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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천성을 다녀오다/구채구,황룡
<2010.6.5~6.10>
여러번 벼루던 중국 사천성여행이 드디어 6월5일부터 4박6일간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천성(四川省)은 유명한 사천요리,펜더와 대나무,그리고 삼국지연의의 촉나라 수도인
성도가 있는 역사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관광여행사 상품으로는 구채구와 황룡,낙산대불,
아미산 등의 지명이 훨씬 우리에게 더 익숙해져 있다.
금년도는 워낙 날씨의 변덕이 심해 봄철날씨를 가늠할 수 없어 일부러 늦은봄,아니 초여름이라
할 수 있는 6월초로 날짜를 잡았다. 3천m가 넘는 고지대이니 의외로 추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날씨란 그 어떤 요소 보다 중요하다.
6월5일 저녁6시 인천공항에서 노랑풍선 카운터에서 전원이 모였다. 우리일행 10명과 다른 일행
6명(3쌍의 부부)이 한팀을 이루어 이번 여행을 하게 된다. 아시아나편으로 8시정각에 떠난 항공
기는 3시간반만에 성도공항에 도착했다. 허명순 가이드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자그마한 키의
여자가이드는 노련하고 숙달된 솜씨로 이번 여행의 총체적인 안내를 해 주었다. 호텔까지는 40
분이 소요된다. 아마도 우리일행의 나이를 감안해서인지 여행의 난이도를 비교설명하였다.
특히 황룡코스는 해발 4천m가 넘는 고산이라 고소증 때문에 고생할 수 있다고--
이번 구채구,황산,아미산코스는 황산이나 장가계 보다는 더 어려운 코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실크로드나 티벹코스는 이 보다 더 어려운 코스로 소개했다.
사천성에 대해 미리 사전지식을 얻는다.
중국은 4개 직할시,5개자치구,23개의 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구는 13억으로 알려져 있다.
사천성은 23개성의 하나로 면적은 491천평방km, 인구는 8,400만명이니 그 규모가 엄청나다.
성도 인구만 해도 1천만명이 넘는다. 분지로 아열대게절풍이 불며,연평균 기온이 16도이나,한여름은
40도를 넘긴다. 그래서인지 매운 음식을 좋아하며 산초 등을 통채로 넣어 얼얼한 음식을 즐겨 먹는다.
농사로는 밀과 유채농사를 하고 2모작을 한다. 등소평의 고향이 이곳 광안이다.
황룡(黃龍)관광
6월6일(일) - 관광1일차
여행 첫날이다. 호텔(喜碼拉雅大酒店)의 아침 모닝콜이 5시. 첫날부터 강행군이다.
아침식사는 도시락으로 성도공항에서 간단히 먹고--
오늘의 관광지는 해발 4000m까지 가는 황룡관광이다.
성도공항에서 국내선을 타고 구채구로 가서 다시 버스로 황룡까지 2시간가량 이동해야 한다.
아침에 비가 내렸다. 비까지 왔으니 해발이 높은 고산지대라 옷을 두껍게 입으란다.
여름 얇은 옷이지만 있는대로 다 껴입고 나섰다.
7시40분발 비행기로 구채구에 도착하니 8시30분. 황룡까지는 버스로 2시간을 달린다.
구채황룡공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공항(해발3500m)이다. 공항 자체만으로도 고
소증세를 느낄 수 있다. 공항에 구채구황룡여행의 가이드(김운룡)가 나와 있었다.
구황공항은 장개석이 군사기지로 사용하던 공항이었으나 지금은 관광여행객을 실어나르
는 큰 몫을 하고 있다. 햇볕이 나면 20도 이상으로 오르나 지금 기온은 6~9도까지 내려가
있단다. 날씨변화가 변화무쌍한 곳이다. 백두산의 열배나 더한 곳이라고-
구황공항에서 황룡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천주사(川主寺)마을에 들러 장족과 강족의 공예
전시장을 구경하고 이곳에서 아예 이른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천주사(川主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관계로 마을이름도 천주사가 되었다.
장족부락이 현존하는 마을로 KBS에서 천장(天葬)과 조장(鳥葬)을 이곳에서 찍어 방영한
일이 있다.차마고도가 30분 거리에 있다고 한다. 이곳 장족들이 사는 집은 마치 사찰같은
집을 짓고 살며 집도 사람도 화려하게 단장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모두 티벹 라마교를 믿
는다. 비취원석을 좋아 하는데 집의 주춧돌을 비취원석으로 사용한다. 집을 지을 때는 나
무기둥과 주춧돌을 먼저 쌓고 나중에 벽돌로 채워 완성한다.
먼저 박물관이라고 소개하는 장강공예전시장으로 갔다. 장강이란 장족(藏族)과 강족(姜
族)을 의미하고 이곳의 자랑거리인 천주석(天主石)으로 된 보석류를 전시판매하는 곳이
다. 전시장을 나와 이곳 천주사 향토요리를 하는 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시간이 11시도 안된 시간이지만 워낙 이른 아침에 도시락으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했기 때
문에 배가 고팠다. 이곳의 해발이 3000m라고 한다. 가져간 쵸코파이와 믹스커피가 팡팡
하게 부풀러 있어 처음보는 일행들이 신기해 했다.
이른 점심식사후 버스로 40km나 되는 험준한 산길을 1시간30분이나 달렸다.
