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심론』의 선정론
4.해탈십육지
밀교는 원만하고 한량없음을 나타내는 숫자로 십육을 사용하며, 주로 실행의 측면으로 숫자 자체로 일체를 총섭한다. 『대일경소』에는 십육의 법은 낱낱이 모두 법계와 같고, 적은 부분이라도 평등하지 않음이 없다. 여래의 만덕을 간략히 섭수하면 십육지(指)가 되며, 늘이면 곧 한량없고 끝이 없다고 한다. 십육의 수치는 지대의 하나, 수대의 셋, 화대의 다섯, 풍대의 일곱을 합해 십육이 되며, 밀교에서 원만무진(圓滿無盡)의 뜻인 태장계 십육수(十六數)로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공덕수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본체인 성품 공덕이 인연 따라 두루 미치게 된다는 뜻이다.
벽산은 이 공덕수를 이용하여 깨달음의 열여섯 단계를 시설한다. 십육이라는 숫자는 사선근의 십육행상, 『관무량수경』의 십육관법, 수능엄삼매도의 십육게송, 반야의 십육공, 밀교의 십육대보살 등, 본 연구에 중요한 법수(法數)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의미를 섭수하며 여러 수행계위를 조합하고 통합하여, 해탈십육지(ṣoḍaśa-bhūmi)라는 수행의 차제를 설한다. 이는 화엄의 보살십지(daśabhūmi)와 유가(瑜伽)의 십칠지(saptadaśa bhūmayaḥ) 등을 위주로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해탈십육지의 명칭은 보살십지의 이름과 십바라밀 앞부분 이름을 차용하며, 유가십칠지와 공승(共乘)십지의 이름과 의미를 참고한 것이다. 즉, 이구지‧발광지‧현전지가 보살십지와 이름과 계위가 같고, 정진지‧선정지는 십바라밀의 넷째와 다섯째의 이름과 동일하다. 또 제십이지에서 제십육지는 유가십칠지와 공승십지의 단계를 참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성문‧연각‧보살‧불지 등의 의미는 같고 이름만 약간 변형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십육지의 명칭과 단계는 보살십지‧ 십바라밀‧유가십칠지‧공승십지의 이름과 의미를 통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대표적인 수행계위인 보살십지와 다르지 않은 것이, 앞의 네 단계인 사선근을 빼면 십지‧등각‧묘각의 열두 단계와 같다. 그러니까 견도 전의 네 단계[난‧정‧인‧세제일위]와 마지막 구경각[無餘地]을 추가한 것이 다를 뿐이다.
『수습차제』에도 "이 같은 차제에 의해 보살이 방편과 지혜를 항상 존중하여, 오랫동안 닦아 나감에는 열두 단계가 있다. 이 단계들은 더 높은 공덕을 있게 하므로 지(地, bhūmis)로 시설한 것이며, 신해행지(信解行地)에서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다."라고 한다. 이것은 보살십지에 사선근을 하나로 하고 마지막에 불지를 추가한 것이다.
<표 11> 보살십지와 공승십지
성문십지 | 벽지불십지 | 보살십지[진여] | 공승십지 |
수삼귀지 | 석행구족지 | 환희지[변행] | 건혜지 |
신지 | 자각심심십이인연지 | 이구지[최승] | 성지 |
신법지 | 각료사성제지 | 명지[승류] | 팔인지 |
내범부지 | 심심이지지 | 염혜지[무섭수] | 견지 |
학신계지 | 팔성도지 | 난승지[무별] | 박지 |
팔인지 | 각료법계허공계중생계지 | 현전지[무염정] | 이욕지 |
수다원지 | 증적멸지 | 원행지[법무별] | 이판지 |
사다함지 | 육통지 | 부동지[부증감] | 벽지불지 |
아나함지 | 철비밀지 | 선혜지[지자재소의] | 보살지 |
아라한지 | 습기점박지 | 법운지[업자재등소의] | 불지 |
1)가행과 견도[초지에서 오지까지]
가행(加行)과 견도(見道) 부분은 전체 십육지 가운데 초지에서 오지(五地)까지 해당한다. 초지와 이지(二地)는 귀의삼보와 바른 믿음을 강조하는 부분이고, 삼지와 사지는 사선근이라는 난‧정‧인‧세제일법을 배치하며, 오지는 깨달음의 견도에 해당하는 금강지(金剛地)이다.
