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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신림 용소막성당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가난에 시달렸던 우리 민족은 수세기에 걸쳐 삶의 안녕을 위한 도피처를 찾아 헤매야했다.
고난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노예생활이나 탈 애굽 후 40년 광야생활의 시련은 우리 민족이 걸어온 시련의 기간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는 생각이다.
당장을 연명해야 삶의 끈이 이어지는 당대의 고난과 고통은 정도의 차이뿐 동서고금 다를 바가 없었겠지만 돌이켜 보면 한민족의 DNA는 21세기를 위한 연단의 풀무질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작금의 한국이 물질문명의 바로미터라고 자부하는 선진국가들의 견제를 받는 대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중심에 종교가 있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26년 3월에 발발한 중동전쟁의 최대 공약수는 무엇일까.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정치,경제,자원,문화의 수탈 등,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 바탕엔 지구의 에너지 창고인 땅과 종교가 자리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시험하는 시대로 도약하고 있지만 여전히 막강한 파워를 앞세운 중동의 석유자원은 중동 내 산유국들은 물론 소위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견제와 함께 간섭을 받아야 하는 처지다.
하지만 그들의 성은 난공불락에 가깝다.
서 아시아에서 동 지중해에 걸쳐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에서 기원전 6세기와 기원후 1세기에 나타난 유대교와 기독교, 기원후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교는 레바논과 키프로스를 제한 중동지역의 90%가 신봉하는 절대적 신념을 지닌 종교가 되었다.
이밖에도 신자수는 적지만 20여 가지의 다신교가 삶의 바탕으로 깔린 중동지방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복잡한 실타래는 구약의 율법이나 도덕법 또는 철학으로도 쉽게 해석하기 어려운 이집트의 또 하나의 피라미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이 그들에게 막대한 석유자원을 준 것은 사막지대의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만나가 되었겠지만 역으로 보면 풍부한 석유자원이 세계의 이목과 함께 자원확보의 전쟁터가 되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화약고가 되어버렸다.
핵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촉발된 3월의 미국의 대 이란 전쟁은 며칠 천하로 끝난 베네수엘라와 달리 쉬 결말이 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중동이 난해한 이유는 바로 이슬람이라는 종교 때문이다.
일정의 종교 신념은 당대의 권리나 행복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목숨을 버리더라도 바라는 바 이상의 세상을 얻을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어서 정치나 철학적인 접근을 쉬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종교적 신념이 굳게 자리한 중동지역은 여타 종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껄끄러운 점들이 많이 나타난다.
기독교 역시 사랑이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폭력이나 전쟁등의 사유를 필요 충분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그동안 이슬람인들이 보여준 수많은 정치적 사건들을 보면 종교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사안들이 많았다.
이는 타국은 물론 중동 국가들 간에 수많은 갈등을 부르고 결국 피를 부르는 전쟁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지금까지 보아온 터이다.
모양과 성질은 좀 다르지만 한국의 종교 문화는 점진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유럽이나 아메리카와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에서 중동지방의 종교 이야기를 곁들어 보았다.
한국에 들어온 천주교나 기독교가 짧은 세월 수 백 수 천 배로 성장한 것을 두고 세상이 혀를 내두르고 있다.
긍정보다 부정의 바벨탑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의 성장은 놀랍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이는 종교개혁의 선두에 섰던 마틴루터나 예정론의 칼빈주의, 신앙의 자유의지를 내세운 알미니안 창의자들이 한국 교회에 나타나 그들의 교리를 다시 주장한다고 해도 씨도 먹히지 않을 만큼의 다변화된 모습으로 변모했다.
22만km2의 국토와 인구 7000만의 작은 나라가 받아들인 크리스트교는 짧은 세월을 거치면서 한 줄기로 시작된 가톨릭에서 수 십 갈래로 갈라지고 세분화된 매우 특이한 구조의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같은 재료로 수 십, 수백 가지의 음식을 ,그것도 매우 특이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우리 삶의 실질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요인들을 파헤쳐보면 종교가 개입하지 않은 것들이 거의 없다.
근간에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신흥종교 단체들을 보노라면 오랜 세월 한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샤머니즘의 또 다른 형태를 보는 듯하다.
요즘 치유와 회복을 의미하는 힐링( healing)이라는 단어가 유명세를 타고 있다.
더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을 추구하는 인류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 조건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두뇌 회로는 극한의 피로감을 호소하는 아이러니를 보이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이 제시되면서 이를 주제로 한 여행 상품이나 명상 자료들이 수없이 쏟아지고 있다.
종교에 힐링이라는 수식어를 대입한다면 불특정 다수에게 힐난의 단초를 제공할 수도 있겠지만 세인들에게 믿음보다는 불신을 자초하고 있는 한국 종교의 민낯을 보기 위해서 복잡한 종교이론을 벗어난 곳에서 단순하게 바라보는 일도 믿음의 힐링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21호 구석구석 가보기에는 종교 힐링의 마지막 보루에 서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 원주 신림 용암리에 위치한 용소막 성당과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소재한 배론 성지를 찾아 나섰다.
성당 앞에 세워진 용소막 성당의 표지판은 매우 낡아서 나이를 가늠하게 어렵게 현대화된 개신교의 뒤안길을 보는 듯했다.
