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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강
푸른 상의를 입음이여! 누른 치마로다[綠兮衣兮綠衣黃裳]:패풍(邶風)편 둘째장의 말인데, 위장공(衛莊公)이 첩에게 미혹되어, 부인 장강(莊姜)이 어질면서도 불행하게 된 것을 비유한 것. 즉 푸른색은 간색, 누른색은 정색(正色)인데, 푸른 상의에 누른 치마를 입어,
귀천과 상하가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
녹의(綠衣),백주(栢舟):녹의는 《시경》 패풍편(邶風篇) 둘째 장에 나오는 말인데, 위장공(衛莊公)이 첩에게 미혹되어, 부인 장강(莊姜)이 어질면서도 불행하게 된 것을 비유한 것. 즉 푸른색은 간색, 누른색은 정색(정색)인데, 푸른 상의에 누른 치마를 입어, 귀천과 상하가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綠兮綠兮 綠衣黃裳]. 백주는 《시경》 패풍편(邶風篇) 백주장(柏舟章)을 이른 것.‘뜬 저 잣나무 배여 둥둥 물에 떠만 있네. 까막까막 잠들지못하여 숨은 근심있는 것만 같네…[汎彼栢舟 亦泛其流 耿耿不寐 如有隱憂…]’라고 하여, 소박당한 부인이 남편에게‘견고한 잣나무 배같은 몸이지만 의지할데가 없으니 서럽기만 하다’고 한탄하였음.
석인(碩人):《시경》국풍(國風)의 한 편명으로, 제(齊)나라 태자(太子) 득신(得臣)의 누이동생 장강(莊姜)이 위(衛)나라 장공(莊公)에게 시집갔을 때의 광경을 묘사한 시임.
이 시의 첫머리에 장강의 혈연관계를 밝히고 있다.
장강(莊姜)은 정실부인이니 궁첩과 같이 비교할 수 없을 것이나, 제풍(齊風)의 계명시(鷄鳴詩)를 가지고 살펴보면, 혹시라도 한가하게 즐기는데 지나쳐 조회를 보임이 늦어질까 두려워하고, 멋대로 즐기며 날로 투박하게 될까 염려하였다. 그리고 대아(大雅)에 이르기를,‘과처(寡妻)에게 본을 보여 나라를 다스린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근본을 단정히 하고 시초를 바로잡는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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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52권, 10년(1504 갑자/명홍치(弘治)17년) 3월 23일(갑신) 5번째기사
회묘의 묘호고치는 일에 대해 승지들이 아뢰다
윤필상(尹弼商), 유순(柳洵), 박건(朴楗)이 의논드리기를,
“회묘(懷墓)께서 자죄(坐罪)된 일은 종묘사직에 죄를 얻은 일이 아니니, 전하의 망극하신 심정을 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호(諡號) 및 능호(陵號)올리는 일은 해당 조(曹)에서 의논해서 시행토록 하시고, 후궁에 대한 일은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하고,
강귀손(姜龜孫), 박숭질, 신준(申浚), 이계동(李季仝), 이집(李諿), 허침(許琛), 정미수(鄭眉壽), 김수동(金壽童), 송질(宋軼), 김감(金勘), 한사문(韓斯文), 안처량(安處良), 이계남(李季男), 성세명(成世明), 이창신(李昌臣), 신용개(申用漑), 장순손(張順孫), 유빈(柳濱), 허집(許輯), 이점(李坫), 한형윤(韓亨允), 노공유(盧公裕), 남궁찬(南宮璨), 정광필(鄭光弼), 이복선(李復善), 성희안(成希顔), 이과(李顆), 손주(孫澍)는 의논드리기를,
“회묘를 추숭(追崇)하는 일이 의리에 어렵기는 합니다.
그러나 전하의 망극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니, 존숭하는 절목(節目)을 예조에서 의논하여 시행함이 편하겠습니다.
죄있는 후궁은 그 몸이 죽은 뒤에는 후궁의 준례로 대우하지않는 것이 마땅하나, 다만 그 어머니의 죄때문에 그 아들의 복을 폐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박안성(朴安性)은 의논드리기를,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어머니는 아들로 하여 귀해진다’하였습니다. 회묘(懷墓)의 칭호는 마땅히 올려 능(陵)으로 하여야 하며, 시호(諡號)는 예조에서 정하여 아뢰게 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또 궁인(宮人)의 범행은 그 악이 대소가 있고 죄가 경중이 있어, 만일 크고 중한 것이라면 살아서도 후궁이라 할 수 없는데, 죽은 뒤에 어찌 그 상례를 치르겠습니까?”하고,
최숙생(崔淑生), 이행(李荇), 이자화(李自華), 권달수(權達手), 박광영(朴光榮), 이사균(李思鈞), 김양진(金楊震), 유부(柳溥), 김내문(金乃文),
강홍(姜洪)은 의논드리기를,
“전하께서 애모(哀慕)하시는 정은 이르지 않을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추숭하는 의식은 예절이 이미 지극하였으니 다시 더할 수 없을듯 합니다. 후궁의 일은 신들이 비록 알지는 못하나 선왕때에 있은 일이니, 지금 추후하여 들출 수 없고, 또 그 아들로 하여금 상사를 치르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황성창(黃誠昌), 김세필(金世弼), 정침(鄭沈), 유인귀(柳仁貴), 신봉로(申奉盧)는 의논드리기를,
“회묘(懷墓)의 일은 전하께서 묘소를 정할 때에 널리 조정의 의논을 모으고 또 그 정과 예를 참작하여 추후로 효도하는 정성을 다하였으니, 지금 다시 더할 수는 없습니다.
선왕 후궁의 일은, 멀리 수십년전에 있었던 일로서 사세가 지금에 밝히기 어려우니, 상제를 의논할 수 없을 듯합니다.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위하여 복입는 것은 천지간의 큰 법이니,
어버이의 죄가 중하다 하더라도 자식으로서 폐할 수 없습니다”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성인(聖人)의 칠거(七去)의 법4250)이 있으니, 만일 그런 죄라면 버리고 말 것이지 하필 죽여야하는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푸른 상의를 입음이여! 누런치마로다[綠兮衣兮綠衣黃裳]’4251)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후궁속에 한 사람의 소위일 것이다.
성종(成宗)께서 명철한 임금이시지만, 어찌 잘못한 일이 없겠는가?
그때의 재상들이 극력 간하였다면 반드시 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옛말에‘만일 그 도가 아닌 일이라면 어찌 3년을 기다릴 것인가?’하였다. 이에 앞서 재상 및 신용개(申用漑)등이 또한 이런 뜻으로 시를 지었다. 그때는 내 나이 매우 적었다. 만일 지금 같았다면,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를 어찌 세상에 있게 하였겠는가? 그 사람이 죽은 뒤에 어찌 후궁의 예로 장사지내며, 그 소생 아들 역시 어찌 복제대로 복입을 수 있는가? 대간(臺諫) 및 귀손(龜孫)등의 의논에‘그 아들의 삼년복을 폐할 수 없다’하였는데, 이 말은 그르니, 정승들이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하니,
필상(弼商)등이 의논드리기를,
“후궁으로서 죄있는 자는, 살았더라도 당연히 강등하여 내쳐 후궁의 이름이 있을 수 없으니, 죽으면 반드시 후궁의 예로 장사지낼 수 없고, 그 소생 아들도 당연히 서인(庶人)의 준례에 따라 백일 복만을 입어야 합니다”하였다. 전교하기를,
“내일 의정부와 전직 정승,관각당상(館閣堂上)4252), 육조참판 이상을 불러 윤씨(尹氏)의 시호를 같이 의논하게 하라”하였다.
註4250]칠거(七去)의 법:옛날 아내를 버리던 일곱 가지의 조건. 1. 부모에게 불순한 것, 2. 아들의 없는 것, 3. 음란한 것. 4. 질투하는 것. 5. 나쁜 병이 있는 것. 6. 말이 많은 것. 7. 도둑질하는 것.註4251]푸른 상의를 입음이여! 누런 치마로다.[綠兮衣兮綠衣黃裳]:패풍(邶風)편 둘째장의 말인데, 위장공(衛莊公)이 첩에게 미혹되어, 부인 장강(莊姜)이 어질면서도 불행하게 된 것을 비유한 것. 즉 푸른색은 간색, 누른색은 정색(正色)인데, 푸른 상의에 누른 치마를 입어, 귀천과 상하가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註4252]관각당상(館閣堂上):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과 제학.
