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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편의 줄거리
(1950년대 후반, 소작농으로 남의 땅이나 부쳐먹으며 식구들 입에 간신히 풀칠을 하는 봉식은 아편중독자가 되어 사경을 헤매는 딱한 처지다
마을의 대 지주인 성부자 영감에게 잘 보이지 못한 탓으로 그동안 얻어 부치던 땅뙈기 마저 빼앗긴 봉식은 딸 언년을 넘보는 성영감의 탐욕에 분을 삭이다가 무능한 봉식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딸 언년이 스스로 성영감의 후처로 들어가자 그 덕으로 괜찮은 땅뙈기를 얻어 그럭저럭 연명을 하지만 끈질긴 아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책하다가 세상을 뜨고 만다.
봉식이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봉식의 처도 성영감의 노리개가 된 딸의 처지를 비관해 병을 얻어 눕게 되고 언년에게 하루라도 빨리 지옥 같은 이곳을 떠나라는 유언을 남긴 채 생을 마감한다.
언년을 후처로 맞아들인 성영감이 언년에게 집칸을 내어주고 언년 사이에 아들까지 얻었지만 언년은 성영감 처의 모진 구박에 시달린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모습을 바라보던 머슴 수삼이 언년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되고 바쁜 농번기를 틈타 언년에게 몰래 마련한 패물을 쥐어주며 도망을 가라고 한다.
수삼이 쥐어준 패물을 들고 도망을 친 언년이 타관 함바집에서 날일을 하며 지내다 공사판 인부인 태석의 눈에 들어 살림을 차리고 딸 은교를 낳지만 의처증에 술로 세월을 보내던 태석이 광산 매몰 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학교 소풍을 갔던 은교마저 사고로 잃게 된다.
객지에서 얻은 인연을 모두 잃어버린 언년은 낙담하지만 두고 온 아들 학기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았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분식집을 차려 재기를 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을 객지로 보내준 수삼을 만나게 된다.
오랜 세월 수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언년은 버리고 간 아들이 고향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수삼을 앞세워 살았던 마을에 찾아가지만 멀리서 바라본 아들이 불구의 몸이 된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언년은 아들과의 만남을 위해 절치부심 돈 버는 일에 매달린다.
분식집에서 출발한 언년의 영업은 악착같은 언년의 노력으로 번듯한 식당을 차리게 되고 돈을 버는 대로 아들 학기를 위해 땅에 투자하여 살림을 늘려나간다.
불어난 자본을 바탕으로 큰 요릿집을 낸 언년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근방은 물론 먼 곳까지 소문이 나고 그 일대의 요식업소로 자리를 잡지만 여러 성격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언년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간다.
자신의 요릿집에서 잔일을 하는 영순을 아들 학기의 짝으로 점찍은 언년이 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는 것을 눈치챈 수삼은 영순이가 투전판을 기웃대는 이장 아들의 사촌 누이라는 것을 알고 판돈을 빌려주며 환심을 사게 되고 마침내 영순의 부친과 상견례를 하게 되지만 영순을 낳고 버린 부친은 혼사를 하려면 언년 재산의 반을 나누어 달라는 조건을 내민다.
영순과 학기의 혼사 존건으로 상당액의 금전을 편취한 영순 아비는 혼사를 허락하면서 혼례 전 영순을 불러 혼례를 치르더라도 합방을 하지 말며, 어쩔 수 없이 합방을 하게 되더라도 후사를 두지 말라고 협박하지만 영순은 자신의 삶이니 따를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혼례일이 다가오자 보통의 혼사와 다르게 돼지를 대 여섯 마리를 잡고 관공서와 이웃동네를 초정하는 등 언년의 큰 손 덕분에 마을이 축제 분위기로 변한다.
세월을 거슬러
영순의 에미 용미댁이 글줄깨나 읽었다는 서당 훈장에게 붙었다가 아이를 밴 뒤 매몰차게 쫓겨난 후 날품팔이로 전전하다 출산을 앞두고 사경을 헤매고 있을 무렵, 동네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는 홀아비 고씨가 나서서 용미댁을 극진히 간호하며 접근한다.
