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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군 남지읍 성사리 지명 유래를 올립니다.
영남들의 살 찌우는 계성천. 보이는 다리는 영남수리, 학암으로 통하는 성사교이다.
6. 성사리(成士里)
성사리(成士里)는 본래 영산현 도사면의 형사리(荊士里)였던 것이 구한말에 성사리로 개칭되었는데 남지읍의 중앙부에 자리 잡은 법정리이다. 『호구총수』에 형사리가 도사면의 방`면중 첫째 면으로 나오는 것을 봐 어쩌면 면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형사리가 도사면의 소재지나 중심지 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 도사면이란 이름의 근원이 될 지명인 '도사골'이 있어 더욱 그럴 가능성을 높힌다,
동쪽으로는 영산면 월령리, 봉암리 등과 맞닿아 있는데 넓은 영남수리들이 있으며 계성천이 성사리 가운데를 흘러간다. 북쪽은 장마면 유리와 대봉리이고 성사고개를 넘으면 아지리이다. 남, 서편은 신전리로 둘러 싸여 동부는 들판임에 비하여 서부는 산지이다.
성사리의 옛 이름이 형사리라 하였던 것은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골자기라 하여 모래골, 형사(型砂)라 하였던 것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모래골이라 불리게 된 것은 2가지가 있을 수가 있다. 하나는 성사리의 동쪽에 계성천이 흐르고 그 들판 일대가 냇물에 떠내려 와 만들어진 모래밭이었므로 그런 지명이 붙었을 것이며, 또 하나는 성사 본동에서 매전- 장시늪으로 이어지는 골짜기가 넓은 모래밭으로 된 곳이어서 모래골이라 불리었던 것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형사 또는 성사의 「砂·士」는 마을, 골[谷]의 옛 말인 「담, 」의 음차이다. 「담, 」은 「堂·谷」으로 쓰였으나 「실」로도 불리어 「室·絲·士·沙」로 차자되고 호전되어 「堂·吞·旦·丹·頓·屯·····」등으로 음차되었다. 곧 「士」는 마을, 골짜기의 옛말 「실」의 차자이다.
골의 옛말이 실이니 「실」이 ‘실 사(絲)’로 전(轉)하고 실(絲)은 그 음이「사」니 「사」가 다시 「사」(沙, 砂), 「사」(士)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형사(荊士)가 성사(成士)로 바뀐 것은 구한말로 흔히 경상도에서는 형(兄), 형님을 성, 성님으로 발음하듯 형사가 발음하기 쉬운 성사로 발음됨에 따라 뜻도 좋은 성사(成士)로 기사된 것으로 보인다.
「砂」가 「士」로 바뀌었으나 모래와 상관없이 그 뜻은 마을이라 하겠다.
행정 리는 5개 리로 성사, 관동, 매전, 학암, 대성 등이다.
성사고개에서 바라본 성사마을
◉ 6-1 성사(成士)
모래골이라 당초에 불리어 형사(型砂 ·荊士)라 하였다고 하는데 구개음화(효자→ 소자 . 향불 → 상불)로 하여 형사가 성사로 변한 듯하다. 성사는 행정 리 명칭으로 불린다. 성사리의 북부 지역으로 고개를 넘으면 아지리이다. 그 골짜기 안쪽에 마을이 있으며, 성사리 동편에 계성천이 흐르고 인근 모래밭이 모두 개간되어 논으로 변해 영남들 넓은 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곡창지대이다. 주위에 자연 마을이 여러 개 있다.
지금은 73호이나 전에는 103호가 되는 큰 마을이었으며, 처음에 수원 백씨가 살았다는 설이 전해지나 현재 김녕 김씨, 김해 김씨와 허씨 등이 많이 살고 있다. 두산재(斗山齋 : 김녕김씨 봉선소)가 있다.
◎ 민두루미
성사 마을의 동남쪽 산등성이에 있는 마을로 앞들에 폐교된 성사국민학교가 있었다. 이 산등성이가 민두름하다 하여 민두루미라 하였는데 「미」는 「뫼」(산)라 하겠다. 곧 마을의 터가 민둥산, 둥근산 등의 뜻이다.
성사국민학교는 1954년에 개교한 학교였는데 최근 학생수의 급격한 감소로 1988년에 폐교되었다.
◎ 새터[新基]
민두루미의 건너 북쪽, 1043번 지방도 변에 있는 뜸으로 새로이 조성된 마을이라 새터, 신기로 불리었다.