○尹弼商、柳洵、朴楗議: “懷墓所坐, 非得罪於宗社, 則殿下罔極之情不得不伸。 上謚及陵號, 令該曹擬議施行。 後宮事, 上敎允當。” 姜龜孫、朴崇質、申浚、李季仝、李諿、許琛、鄭眉壽、金壽童、宋軼、金勘、韓斯文、安處良、李季男、成世明、李昌臣、申用漑、張順孫、柳濱、許輯、李坫、韓亨允、盧公裕、南宮璨、鄭光弼、李復善、成希顔、李顆、孫澍議: “追崇懷墓, 於義雖難, 然出於殿下罔極之情, 尊崇節目, 令禮曹擬議, 施行爲便。 有罪後宮身死後, 不以後宮之例待之宜矣。 但以其母之罪, 不可廢其子之通喪。” 朴安性議: “《春秋傳》曰: ‘母以子貴。’ 懷墓之號, 當陞爲陵, 謚稱, 令禮曹勘啓何如, 且宮人所犯, 惡有大小, 罪有輕重。 若大而重者, 則生不得謂之後宮, 死安得成其喪禮乎,” 崔淑生、李荇、李自華、權達手、朴光榮、李思鈞、金楊震、柳溥、金乃文、姜洪議: “殿下哀慕之情, 雖無所不至, 然追崇之典, 於禮已極, 恐不可復加。 後宮事, 臣等雖不得知, 然事出先王, 今不可追擧, 而且令其子, 不得服喪也。” 黃誠昌、金世弼、鄭沈、柳仁貴、申奉盧議: “懷墓事, 殿下旣於立墓之時, 博收廷議, 酌其情禮, 以盡追孝之誠, 今不可復加。 先王後宮之事, 遠在數十年前, 勢難追明, 則喪制恐不可議。 若人子爲親之服, 天地大經, 親罪雖重, 子不可廢。” 傳曰: “聖人有七去之義, 如其罪也, 則去之而已, 何必殺之? 《詩》云: ‘綠兮衣兮, 綠衣黃裳。’ 此是後宮之中, 必有一人所爲。 成宗哲王, 然豈無過擧? 其時宰相等若極諫, 則必有回天之力矣。 古云: ‘如其非道, 何待三年。’ 前此宰相及申用漑等, 亦以此意製詩矣。 其時予春秋甚少, 若如今時, 則不共戴天之讎, 豈令在世乎? 其人死後, 安可以後宮之禮葬之; 所生之子, 亦豈得全服其喪乎? 臺諫及龜孫等議曰: ‘不可廢其子之通喪。’ 是言非也。 政丞等更議以啓。” 弼商等議: “後宮有罪者, 其生也當降黜, 不得有後宮之名, 死必不得以後宮禮葬之。 其所生之子, 當從庶人例, 只服百日。” 傳曰: “明日其召議政府、曾經政丞、館閣堂上、六曹參判以上, 共議尹氏謚號。”
연산 52권, 10년(1504 갑자/명홍치(弘治)17년) 4월 25일(병진) 7번째기사
전향, 수근비의 재산을 적몰케 하다
전교하기를,
“궁인(宮人) 전향(田香), 수근비(水斤非)가 중죄를 범하고 서강(西江)에 사니, 가산을 적몰하고, 전향은 강계(江界), 수근비는 온성(穩城)에 안치하라. 의금부의 낭청 한사람, 서리(書吏) 한사람, 내관(內官) 한사람으로 압령(押領)하여 가되, 각 역(驛)으로 하여금 비자(婢子)두 사람을 내어 차례차례 압송하도록 하라”하였다.
의정부에 전지하기를,
“부인의 행실은 투기(妬忌)하지않는 것을 어질게 여긴다.
규목(樛木), 종사(螽斯)4293)의 교화와 녹의(綠衣), 백주(栢舟)4294)의 변이 족히 천고에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될 것인데, 사특하고 아양떠는 그 행동이 인군의 마음을 호리고 미혹하여 화란의 계단을 만드는 자가 세상에 끊이지 않으니, 이야말로‘화란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부인에게서 온다’는 것이다.
비록 존귀한 정적(正嫡)이라도 아랫사람에게 미치게 하는 것을 덕으로 삼아야 할 것인데, 하물며 감히 저녁을 맡기지 못하는 뭇 소인4295)으로서 질투하는 마음을 가짐에랴?
성종께서는 명철하신 임금으로도 점차로 북[杼]을 던지는 의심을 가져 끝내는 큰 변을 가져왔는데, 더구나 나에 있어서랴? 그 시초를 조심하지 아니하여 차차 젖어든지 오래되어, 마음과 뜻이 변하게 된다면 후일의 화를 어찌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할 것인가? 지금, 전향, 수근비등이 간사하고 흉악하며, 교만, 투기하여 내정의 교화를 막히게 하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장 80을 때리고 먼 변방으로 내쳐 가두어두어 고생시켜 뒷사람들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니, 중외에 효유하도록 하라”하였다.
註4293]규목(樛木), 종사(螽斯):규목은 휘늘어진 나무.《시경(詩經)》주남편(周南篇) 규목장(樛木章)에,‘남에 휘늘어진 나무가 있으니 칡과 덩굴풀이 감겼도다. 즐거운 군자여, 복과 녹이 편히 지내게 하도다[南有樛木 葛藟纍之 樂只君子 福履綏之]’하여, 주(周)나라 문왕비 태사(太姒)가 덕으로 여러 첩을 거느리고 여러 첩 역시 태사를 따르는 것을 비유하였음. 종사는 메뚜기. 역시《시경》주남편 종사장(螽斯章)에‘메뚜기의 깃이 선선하니, 네 자손 진진함이 마땅하도다[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振振兮]’하여, 왕후의 덕이 많고 질투하지않으므로, 메뚜기처럼 자손이 번성함을 비유하였음. 註4294]녹의(綠衣), 백주(栢舟):녹의는《시경》패풍편(邶風篇) 둘째장에 나오는 말인데, 위장공(衛莊公)이 첩에게 미혹되어, 부인 장강(莊姜)이 어질면서도 불행하게 된 것을 비유한 것. 즉 푸른색은 간색, 누런색은 정색(정색)인데, 푸른 상의에 누른 치마를 입어, 귀천과 상하가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綠兮綠兮 綠衣黃裳]. 백주는《시경》패풍편(沛風篇) 백주장(柏舟章)을 이른 것.‘뜬 저 잣나무배여 둥둥 물에 떠만있네. 까막까막 잠들지못하여 숨은 근심 있는 것만 같네…[汎彼栢舟 亦泛其流 耿耿不寐 如有隱憂…]’라고 하여, 소박당한 부인이 남편에게‘견고한 잣나무 배같은 몸이지만 의지할데가 없으니 서럽기만 하다’고 한탄하였음.註4295]소인:첩이나 후궁.
○傳曰: “宮人田香、水斤非犯重罪, 居西江, 其籍沒家産, 安置田香于江界, 水斤非于穩城。 義禁府郞廳一人、書吏一人、內官一人押去, 令各驛出婢子二人, 次次押傳。” 傳旨議政府曰: “婦人之行, 以不妬忌爲賢。 《樛木》、《螽斯》之化, 《綠衣》、《栢舟》之變, 足以鑑戒千古, 而邪媚其行, 蠱惑君心, 以爲厲階者, 世不絶人。 此所謂: ‘亂匪降自天, 生自婦人。’ 者也。 雖正嫡之尊, 當以逮下爲德, 況不敢當夕之群小, 而有嫉妬之心乎? 成廟以明哲之主, 寢成投杼之疑, 遂至大變。 況在於予不謹其始, 而浸潤日久, 變移心志, 則後日之禍, 安保其必無也? 今田香、水斤非等, 奸兇驕妬, 以梗內化, 罪不可赦。 故決杖八十, 投之遠裔, 幽囚困苦, 以警後人, 其令曉諭中外。”
중종 28권, 12년(1517 정축/명정덕(正德)12년) 7월 24일(무술) 3번째기사
대사헌 최숙생등이 인척을 단속하여 사알을 막을 것등 여섯가지를 차자로 진달하다
대사헌 최숙생, 대사간 이언호등이 차자를 올려 여섯가지 일을 다음과 같이 진달하였다.
