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으로 일본열도를 경악케한 '한국인 조치훈' =
나는 잡기에 능하지는 않다. 특히 운동에는 소질이 거의 없다. 하지만 동양화를 그리고 바둑을 두는 것이 나의 유일한 잡기라면 잡기이다. 바둑은 잘 두지는 못하지만 무료하거나 나만의 자유시간이 있을 때 가장 하고자 하는 취미 거리다. 요즘은 기원이 거의 없기에 거의 인터넷을 통하여 바둑을 두는데, 나에게 있어서 화가 나거나 골치 아픈 생각이 있을 때,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곳에 몰입하기에는 가장 유용한 것이 바둑인 듯하다. 바둑은 시간을 보내거나 여가시간을 즐기는 것 외에 ‘바둑에는 인생이 있다’, ‘바둑을 둬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바둑은 자신을 반성하게 한다’ '바둑은 집중력을 길러준다'는 등 상투적인 많은 잇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바둑에는 한 가지 다른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바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게임이라는 것이다. 가령 축구는 아무리 잘 싸워도 골을 못 넣으면 지며,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다 이긴 게임을 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림을 평가 할 때도 아무리 훌륭한 그림도 관점이 다른 사람이 평가하면 혹평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장사일이나 정치 등 세상의 모든 일들에는 거짓과 위선 그리고 술수 꼼수가 등장하고 그러한 것들이 비급한 행동을 낳게 한다. 플라톤의 말대로 이 세상은 절대로 공정한 세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바둑은 그렇지 않다. 거의 완벽하게 한수 한수가 정당하고 공정하게 진행되어서 조금만 실수를 하거나 대충 두거나 혹은 꼼수를 쓰게 되면 반드시 그 정도의 응징을 받게 되며 승패의 여부도 정확하게 자신이 획득한 집의 수를 헤아려서 한집이나 반집이라도 많은 사람이 승리하게 된다. 사실 바둑은 승패를 떠나서 남녀노소 누구나가 공정하게 게임을 하고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고, 또 꼼수를 쓰거나 대충 둔 수에 대해서 응징을 가하고 어려움에 직면해서 묘수를 찾아내고 하는 그 과정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불공정하고 비-정의로울 수록 바둑을 두는 재미가 큰 듯하다. 프로기사들은 일상인이 볼 때 막상막하인 듯 한데, 자신이 졌음을 시인하고 돌을 던지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는 그만큼 바둑은 공정한 게임이어서 술수나 잔꾀나 상대방의 실수를 기대하는 그러한 게임일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승패가 중요한 것은 아님을 말해주는 예일 것이다. 나 역시 승패나 기력향상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인지 나의 기력(실력)은 바둑을 둔 해수에 비해 형편이 없는 편인데, 20년을 두었지만 아직 인터넷에서 1급과 1단(인터넷1급은 기원 급수로 6~7급 정도) 사이를 오갈 뿐이다.
내가 바둑을 시작하게 된 원인은 아니지만, 내가 바둑을 꾸준히 즐기며 그만 두지 않게 한데 결정적인 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일본 바둑의 영웅, 한국인 조치훈’이다. 사실 조치훈의 바둑스타일 이라든가 그 사람의 기보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한다. 다만 바둑을 시작하면서 조치훈이라는 바둑영웅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하였고, 그 이후로 항상 바둑하면 ‘조치훈’이라는 말이 뇌리에 떠오른다. 그 이유는 그의 놀라운 바둑기사로서의 삶에 있다.
조치훈은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서 6세에 바둑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간 사람이며, 일본에서 가장 어린나이로(당시나이 12세, 호적나이로는 11세) 초단을 획득한 <최연소 입단>을 한 바둑 신동이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바둑의 본고장이었으며, 한국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다. 한국인이면서도 그는 일본바둑계에서 수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1975년 <프로 10걸전> 우승을 차지한 후, 1976년 ‘산케이신문’주최 <왕좌전>에서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을 수립하였고, 1980년 <명인전 우승>, 1981년 <혼인보전 우승>, 1982년 <십단전 우승> 그리고 1983년 일본 제1의 <기성위> 타이틀을 획득함으로써 바둑에 입문한지 20년 만에 일본의 6대 타이틀 전부를 획득하는 말 그대로 일본 바둑계의 천하통일을 달성하는 위업을 세웠다. 그리고 1989년 이래 혼인보전을 5연패하여 <명예혼인보>가 되었으며, 또 아무도 이루지 못한 <본인방 10연패>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기원에서 열린 제59기 <왕좌전 예선>에서 린한지에 7단에게 승리함으로써 프로통산 1364승(3빅4무733패)이라는 성적으로 일본의 <프로기사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명실 공히 그는 <일본의 바둑영웅>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프로기사라고 할 수 있다. 1980년 한국을 방문한 그에게 한국정부는 바둑을 통한 국위선양의 공로를 인정하여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의 삶에 감동을 받는 것은 이러한 그의 놀라운 위업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바둑 인생>이라는 그의 삶의 모습 때문이다. 바둑에 대한 그의 좌우명을 담은 어록에는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 “죽더라도 바둑판 앞에서 죽겠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 과장된 것이 아니다. 그는 한번 바둑에 몰입하면 자신의 전 존재를 쏟아 붇는다. 그리고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다. 바둑에 대한 그의 집념은 연패 뒤에 극적인 역전극의 대명사로 유명한데, 일본 바둑계의 랭킹 1위인 <기성전>에서 당시 기성이었던 후지사와 9단과의 7번기 대국에서 3-0이라는 절망적인 순간에서 포기하지 않고 내리 4판을 연승하여 결국 3-4라는 역전극을 이루며 일본바둑계의 최고 타이틀인 <기성>이 되었으며, 90년 고바야시의 <본인방 도전기>에서도 3-1로 지고 있다가, 결국 내리 3판을 승리하여 3-4로 역전승을 일구어 내었다. 91년에 다시 본인방에 도전한 고바야시와의 대국에서 그는 2-0으로 지고 있다가 결국 내리 4판을 승리하여 2-4로 본인방을 방어하게 된다. 