버스안에서 가이드는 연신 고소증세에 대한 예방법을 설명했다. 고산지대에서는 무조건
천천히, 그리고 잠간씩 쉬면서 걸을 것. 말을 적게 하고 담배는 절대 피우지 말 것. 고소증
에 대비한 예방약을 먹고 고소증세가 오면 산소통의 산소를 마실 것.무엇보다 자신감을
가질 것 등이다. 예방약은 2병을 미리 마셨다. 산소통을 한통씩 지참하고-산소통은 산소
마스크로 40회 정도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각각 10불씩이다.
12시40분 드디어 황룡 매표소입구에 도착했다. 황룡이라는 멋진 한자글씨를 보는 것만으
로도 감격스럽다. 황룡입구에서 단체사진을 남겼다. 황룡은 1992년 구채구와 함께 세계자
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중국속담에 "산을 보려면 황산을, 물을 보려면 구채구를 보라"는
말이 있다. 구채구보다 고지대에 있는 황룡은 오르기가 힘들지만 그만큼 최고의 아름다운
물구경을 할 수 있다. 특히 오채지의 다섯빛갈의 물색은 황홀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
예전에는 케이블카가 없어서 2시간이상을 걸어서 올라야 했지만 2006년에 케이블카를
설치한 후로는 쉽게 오를 수 있다. 케이불카로 5분가량 타고가면 여기서부터 계단길을
1시간 가량 걷게 된다. 나무계단이 잘 설치되어 있고 계단 옆에는 예쁜 야생화들이 고개를
내밀고 반긴다. 이런 고지대인데 울창한 삼림이 이토록 잘 자랄 수 있나?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아~ 여기는 위도가 아열대지구이구나-하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4800m까지 올라본 경험이 있어 자신만만했던 것이 도리어 탈이었다. 마치 술취한 사람
처럼 걸음걸이가 정상이 아니었다.급히 산소통의 산소마스크를 마시며 천천히 걸으니 안정이
되었다. 800m마다 무료산소 공급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스크이용료가 1元이다.
미리 준비해간 스틱도 도움이 되었다.
드디어 전망대가 나왔다. 단체사진을 수시로 남겼다. 인원이 많지 않아 사진찍기도 쉽다.
10명 이내가 역시 통제하기가 쉽다. 드디어 나무 사이로 파란 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더 가니 황색비탈에 물이 흘러 황색연못이 된 그위로 나무다리를 지나게 만들어 놓았
다. 黃龍風景區全景圖 앞에서 관람코스순서를 설명해주었다. 五彩池를 왼쪽으로 시작하여
구경하고 설보장입구(4010m)까지 갔다가 黃龍古寺를 거쳐 계단을 따라 하산하면서 계속되는
연못과 다리를 구경한다. 映月彩池,黃龍中寺,接仙橋,宿云橋,爭艶彩池,紫夢映彩池'
明鏡倒彩池,盆景池,金沙灘池,蓮台飛瀑,飛瀑流輝,迎賓池의 순서로-
맨 위쪽의 오채지(五彩池)는 황룡의 백미라 할 수 있었다. 다섯색의 빛깔을 구경할 수 있는데
특히 가을 단풍철의 오채지는 최고의 절경이라 한다.
옥색빛갈의 물이 이처럼 아름다운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오채지를 돌아가다 보면 설보정
이라는 해발5588m의 설산입구가 나온다. 오채지의 설보정이라는 명패가 붙은 지점은
해발 4010m로 오늘 우리가 오른 중 최고로 높은 곳이다. 황룡에는 사찰이 두개 있다.
오채지 곁에 있는 황룡古寺 그리고 접선교 위쪽의 황룡中寺가 그 것이다. 모두 도교사찰이다.
오채지를 돌면서 호수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감상하였다. 나뭇가지와 뿌리가 물속에 비쳐
환상적인 그림을 만들기도 하고, 맑은 물속에 산과 구름,나무들이 비쳐 대칭을 만드니 더욱
신비롭게 보인다.
맑은 거울속을 들여다 보듯 거꾸로 비친다고 이름지어진 명경도채지(明鏡倒彩池),화분속의
물경치를 보는 것 같은 분경지(盆景池)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飛瀑流輝의 폭포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벌써 시간은 6시가 가까워 온다.
버스주차장에서 구채구의 숙소까지는 무려 80km로 3시간이상이 걸린다. 가는 도중 버스는
물급유를 해야한다. 수년전 운남성 샹그리라로 가던 생각이 난다. 높은 곳으로 달리는 버스는
열이 많이 나기 때문에 가는 도중에 물로 엔진을 식혀야 한단다. 주유가 아니라 주수(注水)를
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관광객들은 신기롭기만 하다. 줄을 서서 주수를 하니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호텔에 도착하니 9시20분. 점심을 일찍 먹은데다 저녁이 늦으니 몹시 시장하다.
호텔에서 늦도록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5성급호텔인 新九寨賓館은 피로를 풀 수 있는 고급
시설을 갖추고 있어 아주 만족스러웠다. 침대밑에 전기장판을 깔아 서 등어리가 뜨뜻하니
편히 잠잘 수 있었다. 내일 아침도 바쁘다. 6시30분 모닝콜이다.
구채구(九寨溝)관광
6월7일- 관광 2일차
어제에 이어 오늘은 하루 온종일 구채구 물구경이다. 워낙 구경할 량이 많은지 아침 일찍
서둔다. 구채구는 호텔에서 차로 10분거리의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침 일찍 왔는데도 벌써
관광인파가 대단하다. 관광객의 80%가 중국 內地사람이라더니 역시 시끌시끌하다.
티켓을 끊는동안 대형화면으로 비춰주는 구채구 풍광에 넋을 잃고 보고 있다.
