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4년 봄소풍시 학부형들과 반주없이
마이크만으로 노래를 부르던 흥겨운 한때 -
니도 한번 맞아볼래?
- 40여년 교직에 종사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정년퇴임을 앞두고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기 위하여 쓴 교단일기 -
한때는 학부모들을 학교에 오지 못하게 접근금지 시킨 적이 있었다.
학부모를 만나면 치맛바람 때문에 불미스런 촌지사건이 일어날 수가 있으므로 그것을 근절시키기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 때문이었다.
90년대 초 양학초등에 근무할 때는 '스승의 날'을 전후해서는 교장선생님께서 교문에서 근무 하시면서 학교를 방문하는 학부모들을 돌려보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내가 초임시절 시골학교에서는 학부모총회, 봄 · 가을 소풍, 운동회, 졸업식 등 커다란 학교행사시에는 공식적으로 학부형들과 어울리는 자리였다.
오늘날같이 노래방이 없던 시절이라 그러한 자리가 마련되면 우리들은 손뼉에 맞추어 반주도 없는 노래를 불렀다.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학교 스피커에서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주가 없어도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면 스피커를 통해서 커다랗게 흘러나오는 내목소리, 그것이 신기하고 신이 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학부형들은 학교 방송 시설을 활용해서 노래를 부르자고 요구를 했었다.
부르는 노래를 고출력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설이 오직 학교에 설치된 방송 시설뿐이었기 때문이다.
반주도 없이 부르는 노래가 오늘날 기준에서는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만 그 시절엔 그런대로 멋이 있는 시골 풍경이었다.
초임지 금릉군(지금 김천시) 신곡초등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당시 4학년을 담임하고 있었는데, 우리 반에는 박00라는 아이가 있었다.
4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였다.
나는 초임교사의 열정으로,
‘5학년으로 올려 보내기 전에 구구단 하나만이라도 확실하게 외워서 보내야 겠다.
누나인 00이는 전교어린이 부회장으로 공부도 잘하며 모범생 답게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굳은 결심을 하고 다음날부터 수업이 끝난 시간을 활용하여 나머지공부를 시키며 차근차근 구구단을 외우게 하였다.
그리하여 2단을 통과하고 3단도 통과하였다.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단수가 올라갈수록 외우는 것을 힘들어 하였다.
그런 어느 날의 일이었다.
구구단을 외우게 하고는 교무실에 잠시 일이 있어서 다녀오니 아뿔싸! 그사이 도망을 가고 없었다.
이튿날 괘심한 생각에 나는
“이제까지 잘해왔잖아? 왜 선생님 허락도 없이 집에 갔니?”
하고 꾸중을 하였다.
그러는 한편 반 아이들에게는 선생님 지시를 어기고 도망을 가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이 기회에 알리고 싶었다.
수업시간중에 교실 뒤에서 손을 들고 있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내 의사가 충분하게 전달이 되었다고 쾌재를 부르며 벌을 준 다음날 아침이었다.
출근을 하니 아이들이
"웅성웅성"
하며 분위기가 이상하였다.
반장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아차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선생님!
00가 어제 벌을 너무 많이 받아서 몸살이 나서 오늘 학교에 못 나오는데요.”
평소 다른 아이들에 비하여 몸이 약한 편인 녀석이 어제 받은 벌로 몸살이 난 것이다.
‘아! 이걸 어떻게 수습한다.’
하고 고민을 하며 1교시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교실 창밖 운동장으로 아주머니 한분이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직감적으로 00어머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지 살펴보니 다짜고짜 우리 교실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노크를 한 후 복도에서 마주한 그녀는
“선생님! 우리 00를 인간되게 하시려고 애쓰시는 점은 무척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당부드릴것이 있습니다.
우리 애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므로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그저 학교에는 부지런히 등교해서 졸업만 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3학년 때까지의 선생님들께서도 그렇게 이해를 하셨으니 고려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면서 한복 치마 뒸쪽에 감추어두었던 ‘아리랑’담배 2갑을 내어 주신다.