“1. 인척(姻戚)을 단속하여 사알(私謁)을 막는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여자가 시집을 가면 부모 형제를 멀리해야 한다’하였는데, 대개 부인이 한번 시집을 가면 곧 남편의 집 가족으로 내친(內親)을 삼고 과거의 친척은 스스로 멀리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한 나라의 국모(國母)가 되어 예법의 대종(大宗)이 되었음에리까! 궁궐안이 깊고 외지다 보니 세(勢)가 절로 존엄하고, 부모형제가 가깝기는 하더라도 종묘(宗廟)가 더 중합니다.
만약 사은(私恩)을 따른다면 반드시 공의(公義)를 해치게되니 졸졸 흐를 때에 막지않다가 큰물이 범람하게 되면 어찌하겠습니까?
외척(外戚)의 화는 세미한데서 생기는 예가 많은 것으로 전감(前鑑)이 있으니 뒷사람이 경계해야 할 바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중전께서는 갑자기 고향을 떠나 처음 곤극(坤極)7751)에 오르셨으므로, 부모의 생각이 늘 마음속에 간절하고 평소 거처하던 곳이 늘 눈에 선할 것이니 기거(起居)의 안부를 묻는 것을 응당 갑자기 끊을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마땅히 공의를 먼저 하고 사은을 뒤로 하여 공도(公道)를 분명히 보임으로써 연줄을 타고 요행을 바라는 근원을 막아야 하며, 궁내의 말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외간의 말이 궁내로 들어오지 않게 하여, 내외로 하여금 구별을 엄하게 하여 사적으로 간알(干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서, 털끝만큼이라도 의심스러운 혐의가 없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음사(陰邪)한 일이 일어나지않을 것이고 정치를 해치는 단서가 절로 발붙일 수없게 될 것입니다.
2. 명분을 삼가서 내치(內治)를 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늦은 밤에서 이른 새벽까지만 공소(公所)에 있으니 실상 부명(賦命)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하였는데, 대개 옛날 후궁들은 임금을 모시는데도 그 예(禮)가 있었으므로 감히 자기 차례가 되어 모시지 못하더라도 자기의 분수를 편안히 여겼으니, 그 존비의 분별을 엄히 하여 환란의 싹을 막은 것이 또한 훌륭하지 않습니까?
후세에는 고임에 미혹되어 이 법을 문득 폐하고 정욕을 삼가지 않으며 예를 경시하고 여색을 중시하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몸을 망치는 것이 항상 이 길로 말미암는 것으로 그 응보가 어김없음이 사책(史冊)에 소연(昭然)하며, 그 화가 참혹함은 일찍 성상(聖上)께서도 직접 보셨을 것입니다.
삼가 중전께서 새로 존위(尊位)에 오르셔서 음화(陰化)7752)가 흡족하지 못하니, 이때를 당하여 더욱 예방(禮防)을 엄중히 하소서.
등급(等級)이 문란하여지면 반드시 참람한 일이 생겨 임석(衽席)7753)에 분별이 없어질 것이니, 이는 실상 치란(治亂)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존비의 분별을 정하되 털끝만큼이라도 어그러짐이 없게하여 궁액(宮掖)안이 늠연히 상하를 문란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를,
소남(召南)의, 중첩이 부명(賦命)이 같지 않음을 편안히 여기는 것과 같게 한다면 음피(陰詖)7754)가 일어나지않고, 적처인 왕후와 대립하는 화가 절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3. 성색(聲色)7755)을 경계하여 폐총(嬖寵)을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녹색(綠色)으로 상의를 만들고 황색(黃色)으로 하의를 만들었도다’7756)하였는데, 예로부터 임금의 마음을 고혹시킨 아름다운 여자가 비천한 데서 많이 나왔으며 거기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이가 많습니다. 변소에서 한번 가까이 하매7757) 드디어 사랑을 받게 되었고 창가(娼家)의 비천한 계집종도 또한 궁액에 올랐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능히 고명(高明)도 미혹시키므로, 드디어 상하가 뒤바뀌고 순서가 어그러져서 미혹된 채 깨닫지 못하고 끝내는 복멸(覆滅)하게 되니, 어찌 깊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중전(中殿)께서는 명문(名門)의 집에서 부덕을 배양하여 일찍이 훌륭한 명망이 있었는지라 진실로 현책(顯冊)7758)에 합당하며, 큰 아름다움이 흘러넘치니 종묘와 사직의 경사요 하늘과 사람의 기쁨입니다.
비록 상(商)나라가 신씨(㜪氏)7759)의 딸【우임금의 어머니】을 얻은 것과 관저장(關睢章)에서 읊은 요조숙녀(窈窕淑女)라도 이에서 더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성탕(成湯)이 성색을 가까이하지않은 것과 문왕이 아내에게 모범을 보인 것처럼 하여, 규방(閨房)으로 하여금 엄숙하고 화하게 하여 투기하거나 순리를 거스르는 사람이 없게 한다면, 복록(福祿)이 만세까지 흘러가서 국가가 길이 편안할 것입니다.
4. 검약(儉約)함을 숭상하여 사치하는 풍속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가는 베와 굵은 베로 옷을 만드니 입으매 싫지 않도다’하였는데, 대개 검덕(儉德)은 후비(后妃)의 근본이며 나라를 흥하게 하는 근원입니다.
예로부터 사치하는 풍습은 반드시 궁금(宮禁)에서 먼저하여‘상투를 높이고 소매를 넓히매 사방이 본받았다7760)’하였으니 거친 비단과 굵은 베옷은 아랫사람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나라의 근본을 망치는 것은 모두 사치에서 기인되며, 예양(禮讓)을 부식(扶植)하는 것은 실제로 공검(恭儉)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삼가 중전께서는 연세가 아직 젊으신데 존귀한 자리에 있으면 교만하기 쉬운 것이라 곁에서 모심에 있어 망령되이 사치스러움을 바라 상의 뜻을 앞질러 종용하여 혹 사치의 근원으로 인도할 수도 있으리니, 그 싹이 모르는 사이에 자라면 장차 막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부인은 처음 맞아드렸을 적에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비록 속담이기는 하지만 미연에 금지하는 것이 실제로 원려가 되는 것이니, 진실로 궁액(宮掖)을 검소로 통제하여 소박(素朴)함을 숭상하게 하고 척완(戚畹)7761)을 검속(檢束)하여 그 싹을 꺾고 사치스러운 완물(玩物)을 눈에 접하지못하게 한다면, 갈담(葛覃)의 덕화7762)가 왕궁에서 절로 높아져 주(周)나라를 흥하게 한 법을 오늘날에 계승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자전(慈殿)께 효도하여 며느리의 도(道)를 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엄숙한 태임(太任)이 문왕의 어머니이시다.
주강(周姜)7763)을 잘 받들어 주(周)나라 왕실의 며느리가 되었다’하였는데, 대개 엄숙함은 어머니의 도이고 잘 받드는 것은 며느리의 도입니다.
남의 어머니가 되어서는 어머니의 도를 다하고 남의 며느리가 되어서는
며느리의 도를 다한 뒤에야, 신령(神靈)의 통서(統緖)를 받들고 만물의 마땅함으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대저 공궤(供饋)를 맡아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은 항례(恒禮)이나 부드러운 표정으로 뜻을 받드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정성과 공경이 지극하여 마음의 감응이 사이가 없어서 윗사람은 즐거워하고 아랫사람은 편안할 수 있다면 복록이 절로 이를 것입니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궁중(宮中)의 예의가 외간과는 같지 않고 복어(僕御)가 많아서 호오(好惡)가 한결같지 않으며, 처음 들어와서 시종(侍從)함에 있어 마땅하게 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고 신구(新舊)7764)가 서로 사귐에 있어 혐의가 생기기 쉽다는 것입니다.
