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바둑연대기(11)
회사생활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컴퓨터에 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어서 같은 팀 동료들에게 미묘한 눈치를 받는 것만 제외하고 말이지요.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한 동료가 Ctrl+c와 Ctrl+v를 알려주어야 할 정도였지요. 출퇴근은 개량한복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습니다. 한여름에 남부순환로를 오토바이로 달려보신 분이라면 아실 테지요. 무거운 헬멧을 쓰고 달리면 땀에 절게 되고 가벼운 헬멧을 쓰고 달리면 매연에 절게 되는 것을요. 하지만 이 정도는 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지요. 그리고 회사가 끝나면 강남역의 컴퓨터학원을 다녔습니다. 6개월 과정의 웹마스터과정이었지요. 파워포인트, 포토샵, SQL등을 속성으로 알려주는 곳이었는데 상당한 고액을 내고 다녔습니다. 바둑사범으로서 눈치받기 싫었고 모르는 것을 아는 체 하기도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몇 달간은 보드게임(바둑, 장기, 오목, 체스) 관리를 맡았기에 업무에 크게 지장은 없었습니다.
게임회사의 즐거움은 업무시간에 자사의 게임을 해도 무방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게임을 하며 모니터도 하고 관리를 하는 것이거든요. 게임상의 오류를 잡아내는 것과 이용자들의 불만을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개선하는 것이 제 주 업무였지요. 메닉스에서 제작해 서비스하던 PC통신 천리안 장기도 맡아서 Z로 시작하는 운영자 아이디로 관리도 하였지요. 그곳에서 소설가 이외수 선생님의 천리안 홈페이지를 알았습니다. 이외수 선생님의 천리안 홈페이지에서의 제 아이디는 ‘까까머리중’ 이었습니다. 제겐 아직도 교회에 대한 정서도 남아있었고 아는 노래의 대부분 찬송가와 복음성가만 알았는데 아이디가 ‘까까머리중’ 이었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99년에 한 번, 서울 송파 석촌호수 인근에 있었던 번개모임에 가서 향초, 동구리, 김호님 등을 만났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그러나 바둑은 더 이상 즐길 수 없었습니다. 바둑을 두는 입장이 아니라 관리하는 입장이어서 초점이 달라진 까닭이었지요. 대신 관리자 입장에서 보드게임과 관련된 많은 분들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체스를 보급하던 이상범 원장님과 재회했으며 당시 아마추어였던 장기의 송해 프로, 장기 최고수인 김경중 프로, 바둑 프로기사 김동엽, 정대상, 천풍조, 나종훈 사범님등을 뵈었지요. 그리고 천풍조 사범님의 제자인 러시아의 바둑유학생 샤샤와 스베타도 넷바둑의 지도사범으로 고용해 국내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개봉했던 바둑영화 ‘스톤’의 故조세래 감독님과도 만났습니다. 자신이 쓴 ‘역수’라는 바둑 장편소설과 인터넷 바둑영화의 대본을 들고 찾아왔었지요. 비록 당시의 여건상 인터넷 바둑영화를 제작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기에 故조세래 감독님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그야말로 어느 날, 월간바둑을 훑어보다 김희중 사범님의 ‘Play361’의 오픈 기사를 보았습니다. 김희중 사범님에 대해서는 이전 월간바둑을 통해 은퇴소식도 접했고 다른 프로기사님들을 통해 개인적인 고충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삐삐는 지니고 있었습니다. ‘Play361'은 수십 명의 프로기사가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지도대국을 해주는 사이트였습니다. 저는 홍보지면에 나와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했습니다. 통화가 되자 “그래, 회사 마치고 사무실로 오너라.” 김희중 사범님께서 반갑게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Play361‘은 서초동에 있었습니다. 저는 한달음에 서초동으로 달려갔습니다. 방배동에서 서초동까지는 오토바이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일본기원 아마 초단인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근거해 100분도 넘게 걸린 것 같았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