◎ 아래골[下谷]
새터 남쪽 골짜기로 성사골의 아래에 해당되므로 아래골이라 불린다. 3, 4호가 사는 뜸이다.
◆ 서낭당
성사 마을 북쪽에 있는 서낭당으로 춘추로 당제를 올리고 있다.
◆ 우실봉[牛膝峰]
남지읍의 등뼈를 이루는 산으로 높이는 209m인데 성사리의 서편에 솟은 산이다. 이 근처의 산의 형상이 소와 같고 이곳은 소다리의 무릎에 해당하여 우슬봉이라 한 것이 우실봉으로 변하였다.
◆ 범굴[虎窟]
마을 남서쪽 약 1km 지점 우슬산 북쪽 중턱에 굴이 있는데 옛날 범들이 뛰놀다가 잠자던 곳이라 전해오며 현재도 그 흔작이 남아 있다.
◆ 절골[寺谷]
우슬산 범굴 아래 골짜기로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골짜기에 절 흔적이 있고 기와조각이 나온다고 한다.
◆ 성사고개
성사리의 북쪽으로 상당히 높은 고개로 넘으면 아지리이다. 이 고개를 경계로 하여 도사면과 남곡면이 나누어져 있었다. 아지로 간다하여 앞실고개, 아지고개로도 불린다.
이 고개 남쪽 아래에 성사저수지가 있다.
◆ 전골고개
성사리 새터에서 대성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고 그 서북쪽에 장마면 대봉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전골에 있기에 전골고개라 부른다.
관동 마을 전경
◉ 6-2 관동(冠洞)
성사리의 서남부로 갓골이라 불리는 골자기 안에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서편 산등에 창녕 조씨(曺氏)의 선산으로 조능(曺陵)이라 불리는 고려 시대의 큰 무덤이 있는데, 고려 말의 장수 조민수 장군이 이성계 일파에 밀려 향리 창녕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 일문이 이곳으로 이거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갓골을 한자로 ‘갓 관(冠)’을 써 관동(冠洞)으로 행정 리 명칭으로 사용한다. 전에는 60호였으나 지금은 49호이다. 함안 조씨와 밀양 박씨가 많이 살며, 염수재(念修齋 : 함안趙씨 제각)가 있다.
◎ 갓골[冠洞]
마을의 산이 갓처럼 생겨 갓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벼슬을 한 사람이 쓰는 갓 관(冠)을 써 관동으로 기사되었다. 그러나 갓골의「갓」은 산지(山地)나 시지(柴地)를 뜻하기도 하며 변두리 가(邊)를 뜻하기도 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을 서쪽의 산이 우실등에서 빠져 나온 산등으로 별로 뾰족한 모양이기 보다는 둥글므로 산지, 시지의 뜻을 가진 것으로 산골 마을 정도로 이해가 된다.
갓골을 갓곡, 관곡(冠谷)으로 쓰기도 하였다. 45호가 살고 있다.
◎ 서재골(書齋谷)
전에 서재가 있었다고 하는 관동 안 골짜기의 마을이다. 전에는 10여 호가 넘게 살았으나 지금은 4호 뿐이다. 지금은 연화사가 있다.
이 골짜기 안쪽에 관동 소류지가 있는데 이를 서재골못이라 부르기도 한다.
◆ 조능산(曺陵山)
관동 서쪽 산등에 고려 때의 네모진 무덤이 2기 있는데 이 분묘들이 창녕 조씨의 선대 묘이므로 속칭 조능(曺陵)이라 불리며, 조능이 있는 산이라 하여 조능산이라 한다. 높이는 110m이다.
◆ 뒷골재
관동에서 북쪽으로 성사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를 마을 뒤에 있다 하여 뒷골재라 부른다.
◆ 수리실고개[新田峴]
관동 서재골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수리실, 신전리에 가 닿으므로 수리실고개, 신전고개라 부른다. 신전을 전에는 차의동으로 썼으므로 차실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황새목에서 바라본 매전 마을 전경
◉ 6-3 매전(梅田)
성사 남쪽의 마을 매말리를 매전으로 쓴 행정리 명칭이다. 관동으로부터 분동되었다.
매전의「梅」는 산의 뜻 「뫼, 메」가 매(梅)로 전사(轉寫)된 것으로 곧 뫼마을, 산마을이란 뜻이다. 「田」이 신전리의 경우처럼 ‘밭’을 말하기보다는 마을을 뜻한다. 산의 옛말(古語) 뫼가 매(鷹), 마(馬), 미(彌), 매(買)등으로 전사되어 옛 지명에서 산을 뜻하는 글자로 많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매전, 매말리는 「뫼마을」곧 산마을이라 할 것이다.
