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남 주(시인, 작가, 전 부경대 총장, 전 부산문화재단 대표)
[편집자 주]‘나의 버킷 리스트’를 시작하며
버킷 리스트(Bucket List), 미국영화 ‘버킷 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2007, 잭 니콜슨·모건 프리먼 주연)과 방화 ‘버킷 리스트’(2013, 안재민·이진성 주연) 이후 우리 주변에서 널리 유행하는 말이다.
이 말은 이제 단순한 유행어 수준을 넘어, 삶을 재정비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삶에 대한 강렬한 동기를 부여하고,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 ‘버킷 리스트’에서 두 말기환자(잭 니콜슨, 모건 프리먼)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을 비롯한 그들만의 소원목록을 작성하여 여행을 떠난다. 이들처럼 여행을 떠나건, 깊은 산중에 오두막을 짓고 유유자적을 즐기든, 가보지 않은 세상의 모든 길을 걷든, ‘버킷 리스트’는 누구에게나 삶의 에너지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시빅뉴스’는 새 연재물, ‘나의 버킷 리스트’를 마련, ⥀요일마다 게재한다. 누구나, 처음부터 좋은 버킷 리스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시간을 두고, 이웃을 살펴가며 이것저것 생각을 하다보면 필시 “아, 이걸 해야겠구나”하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터이다. 그건 자기 자신을 넘어, 세상을 향하여 그 영역을 넓혀가는 희망일 수도 있다.
새 연재는 ‘아름다운 노년’ 강남주 작가(80)로부터 시작한다.
일본 산인(山陰)지구 천천히 돌아보기
강 남 주(시인, 작가, 전 부경대 총장, 전 부산문화재단 대표) ①
몽블랑 입구까지 갔다. 지금부터 37년 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케이블카로 산 위에까지 가보려고 줄을 섰다. 그러나 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산 위에 눈이 많이 쌓여 케이블카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발길을 돌렸다. 다음에 오면 될 테니까, 그러면서 다시 오겠다고 맘먹고 편안하게 돌아섰다. 그러고 나서 37년이 흘렀다.
그 사이 프랑스에 가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스위스에도 몇 번 갔다. 그러나 그 모두는 일 때문이었다. 그 때는 막상 몽블랑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이제는 몽블랑에 다시 가겠다는 생각마저도 희미해졌다. 세월 탓이고 나이 탓이다.
참 많이 돌아다녔다, 그래도 끝내 몽블랑을 가지 못하고...
젊었던 시절, 여기 저기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여섯 곳의 대륙 구석구석 기웃거렸다. 그러나 남미만 칸쿤(멕시코) 남쪽으로는 더 가지 못했다. 비행기를 20시간도 더 타야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가보려고 마음먹었다.
말만 들어오던 이과수 폭포도 가보고 싶었고 잉카문명의 흔적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마추픽추를 거쳐 티티카카 호수 위에 떠 있는 마른 풀잎 집에 들어가 커피도 마셔보고 싶었다. 특히 남미 대륙 남쪽의 아르헨티나 앞 바다에 떠 있는 영국령 포클랜드까지도 가 보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 그곳은 대학에서 일하던 시절의 제자가 오징어 어업을 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섬, 스페인에 먹혔다가 아르헨티나에 점령당했다가 30여 년 전에는 이 섬을 둘러싸고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한판 전쟁을 벌였던 곳이다.
왜 그런 곳에 가고 싶어 했을까? 세상에는 가보지 못한 곳이 많고 많은데.
생각해 보니 호기심 때문이었다. 호기심의 자극은 상상력까지 들쑤셔서 그랬던 것 같다. 큰일을 내는 사람들 가운데는 단순한 호기심 발동의 자극을 받아 일을 저지른 경우가 더러 있었던 것 같다. 나와 같은 사람은 큰일을 저지를 인물은 못 되지만 상상력과 호기심은 끝없이 가보지 못했던 세계 여러 곳을 싸돌아 다녀 보고싶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런 호기심은 모두 거두기로 했다. 80을 넘겨버리자 병원에도 자주 들락거리며 나이가 도무지 뒷받침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궤도 수정을 했다. 일본 땅 가운데 가보지 못했던 여기저기를 움직일 수 있을 때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그것이다. 가다가 중간에 길이 겹치면 그런 곳을 한번 더 가 보면 새로운 느낌이 있을 것 아닌가.