2보루도 아닌 낱갑 담배 2갑.
때로는 촌지만 챙기는 몰지각한 교사로 매도당하는 요즈음 현실에서 초임지에서 순수한 나의 열정으로 일어났던 이 사건은 오늘도 기억이 또렷하다.
그 후 초임지 김천을 떠나서 포항 죽북초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겼다.
1984년 5월에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하는 ‘전국소년체육대회’가 포항에서 열렸다.
옆반선생님은 체조특기를 가지고 있는 관계로 소년체전지도자로 선발이 되어 장기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 후임으로 당시 임시강사로 불리던 김 모 선생님이 부임하게 되었는데, 이 양반이 사고를 쳤다.
월말고사를 치고 난 후, 본래 담임보다 임시 담임이어서 잘 가르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 부담이 되었던 김 선생님은 채점후 결과에 따른 채벌을 했는데, 이것이 사건이 되었다.
이튿날 출근을 하니 야단이 났다.
엄마가 화가 나서 아이는 등교를 시키지 않고 교육청에 전화를 하는 통에, 담당 장학사가 진상조사를 하러 나왔다.
장학사가 돌아간 오후에 학교에서는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차원에서 담임과 몇 분의 보직교사들이 그 아이 집으로 방문을 했다.
도착한 순간 아이 엄마가
“내 아이가 맞은 만큼 담임 당신도 한번 맞아 봐라!”
하면서 주변에 있던 몽둥이로 담임을 때리려고 하였다.
다행히 아이 아버지가 몽둥이를 빼앗아서 더 이상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엄마는 늦게 결혼을 해서 이 아이를 낳았고, 그 날은 마음이 상해서 아침부터 술을 들이키고 술김에 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공교롭게도 그 아이의 동생을 담임 하고 있었다.
몽둥이 사건을 생생하게 목격한 나는 정말로 안전운행을 하면서 조심조심 학급 운영을 하였다.
그러던 차 가을운동회가 다가왔다.
운동회가 끝난 후 학부형들의 요구로 학교 앰프시설을 이용하여 반주 없이 마이크를 사용하여 부르는 노래 파티가 운동장에서 벌어졌다.
유흥이 무르익을 무렵이 되자 그 엄마가 내게 다가오더니 잠시 면담을 하잔다.
‘아차 내가 뭘 잘못했지?
나도 몽둥이 타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스쳐갔다.
그런데 한쪽 구석으로 간 그녀는 예상과 다르게
“선상님!
우리 00이 인간 좀 되게 해 주세요.
걔는 형과는 다르니 잘못한 일이 있으면 매를 들어서라도 제발 인간이 되게 해 주세요.”
하면서 치마 뒤에 감춰두었던 ‘청자’ 담배 2갑을 내어민다.(절대 2보루가 아님)
그러나 나는 몽둥이 사건이 떠올라서 그해는 정말로 안전하게 또 안전하게 학급을 운영 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두 차례나 2갑의 담배를 뇌물로 받은 일들이 있는데,
이것은 뇌물일까?
순수하게 마음을 담아서 전한 선물이었을까?
첫댓글 담배두갑은 마음의 선물이네요
교직생활안전운전 잘하셨습니다👍🎶
ㅎㅎ
담배 두갑이 대단한 시기 였나봐요.
돌이켜 보면 지난날 열정이 넘처 했던 일들이 구설수로 되돌아 옵디다.
전 어른들 풍물을 가르켜 현장에 니가다 보니 때론 기가 찰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마져도 추억 이지요.
안전한 학급운행은 필수~
요즘은 방치한다해도 과언이 아닌듯 합디다.
특히 고등 학생돌~~
피곤 하지만 좋은글에 쉬어 갑니다.
오늘 포항시 승격70주년 행사하고 9시 다되어 왔거던요.
주말밤 편히 쉬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