가구수는 52호이던 것이 44호로 줄었는데, 경주 이씨, 함안 조씨, 밀양 박씨의 세거지로 매산재(梅山齋 : 경주이씨 봉선소)가 있다.
◎ 매말리[梅田]
옛날 이곳에 시장이 있었는데 말을 매어 놓았던 곳이라 하여 매말리라 하였다 하거나 어떤 이는 「梅田」이란 한자의 뜻에 부회(附會)하어 살구, 매실밭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매’는 산의 고어 ‘뫼’에서 변화된 것이니 매말리는 산마을,「뫼마을」로 봄이 타당하다 하겠다. 사실 마을은 산위에 형성되어 산마을이라 할만하다.
또 임란 때, 의병이 진을 친 진터(陣地)로 장시늪가에 진마라 하는 곳이 있는데, 그때 이 근처에 말을 기르고 매었으므로 매말리라 불리었다고도 어떤 이는 주장한다. 이 역시 마을 유래나 이름을 좋게 꾸미고자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 황새목
매전 동쪽 성사 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산줄기가 황새의 모가지처럼 길게 내려오다가 이곳에서는 잘록하게 들어가 곳이므로 황새목이라 한다. 이 목은 남지에서 성사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이곳을 통과해야 산 넘어 고곡지구로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 목 윗쪽 산등으로 새로 길을 닦아 이곳을 통과하지 않아도 된다.
인가가 목 양쪽에 있고 주막들도 있어 길손들의 쉼터였다. 도정공장이 있었으나 철거되었고, 그 옆에 조운한 군수의 선정비가 있다. 또 상덕사(尙德祠)가 있다.
◆ 돌팔이 군수비껄
황새목 동편 학암과 대성으로 가는 길 북쪽 편에 서 있는 비를 돌팔이 군수비라 부른다.
바로 계성천 다리를 건너가기 직전에 있으므로 지명으로도 불린다.
이 비는 1867~1870년 간에 영산현감으로 있었던 조운한 현감의 선정비로 성사리 주민들이 1876년에 세운 비이다.
당시 세곡(稅穀)을 낙동강 하류 삼랑진까지 실어 내렸는데 지방민의 폐해가 막심하자 현감이 진주목사에게 건의하여 송진나루에서 싣고 가도록 해 주었다 한다.
이때 진주목사는 조현감의 아들이었다 하여 세인들이,
"아들은 목사(牧使), 아버지는 현감(縣監)"
이라 하여 아버지의 출세를 못하였음을 은근히 우스개로 알았으며, 그래서 조 현감을 돌팔이 군수로 불렀던 것 같다.(창녕군지에 이 얘기가 실려 있다.)
◆ 도사골(道沙谷)
매전 입구에 있는 뜸을 도사골이라 부른다. 남지읍 남부의 옛 이름이 도사면이었으니 이 뜸의 이름과 같으니 서로 연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예전에 우물이 있었는데 지나가던 도사가 이곳 물을 마시며 물맛이 좋다고 하며, 쉬어 갔다고 하여 도사골이라 하였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러나 산이나 길이 돌아가는 모퉁이나 모롱이를 이곳에서는 모랭이, 모리 등으로 부르고 한자로 표기할 때 흔히 돌 회(回), 모래 사(沙)를 써 돌모랭이, 돌모리를 회사곡(回沙谷)으로도 사용하니 이 도사골도 ‘도는 모랭이, 모리’, 음차로 ‘도사’로 표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 매말리골
매전 마을이 있는 골짜기를 매말리골이라 부른다.
◆ 질마산
매전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마을 앞산이기도 하다. 동편 봉유리는 65m이고 서편 봉우리는 130m로 두 봉우리를 잇는 산줄기가 길마처럼 생겼으므로 질마산이라 부른 것이다. ‘길마’를 이곳 사람들은 ‘질마, 질매’라 한다.
◆ 진막골(陣幕谷)
매전 앞쪽의 질마산 골짜기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영산현에 들어 온 왜군과 싸우며 이곳에 진을 쳤다고 하여 진막골로 불린다.
◆ 장시늪[長成浦]
예전에 성사리의 어귀라서 장승이 서 있었던 자리이므로 이곳 늪을 장승늪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매전 앞 남동편 일대 있었던 큰 늪이었으나 점점 개답되어 늪의 흔적은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아 이제는 들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 늪 옆에 말을 키우고 매었다는 진마가 임진란 때 있었다고 한다.