일본 최남단-최북단 가 봤다, 그래도 일본여행 하고 싶다
일본은 사실 홋카이도 아사히카와(旭川)에서 일본영토의 남단 오키나와보다 훨씬 아래 있는 이시카기(石垣) 섬까지 가 봤다.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거의 없는 셈이다. 그런데도 일본 여행을 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싶단 말인가.
일본은 우리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이다. 공항에서 여권을 내민 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그 나라 땅을 밟을 수 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이국정취가 훅 하고 풍겨 온다. 물건 값이 싸고 사람들이 친절하다. 음식이 청결해서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거기에다 한반도와 닮거나 영향을 받은 문화적 유산이 여기저기 수두룩하다. 과거사와 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고 아름다운 풍광에 취할 수 있어 여행객에게는 딱이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꺼림칙한 마음도 지울 수 없다. 가해자로서의 일본의 흔적이 우리에게 너무 선명한 문신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독립을 앗아갔고, 식민지로 만들어 자주권을 빼앗아 간 나라다. 거기에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우리의 수많은 젊은이를 잡아 가 탄광에서 혹독하게 부려먹고 남태평양에서 비행장을 닦는 데 동원됐다가 맞아죽고, 풍토병에 걸려 죽기도 했다. 비인도적 위안부 사건은 지금도 세계인의 분노를 사고 있다.
패전을 자초하고 세계 전쟁사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1942년의 콰달카날 전투에서도 우리의 젊은 청년들은 잔혹을 극한 전장터의 한가운데로 떠밀렸다. 해군 함정이 공격을 받아 폭파되는 바람에 병사로서 그 배를 탔다가 목숨을 잃었다. 생때같은 청년이 가미카제(神風)특공대원이 되어 돌아 올 수 없는 비행기를 타고 연합군 항공모함을 향해 폭탄과 함께 쏟아져 산화하기도 했다. 일본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원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획죄어천무소도야(獲罪於天無所祈禱也)-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도 없다는 공자의 말이다. 이 말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동서고금의 덕목을 담고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저지른 이 죄값이 어찌 천년을 빌고 또 빈다고 지워질 수 있겠는가.
일본, ‘국가’와 ‘산하’는 다르다...
그러나 나는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본의 산하는 다르다고 본다. 2차 대전의 전범과 오늘의 일본 젊은이는 같은 땅에서 살았거나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다. 시간적으로만 다른 것이 아니라 생각도 다른 사람들이다.
일본이라는 단어는 국가를 가리킨다. 일본의 정치인은 모름지기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고, 국리민복을 위해 선하게 행동해야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일본의 산하는 국토를 이루고 있는 산과 바다를 가리킨다. 산과 바다는 자율적 의지가 없다. 한갓 자연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율적 의지가 없는 산하를 미워하거나 싫어할 이유가 없다. 지리적인 관점에서만 볼 때 일본에 간다고 비난할 이유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는 다르다. 자율적 의지를 가지고 타자(또는 다른 국가)와 접촉하는 국가의사 결정의 주체적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싫어할 충분한 역사적 이유가 있다. 따지고 보면 그런 국가의 의사결정은 지난날의 소수의 군국주의자에 의해서 이긴 했지만.
전쟁을 결행하고, 젊고 죄없는 수많은 목숨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았던 것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결정을 했던 짓이다. 그런 결정은 세계를 흔들었던 소수의 전범, 예를 들면 진주만 공격을 지휘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같은 인물이다. 우리가 “일본은 사과하라”고 아베 신조에게 외칠 때 그것은 아베 신조 개인에게 외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을 다스리고 실질적으로 일본의 역사를 꾸려가고 있는 일본의 대표자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다.
역사 속 전범 다 죽고... 오늘 일본사람 미워할 이유 없어
마찬가지로 우리는 거의 한 세기 전 일본을 그런 나라로 끌고 갔던 전범들과 관계없는 오늘의 일본 사람을 미워할 이유도 없다. 그들의 선대 역시 몇 명 권력을 휘두르던 전범에게 멱살을 잡혀 전쟁터에 끌려가서 아깝게 죽었던 사람이 태반이다. 그랬는데 그 후손을 미워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와 다르지 않는 피해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범은 거의 죽었다. 타의에 의해 죄 없이 전쟁터에 끌려가 인명의 살상에 가담했던 병사들도 이제는 거의 대부분 90살이 넘었다. 그들의 여생은 그다지 길지 않다. 그들은 명령에 복종하고 착했던 장삼이사에 다름 아닌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후손에게 책임을 따지거나 미워할 이유는, 그래서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일본의 젊은 세대는 대부분 전쟁을 싫어 한다. 이웃과도 잘 지내고 싶어 한다.
