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스 신화
처음, 부모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들에게 축하를 보낸다. 좋겠다고. 하지만, 부모로 살다보면 감당해야 할 고독이 더러 있다. 어린 아기는 오직 자기가 가지고 싶은 값비싼 장난감만 사달라고 조를 뿐 부모의 벌이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머리가 좀 큰 자식은 큰 자식대로, 키워준 댓가는 간 곳 없고 뜻대로 안되면 부모를 죽이기도 한다. 세상 어느 부모가 내 자식을 최고로 잘 키우고 싶지 않을까? 그런 것들에 대해 대부분의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자식은 부모의 고통과 고독을 깡그리 외면할지라도 부모는 생각한다. 부모니까 고통도 서글픔도 느껴서는 안 되며, 흙에 뼈를 묻는 순간까지 오로지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장도 한 가정과 같다. 기관장이 되면 사람들은 좋겠다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기관장으로 일하다보면 혼자 감당해야 할 고독을 맞을 때가 더러 있다. 쉽게 술안주꺼리로 씹히는 세상 모든 기관장을 대변하여 한 번쯤은 기관장의 처지도 헤아려 봐주기를 바라 이 글을 쓴다.
교장이라는 기관장이 되고서부터 때때로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처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기대고 싶은 존재로서가 아니라 연민의 정으로 다가가게 된다. 인간은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자기가 믿는 유일신한테 인간 중심의 모든 소원 성취를 위해 기도에 담아 빈다. 그 소원을 다 들어주려면 유일신도 얼마나 머리가 아플까? 하지만 신은 전지전능하시니까 고통도 서글픔도 못 느끼실 것 같아서 인간 중심의 기도만 바치고 소원이 성취되면 ‘감사합니다’ 그 한 마디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기관의 꼭대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다.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내 한 몸의 권위며 수고는 밀쳐두고라도 기관의 발전과 동료 직원들의 따스한 일상을 위해 인간적으로 챙겨주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학교장은 사령관처럼 지극정성을 다해야 하는 자리이다. 전교생이 800명이든 8000명이든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의 낙오자가 생겨나도 안 되고 동료 직원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물의를 일으키면 책임 져야하는 중책이라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나날이다. 한편, 동료들은 어떤가? 일거리가 많다 싶으면 그들의 처지만을 들이대며 기관장을 군림자로 여겨 공략(攻略)의 대상으로 여긴다. 마치 기관장들의 고초는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사랑처럼 아예 사려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안다. 평가 제도를 도입하고서부터는 더 더욱 고독하다. 동료들끼리는 똘똘 뭉쳐 모두 최고점을 매기면서 기관장 평가는 최고점을 주는 것에 더러 인색하다. 하긴, 나도 교사시절에는 내 반 아이들 일만 보였고 교감, 교장의 일은 보이지도 않았다. 부장교사 시절에는 내가 맡은 부서 일만 보였고 교감시절에는 학교의 현상적인 일만 보였고, 교장이 되고서야 비로소 교육이며 전체 학교일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자리가 생각을 키우는 것 같다. 교육장이 되고 교육감이 되고 교육부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된다면 그에 따라 보이는 범위도 더 넓어지고 생각도 더 크게 하게 되리라. 지금의 나도 별 수 없이 내가 선 이 자리에서만 하는 생각이겠지만 기관장은 늘 고독한 존재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정년을 맞아 홀가분하다며 떠날 채비를 하는 선배 교장들을 보면 나는 아직 시지프스의 신화를 행복한 상상으로 옮겨놓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마음을 다잡는다. 교육부장관 표창의 학교 상을 받아도 영예는 교직원들의 몫이고 모든 책임은 교장의 몫이기에 혼자 책임지고 판단해야 할 일들로 잠 못 드는 밤이면 시지프스 신화를 행복한 상상으로 옮겨보려고 스스로한테 최면술을 건다. 그래도 고독하면 밤하늘의 별을 본다. 그럴 때는 유난히 반짝이는 별빛이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사랑이 빛으로 반짝이는 양 연민을 느낀다. 때로는 하늘 높이 매달려있는 초승달을 흔들 그네 삼아, 잠 못 드는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저 그네에 태워 하염없이 흔들어주며 위로해주고 싶은 밤을 지내기도 한다. 비록, 절벽 위로 애써 끌어올린 바위가 굴러 떨어지더라도 또다시 끌어올려야만 한다는 신념으로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하며 아픈 허리를 곧추세운다. 내 허리가 절벽 밑 바위에 깔릴지라도 우선은 내 깃을 둘러 세워 보살펴주어야 하는 학생들과 동료 직원들이 있기에 나는 마음대로 주저앉을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자리의 인간이니까.(13.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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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게재되는 교장선생님의 글은
교장으로 하는 일이 힘들어 혼자 깊어지고 싶을 때,
무심히 지나쳐버린 나의 시간들을 찾고 싶을때,
교직자로 살아 온 이야기 속 감동을 선물 받고 싶을 때
위로를 주는 글입니다.
삶의 온기를 가슴속까지 베어들게 하는 위로요.
- 변상련 · 대구대곡초등학교 교장-
교직자의 청렴을 넘어선 베풂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처럼 한 줄기 물이라도 처지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청렴에 대해 말하다 보면 공직자들은 민감해진다. 전직 대통령이 몇 백억의 비자금을 어떻게 했다느니, 대 기업 총수가 몇 천억의 자금을 어떻게 했다느니 하는 뉴스를 들으면 그러려니 하게 되지만 교사가 십 만원의 상품권을 받았다는 뉴스는 같은 직종에 있는 교직자를 부끄럽게 하고 슬프게 한다.
