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用第十一
제11장,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의 모양새를 없앰으로써 쓰임새를 일삼음에 대해 논한다.
三十輻共一轂,
(수레의) 30개 바퀴살은 하나의 바퀴통을 더불어 하는데,
古者車三十輻, 法月數也. 共一穀者, 穀中有孔, 故衆輻共湊之. 治身者當除情去欲, 使五藏空虛, 神乃歸之. 治國者寡能, 摠衆弱共使強也.
옛날에 “수레”가 “30개의 바퀴살”을 가졌던 것은 한 달의 (30일) 수를 법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30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을 더불어 할” 수 있었던 것은 “바퀴통”의 가운데가 텅 빔을 가졌기 때문인데, 따라서 (“30개”의) 모든 “바퀴살”이 “더불어” 그것에 모일 수 있었다. (따라서) 몸을 다스리는 사람은 마땅히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있는) 마음을 없애고, (마음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를 떠나보냄으로써, (간·심장·폐·콩팥·쓸개의) 오장(五臟; 五藏)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를) 텅 비우고 (일부러 일삼는 바爲를) 텅 비우게 하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이 일삼는) 신령스러운 바(神; 自然)가 이내 그것으로 되돌아가게 해야 한다.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마땅히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있는) 공능(功能; 能)을 줄임으로써,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有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한) 연함을 많아지게 하는 바와 어우러지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無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을) 굳세지게 하는 바와 “더불어” 해야 하는 것이다.
當其無, 有車之用.
마땅히 (바퀴통의 가운데) 그것이 텅 비고 텅 빔으로써, 수레로서의 쓰임새를 가지게 된다.
無, 謂空虛. 穀中空虛, 輪得轉行, 轝中空虛, 人得載其上也.
“무無”는 이른바 텅 비우고 텅 비운다는 말이다. (이른바) “바퀴통”의 가운데가 텅 비고 텅 빔으로써, 바퀴가 굴러가는 바를 얻게 되고, 수레(의 짐칸) 가운데가 텅 비고 텅 빔으로써, 사람이 그 위에 싣는 바를 얻게 되는 것이다.
埏埴以爲器,
흙을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그릇을 일삼는데,
埏, 和也. 埴, 土也. 化土以爲飮食之器.
“연埏”은 어우러지게 한다는 말이다. “식埴”은 흙이다. (이른바) 흙을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음식을 담아) 마시고 (넣어) 먹는 (바로서의) “그릇”을 “일삼는다.”
當其無, 有器之用.
마땅히 (그릇의 가운데) 그것이 텅 비고 텅 빔으로써,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를 가지게 된다.
器中空虛, 故得有所盛受.
(이른바) “그릇”은 가운데가 텅 비고 텅 비어 있는데, 따라서 (음식을) 담(아 마시)고 넣(어 먹)는 바(로서의 쓰임새)를 가지게 된다.
鑿戶牖以爲室,
문과 창을 뚫음으로써 집을 일삼는데,
謂作屋室.
이른바, (“문과 창을 뚫음으로써”) “집”을 만든다는 말이다.
當其無有室之用.
마땅히 (문과 창의 가운데) 그것이 텅 비고 텅 빔으로써, 집으로서의 쓰임새를 가지게 된다.
言戶牖空虛, 人得以出入觀視 ; 室中空虛, 人得以居處, 是其用.
이른바, “문”과 “창”은 (가운데가) 텅 비고 텅 비어야 하는데, 사람이 따라서 (집 밖으로) 나오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고, (집 안을) 들여다보거나 (집 밖을) 바라다보는 바를 얻게 되며, “집”의 가운데는 텅 비고 텅 비어야 하는데, 사람이 따라서 자리하거나 머무르는 바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그것의 “쓰임새”이다.
故有之以爲利,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의 모양새) 그것을 가짐으로써 이로움을 일삼고,
利, 物也, 利於形用. 器中有物, 室中有人, 恐其屋破壞, 腹中有神, 畏其形亡也.
(이른바) “이로움利”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를 있는) 물건으로서, “이로움利”은 (저절로 그러한) 모양새로부터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은) “쓰임새”이다. (따라서) “그릇”의 가운데가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은) 물건을 “가지거나”, “집”의 가운데가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사람을 “가지면”, 그릇(器; 其)과 집이 (저절로 그러한 모양새가) 깨지게 되거나 무너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배(服; 五臟)의 가운데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는) 신령스러운 바(神; 自然)를 “가지면”, 그 (저절로 그러한) 모양새가 망가뜨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無之以爲用.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의 모양새) 그것을 없앰으로써 쓰임새를 일삼아야 한다.
言虛空者乃可用盛受萬物, 故曰虛無能制有形. 道者空也.
이른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有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텅 비우고 텅 비우는 사람은 이내 만물을 “쓰고” 담고 넣을 수 있는데,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有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의 모양새를) 텅 비우고 ‘없앤’ 사람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有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의) 모양새를 (가득 채우고) ‘가진’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이른바) 도道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有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의 모양새를 텅 비우고) 텅 비우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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