일본 자주 들락거려도, 죽기 전 가고 싶은 곳 아직 남아
내가 거리낌 없이 일본을 드나드는 것은 그래서이다. 쓰시마만 2019년 8월 말 현재 109번을 갔다 왔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군사를 이끌고 침략전쟁에 나섰던 도주의 후손마저 이제 쓰시마의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 폐족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가서 아무 것도 모르는 쓰시마 사람들에게 죄를 묻는다고 어떤 실효가 있을 것인가. 과거를 버리고 미래를 향해 서로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것이 실체도 희미한 친일파 혁파를 외치는 것보다 실효적인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런 이유로 해서 일본을 자주 들락거렸다. 그래도 죽기 전에 가고 싶은 곳이 아직도 일본에는 있다. 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일본의 시골이 그런 곳이다.
가끔 혼자 앉아 머리 속에서 그려 보는 일본의 지도는 신간선 초고속 열차가 다니지도 않는 곳이다. 그런 곳을 칙칙폭폭 기차를 타고 세월아 네월아 가면서 일상에 젖어 사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부산에서 출발해서 후쿠오카에서 보통열차를 탄다. 보통열차의 종점 모지(門司)항에서 내린다. 거기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고색이 창연한 세관 건물과 문화재가 된 기차역의 역사 건물도 보면서 어정거린다.
그러다가 레트로라는 쾌속 나룻배를 타고 7~8분 만에 시모노세키에 이른다. 거기서는 가라토(唐戶)라의 어시장에 간다. 거기서 값싸고 맛있는 생선초밥을 사 먹는다. 그 값이 우리나라보다 싸기 때문에 배부르게 먹고 난 뒤 우리나라의 동해 쪽, 산인(山陰)지구로 가는 열차나 버스를 타고 여행할 수 있는지를 자세히 알아 본다.
아키요시(秋吉) 동굴. 시간과 교통편을 봐서 이곳을 먼저 들른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들이 유명한 도자기 터로 일군 하기(萩)라는 크지 않은 도시를 찾는다. 급하게 서두르지 말 것. 가다가 안 되면 시골의 비싸지 않으나 깨끗한 호텔에서 온천욕을 하고 피로를 풀면서 하루를 내려 놓으면 되니까. 거기 가서까지 서두를 일이 뭐 있겠는가.
정신적 여유 속의 일본 동해안 느긋이 걷기
시간이 넉넉하면 이웃 시마네(島根)에 도착해서 3만이 넘는다는 일본 귀신의 총 집합소 이스모다이샤(出雲大社)를 방문한다. 거기서 시마네 사람들이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시비하는 일은 이제 그만 하라고 신들에게 기도하고 돌아 나온다. 그 다음 현청 소재지가 있는 마쓰에(松江)에서 여장을 푼다. 물론 거기서 유명하다는 재첩국을 맛보는 것을 빠뜨려서는 안 되겠지.
이튿날은 돗토리(鳥取)로 향한다. 가다가 중간에 우리나라 동해쪽으로 삐죽 나와 있는 반도에도 한번 들른다. 생선회가 맛있기로 유명한 곳인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돗토리에 도착하면 바다까지 이어진 사막의 언덕 돗토리사큐(鳥取砂丘)가 있지 않은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거기는 가 볼 것이다. 여행 가방을 풀 수 있으면 풀고, 그래도 시간이 있다면 더 동북쪽 후쿠이(福井)까지 간다.
시골 열차를 타고 가니까 그곳의 일상에 젖어 사는 사람들도 더러 만나게 되겠지. 혹시 젊고 예쁘고 교양이 있을 듯한 여성이 곁에 앉으면 더 좋으련만 그런 행운은 크게 기대하지 않고 가야지.
여기까지 여유롭게 천천히 오면 사흘은 넉넉히 걸릴 것이다. 사흘 만에 오지 못하면 나흘만이면 또 어떠랴. 가나자와(金澤)에서 짐을 풀거나 시간이 더 있으면 경관이 아름답다는 도야마(富山)까지는 갈 수 있으면 더 좋고 가지 못해도 좋다.
한때 고성 바닷가 작은 집 짓고 살 꿈 꾸기도
나의 머릿속의 버킷리스트에는 이런 것이 진작 적혀 있었다. 그러나 훌쩍 떠나지 못해 망설이기만 하다가 무정한 세월만 흘려보내고 말았다. 이제라도 갈 수가 있을지.