비교적 이름이 난 성당이라 성당을 찾는 이들이 많은 탓에 넓은 주차장과 탁 트인 공간을 지니고 있었지만 성당이 풍기는 냄새는 소박하고 성실하며 단순 명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은 횡성지역에 위치한 풍수원 성당과도 비슷했다.
*풍수원 성당
용소막 성당은 1888년 강원도에서 최초로 세워진 풍수원성당과 원주 성당에 이어 세 번째로 건립된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모티브다.
지금의 성당이 지어 진해가 1915년이고 용소막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한 것은 그로부터 11년 전인 1904년으로 성당이 시작된 당시 이곳의 풍경은 지독한 오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용소막은 마을이 용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성당이 위치한 곳이 용의 발 부분에 해당이 된다고 한다.
지금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서 깊은 성당이 환경이 좋은 장소를 택하지 않고 무슨 이유로 환경이 열악한 곳에 자리하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성당에서 만난 마을 신자에게 질문을 하니 아주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몰래 숨어든 신자들이 외진 산골에 모여 신앙생활을 하면서 처음에는 초가집을 짓고 예배를 드리다가 점차 규모를 늘려나간 결과물이 지금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으니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성당을 세우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용소막성당의 시작도 마찬가지였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 다니던 (최도철)이라는 인물이 풍수원 본당의 르메르라는 신부에게 전교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숨어 살기 좋은 용소막에 정착하면서 십여 칸의 초가집 경당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1904년 본당으로 승격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신자수가 늘어나면서 성당 신축공사에 나서게 되었고, 공사 3년 만인 1915년 벽돌로 지어진 양옥 성당을 완공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용소막 성당은 원주군, 영월군, 평창군, 제천 군 단양군을 관할 지역으로 두고 수 천명을 상회하는 신자를 둔 본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실상 130년의 연혁을 가지고 있으니 한국 초대교회의 산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취재를 위해 방문 한 날 모 언론사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다. 용소막 성당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양해를 구하고 취재가 끝나길 기다렸으나 그분들의 취재가 길어진 탓으로 수녀님과의 대화는 불발이 되고 말았다. 아쉬움이 남아 근처를 돌다가 점심시간이 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배론 성지로 향해야 했다.
본당 옆에 위치한 부속 건물은 용소막 성당의 자료보존실과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개신교 교회당들이 대부분 건물 규모가 크고 화려한데 비해 용소막 성당은 지어진 지 오래고 일부는 낡아서 개 보수나 신축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성당 안쪽에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기부금을 적을 수 있는 책자와 필기구가 놓여 있었다.
부딪혀 살아야 하는 실제의 삶과 믿음 사이엔 구구셈을 덧입혀야 하는 괴리가 존재한다.
육신을 입은 인간이 피정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고 고단하다.
천주교 박해로 수많은 신도들이 죽임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열악한 환경을 딛고 전국에 초대교회의 깃발을 꽂음으로 오늘의 성당과 신도들이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오고 오는 후대들에게 더 나은 믿음의 처소를 마련해 주려는 일련의 행위들은 물질을 통한 또 하나의 선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담으로 만들어진 성체 조배실
천주교구에서는 "성체 안에 현존하는 예수께 대해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대화함"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홀로 신을 느끼고자 하는 묵언의 소통 장소,믿음으로 몸과 마음을 비우는 장소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고난이 있기 전 겟세마네라는 동산에서 홀로 기도 하셨고, 마태복음 6장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는 내용으로 보아 주석을 떠나 믿음의 슬림(slim)을 폭넓게 해석한다면 이 또한 신앙생활의 힐링을 위한 행위가 아닐까 한다.
산아래 중앙고속도로가 보인다.
성당에서 바라보는 신림의 산과 들은 여느 산골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신림을 관통하는 중앙고속도로가 성당과 가까워 용소막을 방문하는데 매우 편리하다. 서울--중앙고속도로 남원주 톨게이트--15분쯤 진행 신림 나들목--제천 방향으로 5분 정도 진행하면 용소막 성당 모습이 보인다.
특정 종교인이 아니어도 역사가 깊은 성당은 찾는 일은 자신을 한 번 되돌아보는 기회의 장소다.
종교단체의 건물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국가나 자자체의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 유서 깊은 성당들.
그 가운데 원주 신림 용소막 성당이 있다.
신록이 빛나는 계절도 좋고 단풍 물드는 가을에도 좋지만 눈 쌓인 겨울에 찾아가면 연말연시가 주는 특별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름이 알려진 성당의 모습과 달리 성당 앞 버스 정류장에는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람이 언제 앉았다 갔는지 낡은 의자엔 먼지가 쌓여있고 주변엔 일상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성당이 지어질 당시엔 천주교 박해를 피해온 사람들이 산골로 찾아들었는데 세월이 흘러 교통이 좋아지고 형편이 과거와 비교불가인 세상이 됐지만 이와는 반대로 인구가 줄어들면서 농촌에는 고령의 노인들만 사는 희한한 세상이 되었다.
여기뿐 아니라 농어촌 어디라도 사정은 비슷하다.
젊은이들이 사라진 농어촌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중이다.
2026년 3월 28일 청일문학 기자 윤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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