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병관과 삼 원수의 비애_공민왕의 배신
글: 안병태 (안우장군기념사업회 회장)
1. 서론
2018년 4월 27일 전쟁기념관 이병형홀에서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제2회 안우 장군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다. 발표 주제는 ‘고려사로 본 안우 열전’, ‘안우의 생애와 군사 활동’, ‘조선 초 숭의전 배향’, ‘삼원수 살해사건의 당대 평가’라는 주제로 고려사 전문가분들의 심도있는 해석이 추가되어 시종 일반 청중들의 호기심을 자아내었습니다. 저에게는 기존의 단편적인 지식에서 벗어나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부하는데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저는 역사 전문가도 아니고 역사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습니다. 저는 학술세미나를 열심히 듣고 읽고 공부한 후의 제 사견이 들어있는 스토리이니 많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역사전문가가 아니라서 오히려 마음대로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2. 총병관과 삼 원수의 비애_공민왕의 배신
1351년 공민왕 원년 6월 원 숙위시절 호종했던 이들에게 연저수종공신 공신책봉을 정세운과 김용은 1등 공신을 받아 이미 왕의 극진한 총애를 받고 승승장구하던 시절이다. 안우는 처음부터 공민왕 측근이 아니었고 1352년 조일신 난 이후에야 군부판서 및 응양군 상호군으로 군부 실력자로 역사에 등장한다.
안우 장군의 무대는 홍건군전쟁(홍건적의 난, 중국사료에는 홍건군, 난은 전쟁 표현이 적합)이었다. 제1차 홍건군은 1359년 (공민왕 8년) 12월 모거경이 4만 병력으로 침입하였다. 안우장군은 홍건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분전을 하였고, 서경 탈환 후에도 고려 정예군을 이끌고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1360년 2월에 완전 승리를 거두었다. 추충절의 정난공신에 봉해지고 중서평장정사로 임명되었다. 이때까지만 해ㅠㅕㄴ도 안우, 이방실, 김득배의 공헌은 매우 크고 확실하다.
제2차 홍건군전쟁은 1361년 10월 반성, 사유, 관선생, 주원수의 20만 병력 침입하였다. 안우를 상원수 임명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분전하였으며, 중과부족으로 안주 1차 방어선과 절령 2차 방어선의 붕괴로 공민왕은 개경에서 복주(안동)로 피난하였다. 1361년 1월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하여 개경에 고려군 20만 명 집결시켜 개경 탈환 및 홍건군을 격퇴를 하였다.
제2차 홍건군전쟁에서 개경을 지키지 못한 3원수는 공민왕의 처벌 대상이지만 나라가 원체 위급하니 모른 체 지나가고 후일을 도모한다. 이는 인사를 담당하는 중앙 관료들의 공통된 의견일 것이다.
총병관 정세운을 중심으로 20만 대군을 일으켜 안우, 이방실, 김득배, 최영, 이성계 등 장수들이 개경을 공격하여 10만 적군을 죽이고 개경을 탈환한다.
공민왕 입장에서는 상훈을 주어야 하는데 전쟁에서 이긴 장수들이 국민지지를 받고 영웅이 되는 것을 질투한다. 그 대상은 실제 전투 공헌도가 높지 않은 정세운, 전장에서 공을 세웠지만 이미 처벌 대상인 3원수들이다. 공민왕은 김용과 관료들의 묵인 하에 3원수들에게 장세운 제거를 왕명으로 내리고 왕명을 어기면 사형, 지켜도 사형을 생각한다. 정세운은 밉보인 삼원수 때문에 넘치는 장군들의 무인세력 등장에 덤으로 희생당하는 경우가 된다.
