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原始․古代 日本 ♣
(1) 文化의 시작
일본열도는 남북 3000km로 온대기후지역에 해당하며 아한대 침엽수림부터 아열대림까지 분포하고 있다. 홍적세의 일본열도는 아시아대류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10만년전 경의 화석인골이 출토되고, 타제석기가 나오고 있어 인류가 계속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열도가 현재와 같은 자연환경이 된 것은 1만년전의 충적세의 시대부터다. 이때부터 일본열도에 거주한 인류는 일본전국에 패총과 수혈주거를 남기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활과 화살․마제석기․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새끼줄무늬(繩文)가 새겨져 있어 죠몬(繩文)토기가 불리우며, 따라서 일본의 신석기시대는 죠몬시대라 불리운다. 그러나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된 것은 아니어서, 2-3호(1호당 10명 이내)가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 수렵․어로․채집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장방법은 굴장(屈葬)으로 토우(土偶)를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인골에는 발치(拔齒) 흔적이 보인다.
(2) 農耕의 시작
일본열도에서 본격적으로 농경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로 수도(水稻)농업이 북부 규슈(九州)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1세기경에는 동북지방까지 보급되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의 이 시기에 청동기․철기 등의 금속기와 야요이(彌生)토기가 일본열도에서 사용되게 되었다. 이를 야요이토기가 가장 먼저 발견된 도쿄(東京) 야요이초(彌生町)의 지명을 본따 야요이(彌生)문화라 한다.
이 새로운 문화는 외부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직접적으로는 한국남부인들의 이동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야요이시대인의 신장이 한반도남부인과 같이 커진 점, 지석묘와 마제석촉․청동제 무기 등에 한반도남부와 같은 것이 나오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 시대의 묘제로는 지석묘․상식석관등과 부장(副葬)용이었던 옹관묘등이 있었고 방형주구묘도 보인다.
기원후 1세기이후의 야요이시대후기에 낫․도끼․괭이 등 철제농기구 보급되어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빈부의 차가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높은 지대에 해자를 둘러친 집락지가 발견되는데, 이는 전쟁이 발생하였음을 말해준다. 관개사업과 공동체 제사 및 방위를 지도하는 수장(首長)이 출현하면서 소국(小國)이 형성되었음은 漢書. 後漢書, 三國志 등의 중국사서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3) 야마토(大和)정권과 고분문화
3세기말부터 4세기초에 걸쳐 일본열도에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고분이 발생한다. 이는 야마토정권의 성립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야마토정권이란 야마토(현재의 나라지방)에 있었던 호족들의 연합정권으로, 호존들이 각각의 직책을 세습하면서 오오미(大臣)나 오오무라지(大連)로서 대왕과 함께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토모노 미야츠코(伴造)로서 실무를 맡아 보았다. 야마토정권은 지방의 강력한 호족들을 쿠니노미야츠코(國造)나 아가타누시(縣主)로 임명하는 형식으로, 4세기 후반부터 5세기경에 걸쳐 서부일본을 통일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보이는 왜(倭)와 송서(宋書)에 보이는 왜왕(倭王)은 야마토정권과 관련이 있다.
일본고대국가의 발전에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사람에 의한 문화의 전래가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현존하는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을 통해 4세기 후반에 백제(百濟)가 왜국과 교섭을 개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한자․유교․불교․의(醫)․역(易․역(曆)학 등이 백제로부터 전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야마토조정에서는 철기생산․양잠․토기제조․토목분야에 한국남부출신의 기술자집단이 활약하였다.
5세기 이후 철제농기구 사용으로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일본의 고분문화는 변질하게 된다. 즉 군집분(群集墳)이 생겨나고 추장(追葬)을 할 수 있는 횡혈식석실이 백제로부터 전래되고, 회색의 경질토기인 스에키(須惠器)가 만들어진다. 지방마다 종교적 장소인 사(社)가 만들어졌으며, 농사의 풍작을 위해 기년제(祈年祭)․신상제(新嘗祭) 등의 종교의례가 만들어졌다.
♣ 2. 律令國家와 大陸文化의 攝取 ♣
(1) 스이코(推古)조와 아스카(飛鳥)문화
6세기에는 야마토정권의 유력호족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주도권은 오오토모(大伴)씨에서 모노노베(物部)씨, 다시 소가(蘇我)씨로 옮겨가게 되었다. 6세기말부터 7세기초에 소가씨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를 여제 스이코(推古)천황의 섭정으로 삼아, 견수사(遣隋使)를 파견하고 관위 12계제․역사 편찬 등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백제의 기술원조로 아스카(飛鳥)지방에 사원건축이 유행하면서 불교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소가씨의 아스카데라(飛鳥寺)와 쇼토쿠태자의 호류지(法隆寺) 등이 건립되고, 호류지(法隆寺)의 금동석가삼존상과 목조관음상, 코류지(廣隆寺)의 반가사유상 등이 만들어졌고, 삼경의소(三經義蔬)와 같은 불교주석서도 만들어졌다. 또한 고구려(高句麗)의 담징(曇徵)에 의해 종이․먹․그림도구의 제조법이 전해졌으며, 백제의 관륵(觀勒)은 역(曆)법을 전해 역사서와 기록의 발달을 도왔다. 이와같이 6세기말부터 7세기전반의 백제의 영향이 강한, 불교중심의 문화를 아스카(飛鳥)문화라 한다.
(2) 율령국가의 형성과 하쿠호(白鳳)문화
640년대에 한반도에서는 권력집중이 일어났으며, 일본에서는 소가씨가 독재권을 확립하고 이었다. 야마토조정에 당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에 의해 수․당의 율령국가체제가 알려지면서, 소아씨 독재를 타도하고 천황중심의 중앙집권국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645년, 코쿄쿠(璜極)천황의 장자 나카노오오에(中大兄)황자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와 함께 쿠테타를 일으켜 소가(蘇訝)씨 정권을 타도하고, 황태자로서 국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신정부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목표로 한 개혁을 추진해나갔는데, 이를 다이카개신(大化改革)이라 부른다.
660년 한반도에서는 당(唐)과 연합한 신라(新羅)가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의 호족들은 당과 신라에 저항하면서,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일본은 이에 응해 원군을 보냈으나, 663년 백촌강(白村江)싸움에서 대패한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676년에는 당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을 통일하였다.
백촌강의 패전후 나카노오오에 황자는 요지에 조선식 산성을 축성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고, 668년에는 천황(天智)으로 즉위하여, 영(近江令)과 호적을 만들어 율령국가체제를 마련하였다. 그후, 임신(壬申)의 난을 통해 즉위한 덴무(天武)천황은 천황중심의 새로운 신분질서를 만들고, 영(飛鳥淨御原令)을 제정하고 국사편찬을 하였다. 701년 몸무(文武)천황때에 일본실정에 맞게 영을 수정한 다이호(大寶)율령이 완성되어 율령정치의 틀이 정비된다.
일본 율령국가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여 관료제와 중앙집권적인 행정기구를 가진 천황제국가였다. 중앙에는 천황 밑에 2관(太政宮․神祇宮)과 8성을 두었다. 지방은 전국을 기내(畿內)와 7도의 행정구로 나누고 그 밑에 코쿠(國), 군(郡), 리(里)를 두고 코쿠시(國司)․군시(郡司) 등을 임명하였다. 관리는 관위에 따라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관위 5위이상은 귀족으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특권이 있었다.
율령국가는 양천제적 신분사회로, 양민의 대부분은 농민으로 6년마다 6세이상의 남녀 모두가 구분전(口分田)을 지급받는 대신 조세를 부담하였다. 특히 17세에서 65세까지의 남자농민은 조세이외에도 요역에 종사하거나 병사로 징발되었다.
7세기후반-8세기초 율령국가 형성기에, 멸망한 백제․고구려의 유민들의 영향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발달하였다. 덴무천황이후 국가불교의 발달과 함께 불교예술이 발달하여, 코후쿠지(興福寺) 불두나 야쿠시지(藥師寺) 금당약사여래상․호류지 금당벽화 등이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고구려의 영향을 보여주는 다카마쓰쓰가(高松塚)고분벽화 등이 만들어졌으며, 한시의 영향을 받아 5음7음을 기본으로 하는 와카(和歌)의 정형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의 문화를 하쿠호(白鳳)문화라고 한다.
(3) 나라시대의 문화
710년 당나라의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헤이죠쿄(平城京)가 나라(奈良)에 완성되어 천도한 후, 784년 교토(京都)의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길 때까지 80여년간을 나라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율령정부는 일본열도의 동북과 남서로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쓰시마(對馬)․무츠(陸奧)에서 황금광산이, 무사시(武藏)에서 동광산이 개발되었다.
양잠․직물기술자를 지방에 파견하여 기술보급에 힘쓴 결과, 지방의 특산품으로서 조정에 헌상되었다. 당을 모방하여 화폐를 만들어 유통을 장려하였으나, 도읍과 기내(畿內)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벼나 포가 계속 사용되었다.
8세기에는 15년 내지 20년에 한번씩 견당사가 파견되어, 많은 유학생과 유학승이 당의 문물수입에 큰 공헌을 하였다.
통일신라(新羅)와는 서로 경계하면서도 빈번히 교류하여, 신라와 관계가 재개된 668년부터 양국의 공식관계가 끝난 779년까지 신라는 46회, 일본은 26회 사신을 파견하였다. 8세기후반이후 양국관계가 무역중심으로 변하여, 9세기에는 사무역이 중심이 된다. 727년 발해에 사신파견으로 시작된 양국관계도 활발하여 9세기에 발해에서 11회, 일본에서 9회 사신이 파견되었다.
율령정부는 722년 100만정보개간계획을 세우고, 723년에는 개간지의 3대사유법을, 743년에는 영구사유법을 발표하였다. 이로서 토지사유가 가능해져, 장원(莊園)발생의 단서가 마련되었다.
8세기중반이후 잦은 전쟁으로 여러 귀족들이 몰락하였으나, 다이카개신의 공신 카마타리(鎌足)을 시조로 하는 후지와라(藤原)씨는 후히토(不比等)의 두 딸이 몸무천황과 쇼무(聖武)천황의 비가 된 이후, 계속 천황가의 인척으로서 황족에 준하는 지위를 누리었다.
황족과 귀족의 부유한 생활을 바탕으로 나라중심의 귀족문화가 꽃피었는데, 이 문화를 쇼무(聖武)천황의 연호를 따사 덴표(天平)문화라 한다. 이 시기에는 국가불교가 발달하여 각 지방마다 코쿠분지(國分寺)를 설립하고,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에는 대불을 조영하였다. 나라의 주요사찰(南都六宗)에서는 불교의 여러 종파의 강의가 있었다.
유교중심의 귀족 교육기관(大學)과 지방 호족교육기관(國學)이 있었고, 역사서(古事記, 日本書紀)․시가집(万葉集)․지지(地誌, 風土記) 등의 편찬이 이루어졌으며, 도다이지법화당과 도쇼다이지(唐招提寺)금당과 같은 당풍(唐風)건축과 소상(塑像)․건칠상(乾漆像)조각이 유행하였다.
