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an/26(화) :
昨夜 20:20시 작업 완료. 오늘 13:10시 출항했다. 그래도 꽤나 빨리 Documenting이 끝난 셈이다. 보통 하루 내지 3일, 늦다면 한 주일씩이나 걸린다고 들었었는데-. CIRSA의 Mr. Barra 녀석은 10:00시 비행기로 이미 날은 모양이다. 완전히 꺼멓고 괴물같이 생긴 Customs 녀석의 하는 짓은 어디가나 못살고 후진성을 가진 나라의 바로 그것이니 싹수부터 말라 비틀어진 나라다. Gyro Repeater 작동이 시원찮다. 추종이 제대로 안 되는 듯하다. 아직도 갈길이 아득한데-. 내려올 때보다 훨씬 조용해진 해상과 북풍이라 다행이다. 늦어도 30일까지는 Las 이후 중간 기항 없이 바로 갈 수 있어야 할텐데-.
Jan/27(수) :
어제밤은 꼬박 선체로 샜다. 19:00시 Las 외항도착. 곧 Berthing 된다고 기다린 것이 6시간. 先着船의 작업이 늦어진 탓이랬다. 결국 새벽 2시에 접안을 마쳤다. 다행이 오늘은 No Work. 한국행 Cargo라 Nego중인 때문이랬다. 예정되로 29-30일 출항, 바로 Tokyo 직행이란다. JRC의 堀川(호리가와)사장이 방선했다. 편승했던 Mr. Kuni 와 Suzumaru가 하선했다. Kuni는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인데 비해 Suzumaru는 영 시원찮은 촌놈이다. 아마도 촌 녀석이 배를 타다 어찌 현지주재원으로 남은 모양이다. 결국 저런 녀석들이 일본사람들의 예절바른 인상에 먹칠을 하는 놈이다. C/O의 ‘Royal Lily’시절 Seattle 입항시 Longshore man의 부상에 관한 소송사건에 관한 Telex가 있어 답신을 만들어 주었다. 저녁엔 C/E와 더불어 Ingles 백화점을 구경하다. Pakistan 및 중동산 양탄자 깔개가 몹시 탐났지만 엄청스레 비싸다. 집에 전화하다. 그 놈의 동전이 떨어지는데 신경쓰너라 정작 해야 할 얘기는 반도 못하고 말았다. 별고 없다는 것만으로 마음을 놓는다. TV. 냉장고. 전축을 면세로 사가기로 마음을 정해본다.
Jan/29(금) :
어제밤 늦게 갑판장이 올라왔다. C/K의 음주사고 때문이다. 역시 문제의 관건은 그 인물됨됨이다. 과연 1년을 견뎌 낼런지는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그 나이에 아직도 조리수로 전전하는 그 현실이 그를 무엇보다 증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생각을 바꾸자. TV. 냉장고, 전축을 쌌다. 옳은 판단인지 모르겠다만 일단은 면세니까 싸다. 서둘러 Monthly Report를 작성. 미리 띄우자. 11월분을 못 받았다니-. Cienfuego에서 발송했는데-. Copy분을 다시 보낸다. 아울러 부산에서의 교대를 요청하다. 40여년만이라고 하는 Las의 잦은 비. 이 매마른 섬에도 녹색이 만발하려는가? 역시 세계적인 이상기온의 일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으시시하게 춥다. 남은 3월초가 어찌 그리 아득하게 느껴지는고 -.
