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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일원(姜一遠)
출신지: 경북 안동
훈격: 대통령표창(1996)
운동계열: 학생운동
강일원(姜一遠) 1923. 5. 14~ 이명:正祐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43년 8월 경, 경북 안동의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敎)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회복연구단(大韓獨立恢復硏究團)의 단원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방학 중에도 학생들을 강제로 근로동원에 참가시키는 등 전쟁준비에 광분하였다.
이때 안동농립학교 학생들은 대구 동촌비행장의 확장공사에 동원되었는데, 강일원을 비롯한 안동농립학교의 제 8・9・10회생들은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공사 현장에서 항일결사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결사 조직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공사에 동원되었던 일반인들까지 참가하면서 항일투쟁의 강도를 높여 갔다.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은 민족의식 고취에 머물지 않고,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일제의 호방을 교란시키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안동시내의 일본인 기관 및 요인의 습격 등을 투쟁 방침으로 삼았다.
강일원 등은 기회를 엿보면서 거사를 준비하던 중, 1945년 3월 10일 소위 일본육군기념일에 총궐기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거사를 추진해 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강일원을 비롯한 단원 전원이 피체되었다.
그는 이일로 인해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8월 16일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4卷, 國家報勳處, 2000年, p.39.
註・形事事件簿
・安東版獨立史(金乙東, 1985) 338・339面
・안동광복지사기념비 제막식(1981.8.15)
・大韓每日新聞(1982. 8. 5)
이름: 강자선(姜自仙)
출신지: 전남 해남
훈격: 애족장(2006)
운동계열: 의병
강자선(姜自仙) 1866~미상
전남 해남(海南) 출신으로 황두일의진(黃斗一義陣)에 가담하여 의병 활동을 하였다.
황두일은 심남일부대(沈南一部隊) 기군장(起軍將) 이덕삼(李德三)의 중군(中軍)이었다. 심남일은 1908년 음력 2월경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전남 나주·함평·영암·보성·장흥·강진·해남 일원에서 활동하다 1909년 10월 9일 일본군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1909. 9. 1~1909. 10. 10)으로 체포되었다.
강자선은 1908년 음력 12월경 의병장 황두일의 지휘 아래 전남 해남군 송종면(松終面)의 미황사(美黃寺)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중, 황두일의진의 의병 활동을 관헌에게 밀고한 종송면 삼마동(三馬洞)에 거주하는 최덕관(崔德寬)을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강자선·박화선(朴化仙)·이봉기(李鳳奇) 등은 1908년 음력 12월 22일 강모(姜某)를 부장(副將)으로 추대하고, 다음날 23일 새벽 최덕관의 집으로 찾아가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강자선은 1910년 3월 19일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判決文(光州地方裁判所 木浦支部:1910. 3. 19)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별집 제1집 836면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홍영기, 2005) 402·404면.
이름: 강장룡(姜張龍)
출신지
훈격: 애족장(1995)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장룡(姜張龍) ~1934.
그는 신간회(新幹會) 성진지회와 성진청년동맹(城津靑年同盟)에서 활동하다가 1931년 5월 성진농민조합(城津農民組合)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성진농민조합은 1931년 신간회 지부와 청년동맹이 해소된 뒤 이들 조직원을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조직 결성 이후 성진농민조합은 소작료 인하투쟁·채권문서 탈취 및 소각투쟁·스파이 징벌 투쟁·야학철폐 반대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성진농조에서는 조직을 관할하기 위해 1932년 1월에 농민조합본부임시통제위원회(農民組合本部臨時統制委員會)와 지도위원회(指導委員會)와 같은 기구를 설치·운영하였는데, 이 조합은 하부 조직으로 7개 면에 14개 지부와 45개 반(班)을 설치하면서 2천여 명의 조합원 규모의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서는 6, 7세의 어린아이들까지도 혁명가(革命歌)를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농조의 대중적 기반이 다져졌다. 이에 따라 일제는 무장 경찰을 동원하여 대규모의 탄압전을 개시하여 700여 명의 조합원이 피체되고 이 가운데 150명이 검사국에 송환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 때 강장룡은 성진농민조합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34년 10월 공판에 회부된 직후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일제하농민조합운동연구(지수걸, 1993) 515∼51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258면
·동아일보(1932. 9. 14, 1933. 12. 3)
·조선일보(1934. 10. 16)
이름: 강재숙(姜在淑)
출신지: 전북 옥구
훈격: 애족장(1991)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재숙(姜在淑) 1881.12.13~1945. 1. 9
전북 옥구(沃溝) 사람이다.