(4) 헤이안(平安) 前期의 文化
8세기후반부터 조세부담을 피하기 위한 농민의 유랑이 증가하였다. 간무(桓武)천황은 794년에 헤이안쿄로 천도하고, 율령제 재건을 위해 12년마다 반전(班田)을 시행하고, 잡요를 경감하였다. 또한 농민병사를 폐지하는 대신 호족 자제들로 군대를 편성하고, 동북지방을 점령하였다.
헤이안(平安)천도부터 9세기말까지, 헤이안 전기에는 대학기숙학교들과 서민교육기관이 만들어졌으며, 한시문집과 관찬역사서가 계속 편찬되었다. 불교계에서도 새로운 풍조가 일어 사이쵸(最澄)가 천태종(天台宗)을, 쿠카이(公海)가 진언종(眞言宗)을 열었으며, 신불습합(神佛習合)이 진행되어 신사의 경내에 신궁사(神宮寺)가 만들어졌다. 천태종과 진언종의 영향으로 산악가람이 늘어났으며, 나무하나로 만드는 불상조각이 유행하였고, 부처의 세계를 특이한 구도로 그린 만다라(曼茶羅)가 유행하였다.
♣ 3. 貴族政治와 文化의 國風化 ♣
(1) 셋칸(攝關)정치
천황가의 인척 후지와라(藤原)씨는 후히토의 네 아들별로 일가를 이루어, 4家가 있었다. 858년이후 북가(北家)가 미성년 천황을 보좌하는 셋쇼(攝政)와 성년 천황을 보좌하는 간바쿠(關白)를 독점하였는데, 이와같이 셋쇼와 간바쿠에 의한 정치를 셋칸(攝關)정치라 한다. 이 정치는 11세기초에 극성기를 맞이하나 11세기말 인세이(院政)가 시작되면서 약화되었다.
이 시대에는 지방에서 반전수수법이 시행되지 못 하여, 개간지와 구분전을 사유화한 지방호족과 유력농민은 후지와라씨나 유력한 사원․신사의 보호를 받았다. 지방정치가 문란해지자 호족들은 자체방위를 위해 일족을 조직하여 무사단을 만든다. 이 무사단들은 다시 유력자(棟梁)를 중심으로 결합하게 되는데, 황족의 후예인 미나모토(源)씨와 다이라(平)씨가 가장 강력하였다.
(2) 國風文化
894년 견당사가 폐지된 후, 일본은 송․고려와 공적인 국제관계를 갖지 않았다. 이 시기에 일본적인 문화가 만들어졌는데 이 헤이안 중기문화를 코쿠후(國風)문화라 한다. 가나(假名)의 발달로 일본국문학(日本國文學)이 발달하여, 와카(和歌)가 공식장소에서 유행하였으며, 일기나 수필(枕草子), 이야기(源氏物語)들이 가나로 씌어졌다.
불교의 천태종과 진언종이 귀족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일본에 와서 천황가의 조상신(天照大神)이 되었다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이 생겨났다. 그러나 한편 말법사상이 유행하면서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바라는 정토교(淨土敎)도 귀족과 서민층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건축에서는 신덴즈쿠리(寢殿造)라는 일본적인 건축양식이 생겨나고, 일본의 풍물을 그린 야마토에(大和繪)가 등장하게 되었다. 정토교의 유행으로 지방에 사원이 건립되고, 불상도 대량생산되었고, 왕생하려는 사람을 부처가 맞으러 오는 그림도 유행하였다.
당시의 귀족의 복장도 일본색이 풍부하였다. 식생활은 비교적 간소하여, 식사는 1일 2회로, 불교의 영향을 고기를 먹지 않았고 조리에 식용유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헤이안쿄의 귀족의 결혼생활은 처가거주형으로 아이도 처가에서 양육하였다. 다다미를 깔고 앉아서 생활하였으며, 연중행사가 발달하였고, 미신과 원령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3) 인세이(院政)와 다이라(平)씨의 全盛
11세기후반 후지와라(藤原)씨 소생이 아닌 고산죠(後三條)천황이 친정을 실시하면서 셋칸정치는 끝났다.
시라가와(白河)․토바(鳥羽)․고시라가와(後白河)천황 등은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서 인(院)에서 정치를 하였는데 이를 인세이(院政)라 한다. 인세이는 100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에 불사에 의한 낭비와 관직․관위의 매매 및 승병의 시위 등으로 율령정치는 더욱 붕괴되고, 장원은 확대되었다.
인세이 말기에는 1156년 천황과 상황의 대립을 게기로, 무사단이 중앙에서 활약하게 되어, 1159년 미나모토(源)씨를 누리고 정권을 장악한 다이라(平)씨는 천황의 인척으로 약 20년간 권력을 휘둘렀다.
인세이의 문화의 특징은 문화의 지방화․서민화가 진전되었다는 점이다. 정토교사상의 보급으로 지방에도 훌륭한 건축물이 만들어졌으며, 유행가요와 덴가쿠(田樂)와 같은 서민예능이 발달하였다. 설화집 今昔物語集과 무사들의 활약담 陸奧話記, 일본어 문체의 역사서 榮華物語․大鏡 등이 만들어졌으며, 야마토에(大和繪)에 이야기를 넣은 에마키모노(繪卷物)도 유행하였다.
中 世
♣ 1. 武士社會의 形成 ♣
(1) 가마쿠라(鎌倉) 幕府의 成立
다이라(平)씨 일족정치에 대한 반감이 무사단․귀족․사원사이에서 커지자,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다이라씨 타도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켰다. 요리토모는 1183년 동국의 행정권을 장악, 가마쿠라(鎌倉)를 거점으로 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간다. 1185년 단노우라(壇の浦)의 싸움으로 다이라씨를 멸망시키고, 칙허로 슈고(守護)․지토(地頭)의 설치권을 얻어내어 군사경찰권을 장악하였고, 1192년에는 무사의 통솔자를 의미하는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된다. 이 무가정권을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라 하는데, 이후 약 140년간 계속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쇼군(將軍)의 밑에 중앙의 조직으로 사무라이토코로(侍所)와 쿠몬죠(公文所)․만도코로(政所)․몬츄죠(問注所) 등이 있었다. 또한 각지의 공령과 장원에는 쇼군의 가신을 슈고․지토로 파견하여, 치안유지와 연공징수를 담당케 하였다.
막부지배의 근본은 토지에 대한 권리(式)을 매개로 한 장군과 가신과의 주종관계에 있었으므로, 가마쿠라 막부는 봉건제도(封建制度)에 기초한 일본최초의 정권이었다. 그러나 천황조정의 코쿠시(國司)와 장원영주들이 여전히 존재하였고, 무사들은 토지의 일부권리만을 가졌으므로, 그 지배체제는 무가와 천황조정 귀족의 이원적 지배체제로 봉건제도는 아직 미약하였다.
(2) 執權政治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은 초기에는 쇼군(將軍)에 있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의 사후, 부인 마사코(政子)의 부친 호죠 도키마사(北條時政)가 싯켄(執權)으로서 쇼군을 보좌하였으나, 3대 장군의 암살로 미나모토씨의 쇼군(將軍)시대는 끝나고, 호죠씨가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교토조정에서 세력을 만회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221년 고토바(後鳥羽)상황이 군대를 일으켰지만, 막부군의 승리로 끝났다(承久의 亂). 이후 막부는 황위계승에 개입하고 교토조정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으며, 상황측에 가담한 귀족․무사의 영지를 몰수하고 새로 지토를 임명하였다. 그 결과 막부는 전국지배를 확대하여, 천황조정에 대한 막부의 우위를 확립하였다.
승구의 난(承久의 亂)후 막부는 집권 밑에 렌쇼(連署)와 효죠슈(評定衆)를 두어 합의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무가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 무가최초의 체계적 법전인 정영식목(貞永式目) 51개조를 제정하였다.
당시의 무사는 집(館) 주위에 흙으로 소성곽을 쌓고 주변해 해자를 두르고 살면서, 하인이나 농민을 써서 직영지를 경작케 하는 한편, 쇼칸(莊官)이나 지토로서 연공징수를 담당하고 연공의 일부를 받았다. 무가사회에서는 혈족의 결합이 공고하여 일족의 장을 대표로 하여 막부에 봉사하였으며, 여자도 포함한 분할상속이 일반적이었다. 주인에 대한 「봉공」을 위해 무예를 연마하였으며, 검소․무용(武勇)․충성․명예 등을 중시하였다. 이 무가의 도덕은 에도(江戶)시대의 무사도(武士道)로 이어진다.
그러나 지토들 중에서 연공을 횡령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자, 장원영주는 장원의 지배권을 지토와 나누어 갖는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 결과 장원의 현지지배는 점차 무사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가마쿠라 중기에는 기내와 서일본의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고, 비료가 이용되고 우마의 사용과 농구의 보급이 늘어났으며, 종이․염료․등유등의 원료가 재배되었다. 또한 주물사․옹기장이 등의 전문수공업자가 농촌에 등장하였다.
농촌의 생산물의 교역을 위해 정기시가 열려, 지토와 쇼칸은 상인에게 세를 거두고, 연공미 등을 여기서 팔아 돈으로 만들어 교토나 나라의 장원영주에게 보냈다. 도시에서는 장원영주들을 대상으로 한 양조․고급직물․무기․공예품 등 수공업 생산이 이루어졌다. 제조와 판매의 독점을 위해 「자(座)」라는 상공업자 동업조합이 있었으며, 원격지간 거래에는 어음(爲替)이 결제수단으로 사용되어, 고리대금융업자 「借上」․「土倉」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당시의 화폐로는 무역을 통해 수입한 송(宋)의 화폐가 사용되었다.
(3) 鎌倉文化
막부성립 초기에는 오랜 전통을 지닌 공가문화가 우세하였으나, 송․원(元) 문화의 영향으로 소박하면서도 힘찬 무가문화가 생겨났다. 전란과 재해, 귀족세력의 몰락과 다이라(平)씨의 성쇠를 본 사람들은 더욱 더 현실부정의 말법사상을 가지게 되어 종교의 구원을 구하였다. 이러한 때 나타난 것이 가마쿠라신불교(鎌倉新佛敎)다.
신불교는 계율․학문․기진(寄進) 등을 중시하는 구불교를 배척하고, 염불․선․제목(題目)중에서 한 길을 정진하면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크게 정토교계․선종․니치랜종(日蓮敎)으로 나눌 수 있다.
정토교계통에는 정토종․정토진종․시종(時宗)이 있는데 모두 염불을 중시하여 무사․서민층에 퍼졌다. 니치랜종은 니치랜이 창시한 것으로 관동의 무사층에 퍼졌는데, 제목(南無妙法蓮華經 7글자)를 외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송에 유학한 승려에 의해 선종도 전해졌는데, 공안(公案)을 중시하였던 임제종과 좌선을 중시하는 조동종이 있었다.
