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피에타]
약 2천 년 전 그레코-로만 시대의 수사학 중에 ‘파라디그마’라는 것이 있었다. 수사학이라는 게 원래 나 아닌 타인에게 나의 생각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목적이라 다양한 방법론이 필요했으며, 당시 정서와도 잘 맞아 떨어져야 했다. 파라디그마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정해져 있다. 이를테면, ‘세상에 가족만큼 가까운 관계가 없다’라는 말을 누군가 했다고 쳐보자. 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그에 맞는 상황을 설정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간암 말기에 놓여 분초를 다투는 경우에 군 복무 중인 아들이 기꺼이 자신의 간 2/3를 병든 아버지에게 내어준다. 물론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 이식 수술 성공률이 99% 라고 하니까 안심은 되지만, 아무튼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의 멀쩡한 간을 잘라내야 한다는 사실은 가족이라 하더라도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효자가 많기로 유명한 우리나라에선 종종 이런 효행을 보도하는 기사가 실리곤 하는데 역시 ‘세상에서 가족만큼 가까운 관계가 없다.’가 맞는 말이다.
이처럼 말에 상황이 더해서 하나의 논리가 성립되면 이를 두고 파라디그마라 부른다.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지점은 말이 아니라 상황이다. 아무리 가족 관계가 중요하더라도 그에 적절한 상황이 제시되지 않으면 말의 효력이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무리 입을 나불거려도 행동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모두 부질없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가깝게 묶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오는 하느님나라의 윤리를 모아서 산상설교(5-7장) 안에 질서정연하게 배치했다. 아마 복음서작가 마태오가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남다른 취향을 갖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나이가 지긋해지다 보니 말씀을 산발적으로 늘어놓는 게 영 눈에 거슬렸을 수도 있다. 마태오는 자신의 정리 습관을 다시 한 번 발휘해, 산상설교에 바로 이어 예수님의 10가지 기적 이야기를 묶어놓은 편집 작업을 했다(8,1-9,34). 이는 예수님이 비단 말씀에서 그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이 예로부터 기다려 왔던 분, 곧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분의 메시아적 행동으로 확인되었음을 뜻한다. 저명한 성서학자 슈니빈드(J. Schniewind)는 예수님을 ‘말씀의 메시아이자 행동의 메시아’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다음으로 주목할 점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갔을 때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발견 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마태 3,14-15: 그러나 요한은 그분을 만류하며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제게 오시다니요?”하였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지금은 이내로 하시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그제야 요한은 그분 (뜻)대로 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 저 멀리서부터 세례를 받으러 오는 예수님을 단박에 알아봤다. 그리고 자신과 상대도 안 되는 높은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오히려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며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을 설득하여 세례를 베풀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의로움’을 행동으로 완성시켰다. 사실 복음서가 쓰인 시기인 기원후 80-90년경 그리스도교회에서는 예수님은 진즉에 하느님의 아들이자 인자人子로서 그 입지가 누구도 반발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했다. 따라서 이미 지나간 추억의 인물인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몹시 꺼림직 했을 터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최고 신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세례를 받았다. 아니,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도록 허락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극도의 겸손을 통해, 예수님이 결코 말씀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분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율법해석을 모아서 이른바 ‘대립명제’(5,21-48)라는 문단을 구성했다. 그리고 대립명제의 서론으로 5,17-20을 배치했는데 그 중 20절을 옮겨보면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능가하지 못하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로 나와 있다. 이는 시사해주는 바가 무척 크다. 율법의 기본 논리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율법규정들이 비록 인간의 무기력하게 만들고 절망감을 안겨주지만 율법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을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빛이 나기 마련이다. ‘대립명제’의 서문에 ‘의로움’이라는 낱말을 사용해 예수님 사상의 일관성을 찾으려 한 작업은 복음서작가 마태오의 큰 업적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마태오는 율법의 가치를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예수님이 율법 질서를 수호하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하더라도 율법 자체가 그른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마태오복음에는 무려 일곱 번에 걸쳐 이들 위선자들을 저주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23장).
우리는 흔히 언행일치를 강조한다. 이 사자성어의 기원은 쉽게 추측이 가능한데 말 다르고 행동 다른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 주의하라는 뜻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마태오의 공동체도 예외는 아니었을 테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공동체의 중요한 좌표가 되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는 주님이신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자들이기에 공동체가 지녀야 할 자세의 모범도 예수님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율법의 정신이 환히 밝혀진 셈이다.
율법의 핵심은 행동에 있다. 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인가 해야 한다. 말로는 부족하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마땅하다(18,21-22). 율법의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한 바울로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한 것이다.
수사학 용어인 헬라어 ‘파라디그마’(Rara,digma)에서 오늘날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패러다임’이 유래했다. 그러니까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누구인가 강조할 때는 말이 아니라 실제 상황, 다시 말해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하는 법이다. 아무리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백번 강조한들 모든 건물 입구에 휠체어가 오르내릴 수 있는 경사로 설치를 법으로 제정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법을 만들 때는 당연히 경사각도와 길이와 너비를 꼼꼼하게 규정해 놓아야 실제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이다.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크게 부각되면서 통일이 되면 어마어마한 경제효과가 뒤따르고, 단숨에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리라는 희망을 국민에게 심어주었다. 그러나 이 말이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상대는 일말의 의지조차 없는데 우리 쪽에서만 통일을 이루겠다고 하면 결국 상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억지 통일을 이루겠다는 뜻이다. 게다가 상대가 핵무기까지 갖고 있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니 우선 서로 좀 친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친해지려는 노력은 전혀 안하면서 정치적 표어만 앞세우면 통일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삼척동자도 알 법한 이야기다.
우리는 언제쯤 장애인이 숨 좀 쉬는 나라가 되고, 언제쯤 북의 피붙이들도 괴물로 보이지 않게 될까? 과연 우리는 언제쯤 예수님이 알려준 지혜를 깨달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