왕명을 받은 안우는 김득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총병관 정세운을 죽인다. 김득배는 안우 보다는 계급이 낮았으므로 반대해도 고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안우가 정세운을 죽인 후 홀홀단신 공민왕 행궁으로 찾아온 안우를 왜 만나보지도 않고 죽였을까? 이 역시 공민왕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여 만남을 피하고 처형을 준비했음이 분명하다. 일개 경비 장수가 함부로 도원수를 죽일 수는 없다. 이때까지는 공민왕과 김용은 같은 패거리이다. 이는 공민왕이 당시의 대장군들의 영웅탄생을 견디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안우가 정세운을 죽인 것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큰 실수이다. 아무리 왕명이라도 전쟁 승리에 크게 공헌한 정세운이를 죽일 수 없다고 항변했었어야 했다. 그리고 조용히 귀양길을 택했어야 했다. 안우가 역사적으로 전면에 나오기 참으로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우·이방실은 왜 왕명을 어기지 못했을까? 만약 김득배의 의견대로 왕명을 거부했으면 안우·이방실·김득배는 평탄한 삶을 누렸을까? 김득배는 반대했고 도망 다니는 동안 왕이 그 이유를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만나지도 않고 바로 처형한 것으로 봐서는 삼 원수는 원래부터 공민왕의 눈 밖을 벗어나 죽임을 당할 운명인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잡아서 문초라도 했었어야 했다.
역사에는 김 용이 모든 것을 획책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전문가들의 분석을 보면 조금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주고 있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공민왕의 입장에서는 신흥 무인세력 등장은 매우 불편했고 공민왕은 김용을 거들어서 교묘하게 전쟁영웅들(정세운 포함)을 제거한 것으로 보여진다. 공민왕의 입장에서는 구국영웅이 된 막강한 신흥 무인세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을 수도 있다.
후대 유학자 유개(1607-1664)의 말처럼 ‘공민왕이 시킨 것이 아니라고 기필하기 어렵다’에서 보듯이 공민왕과 김용의 합작품으로 추정된다. 사실 공민왕 주연 김용 조연이다. 이 얘기는 쉽게 풀면, 조선시대는 왕조시대라 왕을 직접 비난하는 글을 쓸 수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김용을 내세워 공민왕을 간접적으로 비난한 것으로 풀이된다. 직설적으로 풀이하면 '공민왕이 시킨 것이다. 공민왕이 주도한 곳이다.'로 이해됩니다.
이 사건 후에 공민왕은 최측근인 홍언박, 김용, 경천홍, 유탁, 유숙 등과 함께 사건처리를 논의하였다고 한다. 사전에 예상한 것이 아니라면 분노한 공민왕 이 단독 결정으로 삼원수의 가족들을 반역죄로 모두 처벌했을 것입니다.
정세운 총병관과 전쟁영웅 안우·이방실·김득배는 불행히도 시대를 잘못 만나 너무 업적이 뛰어나 공민왕의 시기심과 조정 중신들의 갈등을 뛰어넘는 구국영웅이 될 수는 있는 상황은 아닌 듯하고 고려역사에서는 지워져야하는 인물들이었다.
추후 김용은 본인의 공헌에도 대우가 좋지 않아 난을 일으켰고 죽임을 당한다. 김용이 정말 난을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용까지도 최영에게 죽임을 당하여 자세한 내막은 역사속에서 사라진다. 결론적으로 역사속의 중요한 인물들인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김용은 공민왕의 희생물로 사라진다.
이로써 총병관과 삼원수의 죽음은 모두 김용의 간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되고 (왕을 가해자로 묘사 불가) 왕조역사에서는 공민왕은 비껴 선다. 이들 삼원수는 당연히 제2차 홍건군전쟁 공신 명단에 없다.
언젠가 역사학 전문가분들에 의해 이부분에 대해 조금 더 명확히 밝혀질 수 있기를 기다려 봅니다.
3. 결론
결론적으로 공민왕이 막강한 군부세력의 출몰을 막기 위해 총병관 정세운과 삼 원수(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죽였고, 그리고는 김용까지도 죽인 것 같습니다. 훌륭한 무장 충신들을 잃어 버린 고려는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