신불교의 등장으로 나라의 구불교계에서도 혁신이 일어나, 빈민․병자를 구제하고 도로․다리를 건설하였다.
가마쿠라시대의 문학으로는 군기물(平家物語)․설화집(古今著聞集)․수필(徒然草)들이 발달하였다. 학문도 발달하여 공가사회에서는 고전연구(釋日本紀), 송학(宋學), 역사(愚管抄)의 편찬이 있었으며, 무가사회에서도 가마쿠라 막부의 역사(吾妻鏡)가 편찬되고, 호죠씨는 가나자와문고(金澤文庫)를 설치하였다.
가마쿠라시대에는 예술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조각이 힘있고 인간미 넘쳤으며, 초상을 조각하기도 하였고, 그림은 두루말이 그림(繪卷物)과 초상화가 발달하였다. 공예품으로는 도검과 도기․갑주의 생산이 발달하였다.
(4) 원구(元寇)와 幕府의 衰退
12세기초 강남의 남송과 일본사이에 국교는 열리지 않았으나, 사무역과 승려․상인의 왕래는 활발하였다. 13세기후반 원(元)의 쿠빌라이의 조공요구를 싯켄 토키무네(時宗)가 거절하자, 원은 고려(高麗)와 연합군을 만들어 1274년 규슈북부를 침략하였다. 원군의 화약과 집단전법에 일본군은 고전하였으나, 때마침 폭풍이 불어 원군은 물러갔다. 그후 원은 남송을 멸망시키고 1281년 다시 규슈북부를 침입하였으나, 일본군의 분전과 폭풍우로 다시 패퇴하였다. 이 두차례의 원의 칩입을 「겐코(元寇)」라 한다.
겐코때에 조정과 사원․신사에서는 신불(神佛)의 가호를 비는 기도가 계속되었는데 원이 퇴각하자, 일본에는 신국사상이 강화되었다. 전시하 막부의 호죠씨는 독재체재를 통해, 전국지배를 강화하게 되었으나, 전비를 부담하였으면서도 보상을 받지 못한 무사들은 막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분할상속제도로 궁핍해진 무사들은 영지를 팔든가 빚을 지게 되었다.
막부는 1297년 무사들이 판 영지를 원상회복케 하는 명령을 내렸으나 별로 효과는 없었으며, 개내부근에서 장원영주나 막부․슈고의 지배를 반항하는 무사들의 집단 행동이 일어나면서 막부체재는 동요하게 되었다.
♣ 2. 武家社會의 成長 ♣
(1) 무로마치(室町) 幕府의 成立
1324년과 1331년에 고다이고(後醍?)천황이 벌인 막부타도운동을 계기로하여, 무사들이 각지에서 거병하였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와 닛타 요시타카(新田義貞)도 막부에 반기를 들고 호죠(北條)씨 일족을 공격하여 1333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타카우지가 무가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1336년 교토조정을 공격하자, 고다이고천황은 남쪽 요시노(古野)로 도망갔다. 이후 1392년까지 타카우지가 세운 교토의 천황(北朝)과 요시노의 천황(南朝)이 병존하여, 전국의 무사들도 둘로 나뉘어 싸웠다. 이 50여년의 쟁란기를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라 한다.
북조의 타카우지는 겐무식목(建武式目)을 제정하여 정치의 기본을 정하고 1338년 세이다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막부정치가 부활되었다. 3대 장군 요시미츠(義滿)때에 남북조가 통일되고(1392), 막부기구가 정비되었다. 막부는 장군 밑에 정무를 총괄하는 3인의 칸래이(管領)을 두고, 그 밑에 가마쿠라시대이래의 사마라이코로(侍所) 등의 지배기구를 두었다. 지방에는 슈고를 설치하고, 관동에 가마쿠라부(鎌倉府), 규슈에 규슈탐제(九州探題) 등을 두었다.
요시미츠는 막부를 교토의 무로마치(室町)에 두었으므로, 이 아시카가(足利)씨의 막부를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라 부른다.
남북조시대에 막부는 슈고(守護)에게 군사․경비권외에 연공의 반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슈고는 장원을 지배하고 무사들을 가신으로 삼아 영주가 되었다. 이렇게 영주로 변한 강력한 슈고를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 한다. 유력한 슈고다이묘는 칸래이(管領)와 사무라이도코로의 장관이 되었으므로 이 시대의 막부를 슈고다이묘의 연합정권과 같았다.
겐코이후 원과 공식국교는 없었으나, 무역은 활발해져 상인․승려들이 왕래하였다. 가마쿠라말기부터 규슈북부와 세토(瀨戶)내해 연안의 무사와 어민들이 원과 고려의 연안에 진출하여 무역을 하거나 해적이 되었는데, 이들을 원과 고려에서는 「왜구(倭寇)」라 불렀다.
명(明)의 왜구단속요구를 받아들인 요시미츠는 정식무역선에 도항증명서(勘合)을 발행하였는데, 감합은 점차 슈고다이묘 호소카와(細川)․오우치(大內)씨가 발행하게 되었다.
1419년 조선(朝鮮)은 쓰시마(對馬)를 공격하고, 왜구 금압을 일본측에 요구하는 한편, 쓰시마의 소(宗)씨에게 도항자의 통제와 특허무역을 허락하였으나, 1510년 삼포의 난이후에는 무역이 쇠퇴하였다. 일본은 조선에 염료와 후추 등을 수출하고, 목면․대장경 등을 수입하였다.
15세기초 상씨가 등장하여 오키나와(沖龜)를 통일하고, 16세기에는 류큐(琉球)왕국이 건설되어, 명․조선․일본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 상선을 파견하여 향료 등의 중계무역이 번성하였다.
(2) 幕府의 衰退와 庶民의 擡頭
무로마치 막부초기에는 쇼군(將軍)과 유력다이묘(大名)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6대 쇼군은 슈고다이묘의 통제를 강화한 「만인공포」정치의 실시로 반발을 사서 결국 살해당하고, 막부의 쇼군의 권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9대 쇼군때에는 쇼군도 통제할 수없을 정도로 슈고다이묘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특히 호소카와(細川)씨와 야마나(山名)씨의 막부내에서 세력다툼이 치열하였는데, 여기서 쇼군가와 칸래이가의 상속다툼이 겹쳐 1467년(應仁 元年) 44개국 슈고다이묘와 27만대군이 동서군으로 나뉘어 11년간 싸웠다. 이를 응인(應仁)의 난(1467-77)이라 한다.
응인의 난 이후 약 100년간 일본전국의 무사들이 서로 싸우는 센코쿠(戰國)시대가 계속되었다. 센코쿠시대에 하극상의 전란 속에서 새로 세력을 확대한 유력영주를 센코쿠다이며(戰國大名)라 한다. 센코쿠다이묘에는 이마가와(今川)․다케다(武田)씨 등과 같이 슈고다이묘(守護大名)출신도 있었으나, 오다(織田)․모리이(毛利)씨 등 대부분은 다이묘의 가신출신이었다.
센코쿠다이묘는 강력한 군대와 독자적인 법을 만들어 장원영주를 무시하고 무사․농민을 지배하였다. 그리고 부국강병을 위해 경지개발, 관개․치수사업, 금은광산의 개발, 상공업자의 보호에 노력하였다. 센코쿠다이묘는 대개 성을 쌓고 부하와 상공업자를 모여 살게 해 도시(城下町)를 만들었다.
무로마치시대에는 마경․우경․비료 등이 널리 보급되고, 관개․배수기술의 발달로 이모작이 전국에 확대되었으며, 16세기에는 면화의 재배도 시작되었다. 유력농민중에서 무사가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 이들 지조하에 농민들은 촌마다 자치조직을 만들어 단결을 꾀하였다. 관개용수와 산야의 공동이용을 위한 규약을 정하고, 장원영주나 슈고다이묘와 연공을 교섭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무사와 농민의 자립에 의해 장원영주는 붕괴하고 장원은 유명무실해졌다.
수공업도 각지에서 발달하게 되었다. 수공업자들은 주문생산뿐만 아니라 시장생산도 하게 되었다. 견직물․도기․술․도검 등의 제조기술이 진보하여 각지방의 특산품이 생겨났으며, 전문적인 직인도 많아져 이들의 동업조합도 발달하였다. 교통의 요지에는 상품거래 중개상이 생겨났으며, 운송업자들이 활약하였다. 수상교통도 발달하여 정기선(廻船)이 있었다. 물자의 유통도 활발해져 무로마치시대 중기이후 정기시는 5일마다 열리게 되었다.
송․원․명의 중국화폐와 과거의 일본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연공도 전납으로 바뀌고, 토지의 매매에도 화폐가 사용되었으며, 어음도 사용되었다.
화폐경제의 진전은 금융업자․고리대금업자를 부유하게 하였으나, 무사와 농민은 빚때문에 토지를 팔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촌과 도시(町)의 자치가 발달하면서 연공감액․부채탕감등을 요구하는 무사․농민․종교단체 등의 집단행동이 일어나, 막부와 슈고다이묘가 지배하는 사회를 동요시켰다.
(3) 무로마치(室町)문화
무로마치시대의 문화는 무가세력과 민중의 대두를 바탕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성격은 가마쿠라시대의 무가문화에 선종을 매개로 하여 전해진 중국문화의 영향이 더해진 것이다.
3대 장군이 교토의 기타야마(北山)에 세운 킨카쿠(金閣)는 귀족적인 신덴즈쿠리(寢殿造)양식과 선종사원의 양식을 채용한 건물로, 이를 대표로 하는 무로마치초기의 문화를 기타야마문화라 한다. 이 시기에는 임제종이 막부의 보호로 번영하였고, 선종의 영향으로 수묵화가 유행하고 선종 경전 및 한시편집의 출판이 이루어졌다. 또한 가무연극인 노(能)의 전문예능집단이 등장하여 막부의 보호로 발전하였다.
8대 장군이 교토의 히가시야마(東山)에 세운 긴카쿠(銀閣)는 선종사원양식을 무사의 거주양식에 도입한 것으로, 이것으로 대표되는 무로마치후기의 문화를 히가시야마문화라 한다. 이 시기에는 應仁의 亂으로 지방으로 피난간 공가와 승려들에 의해 교토문화가 지방에 파급되었으며, 상공업자나 농민층에서도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다.
무로마치시대문화의 특징은 무사와 귀족뿐만 아니라 민중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탄생하였다는 점이다. 복수의 사람들이 와카(和歌)를 계속 이어 간랜가(連歌)라든가, 노(能)의 막간에 상영되었던 코겐(狂言),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춤을 추었던 봉오도리(盆踊り) 등이 그것이다. 또한 이 시대문화에는 다다미․후스마․도코노마 등 일본생활문화의 원류가 많다. 가마쿠라시대의 신불교도 무사․농민․상공업자들의 신앙에 의해 도시와 농촌으로 퍼져 더욱 교세를 확장하였다.