고씨가 여러 여인을 거치며 난 아이들이 넷이나 됐지만 자신의 처지도 한심하다는 생각에 망설이던 용미댁은 정성을 다하는 고씨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어린 영순을 데리고 고씨와 합가를 하지만 밀월이 끝나기 무섭게 돌변하는 고씨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 만났던 모습과 달리 고지식하고 완고한 고씨의 언행에 깊은 상처를 입은 용미댁은 고씨의 아들이 목을 매 자살을 한 후 흉흉하게 떠도는 소문에 갈등하다 소문을 퍼뜨린 푸실레와 한바탕 몸싸움을 벌인 뒤 이를 등한시하는 고씨에게 실망하여 영순을 데리고 타지로 도망을 간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살 곳을 마련하여 어린 영순을 기르며 근근이 살아가는 용미댁 앞에 이번엔 동네 양조장 사장인 배 씨가 접근한다.
용미댁의 반반한 외모를 탐한 배사장은 시도 때도 없이 금력과 완력으로 용미댁에게 구애를 하지만 이미 수차례 상처를 입은 용미댁은 사력을 다해 이를 뿌리치다가 견디지 못하고 영순을 데리고 다시 타관으로 도망을 친다.
몇 해 동안 타관 객지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용미댁에게 고씨 아들이 고씨의 유산을 들고 찾아오는 행운이 다가온다.
뜻밖의 돈을 얻게 된 용미댁의 살림이 좀 펴지자 동네 계주인 성여사가 다가와 일수와 계를 맡아서 해 보라고 유혹한다.
망설이던 용미댁이 날품팔이를 접고 성여사가 쥐여주는 일수와 계를 시작하면서 용미댁의 처신이 점점 나아지지만 중학생이 된 영순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용미댁에게 뜻밖의 상황이 밀어닥친다.)
강물에 용미댁의 시신이 떠오른 건 용미댁이 영순을 데리고 닦달하는 계원들을 피해 도망을 간 지 이레만이었다.
갯배를 이용하여 고깃마리나 낚던 촌로가 발견한 용미댁의 모습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부패해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어린 영순은 보이지 않았다.
경찰에서 수사를 했지만 타살 흔적이 보이지 않자 자살로 종결을 지었는데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있던 영순이 깨어나서 용미댁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경찰서로 찾아온 것이었다.
"엄마가 나를 강가로 밀어 올렸어요. 엄마가 나를 살렸어요."
영순이 흐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자 여경이 영순을 일으켜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여기 아무도 없으니까 차근차근 말해 줄 수 있겠어요?"
여경의 차분한 말투에 마음이 진정된 영순이 용미댁과 함께 있었던 일을 토로했다.
"물에 빠져 돌아가신 분이 제 엄마예요. 어떤 여자가 엄마와 나를 강 언덕으로 불렀는데
그 여자와 엄마가 싸우다가 그 여자가 갑자기 엄마와 나를 언덕에서 강으로 밀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강 언덕이면 절벽이었나요?"
"꽤 높은 곳이었어요. 엄마가 안 떨어지려고 매달렸는데 그 여자가 발로 막 찼어요."
"그럼, 학생도 같이 떨어진 건가요?"
"네, 엄마가 내 손을 꼭 잡았는데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엄마는 돌아가셨는데 학생은 살았네요?"
"물에 빠져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어렴풋이 엄마가 나를 강가로 밀어 올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럼 진작에 찾아오지 그랬어요."
"정신이 들고 보니 병원이었어요. 어떤 할아버지가 제 곁에 서 있었어요."
"할아버지? 평소 알고 지내던 분인가요?"
"아니에요. 모르는 분이었어요."
경찰서안이 술렁거렸다.
나이 어린 학생인데다 진술이 구체적이라 용미댁 사망사건의 수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린 영순이지만 어머니에 얽힌 사건이라 수차례 경찰서에 불려 다닌 끝에 범인이 계주 성여사라는 게 밝혀졌다.
성여사가 붙잡히고 사건이 종결되었지만 어린 나이에 심한 충격을 받은 영순은 학교에 나갈 수 없었다.
성 여사가 영순과 마주쳤지만 가느다란 눈으로 빤히 바라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연락이 오고 친구들이 찾아왔지만 영순은 자신을 살려준 모 할아버지가 마련해 준 단칸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었다.