중국에서도 노인은 우대하는 모양이다. 60세이상은 할인이 된다고 한다. 표를 나눠주고
입장을 했는데 마지막 젊은이가 노인표를 갖고 있어서 문제가 되어 한참 해명하느라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어쨋든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에도 경노우대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구채구라는 명칭은 장족의 9개의 마을이 있는 계곡을 뜻한다. 자여채, 반신채, 화엽채,
흑각채, 반아채, 고와채, 수정채, 칙사와채, 일칙채 이중 화엽채는 구채구가 시작하는
입구의 첫마을이다. 수정채가 두 번째 마을로 민속문화가 풍부한 마을이다.
구채구는 1992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자연유산으로 지정받고, 세계생물환경보호구로
그리고 국가중점풍경명승구로 지정된 60년의 역사를 가진 최고의 명승지이다.
주말이 아닌데도 관광객이 워낙 많아 요령껏 시간계획대로 움직여야 했다. 구채구는 Y자
형태의 세개의 구로 나누는데 왼쪽 상류의 '측사와구' 우측 상류의 '일칙구(日則溝)'
그리고 아래쪽의 '수정구'로 나뉜다. 구채구 안에서는 이곳 자체의 셔틀버스로 이동을 하게
된다. 우리는 먼저 우측상류인 일측구로 직행하여 위에서 아래로 이동하면서 구경하기로
하였다. Y자의 가운데에는 낙일랑폭포가 있고 큰 식당이 있어서 구체구에 들어온 모든
관광객은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일직구가 역시 제일 예쁜 코스이며 46개의 호수로 이어진다. 위쪽의 백조호,팬더호로부터
구경을 시작하였다. 날씨가 너무 좋다. 어제밤에 비가 쏟아져 걱정을 많이 했는데 햇볕도
없고 비안개도 없어 시계가 좋고 관광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이다.
영화 "영웅"의 배경이 된 호수로 유명한 펜더호를 지나 구채구의 정수(精髓)라 칭해지며
가장 아름답다는 오화해(五花海)에서 많은 사진을 남겼다. 물밑의 나뭇가지가 너무 아름답다.
마치 예술작품으로 만든 것 같다. 맑은 물속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다. 석회질 물에 사는
물고기도 있나보다. 공작새 목부위를 닮았다는 공작해도 아름다운 호수이다.
진주탄폭포와 진주탄호수에서 휴식시간을 가졌다. 이곳은 영화 서유기를 촬영했던 명소로
알려져 있다. 구채구의 모든 격류(激流) 중에서 물빛이 가장 아름답고 물살은 가장 거세며,
물소리도 가장 큰 구간이다. 폭포의 폭은 200m, 낙차가 가장 큰 부분은 40m에 달한다.
골짜기 밑으로 내려온 폭포수는 황색과 녹색이 서로 섞여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평해지는 곳이다. 진주탄에서 바로 이어지는 경해(鏡海)는 길이 925m의 폭이 좁고
긴 일직구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경해[镜海]에는 길이
20~30여m의 많은 나무들이 있는데, 반은 수면 위에, 그 나머지는 물 속에 잠겨 있는 형태
이다. 호수에는 라어라고 하는 비늘없는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한달에 한두 번 보기도 힘든
다고 한다. 장족의 조상이 물고기로 출발한다는 믿음 때문에 중요시 한단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 낙일랑폭포에 도착했다. 낙일랑센터에는 대형식당이 있어 모든 단체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식사를 하게된다. 뷔페식으로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관광객을 대상으
로 상품쇼핑가게들이 활기를 띄운다. 이곳 특산품인 직물,가죽,뿔로만든 빗,조각품,공예품
들이 즐비하다.
오후 코스는 다시 좌측 측사와구의 상류인 장해(長海)로 가서 셔틀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관광이 시작된다. 차로 오르는 동안 바깥으로 보이는 계곡은 전혀 물이 없다.
일직구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정상쪽의 장해(長海)는 해발 3100m에 위치한 구채구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또한 가장 큰 호수이다. 설산의 눈이 녹은 물이 큰 호수를 이룬 것
이다. 장해는 "어머니바다"라고 칭해지는데 이곳에서 아랫쪽으로 물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장족의 고유한 민속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넓직한 바닥에 많은 장족 여인들이
같이 사진찍기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한번 찍는데 20元, 여러번 마음대로 찍을 수 있는 경우
30元으로 되어 있으나 비공식적으로 그 반값보다 더 낮은 가격을 부르고 있었다.
구채구에도 오채지가 있다. 황룡의 오채지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선녀와나뭇꾼 얘기의
선녀가 목욕을 한 곳이라 할 정도로 물이 맑고 깨끗하다. 한 호수에서 다섯가지 영롱한 빛이
뿜어나온다는 오채지(五彩池)에서 버스를 타고 낙일랑까지 와서 그곳에 있는 민속마을의
전통가옥인 五好文明家庭 구경을 하였다.
관람료가 없는 대신 각종 약재를 동시에 판매한다. 구채구 안에서는 장족만이 장사허가가
난다고 한다. 집집마다 장대에 깃발이 매달려 있는데 3색의 깃발에는 라마교 경전이 빽빽히
적혀 있다. 글을 몰라도 경전을 바람이 불어 전달된다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한다.
또 직접 손으로 돌리는 경전통도 있어서 읽지 않고도 돌기기만 하면 읽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장족만이 갖는 믿음의 지혜가 아닌가 한다.
