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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적 성향을 갖고, 전생에 [103] 취기에 취하거나 배우고 탐문하는 것이 없는 자나 축생계에서 죽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자는 우치적 성향을 갖는다. 이와 같이 전생에 익힌 것을 원인으로 한다고 어떤 자들은 말한다.
81. 그리고 땅의 세계와 물의 세계의 두 세계가 우세한 까닭에 우치적 성향을 갖고, 나머지 두 세계가 우세하면,655) 분노적 성향을 갖게 되고, 모든 세계가 평등하면, 탐욕적 성향을 갖게 된다거나, 체질 가운데 점액이 많은 자는 탐욕적 성향을 지니고, 바람이 많은 자는 우치적 성향을 지닌다거나, 또는 성향을 지닌다라고 이와 같이 세계와 체질이 원인이라고 어떤 자들은 말한다.
82. 그 가운데 전생에 좋은 과업과 훌륭한 일을 많이 한 자나 천상에서 죽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자들이라고 모두 탐욕적 성향을 갖는 것은 아니고 다른 자들도 분노적 성향을 갖거나 우치적 성향을 갖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해서도 앞서 말해진 대로 우세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은 없다. 체질에 의한 결정에서 탐욕적이고 우치적인 두 가지만 언급하였는데, 전후가 모순이 된다. 신앙적 성향 등에 대해서는 하나의 원인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확정적인 언급이 아니다.
83. 그런데 그것에 관한 앗타까타의 스승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러한 결정설이 있다. 웃싸다깃따나656) 가운데 설한 것이다. “이 뭇 삶들은 전생의 원인657)으로 인해서 탐욕이 우세하기도 하고, 분노가 우세하기도 하고, 우치가 우세하기도 하다. 무탐이 우세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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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 itarāsaṁ dvinnaṁ ussannattā : 불의 세계(火界)와 바람의 세계(風界)를 말한다.
656) Ussadakittana : Aṭs. 267의 이숙론(異熟論) 중의 한 장이다.
657) hetu : 여기서 원인이란 뿌리로서의 원인 즉, 탐욕(貪)·진에(瞋)·우치(痴)·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痴)를 말한다. Vism. 539/17 : 69를 참조하라.
무진이 우세하기도 하고, 무치가 우세하기도 하다. 업을 도모하는 찰나에 탐욕은 강하고 무탐은 약하고, 무진과 무치는 강하고 분노와 우치는 약하면, 그는 무탐이 약하므로 탐욕을 극복할 수 없으나 무진과 무치는 강하므로 분노와 우치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한 업에 의해서 주어진 결생658)을 통해서 태어나 탐욕은 지니지만, 낙천적이고659) 성냄을 여의고 지혜로워서 번개와 같은 앎을 지니게 된다.”660)
84. “그러나 업을 도모하는 찰나에 탐욕과 분노가 강하고, 무탐과 뮌이 약하고, 무치가 강하고 우치가 약하면, 그는 앞의 방식대로 하자면 탐착을 지니고 성냄을 지니지만, 지혜로워서 번개와 같은 앎을 지니게 된다. 장로 닷따 아바야661)가 그 예이다. 업을 도모하는 찰나에 탐욕과 무진과 우치가 강하고 다른 것들은 약하다면, 그는 앞의 방식대로 하자면 탐착을 지니고 우둔하지만, 낙천적이고 성냄을 지니지 않게 된다. 장로 바훌라662)가 그 예이다. 마찬가지로 업을 도모하는 찰나에 탐욕과 분노와 우치가 강하고 무탐 등은 약하다면, 그는 앞의 방식대로 하자면 탐착을 지니고 성냄을 지니고 아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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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 paṭisandhi : 한역에서는 결생(結生)이라고 한다. 이전의 생이 끊어지고 새로운 생에서 최초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마치 이전의 생과 새로운 생을 연결하듯 일어나는데, 이 때의 마음의 작용을 결생이라고 한다. 이전의 생의 존재의 다발의 상속이 소멸한 뒤에 결생의 작용으로 새로운 생의 조건 속에서의 존재의 다발의 상속으로 윤회한다.