자전을 길이 모심에 있어 삼가고 꺼리는 바가 있는 것이어서 만약 조양(調養)과 보호(保護)를 잘못하면 구설(口舌)이 일어서 막기가 어려우니,
뜻밖의 환란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효도로 나라를 다스리고 몸으로 가르침을 삼는데, 더구나 처음을 바루는 것은 왕화(王化)에 관계되는 바이니 가정을 화목하게 하는 도에서도 몸소 모범을 보이셔야 합니다.
마땅히 먼저 내정(內政)을 부조(扶助)하여 아름다운 덕을 이루게 함으로써 공경을 일으키고 효도를 일으키는 정성으로 자전께 들리게 하여 두 얼굴과 두 혀를 가진 무리들이 그 입을 놀릴 수 없게 된다면 자연히 상하가 서로 즐거워하여 털끝만한 헐뜯음도 없게 될 것입니다.
6. 원자(元子)를 어루만져 사랑하여 천륜(天倫)을 도탑게 하는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아버지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가 나를 기르셨다’ 하였는데, 대개 태어나게 한 것은 하늘이고 기르는 것은 사람입니다.
대저 사람은 천지의 기운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나, 그 처음 태어날 때를 당하여는 진실로 지각이 없는 하나의 생명체일 뿐입니다.
온화하게 사랑하여 장성하는데 이르러서 나를 가까이 따르게 하는 것은, 진실로 사람의 힘에 있는 것이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적자(赤子)가 처음 자람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지않아서 이쪽이냐 저쪽이냐 하는 지향(指向)이 정하여지지 않았으므로 일단 어루만져 사랑하면 곧 친압하게 할 수 있거니와, 만약 장성하여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나누어져버리면 비록 친애하려하여도 효력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원자가 이미 강보(襁褓)를 벗어나 바야흐로 해제(孩提)7765)에 있으리니 성정(性情)을 옮길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돌아가시고부터 중전(中殿)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었으므로 아내를 잃은 슬픔에 마음 아플 것인데, 하물며 임금의 어린 아들도 의탁할 데가 없음에리까!
중전을 새로 맞았으니 적자(赤子)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만약 어루만지고 돌보는 정성을 다한다면 천륜이 절로 도타와져서 다른 날 삼조(三朝)7766)에 스스로 의심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비록 양능(良能)이라고는 하나,
어머니가 사랑하고 아들이 효도하는 것은 기르는 바에 말미암는 것입니다.
아, 한혜제(漢惠帝)가 비록 친아들이었으나 근심하다가 죽는 것을 면치 못한 것은 한고조(漢高祖)가 여태후(呂太后)를 교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요, 숙종(肅宗)7767)이 비록 친아들이 아니지만 효성이 지극하였던 것은 현종(顯宗)7768)이 마후(馬后)7769)를 경계하였기 때문입니다.
잘잘못이 저와 같아 화복이 어김없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註7751]곤극(坤極):중전의 자리.註7752]음화(陰化):왕후의 교화.註7753]임석(衽席):침실을 가리킨다.註7754]음피(陰詖):음험하고 부정한 일임.註 775 5]성색(聲色):음악과 여색.註7756]녹색(綠色)으로 상의를 만들고 황색(黃色 )으로 하의를 만들었도다:왕후가 중첩에게 밀려 실위(失位)되었다는 뜻. 녹색은 간색(間色)으로 중첩에 비유하고 황색은 정색(正色)으로 왕후에 비유하였는데, 장공(莊公)의 부인 장강(莊姜)이 이 시를 지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다 한다.《시경(詩經)》 패풍(沛風) 녹의(綠衣).註7757]변소에서 한번 가까이 하매:한무제(漢武帝)가 평양공주(平陽公主)의 집에 행행하였다가, 술시중드는 위자부(衛子夫)를 변소에서 가까이하고서, 인하여 궁중으로 불러들여 총애하였다는 고사(故事)가 있다.註7758]현책(顯冊):왕비로 책봉함.註7759]신씨(㜪氏):국명.註7760]상투를 높이고 소매를 넓히매 사방이 본받았다:유행의 신속함을 비유한 말.《후한서(後漢書)》마진전(馬疹傳)에 “도성(都城)이 상투 높이기를 좋아하니 지방에서는 한자쯤 높였다”하였다.註7761]척완(戚畹):외척을 말한다.註7762]갈담(葛覃)의 덕화:부덕의 훌륭함을 말한다. 주문왕(周文王)의 비(妃) 태사(太姒)가 몸소 칡덩굴을 거두어 가는 베와 굵은 베를 만들어 옷을 짓고서, 칡덩굴이 무성하던 때를 회고하여 지은 시이다.《시경(詩經)》주남(周南) 갈담(葛覃) 註7763]주강(周姜):태왕(太王)의 비(妃) 註7764]신구(新舊):자전과 중전을 가리킨다 註7765]해제(孩提):걸음을 배우는 어린아이.註7766]삼조(三朝):아침, 낮, 저녁에 안후를 살피는 것이다.《예기(禮記)》문왕세자(文王世子)에“문왕이 세자가 되었을 적에 하루에 세번씩 왕계(王季)를 뵈었다”하였다 註7767]숙종(肅宗):후한 장제(後漢章帝).註7768]현종(顯宗):후한명제(後漢明帝)註7769]마후(馬后):마원(馬援)의 딸이다.
○大司憲崔淑生、大司諫李彦浩等上箚, 條陳六事:
其一曰, 檢姻戚, 藺私謁。 《詩》云: “女子有行, 遠父母兄弟。” 蓋婦人一嫁, 便以夫家爲內, 而向來宗族, 自當疎外。 況乎母儀一國, 禮法所宗? 廉陛奧絶, 勢自尊嚴, 骨肉雖親, 宗廟爲重。 若循私恩, 必害公義, 涓涓不塞, 滔天乃何? 外戚之禍, 多由細微, 覆轍在前, 後車所戒。 伏惟中闈, 乍違素里, 初登坤極, 膝下之念, 常切于內; 游居之所, 常在眼中。 其起居寒暄之問, 未應遽絶, 猶當先義後恩, 明示公道, 藺絶夤緣、僥倖之源。 內言不出, 外言不入, 使內外截然, 知不可干以私, 無有一毫疑似之嫌, 則陰慝不作, 而妨政害治之端, 自無所托矣。 其二曰, 愼名分, 以嚴內治。 《詩》云: “夙夜在公, 寔命不同。” 蓋古者, 衆妾進御於君, 自有其禮, 不敢當夕, 安於其分。 其所以嚴尊卑之分, 防禍亂之萌者, 不亦遠矣乎? 後來內荒, 此法便廢, 適情縱慾, 輕禮重色。 破國亡身, 恒由是塗, 昭然方冊, 厥應不爽, 禍敗之慘, 尙經聖覽。 伏惟中闈, 新履尊位, 陰化未洽, 當此之時, 尤嚴禮防。 若紊等級, 必生僭逼, 袵席無別, 實關治亂。 須使尊卑有定, 毫髮莫差, 宮掖之中, 澟然知上下之不可紊, 如《召南》之女, 安於賦命之不同, 則陰詖不行, 而竝后匹嫡之禍, 無自作矣。 其三曰, 戒聲色, 以遠妖倖。 《詩》云: “綠兮衣兮, 綠衣黃裳。” 蓋自古柔曼之傾意, 多出於卑賤之中, 而沈溺不還者衆矣。 軒中一幸, 遂擅尊寵, 娼家賤婢, 亦登宮掖。 尤物移人, 能惑高明, 遂至冠屨倒置、衣裳失序, 迷而不悟, 覆滅爲期, 豈不深可懼哉? 伏惟中闈, 養德名門, 夙有令聞, 久應顯冊, 丕衍洪休, 宗社合慶, 天人交悅。 雖商家之得有㜪, 《關雎》之詠淑女, 無以加矣。 當如成湯之不邇聲色; 文王之刑于寡妻, 使房闥肅雍, 而無妬媚、逆理之人, 則福祿長流萬世, 而國家永安矣。 其四曰, 崇儉約, 以抑奢風。 《詩》云: “爲絺爲綌, 服之無斁。” 蓋儉德, 后妃之本, 而興邦之源也。 自古奢侈之風, 必先宮禁, “高髻廣袖, 四方所則” 大練麤布, 所以率下。 斲喪邦本, 皆緣奢泰, 扶植禮讓, 實自恭儉。 伏惟中闈, 年紀尙富, 貴位易驕, 傍側侍御, 妄希奢靡, 先意從臾, 或導侈源, 潛萌暗長, 勢將難遏。 