수사를 했던 경찰서에서 찾아와 생필품 몇 가지를 전달해 주었지만 문 앞에 두고 간 물건은 며칠이 지나도록 그대로 있었다.
얼마 후 피골이 상접한 영순에게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이곳의 주소를 어찌 알았는지 편지 봉투에는 영순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오랜 간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한 탓에 영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꼭꼭 눌러쓴 편지에는 주소와 함께 한 번 찾아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영순이 어린 나이었지만 그 편지를 대신 보낸 사람이 성여사라는 걸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달랠 수 없어 여러 번 망설이던 영순이 교도소를 찾아갈 때 자신을 살려준 노인이 따라나섰다.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 뒤였다.
중학생이었지만 몸매가 성숙한 영순의 모습을 은근한 눈으로 지켜보던 노인은 아무 말없이 영순을 도와주었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웠지만 죽음에서 자기를 살린 은인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갔고 사실 다른 방도도 없었던지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교도소에 도착해서도 수없이 망설이는 영순을 대신해 노인이 면담 접수를 해 주었다.
그러나 막상 수의를 입은 성여사의 얼굴을 본 영순은 몇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거품을 물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노인이 소리를 지르자 놀란 교도관들이 쫓아 나왔다.
영순이 구급차에 실려가는 동안 노인은 무슨 말인지 큰소리로 계속 떠들었다.
구급대원들이 조용히 해달라고 하자 노인이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니, 이 양반이...보호자가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하지만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뭐가 우스운지 킥킥대며 손바닥을 치기도 했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 영순이 정신이 들었을 땐 늦은 밤이었다.
여전히 노인이 옆에 앉아 있었고 링거를 꽂은 팔 때문에 얼른 일어날 수도 없었다.
"아아, 조금만 더 누워 있어. 절대 안정하라고 하니까."
노인이 다가와 흐트러진 환자복을 추슬러 주었고 헝클어진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노인의 손길이 닿자 영순은 자신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지 말아야지 마음을 먹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왜 그렇게 놀래? 안정이 필요 하대잖아. 걱정 말고 한숨 더 자."
벽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영순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노인이 병실에서 나가기를 바랐지만 어찌 된 일인지 노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영순 옆에 앉아 있었다.
이튿날 아침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영순은 얼굴이 찐빵처럼 부어있었다.
그때까지도 영순 옆에 앉아있던 노인이 영순을 부축해 의자에 앉쳤다.
"잠을 푹 자야 하는데,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하누. 얼굴이 너무 부었네. 이러면 내가 곤란하지"
아침식사가 나왔지만 한 숟갈도 뜨지 못하는 영순을 대신해 노인이 대신 수저를 들었지만 영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나절이 지나서야 병원을 나섰고 여전히 노인이 뒤따라 왔다.
"저, 이제 제 혼자 갈 수 있어요. 더 이상 따라오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 성치 않아서 또 언제 병원에 실려올지 미덥지 않아서 그래."
"괜찮다니까요."
"내가 안심이 안 돼서 그래."
영순은 기가 막혔다.
분명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었지만 그물에 걸린 고기를 다루듯 사사건건 간섭하며 따라오는 노인이 무서워졌다.
"저기요, 이제 따라오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영순이 애원조로 말하자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허허.. 내가 뭘 어쨌다고. 고마워하지는 못할지라도 나한테 이러는 건 도리가 아니지."
"제가 혼자 갈 수 있다니까요. 도와주신 건 너무 고마운데요.저를 따라 다니지 마세요."
"내가 없으니까 이 꼴이 되는데 어떻게 안 따라 다니냐. 너 못됐구나."
"할아버지가 제 가족도 아닌데 왜 이렇게 까지 하세요?"
노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너처럼 고운 애를 누가 또 해코지할까 걱정돼서 그래.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노인의 말에 소름이 돋은 영순은 잠시 서 있다가 노인이 담뱃불을 붙이는 사이 오던 길 반대 방향으로 내 달렸다.
횡단보도 정지 신호도 무시하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노인이 뒤따라 왔지만 학생의 달음질을 따라올 수 없었는지 한참을 내달린 끝에 노인을 떼어 놓을 수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 행인들의 눈길이 분분한 길바닥에 드러누운 영순은 한참이 지나도록 그대로 늘어져 있었다.