659) sukhasīla : 낙천적 성질을 지닌 것을 의미한다.
660) ime sattā pubbahetuniyāmena lobhussadā dosussadā mohussadā alobhussadā adosussadā amohussadā ca honti. su. yassa hi kammāyūhanakkhaṇe lobho balavā hoti alobhomando, adosāmohā bklavanto dosamohā mandā, tassa mando alobho lobhaṁ pariyādātuṁ na sakkoti. adosāmohā pana balavanto dosamohe pariyādatuṁ sakkoti. tasmā sotena kammena dinnapaṭisandhivasena nibbatto luddho hoti sukhasīlo akkodhano pañña vā vajirūpamañāṇ : Ats. 267
661) Datta Abhaya : M rp. I. 333에 꼴리따 승원의 《4부-니까야》의 송출자인 형인데, 병이 들었을 때 동생에게 명상주제를 줄 것을 자문한 결과 음식에 대한 혐오의 명상주제를 받아서 거룩한 님이 된 닷따 아바야가 있는데, 그와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662) Bahula : 이 곳에만 등장하는 장로이다. 미얀마 본에는 박꿀라(Bākula)라고 되어 있다.
663) yassa pana kammāyūhanakkhaṇe lobhadosā balavanto honti alobhādosā mandā
85. “그리고 [104] 업을 도모하는 찰나에 무탐과 분노와 우치는 강한데 다른 것은 약하다면, 그는 앞의 방식대로 하자면 탐착을 여의고 오염을 여의고, 천상의 대상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지만, 성냄을 지니고 지혜가 둔하게 된다. 그런데 업을 도모하는 찰나에 무탐과, 무진과, 우치는 강한데 다른 것은 약하다면, 그는 앞의 방식대로 하자면 탐착을 여의고 성냄을 여의고 낙천적이지만 지혜가 둔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업을 도모하는 찰나에 무탐과 분노와 무치는 강한데 다른 것은 약하다면, 그는 앞의 방식대로 하자면 탐착을 여의고 지혜롭지만, 성내고 분노하는 것을 지내게 된다. 그러나 업을 도모하는 찰나에 무탐과 무진과 무치가 강하고, 탐욕 등이 약하다면, 그는 앞의 방식대로 하자면 탐착을 여의고 성냄을 여의고 지혜롭게 된다. 마하 쌍가락키따664) 장로가 그 예이다.”
86. “여기서 탐착을 지닌 자라는 것은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를 말한다. 성냄을 지니고 아둔한 자는 분노적 성향을 지니고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이다. 지혜로운 자는 지성적 성향을 지닌 자이다. 탐착을 여의고 성냄을 여읜 자는 천성적으로 청정한 믿음을 지닌 자로서 신앙적 성향을 지닌 자이다. 무치를 수반하는 업으로 태어난 자가 지성적 성향을 지닌 자인 것처럼, 강한 신심을 수반하는 업으로 태어난 자는 신앙적 성향을 지닌 자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매인 사유 등을 수반하는 업으로 태어난 자는 사유적 성향을 지닌 자이고, 탐욕 등이 혼합된 업으로 태어난 자는 혼합적 성향을 지닌 자이다. 이와 같이 탐욕 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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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ho balavāl moho mando, so parimanayeneya luddho ceva hoti duṭṭho ca. paññavāpana hoti vajirūpama ñāṇo dattābhayatthero viya. yassa kammāyūhanakkhaṇe lobhādo samohā balavanto honti itare mandā, so purimanayeneva luddho ceva hoti dandho ca, sīlako pana hoti akkodhano Bākulatthero viya. tathā yassa kammāyūhanakkhaṇe tayopilovhadasamohā balavanto honti alobhādaya mandā, so purimanayeneva luddho ceva hoti duṭṭho ca mūḷho ca : Ats. 267; 이하 인용문은 Pps. Ⅱ. 375와 병행한다.