敎婦初來, 雖是里語, 禁於未然, 實爲遠慮, 固當約制梱內, 朴素爲右, 檢柅戚畹, 折其萌芽, 使侈麗玩弄之物, 無得以接乎心目之間, 則《葛覃》之化, 自隆於王宮, 而興周之軌, 可繼於今日矣。 其五曰, 孝順慈殿, 以盡婦道。 《詩》云: “思齊太任, 文王之母。 思媚周姜, 京室之婦。” 蓋齊者, 母道也; 媚者, 婦道也。 爲人之母, 而盡母之道焉; 爲人之婦而盡婦之道焉然後, 可以奉神靈之統, 而理萬物之宜。 夫主饋養姑, 自是恒禮, 承顔順意, 最爲難事。 誠敬若至, 感通無間, 上悅下安, 福履自臻。 第恐掖庭之禮, 自與下里不同, 僕御衆多, 好惡不一。 初來侍從, 未閑宜適; 新舊相交, 嫌疑易生。 東朝長御, 投鼠所忌, 若失調護, 脣舌難防, 意外之患, 亦不可忽。 伏惟殿下, 以孝理國、以身爲敎, 況在正始? 王化所關, 宜家之道, 亦自表率。 當先扶助內政, 將順德美, 使起敬、起孝之誠, 升聞於慈殿, 而兩面、二舌之輩, 無得以容其喙, 則自然上下相歡, 而無繊毫之間然矣。 其六曰、撫愛元子, 荑天倫。 《詩》云: “父兮生我, 母兮鞠我。” 蓋生之者天也, 鞠之者人也。 大抵人受天地之氣以生, 當其初生, 固是蠢然者耳。 若夫翼翼而字之, 以至於成長, 而親愛乎我, 則固在夫人之力, 而非天也。 今夫赤子初長, 未有愛惡, 之秦之楚, 指向未定, 一有撫愛, 便成親狎。 若待壯成, 好惡已分, 雖欲親愛, 終難得力。 想今元子已離襁褓, 方在孩提, 移養性情, 正在此時。 伏惟殿下, 自章敬賓天, 久曠宮闈, 亡鑑之慼, 內隱于懷, 況我呱呱, 亦無依歸。 慈闈新開, 赤子焉往? 若盡顧復, 天倫自篤, 他日三朝, 自無疑阻。 愛親敬長, 雖曰良能, 母慈子孝, 亦由所養。 嗚呼! 惠帝雖親子, 未免憂死, 高帝之所以驕呂后也, 肅宗雖假子, 孝誠天至, 顯宗之所以戒馬后也。得失如彼,禍福不僭,可不愼歟?
숙종 11권, 7년(1681 신유/청강희(康熙)20년) 2월 22일(병오) 2번째기사
인경왕후의 지문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삼가 우리 현종대왕(顯宗大王)을 생각하건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깊이 생각하셔서 미리 우리의 금상전하(今上殿下)를 세워 세자(世子)를 삼으시고, 이미 또 옛 제왕(帝王)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비필(妃匹)로 말미암지않는바 없음을 생각하셨는데, 비필(妃匹)의 어짊은 대개 족성(族姓)의 덕미(德美)에 근본하니, 촉(蜀)·도(塗)·신(莘)·지(摯)3044)가 바로 그러하다.
이에 우리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께서 간택[睿簡]을 받으시어,
신해년3045)4월 초3일 갑신에 대혼(大婚)의 정례(正禮)를 갖추니, 우리 전하께서 머물고 계시던 제궁(齊宮)에서 친영(親迎)하셨다.
예(禮)를 마치자, 종묘(宗廟)에 고(告)하였으며, 중외(中外)의 군자(君子)들에게 반교(頒敎)하시기를,‘황류(黃流)의 술을 바침에 옥찬(玉瓚)에 담기에 합당하니,3046) 믿을 것인저!’하셨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씨(金氏)의 적관(籍貫)은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인데, 그 원류(源流)가 대개 신라(新羅)의 김성(金姓)에서 나왔다.
왕(王)에게 왕자(王子) 흥광(興光)이 있었는데, 장차 국란(國亂)이 있을 것을 알고 스스로 광주(光州)에 피하였다.
그 후 잇달아 8대가 평장사(平章事)가 되자, 사람들이 그 사는 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
본조(本朝)에 와서 휘(諱) 김국광(金國光)은 우리 세조대왕(世祖大王)을 섬겨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아들 휘 김극유(金克忸)는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이었고, 그 증손(曾孫) 휘 김계휘(金繼輝)는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총명(聰明)하고 박달(博達)하여 선조조(宣祖朝)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들 휘 김장생(金長生)은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으로써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벼슬이 참판(參判)이었는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문원공(文元公)으로, 이분이 왕후(王后)의 고조(高祖)가 되신다.
그 아들 휘 김반(金槃)은 일찍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간흉(奸凶) 이계(李烓)등을 논박(論駁)하여 배척(排斥)하고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을 구출(救出)한 것으로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밝혔다.
그리고 그 아들 휘 김익겸(金益兼)은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병자년3047)·정축년3048)의 변란(變亂)때 마음속으로 구차하게 모면(謀免)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강도(江都)에서 입근(立慬)3049)하였는데,
그 배필(配匹)이 우리 선조(宣祖)의 외증손(外曾孫) 윤성(尹姓)이며,
이분이 김만기(金萬基)를 낳으셨다.
〈김만기는〉일찍이 병조판서(兵曹判書)·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군수(郡守) 한유량(韓有良)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참판(參判)과 생원(生員)을 모두 충청도(忠淸道) 회덕현(懷德縣)의 정민리(貞民里)에 장사(葬事)지냈는데, 술인(術人)3050)이 말하기를,‘반드시 덕행(德行)이 있는 임사(任姒)3051)같은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하였는데, 왕후(王后)께서 과연 숭정(崇禎) 기원(紀元)34년 신축년3052) 9월 초3일 을묘 인시(寅時)에 경사(京師) 회현방(會賢方) 사제(私第)에서 태어나셨다.
그런데 이미 태어났으나, 울음소리가 끊어져 희미하므로, 집안사람들이 혹시나 하고 염려하였는데, 의원이 말하기를,‘다친 곳은 없고 성질(性質)이 그러합니다’하였다.
이미 말을 배워서는 말을 가볍게 꺼내지 아니하나, 꺼내면 반드시 이치가 있었다. 그리고 보행은 더디고 느렸으며, 함부로 뜰 계단을 내려가지 아니하였고, 스스로 타고난 존귀(尊貴)함이 있었다.
동배(同輩)와 서로 만났을 때 곁에 있는 자들이 병아리를 희롱하거나 공기놀이를 하거나 배[梨]·밤[栗]을 다투거나 엿과 떡을 갖거나 간에 평소 꼼짝도 않은 채 단정히 앉아 보지않은 것같이 하였으며, 함께 먹을 때에는 반드시 기다렸다가 모두 모인 후에야 먹었다.
또 화려[芬華]한 물건을 애호(愛好)하지 아니하였고, 의복(衣服)이 비록 때가 묻고 해졌다하더라도 싫어하는 적이 없었으며, 곱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가 있어도 부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주려고 하면,‘좋다’하면서 절대로 아까와하는 적이 없었다.
나이 7, 8세가 되자, 집안에 깊숙이 들어앉아 나가지 아니하고 예(禮)를 익혀 10세가 되니, 또 조달(早達)하였다.