(1)삼귀지(三歸地, tri-śaraṇa-bhūmi)
'삼귀지'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자리이다. 깨달음의 지혜[佛], 법의 궤칙[法], 화합[僧] 등의 셋을 삼보라고 한다. 이것은 성품의 밝고 깨끗함과 세력의 위대함이 최상이므로, 세간을 장엄하되 영원히 변함없이 세계에 희유한 까닭이다. 이같이 수행의 시작은 삼보에 귀의하는 것으로 깨달음의 인연을 맺는다. 벽산은 비록 삼귀계를 처음 받을지라도, 해탈이 목적이라면 반드시 대승삼보[동체삼보‧일승삼보‧진실삼보]에 귀의해야 함을 설한다.
(2)신원지(信願地, śraddhā-praṇidhāna-bhūmi)
'신원지'는 믿음을 확립하고 서원을 세우는 자리이다. 『화엄경』의 「현수품」에는 '믿음'에 관한 유명한 게송이 있다. "믿음은 도(道)의 근본이고 공덕의 어머니이다. 일체 모든 선법을 잘 기르며, 의심의 그물을 끊고 애욕을 벗어나며, 열반의 위없는 도(道)를 열어 보이네." 또 37보리분의 수행의 다섯 가지 근본[五根]과 힘[五力]에도 신근(信根)과 신력(信力)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 마디로 믿음이 깨달음을 성취하는 근본인 것이다. 나무도 뿌리가 굳건해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믿음도 굳고 튼튼해야 깨달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벽산은 말하기를, "깨닫기 전은 미혹한 믿음[迷信]이고, 깨달은 후는 바른 믿음[正信]이다. 서원도 삿된 믿음에 근거하면 속인(俗人)의 서원이고, 바른 믿음에 입각하면 도인(道人)의 서원이다. 비록 바른 믿음의 발원이라도 작은 법에 그치면 소승(小乘)이고, 다시 큰 원을 일으켜 동요가 없으면 대승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올바르면 서원도 바르게 되며, 서원도 대승의 큰 원을 세워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대방광십륜경』에는 "일체의 고통을 멀리 여의려는 사람은 …한 구절 한 게송이라도 마땅히 자세히 듣고 올바른 서원을 세워야 한다. 만약 바른 법을 비방하는 이가 있으면 함께 살지 말고, 또 이 사람에게 법을 묻고 듣거나 받아 지녀도 안 된다."고 설한다. 다시 말해 삿된 법이나 사람을 따르면 올바른 서원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벽산은 이 경지에서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도리를 통달하고, 구경성취를 위해 먼저 신심과 원력을 성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3)습인지(習忍地, abhyasta-kṣānti-bhūmi)
'습인지'는 닦고 익힘에 안인(安忍, adhivāsanā)하는 자리이다. 인(忍)이라는 것은 진리에 안주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 혹은 마음을 관하여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끊임없이 마음을 기울이고 전력을 다하여 수행하면 습인이 생기게 된다. 이 지위는 성문십지의 네 번째 내범부지[오정심관을 닦는 지위]와 다섯 번째 학신계지(學信戒地)[삼학 성취의 지위]에 해당하며, 연각십지의 초지인 석행구족지(昔行具足地)[계행을 닦는 지위]와 이지(二地)인 매우 심오한 십이인연법(dvādaśâṅgaḥ pratītyasamutpādaḥ)을 스스로 깨닫는 지위와 삼지인 사성제(四聖諦, catur-ārya-satya)를 깨달아 아는 지위에 속한다. 그러나 소승의 수행법에 국한하지 않고 한량없는 법문으로 근기에 응하여, 수행이 몸에 익어 잘 견디고 편안함을 성취한다고 설한다. 이 계위에서는 아직 번뇌의 종자는 끊지 못하였으나, 이를 굴복시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인(忍)이다.
