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영화관에서 동일한 영화를 보아도 그 영화에 대한 '느낌'이나 '평가'가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각자의 기질이나 개성이 다른 이유만이 아닌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실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실재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적인 실재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오랫동안의 체험을 통해서 한 개인이 그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어떤 '느낌' '분위기' '이미지' '가치감정' 등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바닷가의 검은 바위들은 그것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저 그렇고 그런 바위 보통바위와는 좀 특이한 바위 한 번쯤 보고 감상할 만한 바위 외에 더 이상 별다른 의미가 없는 바위일 뿐이다. 하지만 어린시절 부터 그 바위에서 놀고 그 바위 사이에서 조개나 고등을 줍고 그 바위들 옆에서 수영을 하고 그 바위와 함께 살아온 사람에게 있어서 그 '검은 바위'는 단순한 바위가 아니다. 그 바위는 생명을 주고, 친구가 되어주고, 휴식처를 마련하고, 명상의 장소를 제공하고 한 마디로 가장 친근하고 가장 소중한 '자연의 선물'처럼 여겨질 것이다. 동일한 바위에 대해서 각자가 지니고 있는 그 바위의 '내적인 실재' 이것이 곧 '정신적인 실재'인 것이다. 중세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정신적인 실재'를 '영혼의 내용'이라고 생각하였다. 인간이 오랜 세월을 살아가면서 소유하게 되는 것들, 이들 중에는 외적인 재산, 정신적인 업적들, 사람들 사이의 명성과 신뢰 등이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소중한 것이 '나의 내면에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실재들'이다. 왜냐하면 모든 외적인 것은 시간과 함께 소멸할 수 있지만, 이 '정신적인 실재들'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할 것이고, 나의 동일성 즉 '내가 누구인 것'을 규정해 주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적인 실재는 학문을 하거나, 고상하게 무슨 명상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정신적인 실재들을 간직하고 살아가며 때로는 목숨 만큼이나 소중할 수가 있다. 가끔 농부들이 자신들의 농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혹은 어부들이 자신들의 바다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것은 단순히 '농토'나 '어장'의 경제적 가치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들이 그들의 실존의 일부 즉 '정신적인 실재'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정신적인 실재는 자신들의 목숨만큼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비난하는 범죄자라 할지라도 가끔 그의 어머니나 그의 어떤 벗은 그를 신뢰하고 믿어주고 하는데, 이 역시 이 사람에 대한 그들의 '정신적인 실재' 때문이다. 한 사람의 정신적인 실재는 그의 영혼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어서 어떤 정신적인 실재들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흔희 통속적으로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실천할 줄 안다'고 하는데, 이를 철학적으로 말하면 그의 내면에 사랑에 관한 추억 즉 수많은 사랑에 관한 정신적인 실재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당연히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그의 정신적인 실재는 그의 삶의 '모습' 즉 '삶의 형식'과 '삶의 질'을 규정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적인 실재를 가지기 위해서는 '시간만 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실재를 가지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한 송이 국화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냥 무심히 지나치면 그 아름다움의 가치는 실제로 발생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고 그 향기를 맡아보고 그것을 감상하고 음미 할때, 그리하여 그의 정신 속에서 아름다운 국화꽃의 이미지를 간직하게 될 때, 비로소 그 국화꼿이 그 참된 가치를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대상들은 어떤 사람들의 정신적인 실재가 된다는 한에서 어떤 실재적인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은 가치 중립적인 것,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능성 중의 가치'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인간관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무리 훌륭한 인격자라고 하더라도 무인도에 표류하여 평생을 혼자 산다면 그의 인격이 무슨 가치가 있으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비록 만인이 비난하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다가가서 용서를 배풀고 사랑을 배푼다면 그는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가장 소중한 가치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가치는 각자가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실재'를 통해서 무한히 크지거나 증폭될 수 있다. 이는 연인들의 사랑에서 두드러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한 사람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바다 만큼 하늘 만큼 소중한 존재로 부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네오 토미스트인 '에메 포레스트'는 이러한 정신적인 실재를 가지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솔립시즘(solipsisme)'이라고 한다. '솔립시즘'에 가장 가까운 한글 용어는 '독단주의'이다. 솔립시즘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이상한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데, 흔희 '사이비 종교'를 믿거나 '광신도'인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정신적인 경향성'을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도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나타나고 있는데, 아직 지성이 성숙하지 않는 어린이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부모님의 경제적 사정이 전혀 허락하지 않는데도 명품 옷을 입어야 된다고 등교거부를 하며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는 고등학생은 곧 '솔립시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일상인의 경우 이러한 솔립시즘은 인간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가령 어떤 마을을 찾고 있어서 길을 묻는데, '새별오름을 지나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가도 가도 마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인 실재를 통해 말했지만, 묻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전혀 실재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솔립시즘은 인간관계성에서 전형적으로 발생하는데 어떤 사람에 대해서 '관계성'을 가지기도 전에 이미 자신의 내면에 어떤 '정신적인 실재'를 형성해 버리는 것으로 이는 엄밀히 말해 '실재'가 아닌 '허상'에 가까운 것이다. 속된 말로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 그에 대한 어떤 한 두가지 정보만으로 '선입견'을 형성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보다 훨씬 왜곡되고 나쁜 '이미지'를 형성하기도 하고,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탁월한 것'으로 혹은 '남만적인 것'으로 형성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든 이 경우는 전혀 '정신적인 실재'가 형성되지 않은 '허상'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허상'은 그와의 관계에서 진정한 소통을 방해하면서 참된 관계성을 결코 형성하게 하지 못한다. '자연적 대상'은 오직 그 추억이 인간의 일방적인 관계에 있기에 정신적인 실재는 일방적인 차원에서 형성된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정신적인 실재는 그와의 진정한 소통을 통해서 진정한 관계성을 가질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즉 인간관계를 통한 '정신적 실재'의 형성은 어떤 경우에도 일방적인 아닌 '상호적인 것'이다. '꽃보다는 사람이 아름답워...'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이말이 참이되려면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소통과 관계성을 통해서 '정신적인 실재'가 된다는 한에서 이다. 만일 이러한 '정신적인 실재'가 형성되지 않은 '솔립시스트'들에게는 여전히 사람보다는 꽃이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고자 하는 자, 그리하여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하고자 하는 자는 소통과 관계성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은 피상적이 아니라 그의 '실재'를 알고자 하는 내면적인 관계여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