일찍이 혼인(婚姻)이 있었는데, 마침 노인네[耋艾]들이 모여 구경하고는 또 꽃구경을 하자고 청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저 집은 이웃이고, 친척이다’하였으나, 모두 달갑게 여기지아니하며 말하기를,‘혹시라도 외부의 사람이 있을까 두렵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모(父母)가 말하기를,‘만약 여자가 아니라면, 마땅히 명유(名儒)가 되어 전열(前烈)3053)을 이어받았을 것이다’하였는데, 이로부터 덕성(德性)이 날로 진보하여 온공(溫恭)하고 화수(和粹)하며 장중(莊重)하고 공손해서, 사람들은 오만하고 게으른 용모(容貌)와 비속(鄙俗)한 말이 있음을 보지 못하니, 육친(六親)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덕선(德選)3054)을 받들게 되니, 이때 대개 10세였는데, 선대왕(先大王)께서 두루 절충[折中]하고 응대(應對)하는 바가 마땅함을 가상(嘉尙)하게 여기셨으며, 여러 여관(女官)들로 모두 말하기를,‘천제(天帝)의 누이동생과 같다’3055)하였다.
이미 간선(簡選)되어 별궁(別宮)에 있을 때 부친이 때때로 들어가서 비로소 《소학(小學)》을 가르쳤는데, 단지 한번 음독(音讀)만 가르쳤으나, 그 뜻을 익숙하게 통하였으며, 한 자도 틀리지않고 읽었고, 또 문득 암송(暗誦)하였다.
그리고 겸해서《내훈(內訓)》을 한번 보고는 끝내 잊지않았고, 사람들이 말하는 고금(古今)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듣기를 좋아하여, 아침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이미 위로 삼궁(三宮)과 사성(四聖)을 받드는데 정성(精誠)과 공경(恭敬)을 다하였고, 혼정신성(昏定晨省)3056)을 감히 몸이 아프다고 해서 혹시라도 폐하는 적이 없었으며, 종일 곁에서 모시면서 공경하고 삼가니, 사성(四聖)께서 권애(眷愛)하심이 매우 돈독하였다.
그러나 은혜에 친압(親狎)하고 사랑을 믿는 뜻은 털끝만큼도 마음속에 가지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정사(政事)때문에 선대왕(先大王)께서 종일 별전(別殿)에 계시니, 왕후(王后)께서 유모(孺慕)3057)함을 금하지못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갑인년3058)에 거듭 대상(大喪)을 두번이나 만났는데, 애모(哀慕)함이 예(禮)에 넘치니, 시어(侍御)하던 사람들로서 그 순지(純至)한 성효(誠孝)에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중곤(中壼)에 정위(正位)하니, 판서(判書)를 승진시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삼고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하였으며, 그 어머니 한씨(韓氏)를 서원부부인(西原府夫人)에 봉하였다.
생원(生員)은 이미 인조조(仁祖朝)에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領議政)을 가증(加憎)하고, 후에 광성보사(光城保社)로 훈록(勳錄)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으로 추봉(追封)하였으며,
부인 윤씨(尹氏)는 부인(夫人)의 고신[眞誥]을 받았다.
왕후(王后)께서 이미 궁내(宮內)의 일을 이어받아 주장해 다스리게 되었는데,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면서 옛날의 성비(聖妃)를 모범삼아 후세(後世)에 사가(私家)의 은택(恩澤)을 구하지 않은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다.
항상 성덕(聖德)을 보필(輔弼)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 연사(宴私)의 뜻이 동정(動靜)에 나타나지 아니하였고, 잠경(箴警)이 연거(燕居)에 끊이지 아니하니, 우리 전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내가 내조(內助)에 힘입은 바가 진실로 많았다’하셨다.
존속(尊屬)을 접대(接待)하는데 여러 가지로 주장하는 것이 모두 곡진하여 예의로운 마음이 있었고, 내사(內史)를 다스리는데 은혜와 위의를 아울러 갖추니,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였으며, 복어(服御)의 여러가지 일은 반드시 분수에 넘치게 사치한 것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본가(本家)에 서간(書簡)을 통하면서 안부(安否) 이외의 일에는 언급하지 아니하였고, 묻는 것은 농사[稼穡]가 잘 되었는지 못되었는지, 질역(疾疫)이 치열한지 누그러졌는지 민생(民生)의 질고(疾苦)에 대한 것일 따름이었다.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의 재이(災異)는 위급하고 두려운데 더욱 진념(軫念)하셔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말씀 가운데 가득했으며, 성심(誠心)으로 가엾게 여겨 슬퍼하시는 바가 하늘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이에 우리 전하께서 만약 형벌하시고자 하면 풍화(風火)의 조짐을 두려워하셨으니, 우리 성비(聖妃)의 타고나신 자질(資質)의 아름다움과 가법(家法)의 훌륭함은 진실로 속일 수가 없다.
갑인년3059) 이후로 적신(賊臣)이 무함(誣陷)과 패역(悖逆)으로 동요(動搖)시킬 것을 꾀하여, 처음에는 친경(親耕)을, 이어서 친잠(親蠶)을 권하고, 빈어(嬪御)를 갖추게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장차 요염(妖艶)을 미끼로 하여 진출(進出)해서, 이간(離間)하는 계책을 삼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바람과 우레(雨雷)가 위세를 떨치는 바람에 친경(親耕)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고 간교한 음모가 중도에서 저지(沮止)되니, 어찌 왕후(王后)의 덕성(德性)이 천지(天地)를 두려워하여 음즐(陰隲)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 후 또 예론(禮論)3060)을 청탁하여 장차 한두 신하(臣下)를 도륙(屠戮)하려 하는데, 광성(光城)에 미친 뒤에 따라서 그 이상에까지 미쳤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왕후(王后)께서는 평안(平安)하고 돈인(敦仁)하셔서 스스로 위태하지 아니하였고, 오로지 종사(宗社)를 걱정하여 옥도(玉度)에 허물이 없었으니, 비록 우리 전하의 신성(神聖)하신 예지(睿智)에 힘입었다 하나, 또한 효성스러운 덕행(德行)이 위로 조종(祖宗)을 감동(感動)시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신년3061)10월에 두창(痘瘡)3062)에 걸렸는데, 상감을 염려하여 스스로 아픈 것조차 잊었다. 헛소리[夢語]를 하는데까지 이르러 부원군(府院君)이 여의(女醫)가 진맥(診脈)하는데 따라 들어가면, 반드시 병을 참고 일어나 앉으면서 몸을 단정히 하여 공경(恭敬)을 다하였는데, 어깨와 등을 곧바로 세우는 것이 병들지 않았을 때와 같았다.
대점(大漸)함에 이르러서 정신(精神)이 조금도 흐려지지 아니하더니, 마침내 26일 신해 해시(亥時)에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詳殿)에서 승하(昇遐)하셨다.
이때 위로 자전(慈殿)의 뜻을 받들어 전하께서 창경궁(昌慶宮)에 이어(移御)하셨었는데, 부음(訃音)을 듣고 몹시 슬퍼하고 상심해 하시고는 내어(內御)에게 명하여 모든 월제(月制)와 일제(日制)의 일은 모두 궐내(闕內)에서 구비(具備)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대개 평일(平日)에 인자(仁慈)하고도 검소(儉素)하셨던 마음을 본받아 저자[市律]와 같이 번거롭고 요란하지않고자 함이었다.
군신(群臣)이 시호(諡號)를 올리기를 인경(仁敬)이라 하였는데, 주(註)를 살펴보건대, 인자함을 베풀고 의(義)를 행한 것을 인(仁)이라 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경계(儆戒)한 것을 경(敬)이라 한다.
능호(陵號)를 익릉(翼陵)이라 하고, 전우(殿宇)를 영소전(永昭殿)이라 하였다. 길(吉)한 날을 가려 신유년 2월 22일 병오 묘시(卯時)에 예장(禮葬)하였는데, 흠위(廞衛)와 의물(儀物)은 모두 간략한 것을 따랐다. 능(陵)은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에 있는데, 도성(都城)에서 20리가 된다.
