로수용소 석방 후 아내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였다. 자존심이 상한 김수영은 더욱 큰 좌절과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렸다. 2년 후 김현경은 다시 김수영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이후의 생활은 부부라기보다는 동거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은 사랑하면서도 분노했고, 복잡한 마음으로 살았다. 아내인 김현경과 선배인 이종구의 관계와 살림을 차린 위치에 대해 알려준 사람도 생전 절친했지만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인 친구 박인환이었고, 2년 후 다시 찾아온 김현경을 김수영이 다시 받아준 것도 박인환의 설득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그녀는 김수영의 사후 의상실과 디자이너로 상당한 예술적 능력을 보이며 성공하였고, 45년 동안 김수영의 시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를 그리면서 『김수영의 연인』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3. 아쉬운 요절, 남겨진 이야기
가. 번역료 7만원을 가불한 날 동료문인들과 한 잔하고 집으로 가던 밤,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길에서 시인을 발견하지 못한 버스에 치였다. 한강 둔치에서 양계장을 하던 시인의 집 바로 아래의 길이었다.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날인 6월 16일 유명을 달리 하였다. 48세 젊은 나이, 불의의 교통사고는 너무나 아까운 젊은 시인을 우리의 곁에서 앗아갔다. 그러나 김수영은 뜨거운 안광으로 어둠의 시대를 기록하며 짧지만 맹렬한 족적을 남기고 우리의 곁을 떠났다.
나. 김수영의 사후 그의 사망 1주기를 맞아 김동리, 박목월 등 한국의 대표 문인들과 지인들이 뜻을 모아 1969년 서울 도봉산 기슭에 그의 시 「풀」이 새겨진 시비를 세웠고, 유고시선집인 『거대한 뿌리』91974)와 산문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가 출판되었다. 1981년 《민음사》는 그의 문학사적 공로를 기념하여 ‘김수영문학상’을 제정하였고, 매년 우수한 신예 시인을 뽑아 시상하고 있다. 동 시대 참여시의 선두에 서서 함께 의지하던 신동엽은 「지맥 속의 분수」라는 조사弔辭에서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고 증언했다. 불과 1년 후 신동엽시인도 그의 곁으로 떠났다.
다. 김수영은 스스로 자신의 시어가 평범하다고 했지만, 시와 산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말(언어)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매우 진보적이다. 거칠고 힘찬 어조의 시세계 속에 담아낸 소시민적 자아에 대한 가차 없는 자기 폭로, 후진적 정치 문화에 대한 질타, 빈정거림, 맹렬한 비판은 전통적인 한국시와는 결을 달리하며 한국어의 세련미와도 거리가 있다. 김수영의 원고는 당시 언론 상황에서는 과격한 내용이 많아서 어떤 잡지의 편집자는 몇 밤을 새워 번역한 원고의 번역료를 받으러 온 김수영에게 대놓고 “당신이 일해 오는 것은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기도 했다.
라.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시인을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했고 2001년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이 추서 되었다.
마. 사회주의와 문화적 자유주의를 끊임없이 추구한 시인으로 유명한데, 어느 정도냐 하면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잘 알 수 있는데, 해당 글에서 제2공화국의 2대 악법(집시법, 반공법)에 관련하여 4·19혁명이 미완으로 끝날 것을 알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번은 술에 취해 눈밭에 엎어져 있던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서 경찰서에 데려다 준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술에 추한 김수영 시인은 순경을 보자마자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라며 넙죽 절을 했다고 한다. 매일같이 술에 취해 가족의 속박에서 벋어나게 해 달라고 잠자는 아내와 애들을 깨워 울리기도 하고, 그의 특유의 전위론적 시론 때문에 다른 문인들과 쌍욕을 하며 싸움질을 하기도 하는 초특급 민폐쟁이이기도 했다. 특히 4·19의거와 쿠바혁명에 대한 흥분과 몰두를 볼 때,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동경과 신뢰는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김명인 교수의 분석이다. 「김일성 만세」라는 제목의 실제 시를 지어 2곳의 신문사에 보냈으나 2곳 모두 실어주지 않아 미발표 시로 남은 일화도 있다.
바. 김수영의 시에서 한국 현대시 사상 처음으로 시적인 말과 일상적인 말의 차별이 사라졌다. 이것은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는 김수영의 치열한 노력과 극단적인 정직성이 낳은 결실이었다.
사. 생전 ‘하이데거’철학을 좋아하여. ‘존재와 시간’을 애독했다고 한다.
아. ‘돈을 못 벌어서 그렇지 게으른 사람은 아니다.’
시인의 가난, 노모의 회고가 애틋하다.
먼 산정에 서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우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늦은 거미같이 존재 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간과 마루 한 간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시詩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신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나보다
날아간 제비와 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 -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 「구름의 파수병」 전문
【참고문헌】
1. 『김수영 전집』 (개정판-민음사) (2003.7.5.)
2. 『언어와 윤리와 시의 완성; 상허학회 김수영론』
3. 『나무위키』
4. 『새로 쓰는 한국 시인론; 백년글사랑』 (2003)
5. 『한국 현대시사의 감각; 고려대학교 출판부, 최동호』 (2004)
글쓴이; 월간문예사조편집위원회 회장 이희국
이어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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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희국 회장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배하는 자들의 이념과 철학으로 무장된 시대의 불행을 자신만의 시어로 견뎌낸 시인 김수영님을 생각합니다 시인은 가장 고독한 인종 무모한 예술가 그 대표적 인물이 김수영 시인이었다는게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