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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시절, 나의 옛 얘기]
광복동 거리의 회상
이 재 익
* [소답자한 38호] 2011.12.25.에서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송년모임을 하면서, 남포동 대영극장에서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첩보영화를 관람하면서, 옛날 나의 청소년 시절 추억들이 가슴을 저민다. 광복동, 창선동, 남포동이 연결된 이 거리에는 과거에 부산번화가 1번지였다. 이제 구도심권이 무너지면서 많이 쇠퇴했지만 지금도 연말을 맞이하여 가로빛장식을 아름답게 꾸미면서 구경하려는 인파로 북적거린다. 이 거리는 내 청소년시절과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소개한다. 때는 1960년대 중반 얘기다.
시골에 살던 내가 할머니를 모시고 국제시장가 친척 오촌 당숙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당숙에게는 할머니가 큰어머니가 되는데, 할머니 모시고 영화를 보고 오라고 용돈을 주었다. 내가 할머니를 모시고 선택한 영화가 스팔타카스라는 영화였다. 스팔타카스는 로마 노예반란의 영웅, 웅장하고 화려한 스케일의 로마사 화면에 압도됐지만, 우리말도 아니고 자막이 나오는 것인데, 한글도 모르는 할머니는 골치가 아프다고 곧 주무셨다. 김희갑이 나오는 희극같은 것을 보여드리지 그랬느냐는 당숙모님의 말씀에, 내 선호대로 영화를 선택한 것이 지금도 부끄럽고, 할머니에게 죄송한 마음뿐이다. 할머니는 그 영화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본 영화다. 이 영화는 어린 나에게 역사 전공으로 내면화되는 큰 영향을 주었지만,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 이대호 야구선수가 할머니와 어렵게 살던 시절을 생각하며 가난한 독거노인에게 6년째 연탄배달을 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 얘기를 그대로 시 형식으로 다시 표현해 본다.
참 오랜만에 남포동 대영극장에서 부부동반 송년모임으로 영화를 관람하니 극장모습도 많이 달라졌고 옛 추억 하나로 마음이 아린다.
청소년 시절에 시골에서 할머니와 함께 부산국제시장 당숙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당숙모가 할머니 모시고 영화를 보라고 용돈을 주어 스팔타카스라는 웅장한 로마사 영화를 보았다.
한글 모르는 할머니는 한마디 알아들을 수없는 자막에 눈도 어리는 앞자리의 큰 화면이라 머리가 아프다고 곧 주무셨는데 할머니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였다.
김희갑이 나오는 희극 같은 것을 보여드리지 그랬느냐는 당숙모 말씀에, 내 짧았던 생각이 부끄러워 지금도 가슴을 저민다. 이대호 야구선수가 할머니를 생각하며 가난한 독거노인에게 6년째 연탄배달을 하는 모습이 숙연하다. <이재익, 할머니와 극장>
할머니와 영화를 본 뒤에 나는 결심을 하고 객지인 부산에 와서 혼자 고학을 하며 3년이나 늦게 중학교를 다녔는데 졸업반일 때 일이다. 동아일보 신문배달을 하면서 생활했는데, 6개월 동안 한번도 결근을 하지않은 모범배달원 상여금도 받았고, 라이온즈 클럽에서 주는 모범 배달원 표창도 받았다. 어느듯 중학교 졸업식을 맞이했는데, 부산시 교육회회장상을 받았다. 졸업을 하자 은사 국어과 이연기 선생님이 가정교사로 취직을 시켜 주었다. 창선동에 미성당이라는 보석상 이주석 사장의 딸,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8개월간의 신문배달생활을 끝내고 숙식을 함께하는 가정교사가 되었다.
보석세공소 견습공 문찬이를 따라서 충무동 사장의 자택으로 안내되어 갔더니 내가 가르칠 9살의 사립남성초등학교 2학년 이영주가 남동생 종환(7세), 여동생 혜련(4살)이와 놀고 있었다. 문찬이는 '영주는 착한데 고집이 세고 버릇이 없어서 처음부터 꽉 눌러야지 그렇지 않으면, 기어 오른다'고 귀뜸해주었다. 내가 보기에는 영리하고 착하게만 보여 안심이 되었다.