센코쿠(戰國)시대에는 유력한 다이묘들의 죠카마치(城下町)를 중심으로 각지에 문화의 중심이 생겨났다. 유학이 다이묘들의 필수학문이 되었고, 무사자제는 주로 사원에서 교육받았는데, 특히 우에스기(上杉)씨의 아시카가(足利)학교는 전국의 선승과 무사들이 모여들었던 학교로 많은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도시의 부유한 상공업자나 촌락의 유력자들도 읽고 쓰고 계산하는 능력을 기르게 되었다.
近 世
♣ 1. 막번(幕藩)體制의 確立 ♣
(1) 쇼쿠호(織豊)政權
1543년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한 포루투갈인이 대포를 전래한 후 포루투갈과 에스파냐의 상선이 일본에 와서 무역을 하였다. 또한 1549년 예수회의 선교사 사비에르를 시초로 많은 선교사가 일본에서 포교․교육․의료활동을 하여 신자의 수는 급증하였다.
대포의 전래로 보병 대포부대가 활약하게 되면서 통일사업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이어진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3년 아시카가씨의 무로마치막부를 멸망시키고, 오우미(近江)의 아즈치(安士)성을 근거지로 하여 전국통일에 힘썼으나, 부하장수의 배반으로 1582년 자살하였다.
오다의 부하 도요토미는 1583년 오다의 후계자 지위를 확보하고, 오사카(大阪)성을 축성하여 통일의 거점으로 삼아, 1590년에 전국통일을 완수하였다. 도요토미정권은 토지조사를 통해 경작자를 연공부담자로 정하고, 농민의 무기를 몰수하여 병농분리(兵農分離)를 꾀하였다. 한편 대외정책면에서는 크리스트교를 탄압하고, 고아․루손․대만에 조공을 요구하였으며, 1592년과 1597년에 조선(朝鮮)을 침략하였다.
오다․도요토미시대의 문화는 신흥다이묘․거상(巨商)들의 기풍을 반영하여 호화롭고 웅장하며 현세적․향락적이었다. 특히 성곽건축에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대부터 사탕과 간장이 사용되었고 1일 3회의 식사와 간식이 일반적이 되었으나, 서민들은 여전히 잡곡을 주식으로 하였다.
(2) 에도(江戶)幕府의 成立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싸움에서 승리하여 전국지배권을 확립한다. 이에야스는 1603년에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에도(江戶)막부를 열고, 1615년 오사카성을 공격하여 도요토미씨를 멸망시킨다. 과거의 어떤 무가정권보다도 강력하였던 에도막부는 260년간 계속된다.
에도막부는 쇼군 밑에 로츄(老中)이하의 관직을 두어 쇼군의 부하무사를 임명하였다. 쇼군의 부하무사는 다이묘(大名)와 하타모토(旗本), 고케닌(御家人)으로 나뉘어, 다이묘는 쇼군으로부터 1만석이상의 영지를 수여받는 무사로, 그 영지를 번(藩)이라 했다. 하타모토와 고케닌은 1만석미만의 영지를 받은 쇼군직속의 가신으로 막부 군사력의 중심이 되었으며, 특히 하타모토는 쇼군을 알현할 수 있었다.
에도막부의 쇼군은 다이묘의 영지내(藩)의 정치에 간섭하는 일은 없었으나 막부에 대한 반란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하여, 다이묘는 처자를 에도에 두고 자신의 영지와 에도를 왕복하면서 생활하게 하였다. 이 왕복비용과 에도생활비용 및 막부의 토목공사 등의 부담으로 번(藩)의 재정은 궁핍해졌다.
에도시대에 쇼군(將軍)과 다이묘의 영주권에 의해 토지․인민을 지배하는 체제를 막번체제(幕藩體制)라 하는데, 이는 농민이 부담하는 연공과 부역을 경제적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 막부의 경제력은 약 400만석의 직할지(天領)의 연공과 직할도시의 영업세, 주용광산과 도로, 화폐의 주조권 등에 있었다.
에도막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천민으로 나뉜 엄격한 신분제도를 확립하여, 집안대대로 전해온 직업과 가부장의 절대권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막부는 사원을 민중지배에 이용하기 위해 혼인․여행․취직에 필요한 증서를 절에서 발부하게 하였다.
무사도(武士道)라는 엄격한 도덕을 요구받았던 무사는 성의 경비와 영지내의 행정을 맡아보고 봉록으로 토지나 쌀․화폐를 받았으나, 상급무사를 제외하고는 생활의 여유가 거의 없었다. 전 인구의 80%이상이었던 농민은 수확량의 40-50%를 연공으로 바쳐서 무사의 생활을 지탱하였다. 농민은 전답의 매매․분할상속금지 등, 일상생활 등에서 규제를 받고 있었다. 농민에는 자작농과 소작농의 신분계층이 있어, 자작농은 연공․잡세․노역 등을 부담하였고 유력한 자작농은 관리로 촌의 운영에 참여하였다.
(3) 鎖國政策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역이익때문에 포루투갈과 에스파냐의 상선의 내항을 환영하고 크리스트교 포교를 묵인하였으며, 무역선에는 도항허가증(朱印狀)을 주어 보호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신자가 70만명으로 늘어나자, 막부는 크리스트교의 인간평등사상과 부유한 다이묘의 등장에 대해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영국․네델란드가 일본무역독점을 위해 포루투갈과 에스파냐의 영토확장을 막부에 알리자, 막부는 포교를 금지시키고 무역을 단속하였다. 신교자나 신자는 국외로 추방되든가 처형당하였으며, 무역항은 히라토(平戶)와 나가사키(長崎)로 제한되고, 에스파냐의 내항은 금지되었다. 또한 일본인의 해외도항과 해외거주 일본인의 귀국도 금지되었다.
크리스트교 신자 중심의 시마바라(島原)의 난을 진압한 막부는 모든 사람들을 절의 신자로 등록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고 1638년 포루투갈선의 내항을 금지한 쇄국령을 발표한다. 이로서 네델란드․명․조선을 제외한 외국과의 통교는 금지되어 이후 200여년간의 쇄국체제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무역항 나가카시에는 네델란드․중국과의 무역이 이루어졌으며, 이에야스때 국교를 정상화한 조선과는 쓰시마의 소(宗)씨를 통해 외교․무역이 이루어졌고 쇼군의 교체시마다 조선에서 통신사(通信士)를 파견하였다. 또한 1년에 한번씩 내항하는 네델란드상선이 제출하는 보고서를 통해 막부는 외국의 동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부분적인 쇄국정책이라 할 수 있는데, 이로서 막번체제는 안정되고 국민문화도 형성되어 갔으나 세계정세에 뒤지게 되었다.
♣ 2. 幕藩體制의 展開 ♣
(1) 幕藩의 安定과 經濟의 發展
3대 장군때까지는 무단정치였으나 4대 장군때부터는 세상이 안정되면서 문치정치(文治政治)로 이행해간다. 4대 장군 이에츠나(家綱)는 다이묘의 교체를 완화하였고, 순사(殉死)와 인질(人質)을 금지하고, 치수관계․식산흥업․문교진흥 등의 번정쇄신을 장려하여 17세기후반에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였다. 5대 장군 츠나요시(綱吉)도 주자학과 불교를 장려하였으나 방만한 운영으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6, 7대 장군때에는 유학자 아라이 하세키(新井白石)를 등용하여 문치정치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正德의 治). 아라이는 재정악화를 막기위해 조선사절단 접대비를 절약하고 무역액을 제한하여 금은수출을 방지하려 하였다. 또한 번(藩)의 재정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무사의 봉록을 삭감하도록 하여 무사층의 불만을 사게 된다. 상인들은 신전개발․양조업․수공업 등으로 부를 축재하는 반면, 농촌에서는 자작농이 몰락하고 기생지주가 성장하였다.
8대 장군 요시무네(吉宗)는 정치쇄신과 재정재건을 위해 검약령․다이묘의 쌀 헌납․연공증액․신전개발․식산흥업․쌀값조절 등의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교호(享保)개혁이라 한다. 이 결과 막부재정은 회복하였으나 농민의 궁핍화현상이 심해져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2) 經濟發展과 쵸닌(町人)의 擡頭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막부와 번은 재정의 기초가 되는 농업수입의 증가를 꾀하였다. 신전개발로 18세기초에는 16세기의 2배정도로 전답이 늘어났으며, 농서의 보급으로 농업생산에 발전이 있었다. 18세기에 농촌에서도 화폐가 사용되자 농민들은 뽕․마․면화․유채․야채․담배 등의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도시의 시장에서 팔았다. 어업도 발달하여 정어리잡이가 활발하였다. 광업에서도 채광․정련기술의 발달로 금은동의 광산이 번성하였다.
도시직인에 대한 수공업은 15세기부터 16세기에 수입된 기술에 의해 철포․직물․야금 등을 중심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농촌에서도 직물․칠기․종이 등의 수공업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재정수입증대를 위해 산업을 장려한 번에서는 여러 특산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농촌가내공업이 전대제(前貸制)가내공업으로 바뀌었으며, 도시에서도 목면․양조․견직․칠기․도자기․제지 등의 각종산업이 발달하였다.
막부는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교통망을 만들어 5가도 등의 가도가 정비되고 숙박시설과 긴급통신(飛脚)제도 등이 설치되었다. 대량수송을 담당하였던 것은 해상교통으로 에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연안항로에는 정기배편이 운항하였다.
교통이 발달하자 도시가 발달하였다. 도시중에서도 에도(江戶)․오사카(大阪)․교토(京都)는 3도(三都)로 불리면서 중시되었다. 쇼군(將軍)의 도시 에도는 18세기초에는 인구 100만이상에 무가인구만도 50만에 달하는 정치의 중심지였다.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이라 불리웠던 물자의 집산지였으며, 교토는 전통적 학예․종교도시로서 공예산업이 발달하였다.
도시의 쵸닌(町人)은 자가를 소유한 사람과 임대한 사람(地借․店借)로 나뉘어져, 전자는 영업세를 부담하고 도시의 행정에 참여하였다.
(3) 에도(江戶)前期의 文化
18세기전반까지의 에도시대전기에 오사카․교토에서 꽃피었던 쵸닌문화를, 그 절정기의 연호를 따서 겐로쿠(元祿)문화라 한다. 이 문화의 특징은 쵸닌의 현실주의적 경향과 인간미를 표현한 도시적이며 세련된 문화라는 점이다.
쵸닌의 생활과 감정을 반영한 문예가 일어나 연애와 금전욕 등 쵸닌생활을 묘사한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가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에 의해 창시되었다. 또한 렌가(連歌)로부터 독립한 17자의 하이카이(俳諧)에서는 마츠오 바쇼(松尾芭蕉)가 예술성 높은 작품을 남겼다.