이후 98년 왕립성과의 대국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인미답의 <본인방 10연패>를 일구어 내어 9연패의 기록을 가졌던 다까가와 9단의 기록을 깨면서 일본열도를 경악케 하였다. ‘집념의 승부사’로 알려진 그에게 그 승부사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바둑을 이기려고 두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돌 하나하나 정성 들여 놓다보니까 기성도 되고 명인도 되고 그랬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 돌 하나 하나에 온 정성을 다하여 놓는 다는 것!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1등이 되고 챔피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 온 정성을 다하여 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를 오늘날의 <한국인으로서 일본의 바둑영웅>으로 있게 한 비결이었던 것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진부한 진리가 바둑 기사 조치훈에게는 놀라운 삶의 지혜로 돋보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자신의 바둑 인생이지 그 외는 별 관심이 없다는 조치훈의 말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그의 삶은 놀랍다. 일본열도가 인정하고 무려 60여넌이란 세월을 일본바둑계에서 혜성처럼 살아왔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인이다. 그는 귀화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조치훈이 랭킹 1위부터 3위까지의 기전을 한꺼번에 쟁취해 일본 바둑 역사상 처음으로 대삼관을 이루어, 일본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일본은 본국의 최고 기사인 고바야시(小林光一) 9단을 앞세워 일본최고의 타이틀인 <기성전>을 탈환하고자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불운이 찾아 왔다. 기전을 앞두고 조치훈은 알 수 없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전신의 뼈가 모두 부서지고 전신기부스를 하고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왼쪽 손가락 외에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무 곳도 없었다. 결국 그는 기전에 참석하지 못하고 1회전을 실격패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서도 “왼손가락은 아직 움직일 수 있다. 대국장으로 보내달라, 죽더라도 바둑판 앞에서 죽겠다”며 요청하였고, 침대에 묶인채 헬기로 대국장까지 날아갔던 것이다. 제2국을 완승으로 이긴 조치훈은 그럼에도 뼈란 뼈는 다 부서진 몸으로 장장 18시간의 대국들을 소화할 수는 없었다. 결국 시합은 4-2로 패하고 말았지만 그날 대국 이후 고바야시는 한국인인 조치훈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날 대국이 끝나고 타이틀 획득의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고바야시 9단은 “난 진 것이다. 난 진정 그를 꺽지 못했다. 난 영원히 이 부끄러운 승리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부끄러운 짓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 사고의 배경에는 '독도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맛이간 일본의 극우정치가들이 있었고, 그 사고는 야쿠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바둑계의 최고봉에 있는 기사가 외국인이란 이유로 사고를 당하고 바둑 인생에서 내리막길을 간게 된 기사에는 오청원이란 중국기사가 있다. 조치훈에 앞서 조치훈과 유사한 길을 걸었으며 일본 근대바둑의 대명사였던 그도 조치훈과 거의 유사한 처지에서 거의 동일한 사고로 결국 내리막길을 걷고 말았다. 하지만 조치훈은 달랐다. 그는 이후 다시 고바야시에게 도전하여 마침내 빼앗긴 <기성>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현재 66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모든 기사들이 가슴 설레며 꿈꾼다는 <기성>, <명인>, <본인방>을 아직도 3년째 고수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 기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며, ‘요다 노리모토 9단’, ‘다카오 신지 9단’ ‘장쉬 9단’이라는 젊은 최강자들을 연속으로 무릎을 꿇게 하였으며, 현재 다이와증권배 결승전을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이 40대를 넘기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걷는 것에 비하면 그의 바둑인생은 놀랍기만 하다.
그는 현재 그의 뒤를 이을 ‘김수준’이라는 한국인 제자를 지도하고 있다고 한다. 한때 성적이 지지부진한 김수준을 그의 아버지가 다시 한국으로 데려가려고 했을 때 조치훈은 자신의 인생을 담담하게 말해주었고 김수준의 아버지는 조치훈의 인격에 감탄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결국 1998년 그의 제자 김수준 4단은 승률이 48승-8패로 8할이 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400명이 넘는 일본열도의 프로기사들 중에서 승률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조치훈은 아직도 일본 국적이나 일본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도 없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애국자’라고 치켜세우지만, 하지만 어쩌면 그에겐 한국이니 일본이니 그러한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최선을 다하고 온 마음을 바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키운 제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영광스런 타이틀들을 물려받기 위해서 도전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전혀 애국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냥 자신이 선택한 삶을 최선을 다해 묵묵히 정도를 걷는 것, 이것이 그로 하여금 진정한 애국자로 만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 일본열도를 제패하고 한국방문때의 젊은 조치훈의 모습=

= 소탈한 웃음을 잘 짓는 조치훈 =

= 일명 '폭탄머리'로 유명한 그의 머리스타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