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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 국기의 파랑, 하양, 빨강에서 파란 색은 자유를 상징한다는데, 그게 왜 자유를 상징하게 되었을까? 하늘을 닮은 색이라서 그런 걸까? 이념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자유도 그게 결여된 상태에서만 느껴지는 상대적인 가치이다. 즉 억압과 금지가 자유의 전제 조건이다. 자유는 개인이 외부적인 다른 힘에 의해 속박되거나 통제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나 행위를 뜻한다.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욕구나 욕망에는 반드시 그걸 통제하거나 제한하는 외부의, 혹은 내면의 힘이 존재한다. 그 이유는 나의 욕망의 대상은 반드시 누군가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며, 때로는 그 대상이 타자 자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저항이나 억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아의식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자유가 존재의 기본 조건으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속박과 금지가 기본 조건으로 주어졌다. 역설적으로 그런 이유 때문에 자유라는 개념이 우리가 지향하는 이념적 가치로 떠오른 것이다.
자유를 억제하는 힘이 사회제도나 관행일 수도 있고 개인의 제한된 능력이나 한정된 가능성일 수도 있다. 토마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평화스럽지 않았다. 그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였다고 본다. 상상력으로 인해 무제한의 욕망을 갖게 된 인간이 통제받지 않으면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 다른 동물들의 경우에는 욕구 자체가 스스로 제한되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야생동물 무리에서는 확보한 먹이를 가장 힘 센 녀석부터 실컷 먹고, 남은 건 차례로 다른 녀석들이 먹도록 둔다. 하지만 인간은 힘 센 녀석이 먼저 배불리 먹고도 남은 걸 다른 녀석들이 건드리지 못하게 하여 약한 녀석들을 굶어 죽게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현상이 인간 사회에 보편화된다면 그 사회는 평화롭게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인간 사회의 경우에는 합의 하에 사회계약, 즉 제도를 만들어 각 개인의 욕구를 제한함으로써 사회적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런 목적에서 생겨난 법과 제도, 관행에 각 개인이 동의함으로써 각자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자유의 일부를 포기하게 된 것이다. 즉 문명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는 일정부분 억제된다. 그런데도 개인은 법과 제도를 어기려고 호시탐탐 노린다. 그래서 사회적 약속을 어기는 개인은 법의 처벌을 받는다. 법이라는 게 곧 처벌 규정이다. 그리고 처벌의 전형적인 방식이 개인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자유를 빼앗는 것, 즉 그를 잡아가두는 형벌이다. 그래서 문명사회에는 반드시 감옥소가 있다.
형벌에는 벌금형도 있고 태형도 있고 사형도 있지만, 기본은 징역형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법과 제도에 어긋나는 이런저런 짓—불법유턴, 신호위반, 음주운전, 노상방뇨, 고성방가, 사문서(중학교 때 성적표) 위조, 언어폭력(고함과 욕설)—들을 했지만, 운 좋게도, 지금까지 징역형을 받지 않았다. 다만 철없던 대학생이었을 때 가벼운 범죄를 저질러 반나절 정도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적이 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 구경을 갔다가 길거리에서 장발 단속에 걸려 번잡한 큰길 네거리 모퉁이에 경찰이 줄을 쳐놓은 네모난 구역에 동료 경범죄 죄인들—주로 무단횡단, 장발, 미니스커트, 음주소란 등—과 함께 한참 동안 세워져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우세를 당한 뒤에 그들과 함께 관악경찰서 유치장에 갇혔었다. 경찰이 유치장 복도에 있는 공중전화를 차례로 한 번씩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나는 외갓집에 전화해서 당시 잘나가시던 외삼촌 끗발 덕분에 훈방으로 풀려났었다. 고작 반나절쯤 갇혀 있었지만 유치장은 아주 다른 세상이었고, 그 경험은 아주 색다른 느낌이었다. 단 몇 시간이었지만 정말 답답하고 조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때 나의 태도에 대해 크게 후회한다. 제대로 구류를 살았더라면 그게 값진 경험이었을 텐데. 비록 독립운동도 민주화운동도 아닌 무분별한 젊음이 범한 쩨쩨한 법률 위반이었지만 말이다. 뭐가 그리 괴롭다고 단 몇 분이라도 빨리 유치장을 나가려고 안달이 나고 초조했었던지. 제대로 죗값을 치르고 나왔더라면 경찰서 정문을 나올 때 해방감이 몇 배는 더 컸을 텐데.