구송예능 죠루리(淨瑠璃)는 인형극과 결합하였는데, 봉건제하의 인간의 의리와 인정을 묘사한 치카마츠 몬자에몬(近宋門左衛門)의 대본이 유명하다. 처음에는 무용이 중심이었던 가부키(歌舞技)도 점차 연극화하여 사카다 토쥬로(坂田藤十郞)․이치가와 단쥬로(市川團十郞)와 같은 명배우가 등장하였다.
미술에서도 쵸닌 취향의 장식적인 화풍이 나왔으며, 민중생활을 소재로 한 우키요에(浮世繪)가 등장하였다. 원래는 육필화였던 우키유에는 대량생산의 목판화로 변하면서 쵸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았다.
쵸닌이 부유해지면서 도시의 풍속도 화려해져, 화려한 비단 의복이 유행하였다. 식생활에서도 1일 3식이 확대되고 도시에서는 쌀밥을 먹었다. 한편 농촌에서는 면직물 의복을 입고 잡곡․면류를 먹었으며, 기와사용도 금지되었다. 이 시기에 사원에서는 장례식과 재일행사․불상공개와 복권판매 등으로 세속화가 일어났으며, 서민들 사이에서는 사원과 신사순례가 유행하였다.
♣ 3. 幕藩體制의 動搖 ♣
(1) 幕府․藩의 政治改革
18세기후반이 되자 전국적으로 교통이 발달하고 화폐가 통일되었기 때문에 상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활발한 화폐유통으로 부를 축척한 금융업자들중에는 막부나 번의 어용상인으로서 다이묘를 능가하는 재력을 가졌던 미츠이(三井)․코오노이케(鴻池)․수미토모(住友) 등의 대상인도 있었다.
오사카나 에도 등의 상공업자들은 동업자조합을 만들어, 막부로부터 영업독점권을 얻어 상품가격 등을 통제하면서 이익을 남겼다. 한편 사치스로운 생활로 지출이 늘어난 쇼군과 다이묘는 금융업자로부터 부채를 지게 되었다.
18세기후반 10대 장군 이에하루(家治)시대의 막부실권자 로츄(老中) 타누마 오키추구(田沼意次)는 막부의 재정재건을 위해 상품경제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동․철을 전매하고 상공업자조합을 인정하는 대신 세를 납입하게 하고, 나카사키 무역을 장려하여 재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상인들의 힘이 커지면서 뇌물이 횡행하고 정치기강이 문란해졌다. 기근이 겹쳐 농민반란과 약탈이 빈발하여 이에하루의 사후 타누마는 실각하게 되었다.
타누마의 실각 후에 11대 장군 이에나리(家齊)를 보좌한 로츄 마츠타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농촌부흥을 위해 농민을 귀향시키고 부업․곡식비축 등을 장려하였다. 또한 무사들의 빚을 탕감하고 검약을 장려하는 한편, 주자학이외의 학문을 금지하고 출판을 통제하였다. 이를 간세이(寬政)개혁(1787-93)이라 하는데, 이 개혁은 당시의 실정에 맞지 않아 반발을 사게 되어 마츠타이라는 해임당한다.
번에서도 18세기중엽부터 재정난 타개를 위해 특산물장려, 전매제실시(50여번에서 70품목이상), 번학설립 등의 개혁을 하였으나 대부분은 실패하였다.
(2) 幕府의 衰退
18세기말 구미제국의 배가 일본연해에 나타나 막부를 불안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락스만(1792)․래자노프(1804) 등의 사절을 보내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막부는 거절하고 북방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1808년 페튼호가 나가사키(長崎)에 침입한 이후 영국의 배도 일본근해에 출몰하게 된다. 1825년 외국선의 일본열도 접근을 막는 명령(異國船打拂令)을 발표하였다. 1837년 미국의 모리슨호의 통상요구를 거절하였다.
19세기초 막부와 번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1830년대에는 각지에서 천재와 기근이 계속되어 농민들의 반란과 약탈이 빈발하였다. 1837년에는 양명학자이며 막부관리였던 오오시오 헤하치로(大鹽平八郞)가 오사카에서 빈민구제를 외치며 무장봉기하였다. 이 시대의 국내외 정세는 긴박하였으나 쇼군(將軍) 이에나리는 방만한 정치운영으로 정치의 부패만 가져왔다.
1841년 이에나리의 사후 실권을 장악한 로츄 미즈노 쿠니타다(水野忠邦)는 정치개혁을 하였다(天保改革). 검약령을 내리고 풍속을 단속하였으며, 농민들을 농촌으로 돌려보냈고 영업을 독점하던 동업자조합을 해산하여 상품유통을 장악하였다. 또한 막부직할지를 늘려 재정수입을 늘이려 하였으나 다이묘들의 반대에 부딪쳐 2년만에 실각하였다.
막부의 쇠퇴와는 달리 이즈음 개혁을 하여 성공한 번도 등장하였다. 시츠마(薩摩)번과 쵸슈(長州)번은 재능있는 하급무사를 중용하여 재정난 타개와 군제의 개혁을 하였다. 또한 상품경제의 발전으로 도시와 농촌의 가공업도 발전하여 19세기에는 공장제수공업이 면직물과 견직물에서 등장하였으며, 막부말기에는 서양의 기술을 도입한 공장이 제철과 조선 등의 분야에서 등장하였다.
(3) 에도(江戶)後期의 文化
18세기후반 이후의 에도후기에는 문화의 중심이 에도로 옮겨져, 특히 19세기초를 정점으로 쵸닌문화가 더욱 성숙하였다. 쵸닌문화는 도시서민과 농촌에까지 파급되었으며, 사회의 동요를 반영하여 퇴폐적․향락적이고 사치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문․사상분야에서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비판적 정신이 눈떠 근대로 이어지는 새로운 움직임도 보였다.
에도후기에는 교육이 널리 서민층에게까지 보급되었다. 번에는 무사자제를 가르치는 번학과 민중교육을 담당한 향학(鄕學)이 있었다. 그밖에 오사카의 쵸닌이 서립한 회덕당(懷德堂)과 같은 서민교육기관도 있었으나, 가장 일반적인 서민교육은 절의 데라코아(寺子屋)에서 이루어졌다. 이시다 바이안(石田悔岩)이 유교도덕을 평이하게 설명한 심학(心學)은 정직․근면․이윤추구의 정당성 등 상업을 긍정하였으므로 쵸닌층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사회분위기를 반영하여 세상을 풍자한 17자의 센류(川柳)와 31자의 쿄카(狂歌)가 유행하였다. 소설에는 유곽의 쵸닌들의 대화, 서민생활을 코믹하게 묘사한 것, 연애소설과 교훈적 이야기책 등이 있었다.
가부키의 양식이 완성되었고, 우키요에(浮世繪)는 아름다운 판화로 제작되어 후에 프랑스회화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가츠시카 호사이(葛飾北齋)․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등이 유명하다.
문자를 아는 서민들이 많아지자 세상 소직지(瓦版)가 널리 읽혔다. 서민의 오락장으로는 공중탕․이발소․극장 등이 있었으며, 신사의 제사나 사원의 재일(齋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또한 친목모임(講)을 만들어 절과 신사 등을 순례하였는데, 1830년 이세진구(伊勢神宮) 참배자는 약 400만명이었다고 한다.
18세기중엽 古事記나 萬葉集 등의 일본고전을 통해 일본문화와 민족정신을 연구하는 학문이 활발해진다. 이를 코쿠가쿠(國學)라 하는데, 지방의 부농과 쵸닌들 사이에서 천황을 숭배하는 존왕사상으로 발달하여 막부말기에는 막부를 비판하는 정치사상이 되었다.
또한 18세기중엽 안도 쇼에키(安藤昌益)는 무사가 농민을 수탈하는 봉건제사회를 비판하였는데, 19세기에는 봉건제의 개량을 통해 중상부국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쇄국하에서 유럽의 말이나 지식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쇼군․로츄․나가사키의 통역뿐이었으나 8대 장군 요시무네때 크리스트교와 관계없는 한역양서의 수입을 허락하여, 18세기에는 양서연구가 활발하게 되었다. 네델란드어본 해부서가 번역되었으며, 네델란드어 사전도 만들어졌다. 네델란드어를 통한 서양학문연구를 란가쿠(蘭學)라 하는데, 이로서 의학․생물학․병학 등 근대적인 학문이 발달하게 된다. 1823년 나가사키의 네델란드 상관의사였던 독일인 시볼트는 사숙을 열어 많은 난학자를 양성하였다.
19세기전반 막부는 쇄국정책을 비난하는 학자들을 탄압하는 한편(1838년 蠻社의 獄), 네델란드서적의 번역을 담당하는 관청을 두고, 페리제독의 내항이후에는 외교문서 번역을 위해 양학연구기관 겸 외교문서 번역소(蕃書調所)를 설치하였다.
近代文化의 形成과 發展
♣ 1. 西歐文化의 輸入과 메이지(明治)維新 ♣
(1) 開國과 幕末의 動亂
1840년대에 청(淸)이 영국(英國)에 패배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이 완화되던중, 1853년 6월과 1854년 1월 두차례에 걸쳐 미국동인도함대사령관 페리제독이 내항하여 함대의 위력을 배경으로 막부에 개국과 통상을 요구하자, 막부는 이 문제를 천황조정과 다이묘들과 의논하였다. 당시 여론은 개국반대의 양이(攘夷)론이 우세하였으나, 페리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막부는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맺어 시모다(下田)․하코다테(籍館)의 개항과 미국대표의 일본주재를 인정하였다. 이어 영국․러시아․네델란드 등과도 같은 조약을 맺어 일본의 쇄국체재는 끝나게 되었다.
1856년에 총영사로 부임한 해리스는 중국정세를 막부에 설명하여 1858년 6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은 영사재판권이 인정되고 일본에게는 관세자주권이 없는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막부는 이어서 네델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같은 내용의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859년 무역이 개시되어 생사나 차․금 등이 수출되고, 모직물․면직물․함선․무기 등이 수입되었다. 수출품의 격증과 대량의 금의 유출로 인한 경제의 혼란은 하급무사와 민중의 생활을 압박하였다. 일부 다이묘와 무사들은 외세를 배척하고 천황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론을 주장하였다. 막부의 타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반대파를 처벌하여 막부독재를 강화하였으나, 반대파에 살해되고 막부는 천황조정과 결합하여 막부정치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1863년이후 영국 등의 함대와 전투를 통해 양이가 불가능함을 알게 된 사츠마(薩摩)번과 쵸슈(長州)번에서는 하급무사들이 실권을 잡고 영국과 제휴하여 근대적인 군비를 갖추어, 막부를 타도한 후 천황중심의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막부는 프랑스의 원조로 군사개혁을 추진하고 쵸슈정토를 꾀하려하였으나, 쵸슈번과 동맹을 맺은 사츠마번은 막부의 출병명령에 불응하였고, 물가상승으로 전국에서 약탈행위와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막부는 쵸슈정토에 실패하여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1867년 10월 막부의 15대 장군 요시노부(慶喜)는 천황밑에서 계속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 천황에게 정권을 반환하였으나 12월 토막파 번과 천황조정은 막부의 폐지와 신정부의 성립을 선언하는 왕정복고를 공표하였다.