3·1독립운동 당시 전북 정읍(井邑)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후 1942년 5월 전북 부안(扶安)에서 뜻을 함께 하는 16명의 동지들과 함께 무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펴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1944년 1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44. 1. 10 전주지방법원)
이름: 강재식(姜在植)
출신지: 함남 원산
훈격: 애족장(1991)
운동계열: 광복군
강재식(姜在植) 1919. 2. 6~1991. 2.23
이름: 강재식(姜在植)
출신지: 경북 청도
훈격: 대통령표창(1992)
운동계열: 3・1운동
강재식(姜在植) 1895. 4. 20~1963. 11. 13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청도군 운문면(雲門面)에서 김진효(金鎭孝)・김종태(金鍾台)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운문 장날을 이용, 다수의 군중과 함께 일경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들을 구타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피체되었다.
이 해 5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7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10卷,國家報勳處, 1993年, pp.16~17.
註・判決文(1919. 5. 2. 大邱覆審法院)
・判決文(1919. 7. 5. 大邱覆審法院)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32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437~1443面
이름: 강재천(姜在天)
출신지: 경북 안동
훈격: 애국장(1991)
운동계열: 의병
강재천(姜在天) 미상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대한제국 육군 호위령관(護衛領官)으로 있던 중 1907년 8월 일제에 의하여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광무황제의 밀조(密詔)와 군자금을 받고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장성(長城)에서 일군과 십여 차례 교전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에는 중국 동삼성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9卷,國家報勳處,1991年, pp.541~542.
註・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9面
・韓國獨立史(姜承學) 下卷 71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484面
이름: 강재호(姜在鎬)
출신지: 경남 양산
훈격: 대통령표창(1992)
운동계열: 3・1운동
강재호(姜在鎬) 1901. 8. 16~1986. 4. 2
경남 양산(梁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27일 양산군 양산읍(梁山邑)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엄주태(嚴柱泰)・박삼도(朴三道)・정주봉(鄭周奉) 등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저지하던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이 해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받았으며, 상고하였으나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p.17.
註・判決文(1919. 5. 28. 大邱覆審法院)
・判決文(1919. 7. 12. 高等法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211~214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218~1220面
이름: 강정수(姜正秀)
출신지: 전남 순천
훈격: 대통령표창(1993)
운동계열: 3・1운동
강정수(姜正秀) 1886. 10. 15~1943. 9. 11
전남 순천(順天)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순천군 낙안면(樂安面) 신기리(新基里)에서 전평규(田平奎)・안용갑(安龍甲)・안응섭(安應燮) 등 청장년 33명과 함께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다짐하는 2・8사(二八社, 일명 爲親契)를 조직하고 4월 8일에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서약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이들은 이튿날 4월 9일 오후 1시경에 장좌리(長佐里) 아랫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터에 모인 다수 군중을 규합, 함께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2일 광주지방법원 순청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11卷, 國家報勳處, 1994年, pp.19~20.
註・3・1運動實錄(李龍洛) 554~556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575~577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533・1534面
이름: 강정태(姜正泰)
출신지: 전남 완도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정태(姜正泰) 1896. 3.13~1963.12.14
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목포상업전수학교를 수료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3월 15일 향리에서 송대호․정남국 등 동지들과 함께 수백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후 그는 완도군 소안면(所安面)에서 배달청년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에 추대되어, 군내 각종 청년단체와 노동단체를 통합하여 완도청년연합회와 완도노동연합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이 단체의 간부로 선임되어 농민운동에 전념하였으며, 1926년 6월 15일에는 소안면 미라리(美羅里)에서 농민운동의 일환으로 ‘살자회’를 조직하여 소작쟁의를 계획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그는 결국 1930년 3월 31일 공주지방법언 목포지청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며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칙령 제7호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한의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30. 3. 31 대구복심법원)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22․625면
이름: 강제형(姜齊馨)
출신지: 경남 의령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3・1운동
강제형(姜齊馨) 1888. 3.28~1926.10.24
경상남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누이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문병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귀향 즉시 이곳의 청년 유지들인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만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용덕면(龍德面) 면장이던 그는 이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줄 것을 요청받고 쾌히 승낙한 후, 면서기 전용선(田溶璿)·최병규(崔秉圭) 등에게 면사무소의 기재를 이용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도록 지시하였다. 3월 14일 오후 1시, 그는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의령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는 이튿날 다시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화경·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강순이(姜順伊)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산(馬山) 주둔 일본 포병대대에서 응원 출동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진주재판소(晋州裁判所)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으나, 일제에게 당한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3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3·1운동실록(이용락) 684·686·68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08·311면
이름: 강종근(姜琮根)
출신지: 서울
훈격: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종근(姜琮根) 1901. 9.20~1942. 6. 3
서울 사람이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교회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설교를 하였다.
