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땐 귀한 몸이었는데
동춘 윤흥식
2024년 10월 1일 오후, 국군의 날 시가행진을 보기 위해 광화문으로 향하는데, 통의동 제헌회관 앞 가로수인 은행나무 주변에 사람이 여럿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도시 녹지과’ 표식 조끼를 입은 걸로 보아 종로구청 공무원 같았다.
한 사람이 고가 사다리에 올라 바지랑대로 은행을 털고, 밑에 있는 사람들은 비로 쓸어 담고 있었다. 채 익지도 않은 은행알이 무참하게 폐기 처분되는 순간이었다. 비바람에 은행이 땅에 떨어지니 지나는 사람들한테 밟히고, 오가는 차량 바퀴에 짓뭉개져 흉물스럽고, 냄새까지 고약하니 자연히 민원이 발생할 것이다. 하여 구청 직원이 익기도 전에 미리 털어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2000년대 초 농촌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교정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었는데, 모두 열매가 열리는 암나무였다. 가을이 되어 은행이 익으면 나무는 수난을 당했다. 마을 사람 몇이 아침 일찍 학교에 와 땅에 떨어진 은행을 줍는 데 그치지 않고, 나무를 발로 차거나 가지를 흔들고 돌팔매질까지 해댔다. 주변은 발에 밟힌 은행잎과 잔 가지가 어지럽게 널려있고, 아이들은 마당을 쓸며 불평을 늘어놓곤 했었다.
“선생님, 이거 누가 가지 후려쳐 은행 따간 것 맞지요?”
“아니다. 바람에 잎이 떨어지고 잔 가지가 부러진 것이다.”
“아뇨, 나쁜 놈들이 괜히 우리 청소하기에 나쁘게 만들어놓잖아요.”
6학년 담임인 나는 11월 어느날 방과 후에 아이들을 은행나무 아래로 불렀다. 먼저 조무원이 은행나무에 올라 장대로 은행을 털었다. 잎과 은행알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이들은 양동이와 세숫대야에 은행을 담아 창고에 있는 커다란 고무통에 옮겨 놓았다. 은행나무 두 그루에서 턴 은행이 고무통 그득했다.
일주일 후 방과 후에 아이들이 창고 앞으로 모였다.
“오늘은 저번에 턴 은행의 겉껍질을 제거하겠다.”
“냄새 나서 하기 싫어요.”
“너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줄 것인데, 그러면 누가 하겠니? 옻오를 수도 있으니 옻타는 사람 은 빠지거라.”
“선생님, 걱정 마세요. 저희 손은 무쇠 손이라 끄떡없어요.”
고루 나눠준다 하니 여자아이들까지도 열심히 일을 해 바로 작업이 끝났다.
다시 일주일 후 창고 앞에 모인 아이들 모두에게 잘 마른 은행알을 나누어주었다. 빈 우유갑에 가득 담아 집에 가져가도록 했다. 아이들은 좋아하며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가족끼리 구워 먹겠다고 했다.
수년 전 일이다. 선대 세일사를 산소에서 지내고 음복하려는 데, 갑자기 사람들 손이 은행을 담은 제기로 몰리는 거였다. 밤, 대추, 곶감도 있는데 유독 은행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한 움큼 쥐어 호주머니에 넣은 모습이 보였다.
“은행이 얼마나 맛있으면 저리할까?”
은행 한 알 맛보지 못하고 대추 안주로 음복했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은행은 귀한 몸이었다. 마을에 은행나무가 흔치도 않았었다. 지금은 가로수로 은행나무를 심지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은행나무는 인간이 번식시켜야 한다. 사람 이외의 동물은 은행을 먹지 않으니 귀한 나무가 된 게 아닌가 한다. 은행나무는 소나무와 더불어 천연기념물로 가장 많이 지정된 귀한 신분이다. 향교나 사찰에 가면 오래된 은행나무가 위용을 뽐내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성균관 대성전 앞마당에 은행나무 노거수 두 그루가 있다.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어찌나 멋스러운지 많은 사람이 찾아 감탄한다. 내 18대 조부이신 평와공 윤탁 선생께서 심으신 나무다.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할아버지께선 곡부현 공자묘(孔子廟) 대성전 행단을 생각해 은행나무를 심으셨다. 은행나무는, 병충해에 강하고 수령이 오래 가고, 그늘이 넓어 은행나무 아래서 봄부터 가을까지 공부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 준다. 하여 성균관 유생들이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했다.
은행은 쓰임이 다양하다. 간식으로 볶아먹는 맛 최고다. 찰밥이나 삼계탕과 갈비탕에도 은행이 들어간다. 앞서도 말했지만, 제상에도 오른다. 제사 지낼 때 은행을 쓰는 집은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은행이 귀하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는 목재로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 가구재로 쓰이며 특히 바둑판과 책상을 만들면 좋다. 내가 교육대학에 다닐 때 공작 시간에 은행 나무판을 사다 다과 그릇을 만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조각칼로 손바닥 찔리며 멋있게 만들어 전시회에 출품했는데, 철거하는 날 가지러 갔더니, 누가 훔쳐 가버려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다. 거기 중심에 은행잎이 있다. 바람에 뚝뚝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걸어보라. 모두가 시인이 되어 시를 되뇔 것이다. 은행잎과 가을, 우리 정서에 가장 깊숙이 자리한 노란 잎이다. 이런 은행잎은 한때 수출을 했었다. 은행잎 추출물이 혈액순환 개선제로 유용하게 활용되어 독일로 수출까지 했단다.
그 귀하던 은행이 언제부턴가 괄시받고 있다. 시골 밭두둑에 서있는 은행나무 아래에 은행이 수북이 쌓여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다. 가로수로 은행나무가 지천이다. 은행알이 쌓인다. 아무도 줍는 사람이 없다. 제상에 은행이 오르지 않는다. 괴는 게 까다로워서란다.
한때 귀한 몸이던 은행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예부터 ‘흔하면 천하다’고 했다. 은행나무가 바로 그 신세가 되었다. 예전엔 흔치 않던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등장해 그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거기에 은행은 냄새가 지독하고, 입에 들어오기까지 과정이 복잡해 인기가 떨어진 것이다.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은행의 진가를 알아주고, 은행나무 번식을 돕는 관계인데 홀대를 해서야 되겠는가? 공해에 강하고, 병충해에 강한 은행나무가 인간에게만은 귀한 대접 받길 소망한다. 가을날 곱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서 시심에 젖어보는 여유 가져봄이 멋진 삶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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