(2) 維新政府의 發足
신정부의 영지반환 요구에 반발한 막부츠근 1868년 1월 교토를 공격하였으나 사츠마번과 쵸슈번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군은 1869년에 구막부군을 모두 항복시켰다. 이 싸움을 무진(戊辰)전쟁이라 한다. 무진전쟁이 계속되던 1868년 3월 메이지(明治)천황은 천황친정(親政)과 여론의 존중․개국화친 등 신정부의 기본 정치이념을 선언하였다.
신정부는 정부조직을 정비하고 에도(江戶)를 도쿄(東京)으로 고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하였다. 1869년에는 천황조정이 교토(京都)에서 도쿄로 천도하였다. 이후 신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길을 열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 한다.
개혁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1869년 신정부는 토지와 인민에 대한 다이묘(大名)의 지배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하고, 1871년 신정부는 다시 번을 폐지하고 부(府)․현(縣)을 두어 부지사와 현령을 파견하였다.
막부말기에 전쟁으로 재정이 궁핍해진 번들은 이 개혁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이로서 봉건제도는 붕괴하고 중앙집권정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신정부의 구성원은 대부분 사츠마․쵸슈․토사(土佐)․비젠(肥前)의 4藩 출신의 실력자로 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번벌(藩閥)정부라 부른다.
정부는 신분제도를 고쳐 황족(皇族)․화족(和族:다이묘와 천황조정의 귀족)․사족(武士)․평민(農工常民) 등으로 하여, 결혼과 직업선택의 자유․평민의 성(姓) 소유 등, 「사민평등」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천민도 해방되어 평민으로 편입시켰다.
(3) 維新政治의 展開
신정부는 1873년 1월, 만 20세의 남자를 징병하는 징병령(徵兵令)을 공포하여 구미열강을 모방한 국민군대를 창설하였다. 이로서 국력의 군사적 기초가 만들어졌다. 사민평등과 징발령에 의해 특권을 상실한 사족들의 불만은 반란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반란인 1877년의 세이난(西南)전쟁도 국민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신정부는 재원의 안정을 위해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지주의 토지수유권을 인정하고, 지주가 토지세를 국가에 납부하게 하였다.
한편 신정부는 외국기술자를 초빙하고 기계를 수입하여 근대산업의 육성을 꾀하였다. 조선소․병기공장․광산․생사공장․면사방적공장 등, 많은 관영공장을 만들어 정부의 공부성․내무성을 통해 산업을 보호․육성하였다.
또한 교통․통신의 발달을 위해 1871년에 서양식 우편제도를 발족시키고 1872년 철도를 부설하였고, 일본근해의 해운권의 확립과 군사수송을 위해 해운회사를 보호하였다. 또한 원․전 단위로 하는 새 경화를 만들고 국립은행을 설립하였으며 1882년에는 일본은행(日本銀行)을 만들어 금융과 지폐발행을 맡겼다.
그러나 재정부담에 허덕이던 정부는 1880년에 민영공장이 성공하자, 관영공장을 불하하고 민영사업을 보호하였다. 따라서 1880년대에는 민영의 방적․철도회사가 계속 설립되었으며, 미츠이(三井)․이와자키(岩崎, 후에 三菱) 등과 같은 정상(政商)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4) 維新初期의 西歐化
신정부가 국민교육을 위해 문부성을 신설하고 소학교 교육에 주력한 결과 전국에 2만이상의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국립대학에 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학문의 발달을 꾀하였으며, 사범교육․여성교육․산업교육을 위한 전문학교도 설립하였다. 한편 게이오(慶應)의숙, 도시샤(同志社) 등의 사립학교도 세워졌다.
1873년부터는 태양력을 채용하고 1일 24시간, 1주 7일제, 일요휴일제를 확립하였다. 단발과 군인․관리의 양복착용을 추진하였다. 대도시에서는 벽돌집에 가스 등이 늘어선 가도를 마차와 인려거가 달려가는 모습이 새로운 풍물이 되었다.
신정부는 신토(神道)의 국교화를 추진하면서 크리스트교 금지를 해제한다. 사상계에서는 자유주의․개인주의․천부인권사상 등의 서구근대사상이 유행하였고, 1870년 일일신문(橫濱每日新聞)이 1873년에 잡지(明六雜誌)가 등장하여 봉건사상의 배제와 근대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1871년이후의 불평등조약 개정교섭은 일본이 근대국가로서의 제도를 갖추지 못 하였다는 이유로 실패한다. 1871년에는 청과도 조약을 맺었으나 류큐왕국의 귀속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은 대립하게 된다. 메이지정부는 류큐왕국을 류큐번(藩)으로 하고, 류큐어민 피살사건을 핑계로 1874년 대만에 출병하여 청으로부터 보상금을 받아낸다.
한편 메이지초기 개국요구를 거절한 조선에 대한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하였으나 국내개혁 선행론에 패배하고 정한론자는 정부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1875년 메이지정부는 무력시위로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 다음해인 1876년에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어 개국시켰다. 또한 러시아와 국경에 관한 조약을 맺어 영토를 확장하였다.
♣ 2. 近代國家의 形成 ♣
(1) 自由民權運動
정한논쟁으로 사퇴한 구정부관료 등을 중심으로 1874년이후 의회개설을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自由民權運動)이 전국적으로 벌어진다. 이 운동이 사족을 중심으로 신문․잡지 등을 통해 추진되자, 정부는 장래의 입헌정치 실시를 약속하는 한편 참방률을 제정하여 언론활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은 점차 지주․도시상공업자를 포함하는 국민운동으로 확대되어, 1880년 국회기성동맹(國會期成同盟)이 결성되어 국회개설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집회조례를 제정하여 언론․집회․결사를 탄압하였다.
정부내부에도 국회개설 시기를 둘러싸고 급진론과 점진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마침 1881년 개척사 관유물 불하사건으로 정부공격이 격화되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점진론자들은 급진론자를 추방하고 1890년에 국회를 열것을 약속하였다. 정부의 국회개설 약속을 계기로 급진적 자유주의의 자유당과 영국적 의회주의의 입헌개진당이 결성되었다.
1877년의 세이난전쟁 비용조달을 위해 정부는 불환지폐를 남발하였으므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물가가 상승하였다. 1881년 오오쿠라쿄(大藏卿) 마츠카다 마사요시(松方正義)는 긴축재정으로 세출을 줄이고, 은본위 화폐제도를 확립하고, 관영공장을 민간에 불하하였다. 이로서 인플레이션은 진정되고 화폐․금융제도가 정비되어 근대산업발전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불경기와 쌀값 하락으로 급진 자유당원과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2) 大日本帝國憲法의 制定과 議會의 開設
1882년이래 군주권이 강한 헌법제정을 목표로 이토 히로부미 등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의 헌법과 국가제도를 연구하였다. 이토가 작성한 초안을 추밀원의 심의를 거쳐, 1888년 천황이 하사하는 형식으로 발표된 것이 대일본제국헌법(明治憲法)이다. 이 헌법에 의하면 주권은 천황에게 있으며 천황은 관제제정․문무관의 임명․선전과 강화․조약체결 등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의회의 권한은 약했으며 내각은 천황을 보좌하고 천황에게만 책임을 졌다. 헌법과 함께 형법․민법 등의 제법전도 만들어졌다.
1990년 제 1회 중의원 총선거를 통해 최초의 제국의회(帝國議會)가 열렸다. 제국의회는 귀족원과 중의원의 이원제로 귀족원은 황족․다액납세자․칙선의원 등 지배층의 최상층부 특권계급으로 구성되며, 중의원은 국민이 뽑은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선거결과 자유민권파 정당들이 중의원의 다수당이 되어, 민생안정을 위해 예선안 삭감을 주장하였다. 번벌관료․군인세력의 정부는 중의원 해산과 선거간섭 등을 통해 자유민권파세력을 억누르려 하였으므로 중의원은 청일전쟁(淸日戰爭) 직전까지 정부와 대립하였다.
♣ 3. 日本의 近代化와 亞細亞 ♣
(1) 淸日戰爭
조선(朝鮮)에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청국군의 출병으로 실패한후, 자유민권파는 무력에 의한 조선개혁을 계획(오사카사건)하고, 메이지정부는 해군의 확장을 추진하면서 조선을 둘러싼 청일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때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청국이 출병하자, 일본정부는 이에 대항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7월말 양국군은 충돌하였다. 정부와 정당이 정쟁을 멈추고 거국일치로 전쟁에 임한 일본은 정치적 대립 등으로 전력을 발휘하지 못한 청국에 승리하여 1895년 청일강화조약(下關條約)이 맺어졌다.
이로서 청은 일본에게 요동반도․대만 등을 할양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이 중 요동반도는 러시아 등 삼국의 간섭으로 청국에 반환하게 되어, 일본국내에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 국가주의가 고양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국가세입의 약 3배정도였던 배상금 덕분에 일본정부는 금본위제를 확립하고 군사공업과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청일전쟁후 중국․조선시장이 개척되어 방적업과 직물업이 급속히 발달하였으며, 미국수출을 중심으로 제사업이 발달하여 1900년경까지 방직업․제사업 등 경공업부분에서 산업혁명이 달성되었다.
(2) 러일전쟁(露日戰爭)
청일전쟁의 승리와 삼국간섭으로 일본국내정치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정부와 정당이 손을 잡고 군비확장․산업진흥에 나서게 된 것이다. 1898년에는 일본최초의 정당내각이 성립하였으며, 1899년에는 관료의 신분보장을 강화하고 1900년에는 치안경찰법과 군부대신 현역무관제가 만들어졌다. 번벌관료 이토 히로부미는 1900년 입헌정우회(入憲政友會)라는 정당을 결성하여 내각을 조직하였는데, 이후 입헌정우회는 지주․실업가를 지지기반으로 일본의 대표적 정당이 되었다.
1899-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열강과 함께 청국북부에 출병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대군을 만주에 계속 주둔시키고 조선에도 영향력을 강화하자 카츠라 타로(桂太郞)내각은 1902년 영일동맹조약을 체결후 일본국내에서는 유력 신문들이 대러주전론을 이끌었다.
1904년 2월 일본과 러시아는 전쟁에 돌입하였는데, 영국․미국의 지지와 러시아의 국내혼란 등으로 전황은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1905년 일본육군은 여순과 봉천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해군도 일본해해전에서 러시아함대를 격파하였다. 미국의 중재로 1905년 9월 포츠머드강화조약이 체결되어, 그 결과 일본은 여순․대련의 조차권과 장춘․여순간의 철도권익, 카라후토(華太)남부의 할양 등을 인정받았으나 배상금은 없었다. 전사상자 40만이상에 20억원의 전비를 외채․공채․증세로 감당하였는데 배상금이 없자 신문과 군중들은 강화조약 폐기와 전쟁계속을 주장하였다.