예전에는 구채구 안에 여관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정비하여 숙소는 없고 촌장집을 공개
하고 있다. 장족들의 主食은 야크고기와 야크우유이다. 아침은 야크우유로 만든 수유차가
필수이다. 장족의 평균수명이 86세라고 하니 장수의 비결을 찾아 봄직하다.
구채구에는 말 그대로 장족마을이 9개가 있는데 그 중 3개가 개방되어 있다.
민속가정방문을 마치고 Y자의 가운데 부분인 낙일랑(洛日朗)폭포부터 수정구쪽으로 내려
가면서 관광을 시작하였다. 낙일랑폭포는 낙차 20m, 폭이 폭포중 가장 널은 320m에 달한다.
종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남자의 거시기폭포라고도 통한다.
이어 나오는 서우해(犀牛海)는 구채구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로 길이가 2km에 이른다.
九寨沟계곡의 4대 폭포 중 가장 작은 폭포인 수정폭포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호랑이바다
라고 불리는 노호해(老虎海)에서 흘러내린 물이 작은 폭포를 이룬다. 폭포 맞은편에 장족의
마을인 수정채가 있다. 이어 마치 용이 누운 모습을 연상케 하는 와룡호가 있고
또 불꽃바다로 불리는 화화해(火花海)는 석양이 질때 일렁이는 물결에 비친 햇빛이 마치
불꽃을 연상하게 한다고 한다. 버스로 모위해,갈대해를 지나 마방에 이른다.마방은 수력
터빈을 이용한 제분소이다. 흐르는 물을 이용한 마방(磨房)은 지붕과 벽체의 아름다움으로
많은 관광객의 시선을 끈다. 마지막으로 본 분경탄(盆景灘)은 수심이 0.8m로 가장 아랫쪽
하구에 위치하여 버드나무,갈대 등이 숲을 이루며 마치 분재숲을 연상케 한다
이틀간의 트레킹으로 피로해진 발을 맛사지로 푸는 시간이다. 저녁식사전 전원이 발맛사지
를 받으러 갔다. 어설픈 중국어를 해가며 한시간동안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남자는 여자
아이가 여자는 청년이 맛사지를 맡는 것도 희한한 불문율로 되어 있다.
저녁식사는 옵션으로 선택한 양고기 바비큐장으로 갔다. 버스가 도착하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식구 전원이 나와서 노란 목걸이를 걸어주며 노래와 춤으로
환영해 주었다. "짜시털러"를 연발하면서-- 일이 번성하기를 빈다는 인사말이란다.
우리도 계속 '짜시털러"를 연호하면서 입장했다. 큰 회의실 같은 실내에 앰프로 음악을 틀어
놓고 수유차,청과,빼주,청과주,청과빵,야크고기와 구운 감자가 나왔다. 바비큐한 양고기를
머리에 이고 나와 의식을 갖춘다. 먹는 동안 식구들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다)이 차례로
나와 고유한 전통음악과 춤으로 분위기를 돋운다. 우리도 전원이 나가서 춤으로 한마당을
이루었다. 양고기가 너무 구워 양고기바베큐는 불만이었지만 워낙 열성적으로 춤과 노래를
끝없이 봉사하여 미안할 정도였다. 앵콜송은 박수를 치며 외치는 "야호 야호 야야호 얘 얘"를
연발하면 되었다. 참 재미있고 즐거운 밤을 보냈다. 마지막 헤어지는 차를 전송하는 그 가족
들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여행 사흘째의 밤도 깊어만 간다.
구채구의 숙소인 신구채빈관(新九寨賓館)에서 편한 밤을 보내고 오늘은 성도로 돌아가는 날이다.
구황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한시간이 안 걸린다. 10시경에 성도공항에 도착하니 첫날 우리를
안내했던 허명순 가이드가 반갑게 맞는다.오늘도 일정이 빡빡하다.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임금
유비의 능과 제갈공명의 사당이 있는 무후사부터 관람해야 한다.
향후 계속되는 일정소개가 있었다.
무후사박물관을 구경하고 점심은 사천요리로 준비되어 있단다. 오후에는 두시간 정도 떨어져 있
는 낙산시로 옮겨 그 유명한 낙산대불을 유람선으로 구경한다. 그 뒤 아미산까지 버스로 옮겨 아
미산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잔뒤, 중국 불교의 4대성지라 일컫는 아미산을 찾는다.
아미산은 3000m가 넘는 고산으로 케이블카로 오르게 된다. 다시 성도로 돌아와서 야간에는 사천
성 오페라라고 하는 천극(변검쇼)을 관람하고 성도의 관광거리로 유명한 금리(錦里)를 구경한뒤
밤 12시 비행기로 귀국길에 오른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새벽이 되므로 하룻밤을 비행기 속에서
보내게 되고 그래서 4박6일이 되는 셈이다.
성도 무후사(武候詞)/낙산 낙산대불 관광
6월8일(화)- 관광3일차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관우,장비,조자룡 그리고 제갈공명이 살아 숨쉬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
는 성도 시내의 무후사(武候詞)를 찾았다.
무후사란 일반적으로 제갈량을 모시는 도교 사당을 말환다. 무후라고 하면 보통 제갈량을 말한다.
명나라 때 유비를 이곳으로 모셔오면서 촉나라의 승상 제갈량과 그 임금 유비를 함께 모신 사당이
되었다. 한소열묘(漢昭烈廟)라고도 한다.