(4)가행지(加行地, prayoga-bhūmi)
'가행지'는 수행이 점점 몸에 익어 집중을 더해가는 자리이다. 이 단계에서는 습인을 성취한 후에 법에 의지하여 수행한다. 즉, 경험자의 외호와 지도로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삼밀(tri-guhya)을 지키며, 용맹정진으로 끊임없이 힘써 행한다. 그리하여 난위(煖位)에서 명득정(明得定), 정위(頂位)에서 명증정(明增定)의 성인(性忍)을 성취하고, 인위(忍位)에서 인순정(印順定), 세제일위에서 무간정(無間定)의 도종인(道種忍)을 차례로 성취한다.
밀교의 오상성신위(五相成身位)로는 명득정은 통달심(通達心)의 전상(前相)이며, 명증정은 첫 번째 보리심을 통달하는 지위이다. 인순정은 두 번째 보리심을 닦는 지위며, 무간정은 세 번째 금강심(金剛心)을 이루는 지위이다. 사도(四道)로 말하면 무간도(無間道, Ānaṃtarya-mārga)이고, 바로 다음에 해탈도(解脫道, Vimukti-mārga)를 성취하게 된다.
인순정에서 도종인을 성취하는 것은 공승십지의 세 번째 팔인지(八忍地)이며, 동시에 성문승의 여섯 번째 팔인지[성문 견도 지위]이다. 성인(性忍)과 도종인이 아울러 연각승의 네 번째 심심이지지(甚深利智地)[깊은 無相智를 일으키는 지위]와 다섯 번째 팔성도지(八聖道地)와 여섯 번째 각료법계허공계중생계지(覺了法界虛空界衆生界地)[삼계를 깨달아 아는 지위] 등에 해당한다.
이는 깨닫기 전 단계로, 화엄의 십신‧십주‧십행‧십회향에 비견된다. 유가십칠지로는 초지와 이지에 해당하며, 유식오위로는 자량위(資糧位)와 가행위(加行位)에 상응한다. 지금까지를 요약하면 삼보에 귀의하고 바른 믿음과 큰 원을 발하며, 수행이 몸에 익고 집중되는 단계에서 가행정진하여 무간정(無間定)을 성취하게 된다.
(5)금강지(金剛地, vajra-bhūmi)
'금강지'는 금강의 지혜를 깨닫는 견도(見道)의 지위이다. 이는 보살십지의 초지인 환희지에 해당하고, 오상성신위(五相成身位)의 네 번째 '증금강신위(證金剛身位)'와 상응한다. '금강지'라는 명칭은 본 수행론을 관통하는 제일의 주제이다. 현교의 수능엄삼매와 밀교의 금강삼마지를 의미하는 핵심적 술어이기 때문이다. 또 수증론에서 기세간과 색신의 비교로 깨닫는 금강륜(金剛輪, vajra-maṇḍala)이고, 석공관에서 원자핵의 '금륜(金輪)'을 보는 것으로 견도에 이른 계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금강지'는 보살이 정각에 올라 금강좌(金剛座, vajrâsana)에 앉는 지위이며, 해탈도에 이르러 장차 승진도(勝進道, Viśeṣa-mārga)를 향해 나아가는 자리이다. 성문승의 예류과(預流果)인 수다원지(Srotāapanna)에 해당하며, 연각십지의 일곱째 증적멸지(證寂滅地)[연각 견도 지위]이자, 여덟째 육신통(六神通, ṣaḍ abhijñāḥ)을 획득하는 지위의 첫 단계인 것이다. 또한 '금강지'는 지층(地層)의 가장 밑인 금강륜이 홀로 드러난 경지이며, 중생 몸 가운데 금강불성(金剛佛性)을 보고 증득한 상태이다. 본격적 육안을 성취한 후 점진적으로 천안‧법안‧혜안‧불안 등을 성취해 가는 지위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을 성취해야 비로소 금강살타(金剛薩埵, vajra-sattva)라고 칭한다.
<표 12> 사가행과 견도(見道)
三賢 | 五忍[四道] | 해탈십육지[五相] | 사선근[유식정(唯識定)] |
십신 | [귀의 삼보] | 삼귀‧신원지 | [正信] |
십주 | 습인‧성인 | 습인지 | 난‧정[명득‧명증] |
십행 | 도종인 [무간도] | 가행지 [성금강심] | 인[인순정] |
십회향 | 세제일[무간정] |
초지 | 신인[해탈도] | 금강지[증금강신] | 견도[초선] |
<『금강심론』 수행론 연구/ 박기남(普圓)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