러일전쟁후 일본은 미국․영국의 승인하에 조선에 통감부를 두고 외교․내정․군사의 실권을 계속 빼앗아 갔으며, 통감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을 계기로 1910년 조선을 병합하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두고 식민지지배를 시작하였다. 또한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불평등조약 게정문제는 일본국력의 향상과 함께 가능해졌다. 1894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은 영사재판제도의 철폐와 관세자주권의 일부회복을 인정하였으며, 1911년에는 미국이 일본의 관세자주권을 인정하여 일본은 구미제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 4. 資本主義의 發達과 國民의 生活 ♣
(1) 資本主義經濟의 形成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공업의 중심은 여전히 경공업에 있었으나 중공업도 발전하여, 관영 하치만(八幡)제철소가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고 민영 제강회사가 설립되었다. 조선업과 공작기계공업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한편 정부는 철도의 군사적 이용목적으로 1906년 주요철도를 국유화하였다.
그러나 군비확장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의 전후경영은 많은 문제점을 발생시켰다. 군수품과 중공업자재의 수입․외국채의 이자지불 등으로 일본의 국제수지는 심각한 적자였고, 국민들의 세금부담증가로 사회모순은 심각하였다. 1907년부터 공황․불황이 이어졌으며, 특히 농업생산의 정체로 농촌은 빈곤해졌다. 재벌은 금융․무역․운수․광산업 등을 중심으로 다각적 경영을 하여 콘체른의 형태를 정비해갔다.
정부 주도하에 단시간에 발달한 일본 자본주의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큰 격차,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국내수비수준 등 문제점도 많았으나, 정부는 치안경찰법을 제정하여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하였다. 특히 1910년 천황암살을 계획했다는 「대역(大逆)사건」을 계기로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대탄압을 받았다.
(2) 敎育과 國民文化의 發展
메이지중기이후에는 교육의 보급, 교통․통신․출판 등의 발달로 새로운 국민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1886년이후 국가주의적 교육제도가 체계화되어 충군애국정신과 가족도덕을 강조하는 교육이 국정교과서제도에 의해 학생들에게 주입되었다. 1900년 수업료 철폐로 의무교육 취학률이 크게 증가하여 1910년에는 95%를 넘었으며 최초에 3-4년이었던 의무교육기간도 1907년에는 6년으로 증가하였다.
일간신문도 1880년대에 정치편론 중심의 신문으로 발전하고, 1890년전후에는 뉴스보도 중심의 상업신문이 나왔으며, 메이지말기에는 1일 발행부수 10만부가 넘는 유력신문도 등장하였다. 1880년후반에 국민의 벗과 일본인의 창간으로 잡지도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메이지헌법제정과 청일전재을 계기로 인문․사회과학에서도 국가주의적인 학문이 우세해졌으며, 청년․지식인층에도 대외팽창을 지지하는 국가주의적 풍조가 유행하였다. 대학을 중심으로 근대 자연과학연구로 이루어져, 메이지후기가 되자 원자모형이론, 파상풍균의 순수배양과 이질균의 발견, 아드레날린 발견과 타카디아스타제의 제조 등, 일본인에 의한 연구도 나오게 되었다.
문학과 예술의 세계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사실주의 문학을 주장한 츠보우치 쇼요(坪內趙遙)는 근대문학이론의 선구가 되었으며, 청일전쟁전후에 로만주의가, 러일전쟁이후에는 자연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사회적 모순과 자아의 문제를 다룬 문학도 등장하였다.
연극에서는 청일전쟁후에 신파극이 시작되어 인기를 끌었으며, 러일전쟁후에는 서양의 번역극이 상연되었다. 처음에 군대용으로 수입된 서양음악은 소학교 교육에도 편입되었으며, 전문적인 음악학교도 설립되었다.
철과 콘크리트를 사용한 서양건축이 시작되었으며 1880년대에 공공시설을 시작으로 전등이, 1890년대에는 전차와 전화가 보급되었다. 교통․통신의 발달은 지방민들간의 교류를 확대하여 일본국가의 국민의식을 갖게 하였다.
(3) 第一次世界大戰이후의 日本
제 1차세계대전을 동아시아에서의 세력확대의 기회로 생각한 일본은 1914년 9월 독일에 선전하고 산동반도와 남양제도의 독일군사기지를 점령하였다. 이어서 1915년 산동성의 독일이권의 계승을 비롯한 중국내 일본권익을 강화하는 내용의 21개조의 요구를 원세개정부에 강요하여, 대부분을 인정받았고, 북방군벌에 대한 차관제공 등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러시아혁명으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국가가 탄생하자 1918년 혁명진압연합국군의 일원으로 일본군을 러시아에 파병하여 연합국의 철병후에도 1922년까지 계속 주둔케 한다.
제 1차세계대전중에 일본의 조선․해운업․화학공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으며 유럽의 수출감소와 미국경제의 호황으로 일본의 면사․면직물․생사수출이 격증하여 국제수지는 큰 폭의 흑자를 이루었고, 중국에 대한 자본수출도 활발해졌다.
제 1차세계대전후 조선에서 독립운동(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였다. 또한 일본의 산동반도의 권익을 파리평화회의에서 인정할 것이 확실해지자 중국에서는 대규모 반일운동인 「5․4 운동」이 일어났다. 파리강화회의 결과 일본은 국제연맹(國際聯盟)의 상임이사국이 되어, 산동반도의 독일이권의 계승․구독일령 남양제도의 통치를 인정받았으나 중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한편 미국은 1921-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를 주최하여, 군비축소와 일본세력의 견제에 노력하였다. 회의 결과 주력함의 10년간 건조중지와 각국의 보유량 등이 정해졌으며 일본의 산동성 이권의 중국반환․시베리아철병 등이 결정되었다. 일본정부는 재정파탄을 피하기 위해 미국․영국과의 협조외교에 주력하였는데, 이로서 동아시아에는 미․영․일 3개국의 협력관계를 축으로 워싱턴체제라 불리는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해군과 육군의 군축으로 재정긴축에 도움이 되었으나, 군부의 일부와 국가주의단체는 일본의 대외발전에 저해된다고 비난하였다.
(4) 政黨政治의 發達
메이지이후 번벌중심의 관료정치가 계속되었으나, 1912(大正 1年)년, 번벌정치를 반대하고 정당정치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제 1차 헌정옹호운동이 정당․언론을 중심으로 벌어져 1913년 키츠라 타로(桂太郞)내각이 물러났다. 이는 민중운동으로 내각을 타도한 최초의 일로, 다이쇼(大正)정변이라 한다.
제 1차세계대전의 호경기로 임금은 올랐으나 인플레이션이 계속되어 서민생활은 어려웠고, 1918년에는 상인의 매점매석으로 쌀값이 급등하자 쌀값인하를 요구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 쌀소동 이후 중의원의 제 1당 입헌정우회의 총재 하라 타카시(原敬)내각을 조직하였다. 이 내각은 육․해군과 외무대신을 제외한 전각료가 입헌정우회 출신으로 구성된 일본최초의 본격적인 정당내각이었다. 「평민재상」이라 불리웠던 하라는 1921년 암살당할때까지 선거권의 확대․산업진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하라 암살이후 귀족원 중심이 내각이 이어지자 1924년 1월 정당들은 협력하여 제 2차 헌정옹호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그해 6월 헌정회의 카토 타카아키(加藤高明)의 협력내각이성립하여, 협조외교․군축정책․보통선거 실현을 추진하였다. 1925년에는 25세이상의 남자의 선거권을 인정하는 보통선거법이 성립하였으나 치안유지법으로 무산정당의 활동은 제약당하였다.
카토내각이후 1932년 5․15사건때까지 의회의 다수당이 내각으로 구성하는 정당정치가 계속되었으나, 의회의 권한은 제한적이었으며, 군부․관료세력도 계속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정권획득을 위한 정당의 대립은 격화되어 정치자금 조달을 위해 정당과 재계와 결합하면서 「금권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높아졌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군부와 국가주의단체에 의한 정당정치배격의 움직임이 늘어갔다.
(5) 資本主義의 發展과 大衆文化
제 1차세계대전의 종결로 유럽경제가 부흥하자 일본경제는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1919년부터 무역은 적자가 되고 1920년에는 주식의 폭락으로 전후공황이 발생하여 면사․생사의 가격이 반값이하로 폭락하였다. 1923년에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경제는 더욱 타격을 입어 불황이 계속되었으나, 불황속에서 미츠이․미쯔비시․야스다(安田)․스미토모(住友)의 4대재벌은 금융․유통부문의 지배를 강화하고 정당과 밀착하여 발언권을 갖는다.
제 1차세계대전중 세계의 데모크라시 풍조의 유행으로 일본에서도 천황기관설(美濃部達吉)과 민본주의(吉野作造) 등이 주장되고,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운동도 활발해졌다. 여기서 물가고에 의한 생활불안이 겹쳐 노동운동도 크게 발전하였다. 전국적인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점차 계급투쟁전선을 강화하였다. 또한 소작쟁의가 빈발하면서 1922년에는 전국적 농민조합이 결성되었고, 부락민의 사회적차별을 철폐하려는 부락민해방운동도 활발해졌다. 사회주의자들도 활동을 재개하여 1922년에 일본공산당(日本共産黨)이 결성되었다. 신부인협회 등이 결성되어 부인참정권 요구운동을 벌였다. 또한 고등교육기관이 증설되었으며 자유교육운동이 확대되었다.
인문․사회과학에서도 인도주의적 입장에 의한 사회연구, 문헌비판에 의한 실증적인 역사연구 등이 등장하였으며, 자연과학에서는 중공업의 발전과 함께 여러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문학에서는 인도주의․이상주의․탐미주의 문학 등이 대두하였으며, 사회운동의 고양과 함께 프로레타리아문학이 생겼다. 또한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 등의 신감각파 문학도 일어났다. 자본주의 발달로 도시가 발달하고 백화점․택시․레스토랑 등에 서양풍이 채용되었으며, 보트․야구 등 서양 스포츠도 보급하였다. 1925년에 시작된 라디오 방송은 신문․잡지․문고본․영화와 함께 문화보급에 큰 역활을 하였다.
(6) 經濟界의 不況
제 1차세계대전후 만성적인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에 1927년에는 금융공황이 일어나자,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내각은 지불유예령을 내리고 일본은행의 비상대출로 이를 진정시켰다.
1926년 장개석(將介石)의 국민정부의 북벌이 재개되자, 다나카 내각은 북상하는 북벌군을 저지하여 만주를 계속 지배하에 유지하기 위해 1927-8년 산동에 출병하였다. 그러나 1928년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을 만주주둔 일본군(關東軍)이 폭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새로 성립한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내각은 협조외교노선을 부활하여 1930년 런던해군군축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로서 해군 강경파와 국가주의단체의 비난을 사게 된다. 또한 하마구치 내각은 긴축재정과 산업합리화로 물가인하와 국제경쟁력의 강화를 꾀하였다. 그런데 1928년 세계대공황(世界大恐慌)으로 수출은 안 되고, 1930년의 금수출해금 조치로 금이 다량 해외로 유출되어 불황이 심화되었다. 경제정책의 실패는 정당정치와 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감을 확대시켜, 1931년 하마구치 수상은 암살당하고 협조외교노선은 끝난다.