Jan/30(토) :
Pilot의 지연으로 두어시간 늦긴 했지만 16:40시 드디어 Laspalmas를 떴다. 귀국길에 오른 셈이다. 생각보단 외항이 덜 거칠다만 Gibralartar까지 하루 동안은 뛰뚱거릴 것만 같다. 출항전 다시 JRC의 호리가와 사장, CIRSA의 山下씨를 만났다. 생각보다 부산행 화물이 늘어났다. 堀川씨에 의하면 도중 Singapole에서 급유할런지도 모르며 부산 이후는 N.Z가 Fix된 것 같다고-. 대아와 東日에 Report를 띄웠다. 생각 같아서는 동경에서 후딱 날아갔으면 싶다만. 직접 부산입항했을 때 그 ‘아더메치’한 꼴들이 벌써부터 싫어진다. 뜨끈한 물에 목욕과 밀린 세탁으로 쌓인 마음의 앙금을 털어내고 긴장을 다소 늦춘다. 내일까진 쉬고 다시 남은 30여일간을 보다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하자. 어차피 주어진 시간, 무엇인가 내게 남길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정화의 입학이 3월 5일이랬는데 그때까지 닿으려나?
Feb/01(월) 1988 :
10:00 Gibraltar 항과 중 같은 방향으로 항주한 6척의 France War Ship Fleet(전함선단) 때문에 다소 지장이 있었다만 순조롭게 항과, 뒷바람으로 바뀜으로 선속도 상승한다. JRC의 6일 03:00전 Portside 도착하라는 요청의 Cable에 맞춰질런지는 모르겠다만 2-3일간만 현상태를 유지해 준다면 03:00부터 시작되는 Second Convoy 대열이 끼여들 수 있을 것도 같다. 오후에 대청소 실시. 오후부터 다시 Jogging을 재개해 본다. 불완전한 허리가 견디어 줄는지? 가능하다면 집에 닿을 때까지 계속할 작정이다. Deck chipping 작업 시작. 東京까지 부지런히 한다면 Owner에게 한결 훤하게 보일 것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가 좋으니까. 화선지 마지막 뭉치를 헌다. 먹물도 마지막 남은 한 병을 쓴지 2-3일이 된다. 빼먹지 않고 쓰면 두어번은 더 쓸 수 있을 것이다. 쓰는 시간은 오후 Jogging을 마친 다음으로 바꾸어 본다. 늘 형광등 밑에서와는 또 다른 감각이 따른다.
Feb/06(토) :
01:30 Portside 착. 05:30 S/B. 07:00 Canal Transit(운하 항과) 시작. 10:00 - 16:00 El Ballah Berthing. 22:00 Suez Habour Pilot 하선. 꼭 24시간 걸린셈이다. 그 놈의 지긋지긋한 ‘박쉬쉬’ 수작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질 않는구먼. 피곤하다만 성큼 한발 부산에 닥아선 기분이라 오히려 신선하다. 동경 도착 예정이 25일 밤으로 타전. 앞으로 19일간의 항정이다. 도중에 Singapore에 Bunkering 차 들리란 소리가 있을 것만 같아 찜찜하다. 하루라도 빨리 갔으면 싶다. 얘들의 모습이 자주 떠오른다. 한창 클 때인데 父性의 Image가 너무 엷어지고 있다. 반면에 그것은 진정한 母性像을 심어주는데도 영향이 있으리라. 家長없는 살림살이를 하다 보면 여자도 남자도 아닌 모호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 녀석들이 이해하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벌써 그간에 그들 자신도 모르게 푹 젖어버린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어쨌든 잊었던 부성을 살리고 깨우치는데 힘쓰야겠다.
Feb/08(월) :
Red Sea를 완전히 벗어난다. 인도양을 가로질러야 하는 약 8일간의 항정이 고비다. 오늘 아침부터 계속 남풍이 강하게 불고 있다. Weather Report대로라면 Smooth 하게 건너 뛸 것도 같다만-. 며칠간의 곤두박질로 천당문 앞까지 갔다 왔다하는 시련을 각오해야 할는지?. 아직도 16일이 남았다. 동경까지는…. Coldreefer에서 Bunkering 없이 부산까지 올 수 있느냐고 물어온 걸 보면 또 무슨 꿍꿍이 수를 부리려나? Singapore 기항을 면하는가 보다만 아직은 미정이다. 감기 환자가 많다. 사막을 거쳐 오면서 심한 일교차와 강한 먼지바람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내 자신은 작년에 비해 그 흔하던 감기 곳뿔 한번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히 나아졌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Mrs. Arris come to paliament’ 재미있게 읽었다.