몇 몇 행인들이 다가와 괜찮냐며 흔들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자유를 놓치기 싫은 영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므로 길바닥에서 일어난 영순이 단칸방으로 돌아오자 언제 왔는지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을 본 영순이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도망을 가려 하자 영순의 손목을 낚아챈 노인이 문을 걸어 닫고 영순을 방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지랄맞게 왜 자꾸 도망을 치나. 내가 뭘 어쨌다고."
노인이 다가와 영순의 손목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요. 부탁드릴게요."
"손녀 같아서 그러는거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자꾸 이러니까 내가 서운하네."
노인의 손이 영순의 목덜미에 닿자 소스라치게 놀란 영순이 짐승이 우는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손길을 벗어나려고 발악을 하는 영순의 눈이 돌아가는 걸 본 노인이 찬물을 가져와 영순의 머리에 들이부었다.
노인이 다시 물을 받기 위해 싱크대로 간사이 정신을 차린 영순의 손에 프라이팬이 들려져 있었다.
뒤돌아 선 노인의 머리에 프라이팬을 휘두른 영순은 잠겨있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내 뛰었다.
무작정 거리를 걷다가 허름한 여관에 들어선 영순의 모습은 죽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프라이팬에 머리를 맞은 노인이 걱정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순은 아직 어린 소녀였다.
엄마의 죽음과 자신을 구해준 노인의 태도에 이성적인 판단을 할 나이가 아니었다.
자신을 도와준 노인이 그저 두렵기만 했다.
노인이 또 찾아올까 두려워 아침이 밝기 무섭게 여관방을 나섰다.
어디든 도망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는 그다음에 생각할 일이었다.
행선지도 모르는 버스에 올라 한참을 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점심때가 되도록 생각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기억에 기억을 더듬었지만 엄마와 함께 가본 곳이 거의 없는지라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은혜를 저버리고 도망을 나왔다는 미안함에 노인에게 다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죽기보다 싫은 것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길이 처음과 다르다는 걸 느낀 건 병원에 누워 있을 때부터였다.
물에 빠져 익사한 엄마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살리려고 발버둥 친 모습이 밤마다 악몽으로 다가왔지만 그렇게라도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틀에 걸쳐 도착한 곳은 동해안의 어느 작은 어촌이었다.
노인이 던지고 간 봉투에 들었던 얼마간의 돈이 다 떨어졌으므로 여관방에 들 수도 없었다.
포구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 늙스구레한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 못 보던 아가씨인데 어디서 왔수?"
영순이 대답을 하지 않자 노인이 시커먼 조각을 내밀었다.
"이거 먹어보시우. 짭조름하니 먹을만하다니까."
눈을 들어 고개를 젓는 영순을 바라보던 노인이 영순의 손에 검은 조각을 쥐여주었다.
"보아하니 여기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머리 모양이 학생 같은데 여기는 놀러 왔는가?"
대답대신 먼바다를 응시하는 영순을 조용하게 바라보는 노인의 눈길이 자식새끼 밥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미 같았다.
"여기 하도 오래 살아서 이 바닥은 내 손안에 있는데 여기 친척이라도 있는갑제. 혹시 부뜰네가 이모 아닌가? 많이 닮았네."
묻는 말에 아무런 대답이 없자 노인이 부시시 일어났다.
"말을 안 하는 걸 보니 사연이 있는갑네. 바닷가에 왔으니 속이나 잘 풀고 가시게."
노인이 멀어지자 그제야 영순이 노인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 저기요."
영순이 뒤따라 가자 노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아이고, 벙어리인 줄 알았는데 이제야 경칩 개구리 입이 떨어졌는가 부네."
왜 그러느냐는 얼굴을 한 노인이 코를 찡끗거렸다.
노인의 표정과 달리 영순은 얼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괜찮여."
"저기, 여기서 일을 할 수 있을까 해서..."
영순을 위아래로 찬찬히 뜯어보던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뜬금없네. 아직 학생 같은데 이런 곳에서 뭔 일을 할까? 있다 캐도 해도 할 수 있을까?"
"아줌마가 좀 도와 주시만 안 될까요?"
