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사건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 남곤의 일파인 송사련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24년에 는 심정, 남곤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화 이후에 정계에 다시 복귀하였던 권신 김안로가 파직되고, 이듬해 3월 에는 윤세창 등의 모역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에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심정, 유자광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의 변이 일어나 관련도 없는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쫓겨나 죽었다. 이렇듯 정국의 혼란이 가속화되던 중에도 1531년에는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정계는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이에 중종의 외척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김안로와 대립하 게 되자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정권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국방정책▷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기 막부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였다. 임신조약 후 조선 은 종래 쓰시마에서 보내던 무역선인 세견선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조선 조정에서 보내던 세사미두를 반감하는 동시에, 상주하던 왜인들의 삼포 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왜인들의 변란은 자주 일어났다. 1522년 5월에는 추자도 왜변, 동래염 장 왜변 등이 있었고, 1529년에는 전라도 왜변, 1544년에는 사량진 왜변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은 왜인들의 내왕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북방상황▷ 1512년 북방의 야인들은 갑산, 창성 등지를 침입하여 인마를 살상 했는데,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4군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들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 지대에 순변사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을 수축하여 북방 방어벽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야인들의 4군, 6진 지역에 대한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만포첨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사회면▷ 조광조의 개혁 정치의 여파로 유교주의적 도덕 윤리가 더욱 정착되어갔다.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 유로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를 폐지하고, 불교의 도승제도를 철폐했으며, 도성 안의 무당들을 단속하는 한편절을 새롭게 짓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일련의 유교적 조치에 이어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주의적 향촌 질서를 조성하기도 했다. 한 때 조광조 일파 가 숙청되자 이런 양상은 주춤하는 듯 했지만, 그 뒤 다시 강력하게 추진되어 '소학', '이륜행실', '속삼강행실 도' 등의 책을 간행하여 민간에 유포하고 교화하였으며,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안향의 영전을 모신 백운동서원 을 세워 유교 정신의 고착에 더욱 주력하였다.
문화면▷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 사업이 전개되었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동 활자를 주조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각종 서책이 편찬되었다. 최세진, 신용개, 이행 등을 중심으로 '사성통해', '속동문선', '신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 간행되었으며, 1536년에는 찬집청이 설치되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서 적들을 찬수 또는 번역하기도 했다.
경제면▷ 저화와 동전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다. 또한 의복, 음식, 혼인 등과 관련 된 사치를 금지하였으며, 신임 관리자들에 대한 환영 배례를 금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한 노력을 가하였다. 하지 만 이런 노력들은 정치적 혼란과 국방의 불안 탓으로 별로 효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 밖에 1530년부터 시작된 서양의 세면포 무역이 지배층의 의복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것도 특이할 만 한 사실이다. 또한 농업 관련 기술도 발달하였는데, 관천기목륜, 간의혼상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고, 1534년에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두석, 정청의 조작법과 훈금술을 습득해 오도록 했다. 1536년에는 창덕궁 내에 보 루각을 설치해 누각에 관한 일을 보고하게 했으며, 1538년에는 천문, 지리 등에 관한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하 여 이 분야에 대한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각 방면의 진흥 정책들은 정치적 혼란에 영향을 받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곧 중종의 개혁 정치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인재 활용의 미숙함과 뚜렷한 정치 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