젊은 날에는 낙도의 민속을 조사하고 연구한다고 방학만 되면 학생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서해와 남해에 흩어져 있는 섬들을 돌고 돌며 필드워크를 했다. 물론 육지에서는 찾기 어려운 새로운 연구자료도 상당히 찾아냈다. 그러나 섬에서 보낸 낮과 밤은 중년의 나를 설레이게 했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햇살이 작살처럼 쏟아져도 이마로 그 빛살 받으며 바다로 나가던 검은 팔뚝의 어부들, 밤이면 물결따라 내 시야를 새롭게 꾸며 주던 윤슬. 해으름에 집으로 돌아가던 어부가 대바구니에서 생선 몇 마리를 끄집어 내 주면서 저녁에 매운탕을 끓여서 소주 한 잔 하면 좋다고 하던 그 섬의 넉넉한 인심.
그런 풍광과 인심에 반해 정년을 한 뒤에는 바닷가 어디 작은 마을에서 살겠다는 꿈도 내 정신의 버킷리스트에 기록되어 있었다.
정년이 두어 해 남았을 때 그런 곳을 찾았다. 고성에 사는 후배 시인이 자란만 바닷가 나지막한 곳에 적당한 넓이의 땅이 있으니 가 보자고 했다. 바닷가 200 평 남짓한 마음에 쏙 드는 땅이었다. 서른 평 정도에다 살 집을 짓고 나머지 땅은 정원도 꾸미고 남새터도 일구어 살면 될 성 싶었다.
거기에다 작은 엔진 달린 보트를 한 척 사서 집 앞 갯가에 묶어 두었다가 생각나면 때때로 낚시질이나 한다. 그러면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 주인공 산티아고가 잡은 청새치보다 내가 낚은 잔챙이 생선이 뭐 부족하겠는가. 청새치는 귀항지로 오면서 상어에게 몽땅 뜯겨버리지만 자란만에는 상어가 없어 잡은 생선을 온전히 가져 올 수 있지 않겠는가.
늙으며 버킷 리스트 지워가기... 꿈 그리던 그 때가 그립다
좋다, 정년하면 이곳에서 살자. 며칠 뒤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리고 땅값을 물었다. 그때만 해도 200 평 몽땅이 한 달치 월급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함께 가서 본 집 사람도 좋을 것 같다고 내 계획에 찬성했다. 어서 정년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붕-뜬 채로 며칠을 보냈다.
“여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거기서 살기는 힘들 것 같소”
완전히 불끄는 소리를 했다. 까닭을 따졌다.
우선 늙으면 병원이 가까와야 한다. 무슨 일이 생겨 응급차를 부르면 30분 안에 도착해야 된다. 그런데 건강도 별로 신통찮은 당신에게는 그곳이 읍내 병원과는 너무 떨어져 후미진 곳인 데다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아 불안한 곳이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마당의 풀을 베는 것도 예사 일이 아니고 몇 십년을 부산에서 살아서 삶의 근거지가 부산이고 친구들도 모두 부산에서 살고 있다. 늙어서는 곁에 친구들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는 친구가 없다. 하루 이틀 쉬기 위해서 그곳에 간다면 몰라도 거기서 살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은 것 같다. 내가 너무 덤벙거렸나? 결국 그 계획은 백지화 되고 요새는 여기 저기 병원을 기웃거리며 부산에서 살고 있다.
내 정신의 버킷 리스트에 기록되어 있던 아름다운 이사의 꿈 하나는 이렇게 해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이런 것 저런 것을 따지고 따져보니 결국 갖고 싶었던 것, 가고 싶었던 곳을 차례로 지우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하나씩 지워버린 나의 버킷 리스트는 이제 텅 비게 되고 말았다. 그래도 가끔씩 하얗게 된 버킷 리스트를 펴 보면서, 꿈 속에서 서성이던 그 때를 그려 보기도 하고 그리워 해 보기도 한다.
첫댓글 고성 바닷가 작은 집..풍광이 눈앞으로 달려듭니다. 저도 남해에 별장을 지은 친척이 계속 옆구리를 찌르네요. 복잡한 일 다 정리하고 이쪽으로 오라고..남편이 끄떡도 않아 안달하는 몇 년 사이 이미 땅값이 몇 배로 치솟아 이도저도...이렇게 흘러가야 할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