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령한 사람 / 렘 23:5-9상, 갈 6:1-5
안녕하세요? 오늘도 건강한 몸으로 주 안에서 만나니 반갑습니다. 옆 사람과 서로 인사합시다. ‘오늘도 주안에서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음 주에도 또 만납시다. 천국에 가서도 만납시다.’ 칭찬 한 마디씩 해 주세요.
성도란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자기 신분에 대해 분명히 아는 것에서 새 삶이 출발한다.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자신이 잘나건 못나건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세상이 기준이 된다면 언제나 흔들릴 수밖에 없다. 남보다 내가 똑똑하고 돈이 많아서 잘났는가? 내가 유능하고 인격이 좋하서 훌륭한가? 성도는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데서 자기에 대한 이해를 얻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신 존재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신 아름다운 새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성도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 예수와 함께 사랑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왕이라고 한다. 귀신을 추방하고 병을 고칠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특별히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언하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면 거기에 맞추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기준이 다시 만들어진다. 성도는 그것을 훈련하는 사람이다. 이웃을 향해서는 그 기준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을 향해서 같은 마음으로 대할 것이다. 예수께서 소중히 여긴 사람들을 자신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한 자세로서 모든 행동이 이루어지지 시작한다. 오늘 본문은 신령한 사람이 취해야 할 태도가 어떠한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1. 범죄한 자 온유한 심령으로 대하라.
사람들의 가장 못된 본성은 남을 깔보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남들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 완전히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게 된다. 성도라고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씀하신다.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형제들아’는 형제 사랑을 근거로 하고 있다. 나나 너나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는 형제라는 철저한 형제애를 근거로 권면을 시작한다. 이 권면은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이다.
이어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먼저 범죄라는 말을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성경에 범죄의 뜻으로 헬라어로 ‘하마르티아’와 ‘아노미아’란 말을 사용한다. ‘하나르티아’는 ‘과녁에 빗나갔다’는 뜻으로 죄를 말한다. ‘아노미아’는 ‘불법’을 말한다. ‘하마르티아’와 ‘아노미아’는 결정적인 죄를 뜻한다. 범죄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용된 범죄라는 말은 ‘파라프토마티’이다. 이 말은 ‘미끄러 넘어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실수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얼음판 위를 걸어가면 잘 미끌어진다.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진 것이 아니다.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해서 넘어진 것이다. ‘파라프토마티’는 이런 의미로 쓰여졌다. 고의적이 아닌 과실, 실수를 의미한다.
요즘 자동차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 운전면허증을 가진 사람이 자동차를 운전하다 사고나서 사람을 치어 죽이면 과실치사라고 한다. 그러나 면허증이 없는 사람이 운전하다 사람을 치어 죽이면 살인이 된다. 사고를 내고 싶어서 내는 것이 아니다. 실수로 일어난다. 조금만 잘못하면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넘어질 수 있다. 나라고 사고가 나지 말란 법은 없다. 나도 시험을 받을 수 있음을 명심하면서 접근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범죄란 바로 이런 것이다.
( 여기 중요한 두 단어가 있다. ‘신령한 너희’와 ‘온유한 심령’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신분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신령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영적 존재이다.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서 성소가 우리 속에 있다. 그렇다면 거기 해당하는 능력이 나올 것이다. 이것을 믿음으로 신령한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음을 알 게 된다.
‘장발장’으로 더 잘 알려진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장발장은 어릴 때 배가 고파서 빵 하나를 훔친 죄로 감옥에 갔다. 감옥에서 나오면 다시 죄를 짓고 다시 감옥가고, 또 감옥가는 일을 되풀이하다 나이 늙어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다. 늙은 장발장은 어느 날 하룻밤을 신부의 방에서 신세를 지다가 금촛대를 훔쳐 달아난다. 그런데 경찰에 잡혀 이제는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런 장발장에게 신부는 ‘금촛대는 내가 선물로 준 것이다’고 말을 하지 않는가? 신부의 사랑에 감동한 장발장이 철저히 자기의 삶을 회개하고 이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화하여,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시장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만일 신부이 사랑과 용서가 없었다면 장발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작은 용서와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나에게도 이런 사랑이 있다면 내 주위 사람들이 변화된다. 우리 갈보리교회에 이런 사랑이 풍성한 성도들이 있다면 이곳 아중지역이 변화될 것이 틀림없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전주에서> )
‘바로 잡으라’는 말은 ‘뼈가 탈골이나 위골 되었을 때 바로 잡아준다’는 뜻이다. 골절이 되었을 때 뼈를 제대로 맞추어야 우리 몸이 회복되고 육체의 기능을 정상으로 발휘할 수 있다. 뼈를 제자리에 맞춘다가 바로 잡다의 뜻이다. 또한 ‘어부들이 터진 그물을 깁는 것’을 말한다. 제대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그물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잡고’의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긋나거나 찢어진 것을 바로 잡아 원상회복시킬 때 주의할 것은 정죄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똑같은 잘못, 똑같은 시험, 똑같은 범죄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정죄자가 아니라 회복자가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에 8장에 보면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의 기사가 나온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감동이 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마지막에 홀로 남은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우리는 누구를 정죄하거나 심판할 권리가 없다. 심판주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누구를 심판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바로 잡으라는 것도 온유한 심령으로 하라고 바울은 강조한다. 그러므로 온유한 심령으로 문제된 사람을 대해야 한다. 상대가 잘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바로 잡아야 한다. 물론 그가 안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도 낙심하지 말고 신령한 사람의 자세로서 진행해야 한다. < 진안에서 > )
또한 우리는 남을 바로 잡는 것만 신경을 쓰면 안된다. 자기 자신도 신경을 써야 한다. 본문은 ‘네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또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운전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다. 차를 타고 가는데 앞에 가던 차가 사고가 났다. 이를 보고 나도 조심해야지 하고 운전하다가 5분도 지나지 않아 조심해야지 하는 마음을 잊어버린다. 언제나 스스로 살펴 조심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라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내게도 같은 잘못이 있다’는 뜻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질적으로 같은 실수가 내게도 있다. 다른 사람의 경우를 보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과오를 범한 자를 무조건 판단하고 정죄하며,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교만하게 말하지는 않는가? 그들을 진정 온유한 마음으로 권고하며, 혹 우리의 모습 또한 그러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피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 필요한 때이다.