664) Mahā Saṁgharakkhita : Pps. I. 525에 의하면, 오염에서 벗어난 장로이다. Vism. 47/1 : 135에 등장하는 인물과는 동명이인이다.
서 어떤 것을 수반하는 결생을 초래하는 업이 성향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665)
87. ‘이 사람은 탐욕적 성향을 지녔다고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666) 앞에서 설했지만 그것에 관해서 방법은 이와 같다.
① 위의 자세의 관점에서, ② 일의 관점에서
③ 먹는 것의 관점에서, ④ 보는 것 등의 관점에서
⑤ 또한 사실의 일어남의 관점에서
성향들을 분명히 판별해야 한다.667)
88. 1) [위의 자세의 관점에서] 그 가운데 ‘위의 자세668)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는 자연적인 걸음걸이로 가면서 세련 되게 가고, 천천히 발을 내딛고, 가지런히 내리고 가지런히 올리고, 그의 발자국은 가운데가 닿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669)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는 발끝으로 파는 것처럼 걷는다. 갑자기 발을 내려놓고, 갑자기 들어 올린다. 그의 발자국은 끌린 흔적을 남긴다.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는 혼란스러운 걸음으로 걷는다. 주저하며 발을 내려놓고, 주저하며 들어올린다. 그의 발자국은 급하게 눌린 [105]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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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5) yassa pana kammāyuhanakkhaṇe alobhadosamohā balavanto honti itate mandā, so purimanayeneva aluddho appakileso hoti dibbārammaṇampi disvā niccalo, duṭṭho pana hoti dandhapañño ca. Yassa pana kammāyūhanakkhaṇe alobhādosamohā balavanto honti itare mandā, so purimanayeneva aluddho ceva hoti aduṭṭho sīlako ca, dandho pana hoti Tathā yassa kammāyūhanakkhaṇe alobhadosāmohā balavanto honti itare mandā, so purimanayrneva aluddho ceva hoti paññavā ca, duṭṭho ca pana hoti kodhano. yassa panal kammāyūhanakkhaṇe tayopi alobhādosamohā balavanto honti lobhādayo mandā, so purimanayeneva mahāsaṁgharakkhitatthero viya aluddho aduṭṭho paññavā ca hotī’ti
666) kathañca jānitabbaṁ ayaṁ puggalo rāgacaritoti-ādi : Vism. 102/3 : 79
667) iriyāpathato kiccā ǀ bhojanā dassanādito ǀ dhammappavattito ceva ǀ cariyāyo vibhāvayeti ǁ
668) iriyāpatha : 한역의 위의로(威儀路)로 행주좌와(行住坐臥)를 뜻한다.
669) ukkuṭikañcassa padaṁ hoti :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중앙에 닿음이 없다.’라는 뜻이다.
마간디야의 경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670)에서도 설하고 있다.
“탐욕자의 족적에는 만곡이 생겨나고
분노자의 족적에는 끌린 흔적이 있고
우매자의 족적에는 급히 눌린 자국이 있다.