(7) 軍部의 擡頭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이 국민정부측에 가담하자 군부에서는 만주점령을 강행하려는 움지김이 강해졌다. 1931년 9월 관동군은 봉천근교의 남만주철도를 폭파하고(柳條湖사건) 이를 중국의 행위라고 하면서 만주를 점령하였다. 이것이 만주사변(滿洲事變)이다. 이후 육군은 내각을 무시하고 군사행동을 확대하였으며, 져널리즘 군부의 행동을 열광적으로 지지하였다. 일본은 반년간 만주 주요지역을 점령하고, 1932년 청조최후의 황제 부의(溥儀)를 집정으로 맞아 만주국(滿洲國)을 건국하였다.
1932년 5월에는 해군청년장교들이 수상관저 등을 습격하여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수상을 암살한 5․15사건이 일어났다. 군부를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수상으로 군부․관료출신 등을 등용한 「거국일치내각」을 조직하였다.
한편,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국제연맹은 1932년 릿튼 조사단을 파견하여, 1933년 국제연맹 임시총회에서 일본군의 만주철수를 요구하는 권고안을 압도적 다수로 가결하였다.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워싱턴 해군군축조약 폐기․런던 해군군축회의 탈퇴 등을 통해 군비확장을 꾀하였다.
1936년 2월 26일 급진적인 육군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부요인을 암살한 2․26사건이 일어나자, 군부는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부활시켜 군부의 지지가 없이는 내각을 조직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만주사변이후 언론․학문연구의 자유가 없어져 「천황기관설」이 반국체적학설로 공격을 받고 자유주의․사회주의 입장의 대학교수․연구자들이 탄압을 받았다.
(8) 中日戰爭과 戰時體制의 强化
국제적으로 고립된 일본은 1936년 독일(獨逸), 1937년에 이탈리아와 방공(防共)협정을 맺어, 주축진영을 형성하였다. 1937년 일본군은 노구교(蘆溝橋)사건을 일으켜 중국과 전면전을 개시하여 남경에서 20-30만명을 학살하였다(南京大虐殺). 중국에서는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통해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미국․영국․소련 등의 원조로 항일전쟁을 계속하였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정부는 1938년 의회의 승인없이 물자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였다. 군사비는 증가하여 1938년도에는 국가세출의 4분의 3을 차지하였다.
1939년 9월 제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전쟁불개입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940년 5-6월에 독일의 대승리를 계기로, 석유․고무 등의 물자확보를 위해 열강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점령해야 한다는 여론이 육군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1940년 7월, 전체주의적 일당조직을 만들려는 신체체운동이 육군을 중심으로 추진되면서 정당이 해체되었다. 일본정부는 1940년 9월 남진정책을 결정, 북부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하고 독일․이탈리아와 삼국동맹조약을 맺었다. 10월 수상을 총재로 하는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가 발족하여 의회제도는 유명무실해졌으며 노동조합은 해산되고, 전쟁협력을 위한 산업보국회가 결성되었다.
1940-41년에는 생활필수품의 배급제와 쌀의 공출제도가 실시되었다. 소비물자부족으로 국민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정부와 군부는 군국주의․국가주의 선전에 주력하여, 1941년에는 전시교육체제를 만들었으며, 전쟁이 격화되자 노동력과 전투력확보를 위해 중학교 이상의 수업연한을 단축하였다.
(9) 太平洋戰爭
일본정부는 1941년 4월 소일중립조약(蘇日中立條約)을 맺었으나 6월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소련과의 전쟁도 각오하면서, 7월에 남부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영국․중국․네델란드 등과 함께 경제봉쇄를 강화하여 일본군의 대외침략을 막으려 하였다. 큰 타격을 입은 일본에서는 육군․해군에서 대미개전론이 대두되었다.
1941년 10월 미국이 중국대륙․인도차이나 일본군의 철수․삼국동매의 폐기 등을 요구하자, 일본은 개전을 결정하고 12월 일본해군이 하와이의 진주만 미국해군기지를 공격하면서 미국․영국에 선전포고하였다. 이로서 태평양전쟁이 개시되고, 삼국동맹에 의거하여 독일․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개전후 반년동안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전황은 역전되었다. 1943년의 연합국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각지에서 패배하였으며, 1944년 7월에는 남양의 군사기지 사이판이 미국군에 의해 함락당했다.
통제된 언론과 필수물자의 결핍 속에서 일본국민들은 기국일치하여 전쟁에 협력하였으나, 생산능력을 총동원하여도 연합국의 생산력에 대항할 수 없었다. 중학이상의 남녀학생과 노인까지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되고,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은 강제징용되었으며, 여성들은 공창(公娼)이라는 명목으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로 끌려갔으며, 1943년에는 학도병이 동원되었다.
1944년이후 미공군의 일본본토 공습이 본격화되었다. 1945년 6월에는 오키나와가 미국에게 점령되었다. 유럽에서도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였다.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는 일본의 항복을 촉구하였으나 일본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미국은 同年 8월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으며, 소련은 대일선전을 포고하고 만주와 사할린에 침입하였다.
일본정부는 결국 군부의 전쟁계속론을 천황의 결단이라는 형태로 눌렀다. 1945년 8월 14일 포츠담선언 수락을 연합국에 통고하고 15일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천황이 이를 국민에게 알렸으며, 9월 2일에는 항복문서에 조인하였다. 이로서 제 2차세계대전은 주측진영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다.
現代世界와 日本
♣ 1. 第二次世界大戰後의 日本 ♣
(1) 占領下의 改革과 强化
패전으로 일본은 미국군 주체의 연합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극동위원회 산하 도쿄 연합국군총사령부(G․H․Q)가 일본정부에 지령․권고하여 실시케하는 간접통치방식으로 지배되었다.
총사령부는 우선 육․해군을 해체하고 전범용의자를 체포하고 정치범을 석방하였다. 총사령부의 점령정책의 기본은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였다. 1945년 10월 G․H․Q는 여성해방․노동조합장려․교육의 자유주의화․압제적제도의 폐지․경제의 민주화 등 5대 개혁령을 발표하였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韓國戰爭)이 발발하기 전까지 여러 개혁이 이루어진다. 농지개혁법으로 농촌의 기생지주제가 일소되었다. 재벌은 자산동결과 독점금지법 등에 의해 해체되던중, 독점금지법 완화로 자본과 경영의 분리, 자본의 대중화 등 근대적 형태를 정비하여 재편되었다. 노동조합법의 제정으로 노동운동은 활발해져, 1947년에는 관공서 노동자 중심의 2․1 제네스트가 G․H․Q의 명령으로 중지되었다.
부인참정권이 인정되고 정당도 부활하였는데, 1946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일본자유당(日本自由黨)이 제 1당이 되어 총재 요시다 시게루(吉田戊)를 수반으로 하는 정당내각이 14년만에 부활하였다.
1946년 11월에 일본국헌법이 공포되었다. 일본정부가 G․H․Q안을 기초로 초안을 만들어 제국의회의 심의를 거쳐 공포한 것으로, 국민주권․평화주의․기본적 인권의 보장의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이로서 천황은 국가의 상징인 반면, 국회가 국권의 최고기관이 되어 의원내각제가 제도화되었다.
제 2차세계대전후 미국과 소련이 점차 자유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의 중심이 되어 대립하면서 냉전체제를 형성하였다. 그 결과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 남쪽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군이, 북에는 소련과 중국이 가담하게 된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미국은 자유주의진영에서의 일본의 역활을 중시하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G․H․Q의 지시로 경찰예비대(후의 自衛隊)가 발족하였고 많은 공산주의자가 관공서나 언론기관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심각한 경제위기에 있었던 일본은 UN군의 보급기지로서 호경기를 맞이하여 1951년에는 전전의 평균수준을 회복하였다.
또한 미국은 대일강화를 서두르게 되어 일본은 1951년 9월 미국․영국 등 자유주의진영 49개국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평화조약은 1952년 4월 발효되어 이로서 연합구늬 일본점령은 끝나고, 일본은 자유주의진영의 일원으로서 국제사회에 복귀하게 되었으나, 미일안전보장조약으로 미군은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일본은 1950년대 중반에 해빙무드를 타고 소련과의 국교회복에도 성공하고 UN에 가입하게 된다.
(2) 日本의 復興과 經濟成長
좌우양파로 분열되었던 일본사회당이 노동조합을 지지기반으로 평화운동을 통하여 세력을 회복하여 1955년 통일되자, 보수정당측에서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동하여 자윱민주당을 결성하였다. 이로서 자민․사회양당을 중심으로 보수․혁신의 대립이 계속되었으나, 정권은 40여년간 보수정당에 의해 담당되었다. 1960년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국민적인 안보투쟁 속에서 신안보조약이 조인되어 미일군사협력체제는 계속 유지된다.
이 사이에 일본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한다. 1950년후반에 세계적인 호황 덕분에 수출이 급증하여 호경기를 맞이한 일본경제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초에 걸쳐 고도성장정책을 추진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내각과 사토 에사쿠(佐藤榮作)내각하에서 공전의 성장을 이루었다.
석유화학․자동차 등 중화학공업분야에서 비약적인 기술혁신과 설비투자가 이루어져 1960년대말 일보느이 국민총생산은 자본주의국중 제 2위가 되었다.
1964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8조국이 되어 무역의 자유화를 꾀하였고, 이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여 자본거래의 자유화를 추진하였다.
근로자의 소득도 매해 상승하여 국민생활수준은 향상되었으며,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도 거의 없어졌다. 전기냉장고․칼라 테레비․승용차 등 내구소비제가 일반가정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레져산업도 성장하였다.
국토개발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신칸센․고속도로의 건설, 대도시의 지하철의 발달과 고층건물의 건축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제적 번영은 국민생활에 부작용도 가져왔다. 소비자물가의 상승, 지가의 폭등, 심각한 주택난, 교통문제, 산업폐기물에 의한 대기․하천․해수의 오염과 공해병환자의 발생, 자연환경의 파괴 등 각종 사회․환경문제를 발생시켰다.
1945년이후 일본문화의 특징은 대중성과 균질성에 있다. 테레비 수상기가 3000만대를 넘고 발행부수가 700-800만부에 달하는 유력신문과 각종 주간지가 등장하는 등 매스컴의 눈부신 발전이 국민생활의 균질화를 가져왔다. 교육의 대중화도 급속히 진행되어 1970년대에는 고등학교진학률이 90%를 넘어 고등학교는 사실상 의무교육적인 기관이 되었으며, 대학진학률도 급증하여 1970년대 30%를 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