2. 짐을 서로 지라.
우리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진정으로 이웃을 돕는 자가 되려면, 우리는 이 일에 사랑의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2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했는데, 그리스도의 법을 언급하는 데는 모세의 법과 대조하려는 의도가 있다. 모세의 율법은 십계명으로 대표된다. 구약의 율법은 십계명 말고도 대단히 다양한 금지와 허용의 법규가 있다. ‘하라’와 ‘하지말라’의 법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매우 단순하다. 그리스도의 법에는 조항이 별로 없다. 그리스도의 법은 한가지로 말할 수 잇다. 요 13: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으로 모든 율법이 정리된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직장이 같거나 같은 방향일 때 차를 같이 타고 다니는 것을 카풀제라고 한다. 들은 이야기인데 이런 그리스도인도 있다. 같이 타고 다니는 사람이 차 주인에게 기름값이라며 돈을 주니까, 그 주인이 하는 말이 ‘나 혼자 타고 다녀도 기름을 넣기는 마찬가지인데 무슨 기름값을 주느냐? 정 미안하면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빚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빚을 갚으라. 그러면 예수님의 사랑의 빚이 점점 넓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사랑하면 십계명을 다 외우지 않아도 다 지킬 수가 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면 우상을 섬길 일이 없지 않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안식일을 범할 리가 있겠나?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못한다. 우리가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면 살인할리 없고, 간음할리 없고, 거짓 증거할리 없다. 사랑하면 율법은 완성된다. 이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 그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방법을 배워야 한다. 본문에 그 해답이 나와 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이 해답이다. 본문에 짐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온다. 2절을 보면 ‘서로 짐을 지라’고 했다가 5절은 ‘각각 자기 짐을 지라’고 한다.
2절의 짐은 남의 짐이다. 우리 말은 짐으로 반역했지만 원문의 뜻은 ‘무거운 짐’을 말한다. 5절의 짐은 ‘책임의 짐’이라는 뜻이다. 곧 ‘이웃의 짐을 나누어지고 돕는 것이 당신의 짐이다. 그것이 당신의 책임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져야 할 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웃의 짐을 나누어지는 사랑의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성장은 구체적으로 이웃을 향해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성숙이다. 이웃에 무관심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돈독하다 믿는 것은 진정한 신앙인이 자세가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남도 살리고 나도 산다. 우리 영혼도 이웃을 돌보고 관심을 가질 때 더 풍성하게 살이 찐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보다 더 준비한다.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이다. 더 준비하니 신앙이 더 좋아진다. 나 혼자만 예수 잘 믿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전도하고 말씀을 전할 때, 이웃의 영혼도 복을 받고 우리 영혼도 성숙해 진다. 때로 나에게는 남을 도울 능력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다른 이의 어려움을 그냥 묵과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힘과 소망과 재능을 부여해 주셨고, 서로 짐을 나누어지도록 하셨다. 이제 내가 다른 성도를 위해 도와야 할 일을 손꼽아 보자.
3. 자기의 일을 살피라.
4-5절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않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비교해서 자랑하려고 남을 이용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남이 넘어져서 실패하고 죄를 짓는다고 그것이 내 자랑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그들이 빠진 구덩이에 나도 떨어질 수 있는데, 자랑거리는 스스로 내 안에 있다.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 계신다. 나를 자녀로 여겨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 주셨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친구집에 다녀온 집사람이 ‘우리는 무엇무엇이 없다’ 했을 때,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 아버지의 것이다. 우리가 1억이 필요한데 1억을 만들려면 매달 1백만 원씩 8년을 꼬박 적금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려하면 하루사이에도 주신다’ 하며 같이 웃고 은혜를 받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금니를 하고 자랑한다. 그러자 금니와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자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사람이 보석 하나를 가져도 그것을 자랑하지 못해서 야단이다. 하늘과 땅의 구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 그가 나를 책임지시고 모든 축복을 다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자랑거리가 아닌가? 그것을 자랑하라. 그것으로 자기의 일을 잘 해 나가라. 그러므로 정말로 자랑거리가 일어난다.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돕고 나를 귀하게 하심을 증명한다. 이러한 자세가 된다면 정말로 자신을 크게 여기고, 여러 사람의 짐을 짊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 자랑거리를 우리는 가지도 있다. 그것이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것이다. 내 삶은 이렇게 좋은 것이다.
신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갈 5장에 보면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과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맺는 성령의 열매와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맺는 육체의 열매를 말하고 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정으로 대하는 자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는 짐을 서로 지는 자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는 자기 일을 살피는 자이다. 결국은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는 자들인데, 그 마음 속에 사랑이 충만할 때 이를 다 지킬 수 있다.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는 신령한 성도들이 되자.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하나님이 나의 자랑거리이다. 그 분을 의지하고 자기 짐을 잘 지고 나가기 바란다.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다.
(20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