욕망을 여읜 자의 족적은 여여하다.”671)
89. ‘서 있는 것’도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는 편안하고 우아한 자태를 지닌다. 분조적 성향을 지닌 자는 완고한 자태를 지닌다. 우치적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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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 Māgaṇḍiyasuttuppatti : 마간디야 경(Stn. 163)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DhpA. I. 199-203에 따르면, 마간디야는 꾸루 국에 사는 바라문 마간디야의 딸이었다. 그녀는 천상의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녀녀의 아버지는 딸에 버금가는 사위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바라문 마간디야와 그의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성취할 수 있음을 알고 바라문이 재화를 집전하는 장소에 나타났다. 그러자 바라문은 여래의 상호를 보고는 사윗감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행자여, 내게 외동딸이 있는데, 지금까지 그녀에게 알맞은 배필을 발견하지 못했소. 그러나 당신이 알맞은 배필이요. 당신도 아내가 필요할 것이니, 여기서 기다리시오. 내가 돌아오리라.’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침묵을 지켰다. 바라문은 집으로 가서 딸을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는 딸의 배필을 찾았다고 온 도시가 떠들썩하게 만들면서 스승에게로 갔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족적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바라문의 아내는 족적을 보면서 ‘바라문이여, 이것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자의 족적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바라문은 그녀에게 ‘여보, 물그릇 속의 악어나 집에 숨은 도독만을 보는 주제에 입을 닥치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바라문이 주변을 둘러보고 부처님을 발견했다. 부처님께서는 바라문에게 죽음의 신인 악마(Māra)가 어떻게 출가이후에 자신을 괴롭히고 보리수 아래서 ‘이 자가 나의 권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라고 근심에 가득 차 있는가, 그리고 악마의 딸들이 그녀의 아버지를 위로하러 와서는, 젊거나 늙은 여인으로 변하며 자신을 유혹했든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 결과 바라문과 그의 아내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성취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악마의 딸들 – 땅하(Taṇhā : 갈애), 아라띠(Arati : 불만), 라가(Ragā : 탐욕) -을 보고 성적인 교섭에 나는 욕망이 없네. 똥과 오줌으로 가득 찬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것을 발로도 접촉하기 싫다.’라고 시를 읊었다. 그러자 마간디야는 자신을 똥과 오줌으로 가득 찬 것으로 묘사한 것에 불만을 품고 부처님을 향해 증오를 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숙부인 쭐라 마간디야에게 그녀를 맡기고 출가하여 거룩한 님이 되었다.
671) rattassa hi ukkutiṭaṁ padaṁ bhave ǀ duṭṭhassa hoti anukaḍḍhitaṁ padaṁ ǀ mūlhassa hoti sahasanupīḷitaṁ ǀ vivaṭṭacchadassa idamīdisaṁ padan’ti ǁ Prj. Ⅱ. 544; DhpA. I. 201 참조.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만곡이 생겨난 것’은 족적의 가운데 부분이 땅에 닿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욕망을 여읜 자의 족적’은 부처님의 족적을 말하는데, 여기서 ‘여여하다’는 것은 땅에 닿는 부분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을 지닌 자는 혼란되 자태를 지닌다. ‘앉아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방식이다. 그리고 ‘누워 있는 것’은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는 평평한 침상을 마련하고 천천히 누워서 사지와 지체를 잘 모으고 편안한 자태로 눕고, 일어날 때는 급히 일어나지 않고 살피는 듯 천천히 응답한다.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는 서둘러서 대충 침상을 마련하고 몸을 던지고 인상을 찌푸리고 눕고, 일어날 때는 급히 일어나 화난 듯이 응답한다.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는 비뚤어진 침상을 마련하고 몸을 흩뜨리고 대부분 얼굴을 아래로 하고 눕고, 일어날 때는 ‘흠’하고 소리를 내면서 굼뜨게 일어난다.
90. 그러나 신앙적 성향을 지닌 자 등은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와 유사하므로 그들의 위의 자세도 그와 같다. 이와 같이 위의 자세에 따라서 성향을 판별해야 한다.
91. 2) [일의 관점에서] ‘일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청소 등의 일에서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는 빗자루를 잘 붙잡고 성급하지 않게 모래를 흩뿌리지 않고 씬두바라672) 꽃을 뿌리는 것처럼 잘 골고로 청소한다.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는 빗자루를 꽉 붙잡고 성급하게 양쪽으로 모래를 흩뿌리고 거친 소리를 내면서 불결하고 고르제 않게 청소한다.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는 느슨하게 빗자루를 붙잡고 뒤척이며 흩어지게 하면서 불결하고 고르지 않게 청소한다.