영남수리 제방에서 바라 본 학암 마을
◉ 6-4 학암(鶴岩)
성사리의 동부 영남수리들 들판 가운데 따로 떨어져 있는 독산 남쪽 편에 있는 마을로 행정리이기도 하다. 전에는 72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40여호이며, 임진왜란 이후 팔계 정씨가 처음에 살았다 한다.
이 마을이 의지하고 있는 뒷산이 학이 날으는 형상이라 하여 학바우, 학암(鶴岩)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마을이 크게 된 것은 영남 수리들의 공사 때 인부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가 정착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마을 뒷산의 모양이 학의 모양이라 큰 인물이 난다 하였는데 일본인들이 1925년 영남수리 제방공사를 하면서 돌이 필요하게 되자 채석하려고 학의 부리 부분을 끊었다 한다. 그래서 인재가 나지 않으리라 하였으나, 학이 북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관계없이 인물도 나고 마을이 잘 살게 된다고 한다.
◎ 모과나무터
동편 땀(뜸)인데 학암 마을이 낮은 산줄기가 북에서 들을 향해 남으로 삐죽이 나왔는데 이 산등을 경계로 그 양쪽에 마을이 있다.
모과나무 고목이 있는 뜸이어서 모과나무터라 불리는데, 동편에 있는 뜸이라 하여 동편 땀이라 하기도 한다. 지금도 모과나무가 있다.
◎ 너머굼터
서편 땀인데, 학암 마을 중 서편에 산 너머 굼턱진(굼티기-움푹 땅이 파인 곳을 말함) 곳에 있는 뜸이므로 너머굼터라 부른다. 서편의 뜸이므로 서편 땀이라고도 한다. 마을 앞은 영남 수리들이 펼쳐져 있다. 왜정 때 영남수리 공사판이 벌어졌을 때 만주(중국)인 200여명이 공사 인부로 와서 이곳에 움막을 치고 2년 이상을 거주하며 일했다고 한다.
◆ 한벌
영남수리들의 일부로 학암 서북쪽 넓고 큰 들이 펼쳐져 있으므로 이 들을 한벌이라 한다. 수리시설의 완비로 일찍이 개간되어 경남지방의 유수한 곡창지대로 이름나 있다. 계성천 범람시에 이 들을 보호하는 영남 수리제방이 보호한다.
◆ 오성계다리
영남수리들이 되기 전에 오성계 다리라 불리는 교량이 마을 뒤에 있었다고 한다. 예전 창녕에서 원님이 이 다리를 지나 칠원으로 갔다는 이름난 다리이다. 다리 상판은 길이가 8자되는 청석의 쌍석(雙石)이었다 한다.
영남수리제방에서 바라본 대성마을. 앞에 보이는 다리가 공영교이다.
◉ 6-5 대성(大成)
성사리의 북부로 외돌아 앉아 있는 마을인데 장마면 대봉리와 가까워 대봉리의 「大」와 성사리의 「成」을 붙여 대성이라 작명하였다. 최근에 성사 마을에서 행정 리로 분동 되었다.
마을 앞에 계성천을 건너서 들로 나가는 다리인 공영교(公營橋)가 있는데 이 다리는 1926년에 만들은 군내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옛 마산 - 창녕- 대구를 잇는 구도로(舊道路 · 지방도였다가 폐지됨)의 다리이기도 하다. 그때 창녕 - 마산간을 운행하였던 목탄차가 이곳을 지나다녔다고 한다.
전에는 51호가 살았는데 지금은 27호이다. 파평 윤씨가 많이 살고, 두봉재(斗峯齋 : 파평 尹弘均 祭閣)가 있다.
◆ 두리티고개
대성마을에서 서쪽으로 대봉리 대야로 가는 두리봉에 나 있는 고개이다.
◆ 두리봉
마을 북쪽에 있는 높이 90.8m의 야산으로 산 모양이 두루뭉실, 둥그스럼하므로 두리봉이라 한다. ‘두리’는 둥글다(圓)는 뜻의 이곳 지방말이다.
◆ 두리봉골
대성마을 계성천에서 장마면 대봉리로 통하는 고갯길이 있는 골짜기로 북쪽에 두리봉이, 남쪽에는 전골만당과 서봉이 있다.
◆ 전골 만당
남쪽 성사리로 가는 고개인데 고개를 내려가면 전골이므로 전골 만댕이, 전골 만당이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