왜일까? 교직자는 대통령처럼 높은 직위도 아니요, 기업가처럼 많은 부(富)도 없지만 선생님이라는 이름 자에 명예를 걸고 살기 때문이다. 적어도 ‘선생님’은 청렴이라는 덕목을 지킴은 기본이요. 나아가 제자들한테 베풀며 살아야 하는 직분이라고 스스로들 자부하고 있다.
그래서 축의금이나 조의금 주고받기도 조심스럽다.
전직 교장 이야기다. 아들을 호주에서 장가 들이게 되었다는 사연과 함께 축의금은 일체 사절한다는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축의금을 받았기에 되갚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보냈는데 황태를 사서 우편으로 보내왔다. “호주에서 장가를 들여 예를 어떻게 차릴까 걱정이 큽니다. 황태를 사 보냅니다. 여름이라 냉장고에 넣어두고 드시면 좋다고 합니다. 조품이지만 저희 부부 정성이니 받아주십시오. 김형경 올림”
축의금보다 더 비싼 답례품을 받으니 오히려 폐가 된 것 같아 당황하였다.
조의금을 사절하는 분의 예를 든다. 모친상을 당했다기에 조문을 갔는데 교육계의 거장이라 방명록엔 각계각층의 조문객 이름이 즐비하였다. 하지만 조의금은 일체 사양하였다. 그 분 이전에도 교육감 자리에 계셨던 모든 분이 청렴하셨겠지만 근간에 대구시 교육청이 청렴도 평가에서 일등급을 받은 공로에 우직한 동료애의 기운이 느껴지는 그 분의 함자가 다시 읽혔다. 어쩌면, 세상이 많이 맑아졌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가 청렴 기류로 흐르는 탓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남들이 너나 없이 받는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사양하는 것은 사회 분위기 이전에 우직하고 청강스러운 성품 탓이리라. 아는 이 가운데도 그런 친구가 있다. 어린 날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38년간 교단생활을 하며 스무 권의 책을 썼지만 인세나 강의료 따위는 생활비에 보태지 않고 어려운 둘레에 되돌리며 살고 있다. 이렇듯, 사회 분위기가 어떠하든 간에 청강스럽게 산 사람들은 죽고 나서도 빛살 되어 우리들 기억 속에 따스하게 남아 있다.
30년 전, 시골초등학교에서 정년퇴임한 권덕암 교감선생님 생각이 난다. 암을 앓다 문상의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아는 사람의 전화번호나 주소를 불태워 버리고 돌아가셨다. 승진의 기회도 동료한테 양보한 분이다. 후배교사가 과학실험경연대회 준비물로 가운을 못 챙겨 허둥댈 때 아들 병원까지 가서 가운을 빌려와 건네주며 격려해주는 따위로 자상하고 청렴하여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분이었다. 안부 차 찾아갔다가 넉 달 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미어지던 기억이 난다.
한 분은 돌아가신지 십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개똥이네 집』월간 잡지에서 ‘이오덕 다시 보기’로 그 분의 인품에 대해 글을 올리고 있다. 그 잡지에서 불우시설에 근무하는 분이 쓴 글을 읽었다. 선생님이 말년에 교직을 떠나 글 쓰는 일만 했지만 보내는 사람 주소 없이 선물이 오면 불우 시설에 조심스럽게 갖다 주고 가셨단다.
이것은 ‘선천성 구제 불능 선비병’이나 ‘청렴병’이 아니다. 공직자나 교직자로서 직분을 다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앞선 삶으로 누구를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으리라. 다만 보편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기본 도리로 한 점 부끄럼 없는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서일 뿐이리라. 주위를 둘러본다. 오늘도 내 친구는, 아버지 없이 사는 제자가 수상한 사람 때문에 불안해해서 사비로 그 집에 CCTV를 달아주고 왔다.
이렇듯, 청렴을 넘어선 베풂은 은밀히 숨어서 행해진다. 교직자 뿐 아니다. 우리 이웃 모두가 윤동주님의 「서시」가 아니더라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며 죄 짓지 않고 나누며 살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서로 다른 가치가 함께 있는 사회이긴 하지만, 뉴스에 보도되는 안 좋은 사건을 접할 때는 진위를 따져봐 주며, 그 사람이 속한 집단 전체를 부정의 집합체로 보는 편견은 버려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그래야만 우리가 사는 사회가 나날이 밝아지고 자신의 삶 또한 나날이 즐거워질 수 있을 테니까.(13. 6. 7)
♠ 카톡 한 마디♥
• 늘 청렴을 강조하고 학부모로서의 바른 자세를 알려주시는 덕택에 마음은 가벼워지지만, ‘그래도 되는가?’라는 의문은 항상 남습니다. 과하지 않게, 학부모 처지에서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싶지만, 과해지고, 내 아이만 생각하는 몇 몇 모양새 나쁜 작은 문화가 이런 순수한 것들을 어렵게 하지 않나 싶습니다. - 김기범의 학부모 -
• 청렴은 이제 우리사회에서 당연시 되는 것 같아 기분 좋습니다. 투명한 물처럼 맑은 경영을 하면서 베풀고 나누어주시는 교장선생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 김기석의 엄마입니다. -
• 오늘 힐링 연수에서, 청렴한 교사는 어떤 학부모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교직 생활 마치는 날까지 청렴한 교사가 되고자 다짐해 봅니다.
- 김진솔 · 유치원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