보통 군신을 같이 모시지 않은 관례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무후사의 무후란 충무후(忠武
侯)라고 시호가 내려진 제갈량을 말하고, 그를 모시는 사당을 무후사라고 한다. 그러나 후세의
삼국지나 삼국지연의 등에서 제갈량 이외의 촉한의 무장이나 가신,또한 촉의 임금인 유비나 그의
후대를 이은 유선까지 모시게 되었다고 전한다. 유선의 제위는 나라를 말아먹은 어리석은 군주라
고 하여 남송 때 폐사(廢祀)시켜 버렸다. 서기 223년 유비의 능묘가 조성되었다.
현재와 같이 제갈량과 유비를 같이 모시는 사당으로 정비된 것은 명조에 이르러서이다.
현재 남은 옛날 건축물은 청나라 1672년 강희대제때 조성된 것으로 330년의 역사를 가진다.
성도 무후사 박물관으로 발전되고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사당 내에는 관우,장비 등의 촉한의 무장들의 상이 나란히 있고, 내부에는 제갈량의 소상이나
유비의 소상이 있다. 모두 후세의 작품으로 삼국지연의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이다.
2003년도부터 한국비행기가 성도에 취항하고 2005년도에는 모든 설명문이 한글로도 표기되어
한국관광객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사당 내부에는 촉한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상징하는 토우가 41점에 달한다. 토우들은 청대의 조각
가들이 만들었으며 촉한의 군신서열에 의하여 배치되어 있다. 이밖에 당비(唐碑)는 사당내의 중요
한 문화재 중 하나이다. 이 비석에는 제갈량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당 헌종 4년
(809)에 세워졌는데, 명재상 배도가 글을 짓고 서예가 유공탁이 비문을 썼으며, 명공인 노건이
각문하였다. 이를 일러 명대에 이르러 삼절비(三絶碑)라고 하였다.
명량천고(明良千古)라는 현판을 지나며 명자가 밝을명의 날일(日)이 아닌 눈목(目)변임을 보면서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밝은 눈 즉 인지(人智)의 명군으로 유비를 뜻하며 良은 선량한 신하 즉 제갈
공명을 뜻한다."임금이 밝고 신하가 착하여 천고에 수범이 되었다"라는 풀이이다.
이곳을 지나면 유비전이 나오는데 양쪽에 유선과 손자 유심의 상이 있었으나 유선은 없어지고
유심의 상만이 남아 있다. 좌우 회랑에는 문무백관들의 입상이나 좌상을 배치하여 놓았다.
명랑천고 햔판문 옆 회랑에는 그 유명한 악비(岳飛)의 전,후 출사표가 전시되어 있다.
송나라 악비의 친필로 된 출사표는 제갈량이 유비가 죽은 후 어린 유족 유선을 보필하여 오나라와
손잡고 위나라와 싸우기 위해 출전할 때 올린 글로서 이 글을 읽고 울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하는
천고의 명문이다.
무후사 정전 서쪽에 유비묘인 혜릉(惠陵)이 있다. 유비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펑제현[奉節縣]
의 영안궁(永安宮)에서 병사한 뒤, 5월에 시신을 청두(成都)로 옮기고 8월에 혜릉에 매장하였다.
후주(後主) 유선(劉禪)은 제갈량(諸葛亮)의 뜻에 따라 유비의 부인 감씨(甘氏)와 오씨(吳氏)의
유골도 합장하였다. 원추형의 능묘는 높이 12m, 둘레 180m로 작은 구릉처럼 보이고, 수목이 울
창하고 잔디가 푸르러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짙다. 역대 중국 황제의 묘 중에 가장 규모가 적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삼국문화진열 전시관을 관람하였다. 적벽대전의 현장감을 느끼며 1800년전으로 역사
가 되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당시의 도자기와 돌조각품들이 진열되고 삼국 당시의 인구를 추계한
것이 있어서 흥미를 돋구었다. 소설에서는 100만 대군이란 숫자가 자주 나오지만 위나라의 경우
당시 인구가 443만이고 병사수는 20~50만이었다고 한다. 오나라의 경우는 230~240만 인구에
병사는 15~20만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촉의 경우는 전 인구가 90~94만명으로 병사는 불과 8~12
만명이라고 하니 얼마나 과장된 숫자인지 짐작이 간다.
무후사에서 삼국시대 촉나라의 역사공부를 한 뒤 중국 사천요리 전문식당으로 갔다.
"진마파식당"에서 마파두부 등 두부요리의 진수를 맛보았다. 오후는 낙산시로 가야 한다.
낙산대불(樂山大佛)
성도에서 사천요리로 점심을 마치고 낙산대불을 보기 위해 낙산시로 향했다. 낙산까지는 130km
로 2시간이 걸린다. 낙산시는 1978년에 시로 승격하였으며 인구는 광역으로는 350만 명 정도이
고 시구의 인구는 113만 명을 넘는 작지않은 도시이다. 성도와 낙산대불은, 같은 방향의 아미산
을 잇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므로 편한 여행을 할 수 있다. 4차선의 고속도로는 도중에 보수공사가
곳곳에 펼치고 있어 예정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도로 양 옆으로 펼쳐져 있는 시골 모습은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대부분의 논은 모내기가 끝났으나 간혹 늦은 모내기 모습도 보였다.
가는 도중 고속도로변의 천복산(天福山)차농원에 들러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녹색평야를 보며 차는 계속 달려 러산(낙산)시가지로 들어섰다.
낙산시는 낙산대불과 인근의 아미산의 관광객들 수입이 큰 비중을 이루나 주업은 농업이다.