92.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는 청소하는 일처럼 옷은 세탁하고 염색하는 등에서도 모든 일에서 세밀하고 우아하고 고르고 신중하게 일을 한다.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는 거칠고 완고하고 고르지 않게 일을 한다.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는 세밀하지 않고, 혼란스럽고, 고르지 않고,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106] 일을 한다.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는 옷을 입는 것도 너무 꽉 조이거나 느슨하기 않고 편안하고 원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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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 sinduvāra : 씬디바라(sindhavāra), 씬두바리까(sinduvārikā), 씬두바리따(sinduvārita)라고도 하며 나무의 일종으로 학명은 Vitex negundo이다.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는 아주 거칠어서 원만하지 않다.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는 느슨하고 혼란스럽다. 신앙적 성향을 지닌 자 등에 대해서도 이들과 유사하므로 이들에 준해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일에 따라 성향들을 판별할 수 있다.
93. 3) [먹는 것의 관점에서] ‘먹는 것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는 기름기 있고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데, 먹으면서 너무 크지 않게 둥글게 한 모금을 만들어 맛을 음미하며 성급하지 않게 먹으며, 어떠한 것이든 맛없는 것을 얻으면, 불쾌해 한다.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는 생겨남이 미결정적인 선호가 있는데, 먹으면서 둥글지 않고 조금 한 모금을 만들어 먹을 때 흘리면서 입가에 묻히고 마음이 흩어져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먹는다. 신앙적 성향을 지닌 자 등에 대해서도 이드로가 유사하므로 이들에 준해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먹는 것에 따라 성향들을 판별할 수 있다.
94. 4) [보는 것의 관점에서] ‘보는 것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형상을 보면 놀란 것처럼 오래 쳐다보고, 작은 장점이라도 붙잡고, 허물이 있어도 취하지 않으며, 떠날 때도 떠나고 싶지 않은 듯이 아쉬운 듯 떠난다.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상을 보면 권태로운 형상처럼 오래 쳐다보지 않고, 작은 허물이라도 붙잡고, 장점이 있어도 취하지 않으며, 떠날 때도 떠나고 싶은 듯이 아쉬워하는 것 없이 떠난다.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는 어떠한 것이든 형상을 보면 남을 따르는데, 남이 비난하는 것을 들으면 비난하고, 남이 칭찬하는 것을 들으면 칭찬하지만, 스스로 무지하여서 관심이 없는 까닭에 평정하다. 소리를 듣는 것 등에도 이러한 방식이 적용될 수 있다. 신앙적 성향을 지닌 자 등에
대해서도 이들과 유사하므로 이들에 준해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보는 것 등에 따라 성향들을 판별할 수 있다.
95. 5) [사실의 일어남의 관점에서] ‘사실의 일어남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는 환술 기만 자만 악욕 대욕 불만 음탕 허영 등과 같은 사실들이 자주 일어난다.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는 [107] 성냄 원한 위선 잔인 질투 간탐 등과 같은 사실이 자주 일어난다.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는 해태혼침흥분회한의심완고고집 등과 같은 사실이 자주 일어난다. 신앙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는 관대한 것, 고귀한 님의 친견을 바라는 것, 바른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것, 자주 희열을 느끼는 것, 솔직한 것, 정직한 것, 신뢰할 만한 경우에 청정한 믿음을 갖는 것 등과 같은 사실이 자주 일어난다. 지성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는 상냥한 말을 하는 것, 우정어린 성품을 지닌 것, 식사에 적량을 아는 것,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니는 것, 깨어있음에 전념하는 것, 외경을 일으켜야 할 것을 외경하는 것, 외경을 지닌 자로서 이치에 맞게 정근하는 것 등과 같은 사실이 자주 일어난다. 사유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는 말이 많은 것, 대중을 좋아하는 것, 착하고 건전한 것에 노력을 기울임을 즐기지 않는 것, 일을 끝마치지 못하는 것, 밤에 연기를 내고 낮에 불태우는 것,673) 여기저기로 달려가는 것 등과 같은 사실이 자주 일어난다. 이와 같이 사실이 일어나는 것에 따라 성향을 판별할 수 있다.
