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 약사>
족보를 같이 하는 종파의 사람들이 모인 종중을 '대종회'라한다.
우리나라 족보의 역사는 이르면 16세기 보통 17세기에 족보를 쓰기 시작하였다.
처음 족보를 쓸 때만 해도 대종회가 결성되어 이 족보를 쓴 것이 아니다.
어느 종파에서 주관하여 본관이 같은 성씨의 세보를 수합하여 만든 것이
'대동보'라 하였으며 족보를 같이하는 결성체가 대종회이다.
무안박씨의 처음 대동보는 경파에서 주관하여 만들었다고 말씀 드린바 있다.
족보를 같이 하면서 멀리 떨어져 소식을 모르던 자손들의 수단을 수합하고 조상
의 소목을 분별하였으며 종파 간에 교제가 시작하게 되었다.
대종회란 문화는 유교를 숭상하는 민족의 고유한 문화이다.
옛 조상을 기억하며 조상에 대한 향사를 함께 참여하여 은택을 기리며
종족간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다.
무안박씨는 족보에 비하여 대종회의 역사는 일천하다.
무안박씨족보를 같이하면서도 대종회결성이 늦어져
1970년에야 창립총회를 결성하였다.
이제 겨우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각 지역에 분파하여 결성된 종파의 대표가 모여서
대종회를 결성한 것이 아니고
서울에서 1962년 재경종인들이 무안박씨 화수회(花樹會)로 모여 시작하면서
해를 거듭하여 세가 확장되고 향촌에서 올라와 사는 각 종파의 중진들이
참여함으로써 대종회로 발전된 것이다.
이렇게 서울에 사는 무안박씨 화수회가 대종회로 발전한것은
무안박씨만의 특이한 일이다.
대종회는 1970년 여름 서울종로 안국동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10월에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초대 회장으로 한국일보 상임감사 지평파 박희진을 선출하고. ]
부회장에 지평파 박정재, 음죽파 박수환, 영해파 박홍택(상주), 해남파 박홍근,
무안파 박영록, 군수공파 박화복, 경파 박영돈(건설업), 박재원(금융연합회사무국장),
노성파 박영원을 선출하고,
총무에는 무안파의 박구화,
간사에 홍산파의 박성룡이 맡기로 하였다.
1970년 당시 무안박씨는 22개 종파에 세대수는 9,609세대며
각파 대의원 수는 103명 이사의 수는 49명으로 구성하여
탄탄한 조직으로 발전하여 대종회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 세대수가 많은 순서대로 적으면
1. 무안파 2,618세대
2. 영해파 1550세대
3. 해남파 970세대
4. 당진파 670세대
5. 지평파 557세대
6. 노성파 491세대
7. 음죽파 471세대
8. 진도파 355세개
9. 군수공파 349세대
10. 경파 314세대이다.
1970년 대종회가 결성되어
처음 1차로 착수한 사업이 족보를 새로 만드는 일이었다.
1927년 정묘대동보를 발간한지 5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새로 증보할 때가 되었다.
전국 각파 종중을 총망라하여 전국에서 모인 총회에서
1972년에 발의하고 시작한 것이 2년여 만에
1974년 갑인 대동보를 출간하게 되었다.
두 번 째로 착수한 일이 사우(祠宇) 묘당을 짓는 일이다.
무안 땅은 무안박씨의 관향이다.
무안에서는
1778년부터 무안박씨 시조 진승공 일위(一位)만을 단(壇)을 세워
단제(壇祭)로 향사하다가
1967년 작은규모의 묘당을 지어 시조 위패를 봉안하고
2세부터 7세까지 묘정(廟庭)에 설단하여 향사(享祠)하고 있었다.
매년 향사 때마다 장소가 매우 협소하여 조상의 영령 앞에 죄책감을 통감하고
1978년 3월 대종회 정기 총회에서 묘당중건사업을 발의하여 가결하였다.
그 해 5월에 경기묘(景基廟)를 착공하여 10월에 준공하였으며
경모사(景慕祠) 경조사(景祚祠) 경안문(景安門)도
동년 9월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979년 3월에 준공하였다.
위패 봉안은 1979년 10월 21일 시조 진승(進昇)부군을 비롯하여,
12세 형(亨)부군까지 열다섯 부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봉안제(奉安祭) 및 세일제 (歲一祭) 향사를 봉행 하였다.
당시 경기묘당을 건축할 때 규정을 상고하니
묘당을 지은 부지는 무안파의 개인의 소유이고
건축비는 각 종파의 표성금으로 건축한 것이다.
대종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워 십시일반 성금을 내는 것은
회원의 의무로 받아 들인다 해도
대종회가 관향인 무안에 척촌(尺寸)의 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종회가 발족한 1970년대는 종중의 땅이 거의가 공동명의로 관리하고 있었으며
종중명의로 등기하지 전이다.
대종회가 예부터 내려오는 종중 소유의 재산에 대하여 무안파와 협의 하여
소유권에 대한 것을 분명히 규정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는데 실기한 것이다.
관향의 모든 재산이 무안파의 파조 되시는
익경공이 뒤늦게 낙향하여 일군 재산이라고 볼 수 없다.
무안박씨가 수관(受貫)한 이래 예전부터 유산으로 내려오는
종중재산을 무안파 자손들에게 모두 분재(分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안박씨는 다른 성씨와 달리 대종회 재산이 전무한 것이
앞으로 대종회 발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지금 무안박씨대종회는 재정적으로 어려워 종파에서 분담하는 연회비로 운영되고 있다.
대종회에 종손이 없고 내려오는 재산도 없다.
대종회에 재산이 없으면 종파의 결속력이 떨어지고 운영이 어려워진다.
아직까지 여러 종파의 헌성금으로 운영한다지만 앞으로가 문제이다.
세상은 많이 변하여 각 종파의 재정상태도 어려워
사우관리며 향사에 드는 비용을 종파의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관향의 유산을 무안파가 전부 분재 받았으니
대종중 종사에 짊어진 책무가 막중하다.
역대 대종회 회장은 누가 회장을 맡든지 그분의 수고와
재정적으로 많은 헌신을 하며 희생적으로 일을 하여왔다.
그분들께 종인들은 감사하여 오래도록 기억하시길 바란다.
역대회장님의 공적이 다 훌륭하고 숭고하지만
특별히 해남의 문수(汶洙)회장의 업적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2008년 대종회 회장에 취임하시자
무안파 명의로 되어있는 경기묘부지와 묘당의건물을
대종회 명의로 이전하기로 마음먹고
무안파 종회와 여러 종인 한사람 한사람을 찾아가 설득하고 도움을 호소하여
1년여의 천신만고 끝에 무안파 종회에서 증여하는 형식으로
2010년 7월 7일 묘당 부지 1,758평과 경기묘 건물을 대종회 명의로 등기를 마쳤다.
무안박씨 대종회가 처음으로 재산을 가지게 된 것이다.
두 번째는 대전 뿌리공원에 무안박씨 조형물을 완공하긴 일이다.
시작은 직전 회장 영해의 동수회장이 기초를 놓았고
후임으로 취임한 문수 회장이 성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여러 종인을 두루 찾아 나서 7,000여만 원을 모금하여
2008년 7월 10일 마침내 조형물을 설치하게 되었다.
재정이 빈약한 대종회로서는 어려웠던 일을 두 분 회장이 해낸 것이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다.
이를 위하여 성금을 보내주신 종인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그밖에도 대종회가 발족한 후에 종사에 관한 많은 업적이 대종회 일지에 기록되
어 역사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