그리고 대나무가 많아 죽순의 고장이기도 하다. 사천성의 촉남죽해(蜀南竹海)는 중국이 지정한
국가중점풍경명승구로 120평방km나 되는 150여종의 대나무 산지이다. 촉남죽해는 촉나라 땅
으로 운남성과 붙은 사천성 남쪽의 자연산 대나무 바다라는 칭호이다. 대나무 하면 죽순을 먹고
사는 사천성의 상징 펜더가 연상된다. 펜더의 80%가 이곳 사천성에 살며 야생의 수명은 15년,
생육 펜더는 20년까지 산다고 한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고 얼마 안 있어 낙산대불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민강[岷江] 강가에 있는 링윈산 서쪽 암벽을 통째로 잘라내 새긴 마애석불로서, 713년 창건된
링윈사의 본존미륵불이다. 불상의 규모는 높이 71m, 머리 너비 10m, 어깨 너비 28m이다.
당나라 때 승려 해통(海通)이 배가 안전하게 지나다니기를 기원하여 조각을 시작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지앤난[劍南]의 절도사 위고(韋皐)가 90년에 걸쳐 완성(813년)하였다.무려 1200
년의 역사를 지닌 석불로, 21년간 정권을 잡았던 당나라 측천무후가 유별히 불교를 숭상하고 석
불의 대역사를 많이 이루었다.
조각 당시에는 금빛과 화려한 빛깔로 장식하였고 13층 목조 누각으로 덮어 보호하였으나, 누각
은 명나라 말기에 불에 타 없어졌다. 1994년 유네스코에서 아미산[峨眉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
으로 지정하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낙산대불의 위용을 직접 바로 앞에서 보니 과연 대단하였다. 세계최대의 석불로
서만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실물 앞에서의 느낌은 도저히 표현이 어려운 탄성과 감동의 장이었다.
유람선은 대불 앞에서 사진을 찍을 충분한 시간동안 멈춰 서 있었다. 낙산대불을 친견하는 걷는
코스도 있고 배로 타고 가서 유람선 위에서 보는 방법도 있는데 두가지 방법 모두 장단점이 있다.
멀어져가는 대불을 자꾸만 뒤돌아보며 아쉬운 작별을 하고,원래의 승선장으로 돌아왔다.
낙산대불이 있는 뒷산에는 하얀 영보탑이 서 있는데 등대역할을 한다. 세 개의 강이 한데로 합류
하므로 등대가 필요하다. 뒷 산은 마치 부처가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역시 화제이다.
머리,배,다리 부분이 명확하여 모두 신기해 하였다. 영보탑이 마치 거시기 같다하여 한 바탕 웃음
을 자아냈다. 90년간 공사를 하면서 큰 사고가 없었다는 것도 부처님의 큰 가피로 여기고 있다.
낙산대불 유람후 잠시 쉬는 동안 이 지방의 특수과일인 "피파"를 사서 껍질을 벗기고 먹어 보았
다. 생긴 것은 우리의 살구 비슷한데 전혀 맛이 다르다. 아미산호텔까지는 고속도로로 1시간
가량 걸린다. 오늘은 아미산 시내의 호텔에서 숙박후 내일 아침 아미산 관광에 나선다.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내일아침 7시 출발하려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야 하지만 룸메이
트와 함께 아미산 시내관광에 나섰다. 호텔 앞에 늘어선 인력거를 흥정하여 1시간동안 시내주요
거리를 돌아보았다. 그다지 큰 도시가 아니므로 1시간동안 계속 인력거를 탈 수가 없다.
아예 인력거코스가 있었다. 먹거리시장(好吃街)과 백화점 그리고 차(茶)가게 등에 인력거를 세우
고 먹거나 쇼핑시간으로 시간을 조절한다. 인력거를 타는 동안 중국어를 요즘 배우고는 있지만
의사소통이 참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이곳의 유일한 5성급호텔로 고급이었다.
아미산(娥眉山) 관광
6월9일(수)-관광4일차
미인의 눈썹같이 아름답다는 아미산 ! 아미산은 성도에서 160km 떨어진 곳에 있다.
아미산 시내에서 숙박을 했던 관계로 시간절약이 많이 되었다. 아침 호텔에서 불과 10분만에
아미산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이드가 티켓을 구입하는 동안 아미산입구에서 모두들 사진
촬영에 바쁘다. 입구 한가운데 현판에 "震旦第一山 峨眉山" 이라는 글자가 시선을 끈다.
일찌기 기원 4세기 때 인도 보장 승려가 아미산을 돌아본 후 "震旦 第一山이로다!"라고 감탄했다.
진단(震旦)이란 태양이 솟아 오르는 곳이라는 뜻으로서 고인도사람들이 중국에 대한 존칭이다.
이로부터 아미산은 중국 제1산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미천하수(峨眉天下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 불릴 정도로 산세가 아름다운 아미산
은 천하기경으로 꼽히며,낙산대불과 함께 전세계 18대, 중국 3대 자연문화유산(1996년)로 지정
된 국가급 풍경명승구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은 "蜀國多仙山 峨眉遡難匹" : "촉국엔 신비로운 산
이 많지만,아미산에 비할 바가 아니구나!" 라고 읊었다. 이렇게 찬사가 쏟아지는 아미산에 대한
기대는 자못 컸다.
또 아미산(娥眉山)은 보현보살의 성지로 관세음보살의 보타산(普陀山),문수보살의 오대산(五臺
山),지장보살의 구화산(九華山)과 더불어 옛부터 중국불교의 4대성지로 숭상되어 온 명산이다.
그래서인지 아미산에는 30여개의 많은 사찰이 있다. 복호사,보국사,만년사,우심사 그리고 정상에
화장사가 있다. 입구로 들어가면서 얼굴사진이 찍힌다. 인원검색을 위한 것이란다. 셔틀버스를
타고 1시간반을 달려야 雷洞坪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오르는 길은 꼬불꼬불한 경사길이다.