『월든』의 저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당시 미국정부가 행한 멕시코 전쟁과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부했고, 그에 대한 당국의 처벌로 구치소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풀려 나왔다. 그의 의사에 반하여 누군가, 아마도 그의 고모가, 세금을 대납해줘서 풀려난 것이다. 고작 남들 따라 하느라 장발로 다니다가 쪽팔리게 당국의 처벌을 받은 나와는 달리, 그는 정당성 없는 전쟁과 사악한 제도에 반대하다가 당당하게 처벌을 받은 것이다. 또한 안절부절못하고 편법을 써서 비겁하게 유치장에서 빠져나온 나와는 달리, 그는 구치소에서 느긋하게 동료 죄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명상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쓴 글이 『시민의 불복종』이다. 소로우와 나, 두 사람의 사람됨의 차이가 태평양과 길바닥에 생긴 물웅덩이의 차이만큼이나 엄청나다.
국민학교 다닐 때 나는 무척 자유로웠다. 거의 날마다 종일 내 마음대로 놀았으니까. 어렸을 때 마음대로 노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게 있을까? 들이며 동네 길이며 산이며 바닷가며 아무데나 쏘다니며 동네 아이들과 또는 혼자서라도 마음대로 놀았다. 일단 학교가 파하면 공부는 관심 밖이었고, 자칫 방심하여 부모님 눈길에 붙잡혀 농사일이나 집안일을 도와드리는 것만 피하게 되면 춘하추동 놀았을 뿐이다. 나의 어머니께서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을 가르치니 가서 배우라고 신신당부하셔서 마지못해 가봤는데 너무 재미없고 답답해서 며칠 다니다 포기했다. 방학 때는 또 어머니께서 학교에서 주산을 가르친다고 가서 배우라 하셔서 가봤으나 역시 재미가 없어서 며칠 못가서 그만두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신나는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도시에 와서 중학교에 들어가자 모든 생활에서 속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이 붙지 않았었고 또 공부에 대한 의욕도 동기도 갖지 않았으므로 학교에서는 답답했고 자취방에 돌아와도 답답했다. 학교에서는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고 학교가 파하면 자취하는 다른 녀석들과 만나서 길거리에서 얼쩡거리거나 자취방들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자기 주도 학습을 통한 노력을 하지 않으니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었고, 당연히 성적은 형편없었다. 나는 학습뿐만 아니라 학교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었다. 당시에 중고등학교 생활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심할 정도로 억압적이었고 교칙이라는 게 부당한 규제 일색이었다. 머리카락은 바라깡으로 빡빡 밀어야 했고 멋 부리려고 바리깡에 덧신 같은 걸 씌워서 ‘니부’—몇 밀리미터 정도 그루터기를 남기고 깎는 것—로 깎는 것도 단속의 대상이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동복의 세워진 칼라 목둘레 앞부분 후크를 채우지 않고 등교하다가 교문에서 선도부 선배들에게 걸려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한 방 얻어맞고 그 자리에서 순간적으로 기절했던 적도 있다.
복장이나 태도, 행동의 거의 모든 부분이 단속의 대상이었다. 걸리면 업드려뻗쳐 등의 벌을 받거나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당했다. 시험에서 일정 점수 이하를 받으면 자신의 부족한 점수에 비례해서 그만큼 숫자의 매를 맞았다. 매 맞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릴 때 얼마나 초조하고 두려웠는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앞선 애들이 몽둥이질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걸 바라보며 내 차례를 기다리는 건 신체적 고통보다 더 괴로운 심적 고통이었다. 학교에도 교사에게도 학생에게도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말에 자퇴하는 등 한바탕 소동을 벌인 후, 2학년 때부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생전 처음 공부를 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중고등학교 시절에 학교는 나에게 감옥이나 다름없었고, 나는 무기력한 수감자 같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 모든 억압적인 관행이나, 제도, 교칙을 당연시하여 받아들였으므로 내가 억압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저항의식도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내 인생에서 암흑기였다.