방학도 끝나 개학했을 거고 큰 녀석 둘은 졸업식이 지금쯤 있을 법하데? 미안하군. 마치 애비없는 얘들처럼 기죽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Feb/14(일) :
지난 8일간 정말 순항이었다. 작년 7월 Persian Gulf를 마치고 South Africa로 내려갈 때 심한 Monsoon으로 며칠간 생고생을 했던 그 기억이 생생한 Indian Ocean을 아무 흔들림 없이 건너뛴다. 하늘이 도우시는군. 내일 새벽이면 Ceylon Island 아랫쪽에 닿는다. 싱가폴 해협까지는 아직도 꼬박 4일. 그리고 거기서 다시 Tokyo까지 6일간의 항정이 남았다. 26일 중 최후의 항해가 지루함을 갖게 한다. 더욱이 귀국길이 아닌가-.
큰 고비는 넘긴 셈이다만 Malaca와 싱가폴 해협의 해상강도에 대한 정보가 신경이 쓰이고 필리핀 앞 Bashi Channel의 거친 바다, 복잡한 Urago 수도 및 下關해협의 통과 등이 남았다. Busan항에 완전히 계류가 끝나기까지는 계속 긴장의 줄을 늦출 수는 없다. 방심과 그 놈의 ‘설마’가 지금까지의 공든 탑을 송두리 체 삼켜버릴 수 있는 순간은 언제라도 주위에서 번뜩인다. 두 주일간 계속한 조깅을 8000보까지 올렸으나 역시 허리에 영향이 있어 이 수준에서 머문다. 묵은 것이지만 Reader's Digest에 실린 ‘A Race for Life’, 한 유방암 여자 환자의 집념과 결국 Marathon full course 42.19km를 완주하는 불굴의 정신을 그린 것이었다. 몸의 병도 마음의 집념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어쩌면 그 정신력이란 것은 죽음보다도 더 무섭고 강열하며 처절한 자기 투쟁일 것이다.
24시간 단식하다. ‘Octopus’(문어)를 먹은 후 뒤가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한달에 한번쯤 금식한다는 Havana Cuflet 의 녀석 말이 흥미가 있어 따라보려는 의도다. 잘 될는지? 결국 정신적인 문제일 것이다. 동경 입항시 몇 가지 Class survey가 있다는 Owner의 cable. 또 며칠간 바쁘고 정신없이 보내게 되겠군. 내일쯤 이쪽의 요구도 타전해야겠다.
4월 만기자 5명에 대한 결과 여부도 대아에 문의해둬야 일의 처리가 수월할 것이다. 싱가폴 지나고부터 슬슬 시작하자. Dock Order도 준비하도록 되어 있다만 구체적인 지시가 없다. 달력만 쳐다보는 회수가 늘어간다. 얘들의 모습도, 아내의 목소리도 점점 가까워 오는 듯하다.