"아줌마는 무슨.. 낼 모라면 80줄인데. 내가 아줌마로 보이는 갑제? 어쨌든 기분은 좋네."
하늘을 향해 코를 벌름거리던 노인이 갑자기 영순의 손을 잡았다.
"자, 우선 내 집으로 가서 밥부터 먹고 그 얘기는 다음에 해도 늦지 않지. 밥을 먹어야 말할 힘도 생기잖아."
노인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집은 합판을 이어 붙인 지붕이 푹 내려앉은 단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집은 이래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지. 겨울에도 끄떡없어."
때가 눌어붙은 알루미늄 오봉에 찬 몇 가지가 놓인 밥상을 받은 영순은 그제야 깊은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우선 요기를 하라고. 먹어야 걱정도 하지."
투박한 밥상이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맡아보는 엄마 냄새였다.
숟가락을 들다 말고 눈물을 훔치는 영순의 모습에 노인의 측은한 시선이 내려앉았다.
"원.. 어린 처녀가 무슨 속이 그리 있다고. 이제 한창 투정이나 부릴 나인데."
마을 이장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영순을 만나고 나서 그물에 걸린 고기 따는 일을 해보라고 했다.
영순이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노인이 거들었다.
"곤찮여. 그냥 다른 사람들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돼여."
영순을 훑어보던 마을 이장이 노인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고 돌아갔다.
"큰 벌이는 안 돼도 그냥저냥 지낼 수 있으니까 좀 하다가 행편이 풀리면 살던 곳으로 가면 되니까 걱정 붙들어 매고 한 번 해 봐."
사실 별다른 방법도 없는 터였다.
단칸방이었지만 선 듯 방을 내어준 노인과의 기거가 시작되었다.
비릿한 바다내음과 퀴퀴한 방 냄새가 합쳐져 묘한 화음을 이루는 단칸방었지만 몸을 누일 수 있는 처소가 생겼다는 것에 감사했던 영순이 서툰 부두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둣가에 소문난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선주는 고깃배가 들어오기 바쁘게 영순을 찾았고 함께 기거하는 노인은 더부살이로 따라다녔다.
"허허, 오래 살고 볼일일세. 어디서 굴다 왔는지 모르지만 노친네 집에 호박이 넝쿨채로 굴러들어 왔구먼 그래.
나이가 열여섯이라고 그러지?"
"열여섯 치고는 다부지네. 누가 학생이라고 하겠나."
절치부심 일에 매달린 영순이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아 손놀림이 빠르고 눈치가 빠르다는 소문이 돌았다.
엄마의 죽음과 자신을 괴롭히던 몇 달 전의 일들이 조금씩 조금씩 회색빛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고기를 따고 있는 영순에게 어촌계에 있다는 한 간부가 찾아왔다.
그 사람에게 불려 간 영순이 미소를 띠고 돌아오자 같이 일을 하던 아지매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 뺀지름 한 놈이 뭐래? 뭐, 좋은데 소개해 준대?"
영순이 계속 웃기만 하자 아주머니들이 몸이 달았다.
"그놈 조심해야 할 거야. 눈깔이 뱁새눈깔 닮아서 엉큼한 놈일 수도 있다니까. 그래 뭐라고 해?
아이고 답답하네. 빨리 말해 보더라고."
"그냥요. 가서 차 한 잔 얻어먹은 게 다예요."
"뭐야. 그럼 차 한 잔 멕이자고 바쁜 사람을 부른 거야? 분위기로 봐서 아닌 거 같은데."
배시시 웃던 영순이 땅바닥에 뭔가 글씨를 쓰다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사실은요. 자기 사무실에 와서 일을 해보라고 해서..."
영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중에서 일을 제일 잘한다는 성주네가 발끈 나섰다.
"그럼 그렇지. 또 그 지랄이네. 꼴에 그것도 벼슬이라고 개수작질을 또 하는구먼."
영순이 고개를 갸웃하자 성주네가 영순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나꾸어 챘다.
"아서 아서. 그놈팽이한테 당한 여자가 한 둘이 아니여. 그 빌어먹을 놈이 지 딸년 같은 애한테 침을 바르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질질 끌려간 영순이에게 성주네가 찬물 바가지를 건넸다.
"이거 쭉 마시고 정신 차리더라고. 그리고 그 베라먹을 놈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말어."