대학에 들어오자 나는 해방과 광복, 자유를 맞이했다. ‘먹고대학생’이란 말이 나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공부는 거의 관심 밖이었고 허구한 날 술 먹고 놀아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고, 누구도 무엇을 강요하지 않았다.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자유로웠다. 이제 와서 제아무리 미화하려 해도 나의 대학생활은 청춘 낭비였다. 철든 다른 사람들은 대학시절에 시국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여 사회적으로 성숙해지고 전공 공부에 매진하여 지적으로 성장했겠지만, 나는 사회에 대해서도 내 자신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았고 그저 정서적으로 방황했고, 모호한 낭만적 환상 속에서 무작정 헤맸었다. 어리석고 무분별한 개인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얼마나 소모적인 삶을 살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가 된 결실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처럼 방종을 만끽하다가 군대에 들어가니 거긴 정말 교도소였고 나는 정말 죄수가 되어 갇힌 느낌이었다. 몸이 포박당하고 다리에 사슬이 묶여 끌려 다니는 것 같았고 가슴이 답답했다. 잠자리에 드는 것도, 잠에서 깨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삽질을 하는 것도, 걸어가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바라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지시에 따라야 했고 감시받았다. 그렇게 느끼며 야전공병대(‘골병대’라고 자조했음)에서 삽질하고 ‘공구리 치고 브로꾸 찍고’(전문용어임) 폭동진압 훈련(나는 1979년에 입대해서 1981년에 제대했음)을 받고 내무반 생활을 하며 종종 얻어터지면서 12개월을 보내고 작대기 두 개를 달아 일병이 되기까지 나는 적응에 몹시 힘들어 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건 수긍할 수 있었지만, 국방의 의무를 실행하는 게 그렇게 속박당하는 건 줄은 미처 몰랐었다. 휴가 나왔다가 복귀할 때 버스에서 내려 부대로 들어가는 굽이진 신작로에 접어들면 발걸음이 헛디뎌졌고 하늘이 아득하였고 마음속에 어스레한 불안감이 맴돌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반사적인 거부감에 휘말렸다. 뭘 그렇게 힘겨워 했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역시 후회막심이다. 그 기간도 내 삶에서 더없이 소중한, 전체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 부분이 아닌가. 내가 그때 보인 반응은 2-3년 전 관악경찰서 유치장에서 보인 유약한 태도와 똑같은 종류였다. 뚝심도 참을성도 없는, 접시 물처럼 얕고 촐싹거리는 마음이었다. 당당하게 부딪혀 겪었더라면 그만큼 마음의 근육이 생겼을 텐데. 그런데도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럭저럭 적응해가면서, 영내에 있는 “도하교회”(그 부대 별칭이 “도하부대”였다)에 나가 성가대 활동도 하고 거기에서 일요일에 동네 아가씨 등 민간인들도 만나고, 계급도 상병으로 그리고 다시 병장으로 올라가고 하니 군대생활도 그런대로 할만 했다. 또한 군대가 내 몸뚱이를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해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갈 테니까, 그래서 때가 되면 제대하게 될 테니까.
내가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을 때 ‘야자’(야간 자율 학습)이라는 게 처음으로 실행되기 시작했었다. 1985년 시내 모 남자고등학교에서 2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학교가 그걸 실시했다. 전교생의 하교 시간이 갑자기 오후 5시에서 밤 10시로 바뀐 것이다. 2학년이 된 학생들은 1학년 때까지는 5시에 하교했었다. 그러다가 2학년에 올라가자 갑자기 그들을 밤 10시까지 강제로 교실에 가두어 두고 소위 ‘야자’를 시킨 것이다. 갓 고등학생이 된 1학년들은 그러려니 하고 체념하는 분위기였고, 3학년들은 대학입시라는 발등의 불이 떨어졌으니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2학년들은 달랐다. 1학년 때는 저녁시간이 자유로웠는데 갑자기 밤 10시까지 가두어 두니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걸 감독하느라고 역시 밤10시까지 교실에 남아 묵직한 몽둥이를 들고 학생들을 감시해야 하는 담임교사도 미칠 노릇이었다. 몇 달 후에는 모든 담임교사가 다 남아 있지 않고 학년 당 서너 명의 교사가 남아 몽둥이를 들고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몇 개 반을 감시했다. 감방의 간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게 복도에서 감시하고 있던 어느 날 저녁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중간에 주어진 10분간 휴식시간에 각 교실의 학생들이 갑자기 전등을 모두 꺼버리고 복도로 몰려나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반별로 편을 갈라 마치 미식축구 경기에서처럼 서로 밀어 붙이며 야수의 울부짖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함성을 질러댔다. 누가 주도한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터진 것이다. 모든 폭동은 그런 식으로 터진다. 광란의 현장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그때는 야자가 없었다—보다 내가 교사였을 때 고등학생들—그들이 지금 50대 중후반의 나이이다—이 훨씬 더 가혹한 속박 상태에 있었다. 우리나라 모든 인문계 고등학교가 다 똑같이 그런 걸 실행했는데 그게 전체적으로 무슨 교육적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학교가 더 가혹하게 더 오래 학생들을 가두어 자율학습을 강제하는가가 학교별 입학 성적의 차이를 낼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건 학교를 위해서 그리고 소수 상위권 학생들을 위해서 다수 학생들을 억압하는 정책이다. 