Feb/18(목) :
구정이다. 날씨가 무척 덥다. 더운 설날이라 실감이 없다. 윷놀이라도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밤새워 싱가폴 해협을 통과해야 한다. 특히 Sea Robber(해상강도)에 대한 철저한 경계가 있어야 하니 진득한 염려가 떨어지질 않는다. 많은 선박들이 주위에 훤히 불을 밝힌 체 항해를 한다. 재수 옴 붙어 만에 하나라도 당하면 당하는 놈만 서럽고 뭣 된다. 예상보다 Speed가 늦다. Indian Ocean에서 계속 역류의 영향 때문인 듯. 25일 21:00 ETA가 유지될는지? 동지나 해상에서 3일간만 그런대로 견디면 黑潮(구로시오)를 타게 되므로 몇 시간 늦어진 것은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옛날 굶주렸고 가난했던 시절의 명절을 새삼 떠 올려 본다. 그것이 그 만큼 즐거웠고 기다려졌던 것은 평소 갖지 못했고 먹지 못했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의 원인이었던 것을-. 요즘 얘들에게는 그게 없다. 그러나 그 대신 무언가 그들의 마음속에 뚜렷이 부각될 수 있고 남을 수 있는 의미가 담긴 알맹이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Feb/19(금) :
새벽 3시반. 완전히 싱가폴 해협을 빠져 나왔다. 어젯밤 21:00부터 꼬박 6시간 걸린 셈이다. 수많은 선박들이 닻을 내리고 있기도 했고 들락거리기도 했다. 이 조그만 섬나라에-. 그 분산한 움직임과 기민함, 활기와 그에 따른 실속이 용하다.
생각했던 것 보다 굴직한 Swell이 항로와 정반대 방향에서 밀려온다. 대만 남단까지 약 3일반의 항정이다. 오기도 많이 왔다. 20여일간-. 다음항차는 NZ/Conti란 것과 동시에 동경 입항에 관한 일정도 Agent로부터 연락이 있었다. 역시 일본인들의 기민함과 정확성, 성실성에 감탄한다. ETD가 29일 PM이면 ETA Busan은 3월2일 아침이 되겠군. ‘꼭 휴일을 다 피하고 바쁜 날만 골라서-’ Wife의 푸념이 또 한 번 기똥차게 들어맞게 되는군. 어쨌든 12일 남았다. 대아로부터 교대에 관한 답신은 없다. Owner 말처럼 아직도 Nego 중인가? 종일 잠으로 떼운다. 잠잠했다 다시 시작하는 흔들림에는 꼭 따라 다니는 멀미증세. 역시 인간에 체질에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Feb/22(월) :
연3일째 배도 사람도 우황든 황소처럼 끙끙 앓는다. 책에도 없는 굵은 너울이 어디서 생겼을까? 거기다 또 북동풍은 어째서 부는가? 영 미치게 만드는군. 겨우 14~15k't를 유지했고 코스도 삼천포로 빠지다가 오늘 오후 3시경 겨우 제 코스로 잡았다. 아무래도 26일 오전에 닿긴 힘들겠군. 늘 그랬듯이 Last Voy.의 이런 황천은 딱 사람 축나게 만들기 마련이다. 결국 이틀밤의 불면이 오늘 눈거죽이 한발이나 들어가게 만든다. 남지나해! 씨팔 것! 굴러가도 내일이면 벗어날 것이고 4일이야 못 견딜라고-.
귀국일이 Count down 됨과 동시에 일어서는 그 ‘내일’의 상념이 다시 번민스럽다. 낮아진 급료에 떨어진 환률까지 감안하면 연간 약 천만원의 손실이 된다. 또 무슨 낯으로 아내 그리고 얘들한테 “다녀오마” 고 봇따리를 들고 나설 것인가?
과연 길은 영영 없는 것일까? 어떤 기구, 제도 또는 가정,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생기를 공급받지 못하고 항시 청신한 바람을 불어넣지 않으면 어느새 더께가 앉고 이끼가 끼고 쉬이 늙어버린다. 결국 그 속의 사람들은 아무리 혈색 좋고 덩치 커도 구린내 풍기고 상투화된다. 늘 현재의 분수에만 주저앉아 있는데 버릇된 사람들의 그 정신적 퇴폐. 그 표본이 곧 뱃놈들이고 내 자신이 아닌가.