만주 철령에 있는 육영학교를 다닌 강종근은 이 학교에서 이동교회(裡洞敎會) 목사이며, 민족주의자인 최학기(崔學基)로부터 민족주의 사상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내에 들어와 경성신학교·배재학당 등을 다니면서 민족주의 의식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강종근은 1930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기독교 전도사가 되어 경기도 연천군 연천면에 있는 연천교회에서 근무하였다. 이곳에서 강종진은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함양시키는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1938년 5월 목사가 되어 강원도 금화군 창도면 창도교회(昌道敎會)로 옮겨서도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결과 강종근은 1940년 6월 철원 제일교회에서 목회 활동 중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피체되었다. 그래서 1941년 10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후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2년 6월 고문으로 인한 신병의 악화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41. 10. 9)
·한국감리교인물사전(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23卷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순교열전원고(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2003)
이름: 강종득(姜宗得)
출신지: 전남 담양
훈격: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종득(姜宗得) 1902. 8.27~1960. 5.18
1927년 전라남도 담양청년동맹(潭陽靑年同盟) 집행위원으로 활약하다가 전남청년연맹(全南靑年聯盟)의 집행위원(執行委員)으로 선임되었다. 표면적으로 청년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1927년 9월 전남 광주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또한 1928년 2월 신간회(新幹會) 담양지회 결성에 앞장 서 조직선전부 상무간사로 활약하였다.
1928년 9월경 체포되어 동년 12월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30. 12. 22)
·東亞日報(1930. 12. 23, 1927. 12. 16)
·朝鮮日報(1930. 12. 24)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1권 91면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9권 624면
·現代史資料(姜德相, 1972) 제29권 104·138·143면
·韓國靑年運動史(鮮于基聖, 1973) 344면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 16∼17면
이름: 강종완(姜宗完)
출신지: 경남 마산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3・1운동
강종완(姜宗完) 1900.12.25~1962. 5. 5
경상남도 마산(馬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진주(晋州)·함안(咸安)·마산 등지에서 동지 180여명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는 등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해 4월 25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부산(釜山)형무소에서 3년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1986. 4. 18 감식 23182∼1225)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39면
이름: 강종회(姜鍾會(姜鍾八)(姜宗瑞))
출신지: 전북 고창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의병
강종회(姜鍾會) 1851. 3.15~1915.12. 8 이명:姜鍾八, 姜宗瑞
전남 고창(高敞) 사람이다.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경복궁위장(景福宮衛將)을 역임하였던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향으로 내려왔으며, 1906년 4월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거의하자 김재구(金在龜) 등 장사 수십명을 이끌고 이에 참가하여 고용진(高龍鎭)의 부대에 소속되었다. 1906년 6월 16일에 최익현의진이 순창 구암사(龜岩寺)를 거쳐 순창에 도착하자 그는 포군장(砲軍將)에 임명되었으며, 채영찬(蔡永贊)·김갑술(金甲述)로 수포수(首砲手)를 삼고 휘하에 3백여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군과 대치하게 되어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하고 면암이 스스로 포박되자 의병진도 자연 해산하게 되었다.
그는 이후 부하를 이끌고 기삼연(奇參衍)·박도경(朴道京) 의병진에서 일병(日兵)과 계속 싸웠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최익현의 포군장임명장(1906. 閏4)
·서신(최익현 1906. 4)
·돈헌(遯軒)유고(全) 창의일기 1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73·37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84·85면
이름: 강주룡(姜周龍)
출신지: 평북 강계
훈격: 애족장(2007)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주룡(姜周龍) 1901~1932.6.13
평양에서 일제의 민족 차별에 반대하는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은 14세 때에 서간도로 이주하여 통화현의 최전빈(崔全斌)과 결혼하였다. 24세때 채찬(蔡燦이명 白狂雲)의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남편이 병사하자, 강주룡은 가족을 데리고 귀국하여 사리원을 거쳐 평양에 정착, 평원(平元) 고무공장의 여공으로 일하며 가장 역할을 했다.
1930대초 평양에서는 고무공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파업투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1929년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고무공업이 타격을 입자, 고무공업계는 1930년 5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고무공업자대회를 통해 임금 인하를 결의하였다. 1930년 8월 1일 평양고무공업조합이 이 결정에 따라 종래 임금의 17% 삭감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자, 노동자들은 일제와 그에 결탁한 자본가들을 비판하며 반대투쟁을 일으켰다.