백번 양보해서 성적 상위권 학생들에게 강제로라도 공부를 더 많이 시켜서 더 좋은 대학에 더 많이 보내는 효과가 있었다 해도, 그건 그 학생들과 그 학교 차원을 벗어나면 별 의미가 없다. 왜냐면 전국적으로 보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학생의 숫자는 일정하게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수학능력이 전체적으로 향상되었다는 보도를 들은 적도 없다. 그건 일종의 개싸움이다. 게다가 중위권 이하의 학생들은 뭔가? 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들러리 죄수에 불과하다. ‘강제 야자’는 그들을 순장시키는 것과 같은 종류의 야만 행위였다. 그런 생각을 가진 교사였던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것도 내가 2년 후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유학을 가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강제 야간 자율 학습’—물론 그 표현이 자체 모순이기도 하고—이 인권침해적인 어떤 교칙보다 훨씬 더 나쁜 이유는 그것이 ‘금지의 영역’과 ‘권고의 영역’을 혼동하여 학생 개인의 정신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자유에 거스르는 강제력은 대체로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의 형태를 띤다. 제도나 법률은, 공동체에 대한 기본 의무를 요구하는 걸 제외하면, 주로 개인에게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의 형태를 띤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최소 규정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나 제도가 자기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권고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걸 강제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나쁜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쉽게 합의에 이를 수 있지만, 무엇이 좋은가에 대해서는 좀체 합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구타를 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싫은 것이기 때문에 그 행위는 나쁜 짓이고 구타를 금지하는 데는 모두가 쉽게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귓불을 만지는 걸 좋아한다고—군대에서 내 동기 중에 그런 기이한 취향을 가진 녀석이 있었다—해서, 혹은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만짐을 당하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그런 행위가 선이라고 주장하는 데는 결코 보편적인 동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건 엄청나게 불쾌한 느낌일 수 있다. 따라서 그런 행위를 다른 사람에게 강제해서는 안 된다. 모두에게 강제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아마도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주변 인물들, 특히 남성들이 그녀에게 행하는 가장 나쁜 행위는 그들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녀에게 강제하는 짓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좋은 것이 영혜에게도 좋은 것이어야만 한다는 믿음으로, 그리고 자신들이 영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녀의 입에 고깃덩어리를 강제로 쑤셔 넣는다.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은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좋아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자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개인에게 자유란 외부적인 힘에 의해 강요당하지 않고 자기 삶의 방향과 진로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전공이나 진로 선택이든, 연애든, 결혼이든, 주거 이전이든, 어떤 종교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든, 히잡을 쓰고 안 쓰고의 선택이든, 고기를 먹고 안 먹고의 취향이든, 자율학습을 하고 안 하고의 결정이든, 그런 것들은 기껏해야 권유의 영역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 그런 걸 강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정신과 생명권을 짓밟는 행위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누구도 자신의 삶에 거슬러서 작용하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다. 즉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우리에게 자유가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그게 현실에서 완전하게 실행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라는 뜻이다. 개인은 제도가 부과하는 외적 강제력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환경적 조건이나 유전적 능력의 한계에 의해서도 제한된 삶을 살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게 되고 강제된다. 예를 들면 우리의 생각이나 상상력은 제한이 없어서 우리의 제한된 몸이 가진 제약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답답하다고 느낀다. 국민학생이었을 때 나는 “우주 소년 아톰”(“철완鐵腕 아톰”)이라는 만화를 보면서 나도 로봇 아톰처럼 단단한 콘크리트 벽을 주먹으로 한 방에 쳐부수고 신나게 하늘을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짜릿한 착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철이 들면서 그런 무모한 시도를 했다가는 내 몸이 박살나게 된다는 ‘현타’에 이르게 되었고, 그런 상상이 짜릿한 쾌감이 아니라 끔찍한 아픔으로 느껴졌다. 