‘한 번도 인생에서 실패 비슷한 것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한 번도 열중해 볼만한 인생 내용이 없다는 얘기’ 란 말이 있었다만-. 그만한 각오로 다시 부딛쳐 본다면? 허지만 지금 어떤 것이던 실패를 갖는다는 것은 너무나 시기적으로 늦지 않은가? 이제부터 시작된 애들의 본격적인 교육투자에서 치송까진 너무 긴 시간이 남았다. 다시 이만큼이나마 복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 아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와 Wife 그리고 얘들에게도 이젠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고 정신적인 문제도 있다. 즉 가슴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일들이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겐 오직 부의 축척만이 내 남은 모든 인생을 걸 목적일 수밖에 없다만 내 뜻은 어떻게 찾는다? 대통령과 맞먹는 액수의 월급을 받던 놈. 그 나이, 거기다 배운 것도 없으니 데려다 써줄 놈 없을 것이고 또 새삼 그 밑에 들어가기도 싫다. 죽으나 사나 내가 사람을 부리고 생각하고 만들어 내야 하는 수뿐인데 바로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쥐뿔도 배운 것이라곤 없는 주제에 한잔 걸치고 느스레를 떨며 호탕하게 웃음을 날리며 대가리는 마음 같지 않지만 숙일 수 있었던 그 능력도 20여년의 세월과 환경속에서 깡그리 사그려저 버렸고, 타협없는 성실과 도리만 찾아 굳어버린 지금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우리 한국사회에서 과연 적응이 될 수 있을 것인지? 그것도 아무런 대가없이 단 시간내에…. 우선은 체력부터가 의심스럽다. 벌써 금주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부터가 커다란 장벽이 될 수도 있다. 우선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아내의 협조가 절실하다. 이번만은 좀 더 깊고 무게 있게 그와 상의하고 자문을 얻어야 한다. 한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자존심을 스스럼없이 버리고-. 이놈의 배가 끙끙 앓듯이 내 마음속의 응어리도 똘똘 뭉친 체 함께 앓기만 한다. 앞으로 2-3일은 계속 그리 할 것이다. 浦賀 Pilot승선지에 닿을 때까지는-. 지난 20여년의 세월이 그처럼 긴요했다는 것을 새삼 절실히 느낀다.
Feb/24(수) :
낯익은 일본 TV 그리고 한국 방송을 듣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만큼 되버렸다. 아침 나절에 Okinawa 그리고 저녁에 Amamioshima를 항과하다. 생각보다는 구로시오(黑潮)의 영향이 적다. 정오경 대아로부터 전보는 완전히 기분을 망친다. 27일 C/E, C/O만 동경에서 교대한댔다. 오는 1년을 위해서 동경/부산간의 Training을 위한 조치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짐작했으면서도 또 그렇게 추천을 했으면서도 정작 내 자신의 문제를 삽입시키지 못한 스스로의 우둔함이 밉다. 정작 가야 하는 것은 내 자신이 아닌가 말이다.
28일부터 3월1일까지의 3일 연휴는 나와 함께 아내나 얘들에게 황금 같은 Chance가 될터인데-. SSB로 좀 어떻게 해보려 했더니 왠 놈의 混信이 그렇게도 심할게 뭐람. ITF에 관한 일거리만 한아름 안고 물러앉은 셈이다. 참 재수 없는 날이다. 東京체재 3일간의 선주측의 일정이 저들 나름대로 짜여져 있을 테지만 좃도 잘 되겠지. 아내보기 민망스럽다.
Feb/25(목) :
어제밤 술 한 잔을 했다. 부아도 나고 추가교대도 재계약 신청도 결말이 난 이상 모든 당사자들의 기분도 있다. 그래봤자 골치 아픈 것들만 남고 하나도 변하는 것은 없다. 뜨끈한 물에 땀을 쪄내도 그 마음의 찌꺼기는 그대로 남는다. 시부럴 것. 될 대로 돼봐라. 싸늘히 식어가는 외기에 몸도 마음도 함께 얼어간다.
