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곡점을 지나 / 이임순
요즈음 기다리는데 익숙하다. 무슨 일을 하려고 작정하면 마음이 앞서는 바람에 바빴는데 조급증이 줄어든다. 내 성격은 급하지 않다. 그렇다고 유한 것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서두르는가 하면 느긋하다. 되짚어보니 내게 도움이 되거나 필요한 일에는 행동이 빠르고, 하지 않아도 그만인 것에는 둔하게 움직인다.
내가 기다리는 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은 걷기 운동을 한 후부터다. 해마다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받는다. 그런데 60대 중반 이후에 운동 부족이 단골 차림판처럼 적혀있다. 처음 한두 해는 건강하다고 믿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건강한 지인이 믿기지 않게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부터는 운동 부족이 남의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수영이나 헬스는 그림에 떡이다.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고르다 보니 걷기가 무난하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면 대문을 나선다. 일부러도 하는데 볼 일이 있으면 웬만한 거리는 걷고 되도록 자동차를 타지 않는다.
처음에는 세면서 걸었다. 친구한테서 전화가 와서 받으니 왜 그렇게 숨이 차냐고 물어 운동 중이라 했더니 ‘만보기’를 이용하면 좋다고 한다. 기기 다루는 것이 서툴러 망설이고 있는데 때마침 동네 청년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한다. 그에게 부탁하니 핸드폰에 ‘토스’를 깔아준다.
걸음을 옮기면 그 숫자만큼 자동으로 입력된다. 큰 은행나무 밑에서 시작하여 다리 끝까지 가면 대충 어림잡아 얼마나 걸을지 염두에 두고 도착 지점에서 확인한다. 시일이 지날수록 예상치에 가깝다. 그러면서 거리 감각도 익히고 물렁하던 장딴지도 제법 단단해진다.
걷기가 일상이 되어 일과가 마무리되면 거리로 나선다. 덥다고 아우성인데 겨울 추위를 생각하며 오가는 이들과 스치고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내 매무새도 살핀다. 늦은 밤, 가게 앞을 지나는데 순간 무섬증이 든다. 목이며 팔다리에 빼꼼한 데가 없이 문신을 한 젊은이가 문지기처럼 가게 앞에 버티고 서 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벌벌 떨고 있는데 두 손에 비닐봉지를 든 여자가 나온다. 용기를 내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그의 뒤를 따른다. 한참을 걸었는데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간다. 또 발이 땅에 붙는다. 금방이라도 문신을 한 그가 나타나 앞을 막아설 것 같아 겁에 질려 택시 회사로 전화를 한다.
운동 나갔다 택시로 귀가한 후로는 밤이면 되도록 거리로 나서지 않고 어린이집 강당을 돌고 돈다. 한 바퀴 걸으면 100걸음이다. 사방이 벽이라 답답하긴 해도 내 건강을 지키려면 이런 불편쯤은 참아야 한다.
걸음 수를 확인하다 잘못 하여 행운복권을 누른다. 포인트가 쌓인다. 버튼 누르기도 시도해 본다. 여기서도 숫자가 더해져 똥 누러 가다 알밤도 줍는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포인트를 쌓는다. 그런데 서두르면 안 된다. 광고를 봐야 다음으로 이어진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다 광고가 나오면 그 틈에 화장실을 가거나 설거지를 한다. 눈을 쉬게 하려고 그러기도 했고, 광고 자체가 듣기 싫었다. 영업 수단으로만 여겼는데 화장실 청소용품을 구입하여 실생활에 유용하게 쓴 후로는 무조건 외면하지 않던 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지식은 책에서 얻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오만이다. 내가 그렇게 귀를 닫았던 광고에서도 짧은 순간 스치는 것이 있다. 그냥 시간만 축내지 않는다.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기다림을 배운다. 요즈음 내가 광고도 귀 기울여 듣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곱씹는다. 눈코 뜰 새 없다가도 그 순간이 지나면 차분해진다. 광고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한다. 짧게는 20초 남짓에서 2분 내외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여유를 가진다. 기다림을 익히는 것이다. 그리고 포인트도 얻는다. 작게는 1원에서 가뭄에 콩 나듯 10원까지다. 하루 포인트를 모으면 200원 안팎이다. 한 끼 식사는 고사하고 라면 한 봉지 사기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내 인생의 변곡점을 오래전에 지났는데 새로운 시작을 진행 중이다.
기다림을 익히는 요즈음 걸음은 앞으로 나가고 광고는 옆길로도 나를 이끈다. 새로운 시작이 새길로 이어진다.
첫댓글 저도 친구가 안내해서 한동안 포인트를 적립했더랬죠. 그런데 우리 집 냉장고를 열어 보니 사 두고 미처 요리하지 못해 버릴 지경에 이른 콩나물을 비롯한 식재료들이 만 원어치도 넘게 쌓였더라고요.
느긋한 선생님의 여유가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