그러자 그런 착각이 사라졌다. 어렸을 때 내가 들었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낭랑한 구호가 현실의 테두리 속에 갇히면서 점점 사라져 갔다. 우리는 철이 들면서 상상 차원이든 실행 차원이든 자유가 점점 위축되면서 몸과 마음이 점점 더 작은 공간과 시간 속에 갇히게 된다. 그러다가 가끔 마음 자체가 감옥이나 심지어는 지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몸이나 마음, 현실이나 능력, 조건이나 운명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상상을 한다. 그것이 합격 통보를 받고 환희의 전율을 느꼈던 직장이든, 흔히들 ‘홈 스위트 홈’이라고 칭송하는 가정이든, 주어진 운명이든 그 테두리 안에서 구속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을 꿈꾼다. 그래서 사람들이 꿈꾸는 탈출의 형태는 일상 탈출이나 직장 탈출, 도시 탈출, 시골 탈출, 가출, 탈북, 문명 탈출, 자연 탈출 등 실로 다양하다. 그러다가 때로는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나는 아마 기질적으로 젊어서부터 탈출 욕구가 좀 강한 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빠삐용』과 『쇼생크 탈출』이라는 두 편의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었다. 아시다시피 그 두 영화는 탈옥 영화이다. 지은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갇히게 되었든 무고하게 누명을 쓰고 그렇게 됐든, 감옥에 갇히게 되면 극히 평범한 자유가 어마어마하게 간절해질 것 같다. 영화 『빠삐용』에서는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서 이미 백발이 되고 치아도 모조리 빠진 몰골에 고문으로 뼈를 다쳐 발을 절룩거리는 주인공이 야자열매를 담은 부대 자루와 함께 수십 미터의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는 마지막 장면은 내 가슴에 징을 치는 느낌을 주었다. 한편 『쇼생크 탈출』에서는 주인공이 조그만 암석망치로 16년 동안 몰래 교도소 벽을 조금씩 파내고 그로 인해 생긴 흙은 그의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교도소 운동장에서 몰래 버리는 수법으로 탈옥하여, 벽을 뚫은 지점으로부터 수백 미터나 되는 하수구를 기어서 통과한 다음 그 끝에서 빠져나와 쏟아지는 빛과 빗줄기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양팔을 한껏 펼쳐드는 모습—그게 영화 포스터 장면이기도 했다—에서 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발현하고 자신의 욕구를 실행하고 싶다. 그게 우리의 자유가 지향하는 방향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신을 스스로 억제하고 다른 대상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도 싶다. 전자가 자유라면 후자는 사랑이다. 전자는 자아실현을 추구하고 후자는 자기 속박을 지향한다. 우리는 자유와 사랑이라는, 이처럼 해결되지 않는 갈등 사이에 끼어 있다. 생물학적 끌림인 연애와 사회적 계약인 결혼을 생각해 보자. 그 둘 다 그리고 남녀 양측 모두 상대방에게 자신을 얽매는 일이다. 그게 싫어서 혹은 두려워서 연애도 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으면 자유로울까? 자유가 속박에 의해서만 그 가치를 발하는 역설적인 가치이듯이, 사랑도 구속에 의해서만 가치를 발하는 모순된 가치이다. 아마 그것은 우리가 몸과 마음이라는 모순된 두 요소로 구성된 존재이며,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이중적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가정이라는 안식처를 원하면서도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결혼이 사랑의 동의어가 아니듯, 결혼의 반대가 자유가 아니다. 완전한 사랑이 있을 수 없듯이 완전한 자유도 불가능하다. 이래도 저래도 우리는 속박 상태에서 탈출할 수 없다. 삶 자체가 제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가수 김용임은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단단히 묶어라”고 노래하며, 사랑의 밧줄로 연인을 꽁꽁 묶어두겠다고 외친다. 그렇게 묶인 그녀의 연인은 참 딱한 처지에 놓일 것 같지만, 그가 그걸 좋아한다면 ... 다른 사람이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사랑이라는 게 근본적으로 묶고 묶이는 것이다. 연인들 사이의 연애든, 기독교에서 주님과의 영적 결합이든 묶고 묶이는 건 마찬가지다. 자신이 그분에게 꽁꽁 묶이고 그분이 자신에게 꽁꽁 묶여 서로 떠날 수 없게 되어야 하니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포박당한 상태에서라야 내가 자유로우니까. 밀턴의 『실낙원』에서 묘사되는 하늘나라 전쟁에서 사탄이 자신의 군대가 자유를 지향하고 있고 반면에 하나님의 군사들이 노예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사탄 자신이 독재자 하나님의 억압에 저항해서 봉기했으니까 자유주의자라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 군대의 지휘관인 천사 아브디엘(Abdiel)은 섬기는 행위 자체가 섬기는 자를 노예로 만드는 게 아니며, 오히려 최고의 지혜를 가진 하나님을 섬겨야 자유로워진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지혜롭지 못한 자인 사탄을 섬기는 행위가 노예상태를 자처하는 짓이라는 거다. 사탄 자신이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고 따라서 그를 따르는 자들도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당시 하늘나라의 천사들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섬기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리들 인간이 처한 입장이 당시 천사들이 처한 상황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지 않다.
