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질투가 나의 질투가 된 창조적 소수
2024. 3. 17(주일낮예배) 민수기 25:1-13
2024년 미주 다니엘기도회에 류응렬 목사님이 설교 서론에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라는 책 이야기를 한다. 류응렬 목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좋은 환경이 문명을 발달케 한다는 논지로 문명을 설명한다. 그래서 세계 4명의 발생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와 유브라데스 강을 가지고 있고,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의 황하문명은 황하강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인류는 농사를 짓기 평지에 강이 흐르는 좋은 환경에서 문명의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책에서 다른 이야기를 한다. 토인비는 나일강은 매년 범람하였기에 땅은 비옥했지만, 사람의 목숨에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매년 범람하는 나일강으로 인하여 기하학과 공학을 발달시켜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 나갔다는 것이다. 중국의 황하강도 마찬가지이다. 산이 깎아져서 일 년 365일 누런 물이 흐르는 황하강은 그 물을 식수나 공업용수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그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했을 때 황하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인비는 인류가 문명을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토인비가 생각하는 인류가 문명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겠는가? 아놀드 토인비는 도전(Challenge)과 반응(Response), 그리고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를 말한다. 역경과 어려움 앞에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고 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문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니 토인비는 그렇게 바르게 반응하는 도전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하여 문명은 발달하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교회도 이렇게 세워져 가지 않는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였을 때 모든 유대인들이 반겨 맞이하지 않는다. 그들은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할 때 베드로는 그 말에 도전하고, 반응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을 때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사도행전 5장을 보면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때 베드로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고 대답한다. 그리고 교회는 핍박과 역경 가운데서도 말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을 때 부흥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도 교회는 이러한 도전과 반응, 그리고 창조적 소수를 가지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본문은 40년 광야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제 가나안 땅이 보이는 싯딤에 장막을 쳤을 때의 이야기이다. 싯딤에 장막을 친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여인과 음행하고, 또 모압여인이 섬기는 신 앞에 절을 하였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의 수령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목매어 달라(민 25:4)고 명령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역병이 돌아서 2만 4천명의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으로 많은 사람들이 회막 문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40년 광야생활을 통하여 이제 가나안이 보이는 싯딤에 장막을 쳤는데 더 이상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은 멸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였던 시므니가 미디안 수령의 딸 고스비를 데리고 막사 안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절망할 때 시므니는 아직도 그 범죄의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싯딤에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 어떤 사람은 죄악으로 인하여 절망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 그 죄악의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의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였다.
어떻게 비느하스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막사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창으로 그들을 찔러서 죽였는데, 배를 뚫어서 죽였다고 한다. 비느하스가 죄악의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므니를 보고 분노하여 창을 들고 들어가서 그들을 죽였을 때 이스라엘의 혼란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시므니를 죽였는데, 이스라엘의 문제가 사라졌겠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먼저 민수기 16장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싶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고라자손의 반란이 있었다. 고라자손은 모세와 아론만이 총회에서 높임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가졌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할 때 하나님은 고라자손이 선 땅을 갈라지게 하여서 그들을 삼켜 버렸다. 그렇게 고라자손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다고 원망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 1만 4천 7백명을 염병으로 죽게 하였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의 마음을 알고 모세와 아론보다 더 진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본문을 자세히 보기 바란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보다 더 분노하여 시므니와 고스비를 죽인 것이다.
지금 하나님과 비느하스의 관계를 보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아론이 억울한 상황에 놓였을 때 아론을 대신하여 진노하였다. 그런데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는 하나님이 억울한 상황에서 진노할 때 자신이 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과 이런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신형주가 쓴 별이라는 시가 있다.
가슴에 별을 간직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소멸하는 빛 흐느끼고 별이 낡은 구두를 벗어 놓는다.
절대 고독, 허공에 한 획 긋는다. 별을 삼킨 강 뒤척인다.
가슴에서 별이 빠져나간 사람은 어둠 속에서 절벽을 만난다.
신형주가 말하는 별은 내 삶의 이유이고, 모든 것이다. 그래서 가슴에 별을 가진 사람은 어둠 가운데서도 길을 잃지 않고, 또 낡은 구두를 벗고 새로운 삶을 향하여 달려갈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가슴에 별을 잃어버리면 어둠 속에서 절벽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면 신형주가 말하는 별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그 별을 꿈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떤 사람은 그 별을 사랑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의 꿈을 모든 것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있고, 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역경을 이겨나가는 삶을 사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비느하스에게 있어서 별은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비느하스는 하나님이 자기 가슴 속에 있었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았고, 또 하나님이 계심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아론의 집안이 아름다운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그래서 민수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염병으로 1만 4천 7백명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아론이 향로를 들고 섰을 때 염병이 떠나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진노한 비느하스가 쾌락에 빠져서 있었던 시므리와 고스비를 죽였을 때 하나님의 심판은 끝이 난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의 별이 되어서 전부가 된 아론과 비느하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떠나간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 별은 무엇인가? 내가 수고하며 쌓아온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삶에 혼란이 다가올 때 그때 우리는 내 가슴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내 마음이 별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질 때 우리는 도전하고, 바르게 반응하는 창조적 소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었던 이유를 오늘 본문으로 해석하고 싶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시므리를 죽인 비느하스의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의 평가가 나온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평가하는지 민수기 25장 11절을 읽기 바란다.
(민 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질투(קינאה 킨아)라는 단어는 열정이나 질투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킨아가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되면 언약적 혼인관계로 해석한다. 신랑된 하나님이 신부된 이스라엘에 대하여 질투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질투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얼마 전에 젊은 청년들 사이에 깻잎 논쟁이 있었다. 내 애인이 이성의 깻잎을 잡아서 떼어주면 가만히 있겠는가? 화를 내겠는가? 하고 질문한다. 그러면 어떤 청년들은 왜 깻잎을 잡아주느냐?고 화를 낸다. 젓가락으로 깻잎 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래서 젓가락으로 잡아주고, 떼어주는 것은 매너이다. 그런데 어떤 청년들은 내 여자친구는 절대로 깻잎을 떼주면 안된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애인이 이성의 깻잎을 잡아주어도 되는가? 내 애인이 이성에게 새우나 게껍질을 까서 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사탕껍질 까서 이성에게 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친절과 배려를 베푸는 것을 우리는 참지 못한다. 그래서 질투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투 이유는 그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은 신부된 이스라엘이 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하나님은 질투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질투하고 분노할 때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였을 때 진노를 멈추신 것이다.
무슨 말인가? 비느하스는 질투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비느하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여 진노하고 있는지를 알았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질투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질투와 분노에 만족해 하신다. 그래서 비느하스에게 큰 복을 주시는데, 그 내용을 민수기 25장 1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민 25:13)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비느하스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약속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질투를 자기의 질투로 삼고 진노한 비느하스에게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제사장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다고 칭찬한다.
놀랍지 않는가? 하나님이 마음의 전부가 되었고, 또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된 비느하스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받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속죄하는 놀라운 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비느하스가 받는 이 칭찬이 놀랍지 않는가? 왜냐하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 그 예수님의 마음에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었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이 감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우리의 죄를 속죄하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십자가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저는 설교 서론에서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도전(Challenge)과 반응(Response), 그리고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라는 단어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을 하였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 어려움과 역경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내 가슴의 별이 하나님이 되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함으로 도전해야 하고, 또 반응해야 한다. 그래서 창조적 소수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함을 이루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