Feb/26(금) :
계속되는 강풍 속에 한 시간반이나 늦게 우라가 수도(水道)에 도착. 16:30시에 大井水産부두에 접안했다. Owner측의 伊藤(이토)과장, 菅野(간노)부장이 왔었고, Boiler, Radio Survey와 선박전화설치 등으로 정신없이 보냈다. 역시 ITF가 최대의 과제다. 이토 과장의 주선으로 별일없이 끝날 것도 같다. 自國의 이익을 위해선 노조의 파업도 일부분을 활용하는 일본이다. 예상외로 춥다. 그래서 그런지 허리가 영 불편하다. 늦어서 전화도 포기하다. 아내의 엽서가 우울하게 만든다. 결코 그를 나무랄 수는 없다. 역시 그도 평범한 한 여자인 것을 -. ‘세상의 뭇 여성이 다 그래도 아내만은 -’하고 생각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착각이고 믿음이고 미몽이었던 것이다. 원인도 결과도 모두 내 탓이다.
Feb/27(토) :
간밤 Boiler가 중지되는 바람에 새우잠을 잤다. 전신이 떨린다. 새벽부터 함박눈이 퍼붓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종일을 계속한다. 하루를 늦춘다. 제기랄이다. ITF 때문에 하루가 如三秋인데 -. 저녁에 집에 전화하다. 어떤 결심이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 없을 만큼 절박한 지금이다. 구포로 전보되었고 정주의 부산진고 진학, 정화의 입학식 일자 미정, Wife의 졸업 연기 등등 예상보다 침침한 소식들이 많다. 어쨌든 5-6일 있으면 내가 닿는다. “함께 하는 날 힘껏, 따뜻이 안아 줄 참이오, 당신과 애들 모두-” . 자정 넘어까지 추위에 떨었다. 왠놈의 기관사들이 그리 모른단 말인가. 고드름똥이 나오겠다. JRC의 紺賴(곤라이)란 녀석이 다녀갔다만 森保 과장이나 NYK의 藤井보다 영 시원찮은 놈이다. 藤井(후지이)도 三井(미쓰이)도 다시 선장으로 해상생활로 돌아갔단다. 결국 그 놈들도 그 놈들이었군.
Feb/28(일) :
萬人이 쉬는 일요일. 일찍 시내 나가다. 아내가 부탁한 화장품 몇 가지를 사러-. 쌍말로 마누라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면 두 말 없이 집어치우고 왔을 거다. 30g에 10,000엥이라니! 그걸 발라서 삐뚜러진 얼굴이 바로 선다면 몰라도-. 해도 너무하는군. 중국놈 라면 한그릇 700엔(4,500원)으로 점심을 떼다. 정모녀석은 그냥 갈 수가 없어 자동차 하나를 쌌다만 결코 만족하지가 않다. 좀 더 큰 것을 못산 것은 내 옹졸함만이 아니다. 그럴만한 때가 아니다. 銀座의 화려함과 일본인들의 여유가 한결 더 높아졌군. 씨팔! 새로운 기관장과 일등 항해사가 도착했다. 옥강 이사의 편지에 신경 쓰이게 하는 구절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금년엔 아예 미리 방패막이를 했는지도 모르겠군. 금년에 있었던 대아의 해난사고들. P. World의 좌초. Exploder의 충돌 등. 그리고 최근 한국해난사고의 빈발이 사회적으로 크게 시끄럽다는 전언들이 더욱 마음을 울적하게 한다. 마지막 남은 36시간의 항해는 줄곳 서서 지새우더래도 무사해야만 한다.
Feb/29(월) :
작업시작. Sea protest도 만들고 NKK의 Boiler 및 S.R 검사도 마쳤다. 선주측. NYK, 용선자측 종일 사람한테 시달린다는 것이 무척 피로하다. 이토 과장은 ITF 때문에 종일을 기다리다 갔다. 오기 전에 떠나버린는 것이 上手인데-.