물바가지를 받아 든 영순이 주저하자 성주네가 억지로 바가지를 들여 밀었다.
"그분이 그렇게 나쁜 사람인가요? 친절하시던데.."
"속에 능구렁이가 잔뜩 들어있는 개똥보다 못한 놈이지. 진철은 개뿔."
찬물을 들이키던 성주네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 뭐 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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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이 바지런하게 일을 한 탓에 어디로 떠나도 될 만큼의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세월이 약이라는 노랫말처럼 시간이 흐르자 잔인했던 엄마의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한 영순은 이제 이 부두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중단했던 학업을 이어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틴 날들이었다.
오랜 간 단칸방을 내어준 정 노인에게 이곳을 떠나겠노라 말을 건네자 노인은 아무 말없이 영순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래야지.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한 아가씨가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순 없지. 잘 생각했어. 여기 일은 모두 잊고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눈가에 이슬이 맺힌 노인은 돌아앉아 눈물을 닦았다.
그날 밤 정 노인의 손을 잡고 잠자리에 누운 영순은 지난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슬픔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른 새벽에 살며시 일어난 영순이 지난밤에 꾸려둔 짐을 챙겨 들고 밖을 나서자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노인이 깨지 않았고 노인의 머리맡에 상당액이 든 돈봉투를 두고 나온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새벽버스가 오지 않았으므로 읍내까지 걸어가야 했다.
우산을 쓰긴 했지만 들고 있는 가방 탓에 어깨가 많이 젖어서 한기가 밀려왔다.
읍내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렸기에 버스를 기다릴까 생각했지만 동네 사람들 눈에 뜨이기 싫어 부지런히 걷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집을 나서긴 했지만 이곳으로 올 때처럼 정해진 목적지도 없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영순의 뒤에서 갑자기 굉음과 함께 밝은 빛이 비쳤다.
영순이 놀라 길가로 나서자 시커먼 트럭 한 대가 급하게 다가섰다.
불빛에 사선을 긋는 빗줄기가 선명하게 보였지만 사람의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없었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은 성수였다.
허연 입김을 몰아붙이던 성수가 영순 앞을 가로막았다.
"새벽에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신대유?"
갑작스러운 돌출 행동에 놀란 영순이 가방을 뒤로 감추자 성수가 재빨리 가방을 나꾸어 챘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새벽에 떠나유? 그리고 누구 맘대로 도망을 친대요?"
어안이 벙벙한 영순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성수를 바라보았지만 성수는 눈을 맞추지 못하고 땅만 바라 보고 서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여기는 어떻게 알고."
"잔말 말고 차에 타유, 내 허락 없이는 암데두 못 가유."
영순은 기가 막혔지만 우악스럽게 잡아당기는 성수의 완력에 할 수없이 트럭에 올랐다.
차에 오른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한테 왜 이래요?"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성수는 입안이 탔는지 계속 입술에 침을 바르고 있었다.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자신을 여동생쯤으로 여길 거라고 생각한 영순은 성수의 돌발적인 행동이 부담스러웠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러지 말아요. 버스를 타려면 빨리 나가야 해요. 저 내릴게요."
영순이 가방을 챙겨 트럭에서 내리려고 하자 성수의 억센 손길이 영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갑자기 자신을 구해준 노인의 그 손길이 떠오른 영순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왜 이래요. 이 손 치워요."
영순이 좁은 트럭 안에서 빠져나오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우악스러운 사내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다.
영순이 격하게 울부짖자 영순의 허리를 감쌌던 성수의 손길이 잠시 풀렸다.
영순이 급하게 트럭에서 내려 어둠 속으로 내 뛰자 트럭이 다시 쫓아왔다.
트럭의 불빛에 맥이 풀린 영순이 물이 흥건한 길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싸움을 하느라 헝클어진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었다.
이미 지쳐 있었으므로 더 이상 반항 할 힘도 없었다.
우산을 들고 내린 성수가 영순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좀 전과 다른 태도로 다가앉았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난 왜 이런지 몰라요. 내가 죽일 놈이에유."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하는 성수의 모습이 공포스러웠지만 어떻게든 여기를 벗어나야 했으므로 성수를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오빠라고 부르면서 많이 의지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서 놀랬어요. 아까 심하게 굴었던 거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됐어요."