아열대에서 온대로 바뀌는 지점이다. 유명한 만년사(萬年寺) 진입로 표시도 보인다.
가는 도중 엔진의 열을 식히는 물주유도 하여 구경거리가 되었다.
버스주차장에 도착전 버스 안에서 검문(사진대조)을 하는데 형식적이다. 험한 구비길을 흔들리며
달려 왔으니 차멀미도 남직하다. 그러나 일행 모두 건강하다. 9시에 샤틀버스 종점인 뇌동정류장
(雷洞坪車站)에 도착하니 날씨가 보통이 아니다. 이곳은 해발 2430m로 기온이 5~10도라고 하니
~ 옷을 껴입느라 야단들이다. 여기서부터 계단길을 걸어서 오른다. 힘에 부친 사람들을 위한
가마꾼들이 즐비하다.다른 곳처럼 흥정을 안해도 정찰제가 잘 지켜진다고 한다.
아미산 원숭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점심때 쯤 원숭이도 배가 고플 때 나
타나는가 보다. 들고 가는 비닐 같은 것을 조심하라고 일러준다. 오르면서 곳곳에 전망대가 있어
풍광을 구경할 수 있고 두견화(진달래)도 보인다. 계단 옆에는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고개를 들고
반긴다. "一路平安 珍愛峨眉山"(즐거운 여행되시고 아미산을 사랑하세요)라는 간판이 곳곳에 보
인다. 트레킹이 끝나는 지점에 케이블카가 기다리고 있다. 케이블카는 정원이 100명을 태우는
대형이다. 불과 3~4분을 타지만 무소음으로 3048m까지 오르게 된다. 안개 때문 만이 아니라 가
득찬 관광객들로 창밖을 볼 수조차 없다. 케이블카를 내려 아미산 보현보살 조각상이 있는 계단
길을 오르게 된다. 보현보살은 항상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 그래서 코끼리 상도 좌우에 늘어서
있다.
3층 10상의 모습으로 서 있는 보현보살 조각상은 높이가 48m인 10방 보현탑으로 무게가 600톤
이나 된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하다. 보현보살상 뒤에 서 있는 절이 화장사(華藏사)로 대웅보전
이다. 즉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는 주 법당이다. 金殿,銀殿,銅殿으로 불리는 것 중 銅전이다.
좌측 은빛 건물이 銀殿으로 와운선원(臥雲禪院)으로 스님들의 참선도량이다. 가장 꼭대기의
금정(金頂)은 3077m의 높이에 서 있는 소위 金殿으로 불리는 법당이다. 금정 앞 전망대는 수천
명이 조망할 수 있는 경관대로 사방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아미산의 4대奇觀이라 불리는 日
出,雲海,佛光,聖燈을 볼 수 있다. 멀리 서쪽을 가로막는 공갈산은 높이가 7556m나 되는 최고 높
은 산이다. 우측에 만불정(萬佛頂)이 보인다. 아미산에서 가장 높은 3099m의 봉우리인데 모노
레일로 가도록 되어 있으나 현재는 공사중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중국 10대 명산의 하나로서 아미산은 평일인데도 불교신자들은 물론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 과연
명산이구나하는 것을 실감케 했다. 약속된 40분간의 구경을 마치고 銀殿인 臥雲禪院 옆 계단길로
내려서니 예쁜 조각상(공동화:珙桐花 비둘기나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야단들이다.
3079m라는 해발 높이가 나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3077m를 3079m로 표기하는 것은 중국사람
들의 심리를 나타내는 것이라나? 중국 일본 관광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사랑의 자물쇠가 여기도
여지없이 나타나고-다시 4분간 케이블카를 탄 다음 셔틀버스정류장까지 계단길을 걸어하산한다.
날씨가 화창하여 주변경관을 감상하기가 좋았다. 이렇게 좋은 날은 1년에 며칠 안된다고 하니 우
리는 큰 복을 받은 셈이다. 일행 중에 3대에 걸쳐 복을 지은 회원이 있을 거라며 모두들 흐뭇해한
다. 여행에서 날씨란 그만큼 중요하다.
셔틀버스 정류장의 식당에서 점심 일정이 잡혀 있었다. 留香閣飯店에서 현지식 중식을 했다.
飯店은 숙식을 같이하는 호텔,식당을 말한다. 별이 두 개 걸려 있다. 누군가 "별두 개가 뭐냐"고
하니 "투스타"한다. 다시 늘 재치있는 언변의 친구가 "이별"이란다. 여성들이 손벽을 치며 좋아
한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하산하면서 만년사 입구에 들렀다. 시간이 되면 동행하고 싶었지만
우리 일정으로는 어렵다. 만년사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동진 때의 절로 1100년의 역사
를 가진 고찰이다.
다음 코스는 아미산 입구쪽에 있는 보국사(報國寺)이다.
보국사는 명나라 만왕 시기(기원1573~1620년)에 세워졌으며, 원래는 복호사 좌측에 있었으나,
청나라 순왕 시기에 현재 위치로 옮겨 지어졌다가 강희(기원1730년)때 재건해 '보국사'라는 이름
을 하사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용주차장인 영빈광장에 들어서면 앞 계단 정면에 인공폭포가 흐르고 좌측엔 震旦第一山
그리고 우측바위엔 峨眉山이라고 황금글씨로 음각되어 있다. 옆쪽으로 아미산박물관이 자리하
고 있으며 天下爲公이라는 손문의 글씨를 비롯한 선인들의 글씨를 바위에 새긴 "고비림(古碑
林)"이 박물관 옆회랑을 따라 늘어서 있다. 청나라 강희황제의 편액 "報國寺"가 걸려있는 문을
지나 산문에 들어서면 좌우 2층 누각으로 종루 聖積晩鐘과 고루 法鼓가 서 있다.