그와 같은 근본적인 속박 상태에서 탈출하여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은 욕구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케이트 쇼팬(Kate Chopin)의 소설 『각성』(The Awakening)에서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부족할 게 없는 주부인 여주인공 에드나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작품의 끝부분에서 멕시코 만의 따뜻한 바닷물 속으로 홀로 수영해 들어감으로써 자살을 선택하는 행위가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 삶의 비극적 종말을 극화한다. 그리고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자신의 묘비명에서 외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는 명제가 그걸 압축한다. 그러나 죽음은 자유의 성취가 아니라, 비존재상태로의 회귀이고 무의미 상태로의 환원이다. 불교에서 열반은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승려가 죽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해탈이나 열반을 인간적인 삶의 가치로 보지 않는다. 나는 그처럼 신비로운 경지에 이른, 살아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 자유라는 이념적 가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본적으로 그것은 나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문제를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당하지 않고 스스로 실행하는가의 문제이다. 나는 그런 문제들을 외부의 힘에 강제되지 않고 비교적 내 마음대로 선택하고 결정해왔다고 생각한다. 대학을 진학하는 데 있어서, 전공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연애나 결혼에서, 유학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연구 분야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나는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혹은 그 결과로서, 나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제한과 속박에 대해 나는 어떻게 대처해왔는가? 나는 속박과 그에 따르는 어려움을 견뎌내는 힘이 부족했다는 점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기 싫은 일을 참아내며 끝까지 해내는 힘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어렸을 때 서당에서 지루함을 이겨내고 끝까지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천자문을 떼지 못했고, 방학 때 따분함을 참아내고 주산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주산이나 암산이 익숙하지 않으며, 단 몇 시간 경찰서 유치장에서의 답답함도 제대로 견디지 못하고 편법으로 빠져나왔고, 군대 생활도 능동적으로 감당하지 못해 허우적거렸기 때문에 지금도 이런저런 사소한 문제에도 연약한 지반에 세워진 구조물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마음이 흔들린다. 나는 억압을 버텨내는 힘이 약하다. 삶의 진행이 자유를 누리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시련을 견디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말이다. 나는 대학원 주임교수였던 번즈 교수(Professor Byrnes)께서 외국학생으로서 종합시험 등으로 힘들어 하는 나에게, 스쳐 지나가면서 “Hang tough!”라고 말하며 엄지척을 보내준 순간을 사진처럼 기억한다. 또 한번은 늦은 나이에 시간강사 하느라 허덕거리는 나에게 선배 교수 한 분이 역시 스쳐 지나가면서 주먹 쥔 손을 치켜세우며 전라도 사투리로 “버터!”(버텨)라고 말해주었던 순간도 사진 찍힌 듯 머릿속에 선명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유라는 파랑새는 하늘을 마음껏 훨훨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내려앉을 곳을 찾아 애태우고 있다.
첫댓글 호미님의 결론 '내려앉을 곳을 찾는 파랑새'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이 결론을 읽을 때까지 '활자의 속박과 억압'이 심리적으로는 36년처럼 느껴졌달까요.
파랑이 자유인 것은 하늘이 파래서 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유와 속박은 한 곳에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않나…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