영순의 낮은 목소리를 듣던 성수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은.. 사실은유. 처음 볼 때부터 영순 씨를 좋아했어유. 나를 보고 오빠라고 했으니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았어유."
뜻밖의 고백이었다.
보기보다 나이배기고 행동이나 말투가 어눌했지만 심성은 착한 사람이었다.
영순이 한참 아래였지만 만날 때마다 깍듯하게 존댓말을 붙여서 처음엔 어색했지만 그의 본심을 알고 이내 가까워졌다.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던 사람이었는데 이런 마음을 먹고 있었다니.
"전 아직 학생이에요. 오빠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요.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영순이 나름 조리있게 말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성수의 볼을 타고 흐르는 물기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반짝거렸다.
그렇게 한참이 흘렀지만 영순과 성수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 전 아직 공부를 해야 하고 오빠는 고기를 많이 잡아서 돈을 벌어야 하잖아요. 저를 예쁘게 보아주시는 건 알겠지만 저는 아니에요. 오갈 데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뭐가 좋다구요."
성수가 말없이 서있자 영순이 비에 젖은 옷가지를 집어 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부탁할게요. 따라오지 마세요. 그리고 아까 한 말 안 들은 걸로 할게요."
영순이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멀어지자 얼마 안 있어 성수의 외마디가 들려왔다.
"영순아, 너 그대로 가면 나 죽어 버릴 거여. 나 이대로 살 자신이 없어."
무시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길을 걷던 영순이 다시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엄마,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나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학생이잖아.
사람들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동녘이 어슴프레 밝아오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기진맥진해서 걸어온 탓으로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영순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영순이 버스표를 끊고 대합실 의자에 쭈그려 앉자 잠이 쏟아졌다.
얼마를 잤을까
누군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뜬 영순에게 경찰이 다가왔다.
"신분증 좀 보여 주시지요."
가방을 뒤졌지만 가지고 있던 학생증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학생이고 소지했던 학생증이 없어졌다고 하자 경찰은 서에 가자고 했다.
학생이라고 거듭 말했지만 대합실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 신고를 한 것 같았다.
파출소에 끌려온 영순이 조사를 마치고 나오자 밖은 이미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차표는 오전 8시거라 한참이 지난 뒤였다.
허기가 졌으므로 근처 식당에 들어가 앉자 다시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오늘 안에 어디든 가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밥을 퍼먹은 영순이 대합실로 되돌아 가기 바쁘게 어디서 나타났는지 홍겁을 먹은듯한 정 노인이 급하게 영순에게 달려왔다.
"아니, 어쩐 일이세요. 여긴 어떻게 알고.."
영순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 노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영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무래도 멀리 못 갔을 거라고 생각해서 쫓아왔는데 내 생각이 맞았구먼. 아이고 내가 제명에 못 죽지."
흘끔거리는 주변 사람들을 피해 대합실 한쪽 구석으로 나오자 정 노인이 대성통곡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이렇게 극적으로 일어나는지 영순은 머리가 지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2년여 함께 지내면서 평소 차분했던 정 노인이었고 자신를 끔찍하게 위해 주었던지라 통곡을 하는 정노인의 모습에 영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정 노인이 잘 못 된 것도 아니어서 정노인이 소리를 내고 우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왜 그러시는지 말씀을 하세요.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후.. 그놈이 약을 처먹었어."
"예? 누가요?"
"성수 그놈이 농약을 마시고 발버둥 치다가 병원에 실려 갔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러."
정 노인은 두 손을 잡고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고 있었다.
영순은 대합실 벽이 자기에게로 무너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성수오빠가 왜 농약을 먹어요. 성수 오빠가 누군데 할머니가 저한테 쫓아와요?"
눈물 콧물이 합창이 된 정 노인의 울부짖음이 대합실에 가득했다.
놀란 모습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도착한 버스에 오르기 위해 우르르 몰려 나가자 그제야 잠깐의 짬이 생겼다.
정 노인의 손을 마주 잡은 영순은 승차 시간이 가까워졌지만 멍한 눈으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작로에 도열한 미류나무에 5월 연두빛이 무심하게 빛나고 있었다.
8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