직공중에 이연기 선생님의 동생 이충기가 나와는 동갑이고 활달하고 친절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제 먹는 것 잠자리가 갑자기 좋아지고 선생님이라는 과분한 호칭에 좀 어색하기도 했다. 나는 영주의 학습은 물론 등하교시 안전한 등교를 위해 데리고 다니고, 하교시에 기다렸다가 피아노 교습소도 같이 다녔다. 영주의 모는 친절했고 영주도 나를 잘 따라주었다. 나는 동아고교 2부를 지원해서 다녔다.
7월이 되자 영주네 집은 갑자기 브라질로 이민을 갈 계획을 세우고 집을 내놓았다. 예상외로 집이 빨리 팔리자, 남부민동에 있는 영주 큰집으로 함께 가서 기거했다. 영주 아버지의 두 형님 가정도 영주네와 같이 형제 3세대가 모두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찌는 듯이 무더운 8월 부산항구 제2부두에서 영주네 가족들은 큰 배 이민선을 타고 고국을 떠나는 다른 수많은 이민자들과 함께 친지들과 이별하는 눈물을 뿌리며 떠나갔다. 7개월 동안의 가정교사 노릇도 접었다. 나에게는 시련이 다시 찾아왔다. 여러 가지 옷이며, 영주가 아끼던 인형같은 것을 나에게 주고 갔다. 이사장의 질녀 옥남이가 그 인형을 갖고 싶어해서 주었더니, 그 댓가로 교복 한 벌을 사주었다. 결국 인형을 교복 한 벌값으로 판 셈이었다.
영주 부모가 경영하던 창선동 보석 상점은 그분의 친구 손양견씨가 인수했다. 그리고 나도 함께 손사장에게 맡겼다. 나는 이제 보석상점의 점원이 되었다.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상점과 직영하는 보석세공공장 사이를 오가며 심부름을 주로하며 밤에는 숙직을 하고 새벽에 정식 점원인 호순이 형을 도와서 진열장에 보석을 진열하는 일을 도왔다.
손씨 누님은 일제때 여의전을 나온 지식인인데 어린 딸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살면서 호순이와 함께 보석가게의 장사 일을 맡았다. 이상하게도 영주네 때는 장사가 잘 됐는데 손사장이 인수하면서 부터는 경영이 점차 어려워져갔다. 올케는 시누가 빼돌린다고 의심을 하여 시누이 올케간에 사이가 나빠서 자주 싸웠다. 손씨 부부도 잘 싸웠다. 한번은 내가 상점에서 주문받은 반지의 루비 원석을 종이에 싸서 들고 세공장으로 갔는데 가서보니 원석이 없어졌다. 가던 도중에 길에 흘려버린 것이다. 얼마나 황당하고 미안하던지 화정실에 가서 많이 울었다.
손사장과 이민을 간 이사장, 친구 사이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둘은 함께 같은 스승밑에서 보석세공기술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 스승에게는 질녀가 있었고. 두 친구는 모두 그 처녀를 사랑했다. 경쟁 끝에 결국 그 질녀는 손사장과 부부로 맺어졌다. 그토록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였건만 점점 기울어져가는 상점과 마누라 바가지에 손사장은 풀이 죽어서 언제나 말이 없었다. 어려운 중에서도 손사장은 나에게 잘해줬다. 다른 사람 몰래 용돈도 더 줬다.
그 무렵 내 동생 재열이가 부산에 내려와서 6촌 형님 우재 욱재 형제가 동업하는 범일동 태양모사점에 근무하였는데, 1967년 6월 첫 일요일에 우리 형제는 태종대에 놀러갔다. 동생은 내가 처한 상황을 알고, 직장을 한번 옮겨보라고 권했다. 결국 나는 동생의 소개로 6촌형 우재가 송도에서 새로 차린 요꼬편물 공장의 관리일을 맡아 직장을 옮기면서 남포동 창선동 광복동 시대를 마감했다.
창선동~광복동은 당시에 화려한 보석상가가 즐비했던 거리였는데 지금 와서 보니 보석가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층층계단으로 용두산공원까지 올라가던 미화당 백화점도 벌써 없어졌다. 추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그때도 있었던 서울깍두기집은 아직도 성업중이라 반갑다. 찬란한 빛의 거리를 걸으면서 이 거리 어딘가에 45년전에 잃어버린 루비 보석알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싶은 느낌에 잠겨있는데, 쌀쌀해진 날씨에 바로 옆에서 함께 걷고 있지만,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턱이 없는 아내가 옆구리를 파고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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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학정형... 역시 가슴 저미는 글...
가슴이 찡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