강주룡은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던 중 일경의 간섭으로 공장에서 쫓겨나자 을밀대(乙密台) 지붕으로 올라가 무산자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참상을 호소하는 한편, 고용주의 비인도성을 거세게 비판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1주일의 구류처분을 받자 다시 6월 11일까지 54시간 단식을 결행하였다. 여장부로 신문지상의 주목을 받던 강주룡은 투옥 중 극도의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등으로 보석 출감되었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출감 두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동아일보(1931. 6. 1, 6. 3, 6. 11, 6. 12, 6. 13, 1932. 6. 10, 8. 17, 1933. 3. 25)
·동광(제23호, 1931년 7월) 40~42면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0권 931~932면
이름: 강주형(姜宙馨)
출신지: 전남 강진
훈격: 대통령표창(1992)
운동계열: 3・1운동
강주형(姜宙馨) 1887. 10. 19~1976. 9. 5
전남 강진(康津) 사람이다.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전개될 무렵인 1919년 4월 4일, 강진군 강진읍(康津邑) 장터에서 이기성(李基性)・오승남(吳承南)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주민들을 규합하여 장터에 모인 다수의 시위군중과 같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4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5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었으나 징역 5월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p.18.
註・判決文(1919. 5. 21. 大邱覆審法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14~616面
이름: 강지석(姜智錫)
출신지: 전남 무안
훈격: 대통령표창(1999)
운동계열: 3・1운동
강지석(姜智錫) 1894. 11. 30~1953. 3. 16
전남 무안(務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 전남 무안군 외읍면(外邑面) 구무안읍(舊務安邑) 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무안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김한근(金翰根)이 3월 9일 만세소식을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강지석은 1919년 3월 19일 밤 김순기(金順淇)의 집에서 정순홍(丁淳紅), 박상규(朴相奎) 등 수십 여 명과 함께 무안읍 장날인 20일 새벽, 이들은 읍내 각처에 독립선언서와 경고문을 붙여 일제와 친일파들의 자숙을 촉구하는 한편 군중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11시 경, 강지석 등은 남산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다음 읍내를 향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1시 경, 그들이 무안공립보통하교 앞을 지날 때, 주재원들에 의해 저지를 받았지만 행진을 계속하여 구무안읍 장터에 도착하였다. 읍내 장터에는 이미 수백의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주도자들은 그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한편,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군중들을 주도해 나갔다. 오후 2시경 만세시위대는 500여 병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저마다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지를 행진하며 만세시위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때 일제 당국은 만세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무안군수와 목포경찰서장의 진두 지휘 아래 군경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는 이리경에 피체되어 이 해 4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14卷, 國家報勳處, 2000年, pp.40~41.
註・判決文(1919.5.31. 大邱覆審法院)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刑事事件簿
・3・1獨立運動務安義蹟碑(3・1獨立運動務安義蹟碑建立推進委員會,1975)
이름: 강지형(姜芝馨(姜在馨)(姜始馨))
출신지: 경기 포천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지형(姜芝馨) 1881.~1931. 4. 8 이명:姜在馨, 姜始馨
경기도 포천 가산(加山)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에 있던 이헌교(李憲敎)·이민태(李敏台)·한남수(韓南洙)·이규갑(李奎甲)·김사국(金思國) 등이 서울시내 내자동 한성오(韓聖五)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임시정부 및 국민대회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토의하고 국민대회 취지를 작성하였는데 이때 13도 대표 25인 가운데 1인으로 참가하였다.
그후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12월 길림성 관전현에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였으며, 박장호(朴長浩) 총재로부터 경기도 지단을 조직하라는 밀명을 받고 1920년 1월 경기도 도시찰 전권위원에 임명되어 서울로 들어와 상왕십리에 거주하였다.
그리하여 비밀리에 서울에 중앙본부를 조직하고, 각 도·군에 지단을 설치하기 위하여 임명장·사령서·격고문·경고 경향 각 부호문·경고 동포 왜관리문·임시통칙·군자금 영수증 등 수천매의 유인물을 제작하였다. 이어서 단원을 확보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독립군의 국내 진입시 일제히 호응할 수 있도록 사전 준비에 동분서주하던 중 일경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으며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19. 9. 30 경성지방법원)
·조선민족운동년감 9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19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4면
·동아일보(1921. 7. 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3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1068∼108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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