근신(近臣)이 가만히 엎드려 생각해보건대, 한유(韓愈)가 말하기를,‘《시경(詩經)》에서는 석인(碩人)3063)을 노래하여 이에 종친(宗親)을 서술하였고,《예기(禮記)》에서는 아내를 얻는 것을 논하여 반드시 효제(孝悌)를 가려서 대대로 행의(行義)있는 자라야 한다’고 하였는데, 신이 삼가 우리 성비(聖妃)를 살펴보건대, 그 세족(世族)의 출신을 추구해 보면, 진실로 왕자(王者)의 후예(後裔)로서, 고려(高麗) 5백년동안 이어져 오며 찬란하게 빛났고, 본조(本朝)에 와서는 명경대유(名卿大儒)가 조손(祖孫)에 서로 잇달아서, 마침내 성녀(聖女)가 태어나 경실(京室)3064)에 와서 내치(內治)를 성취하고 왕화(王化)를 도왔으니, 근원(根源)이 크고 내[川]가 풍성한 것은 마땅히 그러한 것이지만, 만약 신성(神聖)하신 우리 현종(顯宗)이 아니었더라면, 비록 성덕(盛德)이 많다하더라도 어떻게 간선(簡選)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처음에 인선대비(仁宣大妃)께서 말씀하시기를,‘문원(文元) 김공(金公)은 진실로 우리 선고(先考) 문충공(文忠公)의 스승이었는데, 이제 내가 그 자손(子孫)과 함께 왕가(王家)의 지어미가 되었으니, 또한 한결같이 기이하다’하셨다.
아! 우리 성비(聖妃)의 씨족(氏族)의 덕행(德行)과 아름다운 일들이 이와 같이 성대(盛大)하였으니, 마땅히 길이 복록(福祿)을 누리시면서 우리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인자하신 은택(恩澤)을 함께 입게 할 것인데, 하늘이 불인(不仁)하셔서 갑자기 하령(遐齡)3065)을 막으시어 우리 삼성(三聖)으로 하여금 위에서 비도(悲悼)하게 하시고, 아래로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울부짖게 하시니, 어찌 이른바 신(神)이란 진실로 밝히기 어렵고, 이치란 추고(推考)할 수 없다는 것인가?
비록 그렇다고 하나, 인(仁)이란 선행(善行)의 으뜸이고, 경(敬)이란 덕행(德行)의 기틀이고, 익(翼)이란 사려(思慮)가 깊고 원대한 것으로서, 지금 올린 시호(諡號)는 능호(陵號)와 더불어 실상(實狀)을 잘 나타내었으므로, 하늘 위에서 빛날 것이며, 영문(令聞)이 그쳐지지않을 것이니, 공성(孔聖)께서 말한바 대덕(大德)은 반드시 그 이름에서 얻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에 신은 가만히 깊이 느껴 거듭 슬퍼하는 바가 있는데, 기억하건대, 옛날에 일찍이 성조(聖祖)를 모시던 별전(別殿)에서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거처(居處)하시던 동합(東閤)을 가리키면서 성사(聖嗣)의 시기가 늦어짐을 깊이 한탄하셨는데, 하늘의 종방(宗祊)을 도우심에 미쳐서 우리 전하께서 탄생(誕生)하셨지만, 성조(聖祖)께서는 이미 미처 보지 못하셨다.
그래서 우리 성비(聖妃)께서 공손히 종사(宗事)를 반드는데 미치면, 항상 말씀하시기를,‘많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하늘에 계신 우리 성조(聖祖)의 영혼을 위로해 드려야한다’고 하셨는데, 이제 곤의(坤儀)가 비게 되어 갑관(甲觀)3066)을 열지못하게 되었으므로, 성비(聖妃)의 덕행(德行)으로써도 끝내 성조(聖祖)의 유택(遺澤)을 입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 슬프도다”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제술(製述)하여 바치었다】
註3044]촉(蜀)·도(塗)·신(莘)·지(摯):모두 고대 중국 후비(后妃)의 출신지를 말함.‘촉’은 황제(皇帝)의 아들 창의(昌意)의 아내 촉산씨(蜀山氏)의 딸의 출생지이고, ‘도’는 우(禹)임금이 아내 도산씨(塗山氏)를 맞이한 곳임.‘신(莘)’은 문왕(文王)의 아내 태사(太姒)의 출신지이고,‘지’는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의 출신지임.註3045]신해년:1671 현종12년.註3046]황류(黃流)의 술을 바침에 옥찬(玉瓚)에 담기에 합당하니:《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의 “아름다운 저 옥찬(玉瓚)엔 황류(黃流)가 그 가운데 있도다[瑟彼玉瓚 黃流在中]”에서 인용한 말임. 옥찬은 울창주(鬱?酒)를 담는 구기 비슷한 잔을 말함이고, 황류는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만든 술임. 울금(鬱金)의 뿌리를 넣으면 술빛이 황색(黃色)으로 변하고 향기가 난다고 한다. 여기서의 뜻은 향기로운 술이 아름다운 잔과 또 어울렸다는 것으로, 왕과 왕비가 서로 훌륭한 배필이었음을 의미함.註3047]병자년: 1636 인조14년 註3048]정축년:1637 인조15년.註3049]입근(立慬):절개를 위해 생명을 버림.註3050]술인(術人):음양(陰陽)과 복술(卜術)에 능한 사람.註3051]임사(任姒):태임(太任)·태사(太姒).註3052]숭정(崇禎)기원(紀元)34년 신축년:1661 현종2년.註3053]전열(前烈):선현(先賢).註3054]덕선(德選): 간택.註3055]천제(天帝)의 누이동생과 같다: 《시경(詩經)》대아(大雅)대명(大明)의‘견천지매(俔天之妹)’를 그대로 인용하였음. 곧 주문왕(周文王)의 비(妃) 태사(太姒)가 몹시 현숙(賢淑)하여 존숭(尊崇)하기를 마치 천제(天帝)의 누이동생과 같이 한다는 것임.註3056]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 부모의 이부자리를 보살펴드리고, 아침에 안부(安否)를 묻는 것.註3057]유모(孺慕):어린아이가 부모를 따르듯이 깊이 사모함.註3058]갑인년:1674 현종 15년.註3059]갑인년:1694 숙종즉위년.註3060]예론(禮論):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복제(服制)에 대한 논의 註3061]경신년:1680 숙종6년.註3062]두창(痘瘡):천연두(天然痘).註3063]석인(碩人):《시경》 국풍(國風)의 한 편명으로, 제(齊)나라 태자(太子) 득신(得臣)의 누이동생 장강(莊姜)이 위(衛)나라 장공(莊公)에게 시집갔을 때의 광경을 묘사한 시임. 이 시의 첫머리에 장강의 혈연관계를 밝히고 있는데, 이를 인용하며 종친을 서술한 것이라고 한 것임.註3064]경실(京室):왕실(王室).註3065]하령(遐齡):긴수명.註3066]갑관(甲觀):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誌文曰:
恭惟我顯宗大王深惟宗社大計, 豫建我今上殿下爲世子。 旣又以爲, 古之帝王其興替, 莫不由妃匹, 而妃匹之賢, 蓋本於族姓之德美, 蜀塗莘摯是也。 於是, 我仁敬王后金氏克膺睿簡, 辛亥四月初三日甲申, 克備大婚正禮。 我殿下親迎于所館之齊宮, 禮畢告于宗廟。 頒敎中外君子曰: “黃流之薦, 宜于玉瓚, 其信矣乎!” 謹按, 金氏籍全羅道光州, 其源蓋出於新羅金姓王。 有王子興光, 知國將亂, 自遯于光。 其後連八代爲平章, 人號其居爲平章洞。 本朝諱國光, 事我世祖大王爲左議政, 封光山府院君。 子諱克忸, 官大司諫。 其曾孫諱繼輝, 官大司憲, 聰明博達, 爲宣廟朝名臣。 其子諱長生, 以學問道德爲世儒宗, 官參判, 贈領議政, 謚文元公, 是爲后高祖。 其子吏曹參判諱槃, 嘗爲大司憲, 論斥奸凶李烓等, 以救文正公金尙憲, 以明《春秋》大義。 其子諱益兼, 生員狀元, 丙丁之亂, 心恥苟免, 立慬於江都。 其配我宣廟外曾孫尹姓也。 是生萬基, 嘗爲兵曹判書、大提學, 娶郡守韓有良女。 參判與生員, 皆葬忠淸道懷德縣之貞民里, 術人曰: “必有德如任姒者生焉。” 后果以崇禎紀元之三十四年辛丑九月初三日乙卯寅時, 誕降于京師會賢坊私第。 旣誕, 呱聲絶稀, 家人或且憂。 醫者曰: “無傷也。 性質然也。” 旣學語不輕發, 發必有理。 致行步徐遲, 亦不輒下庭階, 自有天然尊貴。 相見同輩, 在傍者弄雛戲甎, 爭梨栗取飴餠, 常凝然端坐, 若無覩也。 與之共食, 必待其咸集, 然後乃食。 又不愛芬華之物, 衣服雖垢弊而無斁, 有着鮮好者, 亦無歆艶色。 己之所有, 長者欲移以與人, 則曰可也, 絶無靳焉。 年及七八, 深藏不出, 視禮之十年, 則又早矣。 嘗有婚姻, 會耋艾聚觀, 又有請與看花者曰: “彼家隣且親也。” 皆不肯曰: “恐或有外人也。” 父母曰: “是若非女子, 則當爲名儒, 以繩前烈矣。” 自是, 德性日就, 溫恭和粹, 莊重齊遬, 人不見有傲惰之容、鄙俗之言, 六親咸異之。 未幾, 承膺德選, 時蓋十歲也。 先大王嘉其周折中度, 應對得宜。 諸女官皆曰: “俔天之妹也。” 旣選在別宮, 父時往入, 始授以《小學》書, 只授音讀一遍, 便通其義, 讀不錯一字, 輒又成誦。 兼看《內訓》一閱, 終不忘喜聽人說, 古今嘉言、善行, 早夜不倦。 旣上奉三宮四聖, 克盡誠敬, 晨夕定省, 罔敢以疾病而或廢。 終日侍側, 油油翼翼, 四聖眷愛深篤。 然狎恩恃愛之意, 一毫不萠于內。 嘗以政事, 先大王終日于別殿, 后不勝孺慕, 至於釀涕焉。 甲寅荐遭兩大喪, 哀慕踰禮, 侍御之人莫不歎其誠孝純至。 於是正位中壼, 陞判書爲領敦寧府事, 封光城府院君, 母韓封爲西原府夫人。 生員, 仁廟朝已贈持平, 至是加贈領議政, 後以光城保社勳, 追封光源府院君。 配尹受夫人眞誥。 后旣承主內治, 必敬必愼, 必以古聖妃爲法, 如後世不求私家恩澤, 不足言也。 常以輔助聖德爲心, 宴私不形乎動靜; 箴警不絶乎燕申。 我殿下嘗曰: “予賴內助者實多。” 諸主皆尊屬其接待, 曲有禮意, 御內史恩威竝濟, 人皆愛而畏之。 服御凡百, 必戒侈靡。 通書本家, 安否外不及餘事, 所問者稼穡枯興、疾疫熾熄、民生疾苦而已。 水旱災異, 益軫危惕, 其戒懼之意, 溢於言色, 誠心惻怛, 可以感天也。 是雖我殿下刑家之則, 協于風火之象, 而我聖妃天質之美、家法之懿, 寔不可誣也。 自甲寅以後, 賊臣誣悖, 謀所人搖, 始勸以親耕, 繼以親蠶, 備嬪御, 蓋將媒進妖艶, 以爲離間計也。 幸而風雷動威, 親耕旣不成, 而奸謀中沮, 豈后德協天地, 受其陰隲耶? 厥後, 又托禮論, 將屠戮一二臣, 以逮光城, 然後因以上及焉。 當是時, 后能安土、敦仁, 不自危, 而惟宗社是憂, 終至於玉度無玷, 雖賴我殿下神聖睿智, 而亦豈其誠孝之德, 上感祖宗而然歟? 庚申十月遘痘瘡, 憂念聖躬, 自忘其疾痛, 至發於夢語。 父府院君從女醫入診, 則必力疾起坐, 收束致敬, 肩背聳直, 如不病時。 及其大漸, 精神猶不少爽。 竟以其二十六日辛亥亥時, 昇遐于慶德宮之會祥殿。 時, 上奉慈殿, 殿下移御昌慶宮, 訃聞震悼傷慟, 命內御凡月制日制之類, 皆自內具備。 蓋體平日慈儉之心, 不欲煩撓市肆也。 群臣上謚曰仁敬, 按註, 施仁服義曰仁, 夙夜儆戒曰敬。 陵號曰翼, 殿曰永昭。 卜得吉, 以辛酉二月二十二日丙午卯時禮葬。 廞衛儀物, 皆從省約。 陵在京畿高陽郡, 去都城二十里。 而近臣謹竊伏念, 韓愈曰: “《詩》歌《碩人》, 爰敍宗親。 《戴記》論娶婦, 必擇孝悌, 世有行義者。” 臣謹按, 我聖妃原其族出, 實王者之後, 而歷高麗五百年, 蟬聯燀爀, 及至本朝, 名卿大儒, 祖孫相望, 末乃克生聖女, 來婦京室, 聿成內治, 以助王化。 源大川豐, 理則宜然, 而倘非我顯考神聖, 雖甚盛德, 曷膺簡選哉? 始也, 仁宣大妃曰: “文元金公, 實我先考文忠公師也。 今予與其孫, 皆爲王家婦, 亦一奇也。” 嗚呼! 我聖妃氏族德行嘉美之會, 其盛若此, 宜其永綏福祿, 使我臣民, 同被慈濡, 而上天不仁, 遽閼遐齡, 令我三聖, 悲悼於上, 臣民號慕於下, 豈所謂神者誠難明, 而理者不可推者耶? 雖然, 仁者善之長; 敬者德之基; 翼者思慮深遠。 今所上謚與陵號, 克著其實, 而在天於昭, 令聞不已, 孔聖所謂, 大德必得其名者非耶? 抑臣於此, 竊有所深感而重悲者, 記昔嘗侍聖祖于別殿, 指示我先大王所居之東閤, 而深歎聖嗣之遲期, 及其天佑宗祊, 我殿下誕生, 則聖祖已不及見矣。 逮我聖妃恭承宗事, 則常謂則百有慶, 以慰我聖祖在天之靈矣。 乃今坤儀遽缺, 甲觀不闢, 以聖妃之德之行, 終不克蒙聖祖之遺澤, 嗚呼, 痛哉!【領中樞府事宋時烈製進。】
순조 14권, 11년(1811 신미/청가경(嘉慶)16년) 5월 29일(병오) 1번째기사
소대하여 《시전》의 석인장을 강하다
소대하고, 《시전(詩傳)》〈위풍(衛風)의〉석인장(碩人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부(大夫)들이 일찍 퇴근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수고로움이 없게 하였는데, 이와 같이 한다면 현사대부(賢士大夫)를 가까이 할 때가 적을 것이다. 장강(莊姜)은 정실부인이니 궁첩과 같이 비교할 수 없을 것이나, 제풍(齊風)의 계명시(鷄鳴詩)를 가지고 살펴보면, 혹시라도 한가하게 즐기는데 지나쳐 조회를 보임이 늦어질까 두려워하고, 멋대로 즐기며 날로 투박하게 될까 염려하였다. 그리고 대아(大雅)에 이르기를,‘과처(寡妻)에게 본을 보여 나라를 다스린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근본을 단정히 하고 시초를 바로잡는 도리인데, 인신(人臣)이 된 자가 그 임금이 부인을 가까이 좋아하게 하려고 대부(大夫)가 일찍 퇴근하도록 경계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것은 인군(人君)이 즐겨하는 뜻을 인도하여 아첨하는 데 가까운 것이 아닌가?”하자,
시독관(侍讀官) 조봉진(曹鳳振)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훌륭합니다. 위(衛)나라의 대부(大夫)가 그들 임금이 어진 부인을 맞게 되었음을 기뻐하여 이 시를 지은 것입니다”하였다.
○丙午/召對。 講《詩傳》《碩人章》。 上曰: “大夫夙退, 無使君勞, 若此則親賢士大夫之時少矣。 莊姜則正室夫人, 不可比同於宮妾, 而以《齊風》《鷄鳴》之詩觀之, 或恐有過於燕昵, 晏於視朝, 致有安肆日偸之慮。 且《雅》曰, ‘刑于寡妻, 以御于家邦’, 此乃端本正始之道, 而爲人臣者, 欲其君之親好夫人, 至戒以大夫夙退, 則無乃啓人君宴樂之志, 而近於謟諛乎?” 侍讀官曺鳳振曰: “聖敎好矣。 衛之大夫, 喜其君之有賢夫人, 而作是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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