Mar/01(화) :
기어이 3월을 맞는다. 全日海(ITF) 일행 6명이 방선하다. 東日에 급히 연락. 이토과장이 달려왔다. 순조로히 넘긴다만 빌어먹을 비가 종일을 망친다. 또 하루가 늦는다. 떠거랄 놈의 날씨! 새로 온 기관장 金斗生, 사람이 좀 이상한 듯. 말이 많음에 결코 믿음이 없다. 한마디로 야시 같은 사람이다.
Mar/02(수) :
또 비가 질척거린다. 아침부터-. 짜증뿐이다. 紺賴(곤라이) 녀석이 어제 뭔가 군지렁데더니 왠일로 오늘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Pilot 사용을 선뜻 허가한다. Pilotage라도 좀 내놓으라고 할 참이었는데 미리 입막음 하는 듯도 하다. 차라리 잘 됐다. Moji의 Agent인 Pacific Shipping도 선내 설치한 전화로 즉시 통화가 된다. 참 편리하다. 역시 일본 사회가 발전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요코하마에 가다. 빌어먹을 놈의 Foundation 331번에 있는 데는 있고 없는 데는 전연 없을 뿐아니고 값도 엄청스레 다르다. 뭔가 속은 느낌도 있다. 결국 일요일 松屋백화점에서는 유명세만 듬뿍 바가지 쓴 셈이다. 전기밥솥을 느닷없이 하나 쌌다만 꼭히 왜 쌌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내의 먼 통근길과 정화의 객지생활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라면 대강 바른 해답이 될는지 모르겠다. 돈! 그 놈에게 너무 비굴하게 매달리지 말자는 엊저녁의 생각에 다소 영향을 받은 것도 같다. 그러나 아직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아끼고 저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최선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Shifting 때문에 일찍 귀선. 덕분에 10,000엥 한 장은 번 셈. 봇다리를 대강 챙겨본다. 그놈의 밥통이 문제다. 아무래도 거지 이삿짐처럼 된다. 갖고 가면 쓸데는 있을테니 꾸려 보자. 날씨 탓인가 허리가, 특히 오른쪽이 심하다.
後記
여기서 긴 船上日記를 맺었다. 아마도 그 다음날 출항해서 바로 부산으로 왔었고, 부산에서 교대하고 하선했다. 그러나 이것이 내 마지막 해상생활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질 못했다. 결국은 어중간하게 그만두게 된 셈이 되고 만 것이다.
첫째는 正花의 대입 실패다. 정작 바다 위에서 주고받은 서신의 내용을 거짓이었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데는 할 말이 없다. 역시 본인이 기어이 원하는 예능은 실력만으로는 안 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뭣 같은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法治가 제대로 되지 않고 불성실한 사람이 더 잘 사는 곳이 어떻게 안정되고 질서 있는 사회가 된단 말인가.
再修하기로 했고, 大亞(株)의 玉 岡 理事가 타던 현대 Presto 승용차를 사서 매일 정화를 싣고 학원, 피아노, 和聲 등 하루 세 군데를 옮겨 다니길 8개월. 부산대학교 예술대학에 합격의 영광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내 길은 끊겼다.
그러나 사실은 몇 년 더 계속했어야 했다. 아내도 그런 눈치였지만 강요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어선 免許狀으로 漁船을 시작했었다. 일반화물선박은 면허가 없었다. 다행히 편의치적선 제도에 따라 Panama 면허를 얻을 수 있어서 버티어 왔기는 했지만 실상 이 문제 때문에 지난 20여 년간 고민도 애로도 많았다.
당시는 선박면허제도가 ‘航海’와 ‘機關’으로 나누고 또 漁船과 商船(일반 화물선)으로 구별되어 있었고, 일제 강점기의 잔존으로 甲種과 乙種으로 나뉘고 각각 3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내가 가진 자격은 「漁船甲種 2等航海士」였다. 이 면허이면 어선은 왠만큼 큰 선박이라도 승선할 수 있었지만 일반화물선은 해당이 되지 않았다. 이 면허제도가 1980년대 초반인가 국제화되면서 구별없이 「국제 1. 2. 3급」의 3종류로 바뀌었다. 시험 자체도 엄청 어려워졌다.