안쪽으로 미륵전,대웅보전,칠불전,보현전,장경루가 산세에 따라 지어져 점차 높아진다.
사원 주위는 청송취백이 빽빽히 우거져 하늘을 가릴 정도이다. 차례대로 구경을 하며 오른다.
특히 칠보전은 장관이다. 전내외와 석란판의 목석 조각 또한 훌륭하여 주목을 받는다.
보국사 관광을 마치고 나니 3시- 이제 다시 성도로 가야한다. 성도에서 저녁도 먹고 성도 시내
금리(錦里)거리 구경도 하고 사천성이 자랑하는 천극도 구경한다. 마지막 밤이다. 자정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밤이기에 그동안 많은 관광을 하느라 피곤도 하지만,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피곤보다는 즐겁기만 하다.
성도(成都)의 밤
성도에 도착하여 라텍스매장에 들렀다가 사천요리 샤부샤브(火锅) 저녁만찬을 먹기 위해 전문
식당에 도착했다. 각종 야채,육류,해물을 자기 취향대로 끓여먹는 사천식 사브사브다.육류도 야
채도 종류가 부지기수다.닭고기,돼지고기,양고기,야크고기,심지어 토끼고기까지-
사천식 샤브샤브의 특징은 매운 맛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가운데는 아주 매운 소스를 제공한
다. 매운 소스에 적셔 먹는 맛은 일품이지만 계속 먹으니 입안이 얼얼하다.
식사를 마치니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낮에 보는 금리(錦里)거리보다 밤거리가 좋다하여 일부러
밤에 찾기로 한 것이다. 금리골목 끝에 오늘 저녁 옵션으로 제공되는 사천 천극이 공연된다.
공연 내용 중 하이라이트는 변검쇼(變臉)인데 얘기만 들은 변검쇼가 크게 기대된다.
휘황한 불빛을 받은 금리(錦里)는 황금같이 찬란하다. 골목안은 수많은 종류의 가게와 야시장
구경을 나온 관광객들로 붐볐다. 금리거리는 Y자로 갈라지는데 한쪽은 식당가이고 다른 한쪽은
상품가게들이다. 사천극을 보고 나올 때 필요한 쇼핑을 하도록 미리 봐두는 것이 시간절약이 되
겠다. 손자녀석한테 줄 선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천의 명물 펜더 인형이 적격이라 생각
되어 미리 가게를 봐 두었다.
사천극 극장에 입장하고 사진촬영을 위해 일부러 앞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땅콩과 뜨거운 차가
나왔다. 사천극이 시작되고 있었다.사천극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변검(變臉)이다.
중국 여행에서 자주 보았던 경극(京劇),쑤저우 지역의 곤극(昆劇)과 더불어 중국3대 전통연희로
꼽히는 사천성 천극(川劇)공연의 한 부분이다. 특별한 기술과 장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천성 출
신 사람에게만 전승되고 있는데 엄격한 심사를 거친 일부 사람에게만 전해진다고 한다.
얼굴에 쓴 가면(假面)이 순식산에 깜쪽같이 변할 때마다 우레같은 탄성과 박수가 나온다.
마술 같기도 하고, 마술이라면 예술성을 훼손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한시간 가량 자유시간을 받아 금리거리를 구경했다. 서울에도 이런 관광객을 위한 야간쇼핑거리
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까 미리 보아두었던 펜더가게에 가서 인형을 샀다.
여기는 무조건 정찰제로 한푼도 에누리가 없다. 외국인에게는 이것이 훨씬 좋다. 에누리가 심한
중국 재래시장 에서는 언제나 바가지 요금이 아닌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어제 아미산 백화점에서 보다 20元가량 싼 것 같다. 말도 못하는 아직 어린 손자이지만 간단한
선물로 숙제를 다 푼 것 같은 홀가분한 심정이다.
오는 날까지 포함하여 5일간의 여행이 끝나는 시간이다. 10시에 성도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밟고 가이드와 작별을 하였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정이 들었다. 여행기를 쓰면 보내주겠다고
명함도 받았다. 밤 12시가 넘어 출발하니 하루가 지난 셈이다. 비행기에서 새벽3시에 밥이 나왔
다. 저녁인가? 아침인가? 잠 한숨 못자는 비행스케쥴이 무리이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인구 8500만의 사천성--광대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천성, 촉나라의 수도 성도의 역사
탐방도 하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오색찬연한 물빛갈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던 황룡과 구채구--
세계최대규모의 석각 미륵불, 낙산대불의 감동도 좀처럼 잊지 못하겠다. 더구나 중국 제1의 아름
다운 산이라고 중국인 스스로 자찬하는 아미산에 올라 아름다운 풍광에 황홀감과 행복감에 도취
되었던 기억이 멀지 않아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할 것이다.
雨期라고 하는 기간이었지만 기가 막히게도 관광하기에 최상의 날씨가 이어져 더욱 즐거운 여행
이 되었다. 같이 동행했던 친구와 가족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여행주선과 준비연락을 맡았던
관계로 조바심과 걱정이 많았는데 한결같이 잘 협조를 해주어 대과없이 마쳤다고 생각되지만,
부족한 점은 너그러운 이해를 바랄 뿐이다.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