결국 이 해에 이미 應試자격조건(승선경력)이 갖추어졌기에 20여년간의 숙원이었던 국제 1급 면허시험에 도전, 합격, 기어이 면허를 취득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筆記 합격 후 面接試驗 때였다. 세 명의 면접관 앞에 네 명의 수험자가 마주 앉았다. 내 왼쪽은 소형선 출신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인데 처음부터 “살려주세요” 하는 타입이고 오른쪽의 두 사람은 젊은 사람들인데 정규 해양대학 출신들이었다. 더듬거리다 海大 선배인 면접관들에게 “이 자슥들이 공부도 안하고…” 하면서 욕을 먹은 반면, 나는 면접의 요령을 일찍부터 터득한 터라 시험관들과 같이 놀았다(?). 모르는 것은 솔직히 시인하고, 시험을 떠나서 어떤 방법이 있느냐고 되레 묻기까지 했으니…. 결국 4명 중 나 혼자만이 합격을 따냈다.
필기시험 전 마지막 한 달 동안 다녔던 大韓海技士學院 金 원장이 고맙다는 의미에서 저녁을 샀다. 원장의 말에 따르면 제도가 바뀐 이후 면허시험의 格이 엄청 높아져 어려워졌는데다 국제화에 따라 영어가 특히 문제가 되어 1. 2 급은 거의 영여에서 불합격됐다고 했다. 내가 합격한 것도 영어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기 때문이며, 드물게 1급에 합격함으로 학원의 명예를 높여 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승선 중 영어 때문에 늘상 신경질을 부렸지만 그래도 꾸준히 책을 마주한 덕분임을 절실히 느끼고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겼다. 특히 토익(TOEIC), 참말로 까다롭고 어려웠다. 왜 of, for, to 같은 단어를 가려 쓰야 하는지 어떻게 알꼬?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제를 보고 눈에 익은 것을 찍었다. 그게 정답이었다. 문제는 평소 토익과는 관계없지만 영어책이나 영어잡지를 많이 읽었다는 증거였으리라.
그러나 결국 그 면허장을 손에 쥐어보지 못하고 말았다. 새로 취득한 자격증으로 몇 해 더 당당히 승선했어야 했는데….
20여년간, 實習船을 시작으로 漁船, 商船, 특수선인 냉장운반선 등 11척을 승선한 船上日記였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열심히도 섰다. 모두 컴퓨터에 입력을 마치고 보니 A4 용지에 10포인터 글자 크기로 장장 1,200여 페이지에 이르렀다. 지금 돌이켜보면 좀 더 기록내용을 풍부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Exelsor Reefer 승선 중인 1981년 6월 12일부터 8월 16일까지 두 달 간이 빠져 있지만 그 이유는 결국 밝히지 못함)
남겨진 일기장을 다행히 컴퓨터로 활자화시킬 수 있었던 것도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일찌기 시작한 컴퓨터 덕분에 이룩할 수 있었다. 버리기가 아까워 대강 발췌한 것을 2019년 11월에 『항해일지』란 이름으로 책으로 발간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불완전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데다 중간중간 끊어짐으로 내용의 연결이 불확실함도 불만이기에 全量을 내 개인 Cafe를 만들고 올리기로 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奇蹟의 연속이었고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을 앞둔 유언장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88년은 그렇게 보냈다. 올림픽이 있은 해이지. 아마. 다시 1년을 방황하다가 아내의 권고로 개정된 법에 따라 시행된 ‘공인중개사’ 시험, 이 또한 고등고시보다 더 어렵다던 공부를 하고 3회 때 합격한 것도 이 때였었다. 그러기를 다시 계속. 마치 국민학교 일학년처럼 낯설고 서툴기만 한 사회생활이 위태롭게 어울려져 갔다. (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