96. 그러나 이러한 성향에 대한 분석은 그 모든 유형이 경전이나 《앗타까타》에서 전해지 것은 아니다. 단지 궤범사가 견해에 따라서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통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에 대하여 설한 위의 자세를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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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 rattiṁ dhūmāyanā, divā pajjalanā : MN. I. 44 : ‘수행승이여, 낮에 한 일에 대해 밤에 사유와 숙고를 하는 것을 밤에 연기를 내뿜는 것이라고 한다. 수행승이여, 밤에 사유와 숙고를 한 뒤에 낮에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일에 종사하는 것을 일러 낮에 불타오르는것이라고 한다,’
불방일하게 정진하면서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혼합적 성향을 지녔다면 두드러진 특징의 위의 자세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앗타까타》에서 성향에 대한 분석으로 설한 것은 정통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타자의 마음을 읽는 앎을 얻은 궤범사는 성향을 알아 명상주제를 설할 수 있다. 다른 자들은 그의 학인들에게 물어야 한다.”라고674) 설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 대하여 타자의 마음을 읽는 앎을 통해서 또는 질문을 통해서 “이 사람은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이다. 이 사람은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 등 가운데 어떤 성향을 지닌 자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97.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것이 적합한가?’라고 한다면, 그 가운데 처소는 이와 같다.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의 처소는 씻지 않는 문지방, 땅위의 지대, 천연적 산굴, 풀로 엮은 암자, 나뭇잎으로 만든 암자 등 가운데 어떠한 것이든 흙먼지가 덮이고, 박쥐가 가득하고, 헐고 붕괴되고, 너무 높거나 너무 낮고, 불모지이고, 위험하고, 더럽고, 울퉁불통한 길이 있고, 그곳의 침상도 의자도 [108] 빈대가 가득하고, 유형도 추하고, 색깔도 추하고, 보는 자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는 그러한 곳이 적합하다. 의복은 단이 끊어지고, 너덜거리는 실오라기가 흩어진 그물과자와 같이 남루하고, 마포처럼 촉감이 좋아야하고, 더럽고, 무겁고, 입기 힘든 옷이 적합하다. 발우도 새깔이 추하고,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거나, 못이나 마디가 상한 철로 만들어진 것으로 무겁고 찌그러지고 해골 모양처럼 혐오스러운 것이 적합하다. 탁발하러 가는 길도 마음에 들지 않고, 가까이에 마을이 없고, 울퉁불퉁한 곳이 적합하다. 탁발가는 마을도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처럼 다니고, 단 한 가정에서조차 탁발을 얻지 못하고 나오면서 ‘존자여, 오십시오.’라고 휴게소에 들게 해서 죽과 음식을 주고 가면서 소를 우사에 넣고 무심코 가버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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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4) cetopariyañāṇassa lābhī ācariyo. cariyaṁ ñatvā kammaṭṭhānaṁ kathessati, itarenaantevāsiko pacchitabbo’ti
갈 수 있는 그러한 곳이 적합하다. 시중드는 사람도 하인이든 일꾼이든 추하고 용모가 악하고 더러운 옷을 입고 악취를 풍기고 혐오스러운 자로서 무례하게 죽이나 음식을 던지듯, 시중을 드는 그러한 사람이 적합하다. 죽과 부드러운 음식이나 단단한 음식은 거칠고 추하고 기장과 곡식과 쌀겨 등으로 만든 것, 썩은 버터우유, 산죽, 오래된 소채수프, 어떠한 것이든 단지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면 적당하다. 위의 자세는 서 있거나 걷는 것이 적합하다. 명상대상은 푸른 색 등의 색깔의 두루채움이라면 어떠한 색깔이든 깨끗하지 않은 것이 적합하다. 이러한 것은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 적합하다.
98.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의 처소는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고 그늘과 물을 갖추고, 잘 설치된 벽과 기둥과 계단이 있고, 잘 갖추어진 장식세공과 등(籐)세공이 있고, 여러 가지 그림이 찬연하고, 평평하고 매끄럽고 부드러운 바닥이 있고, 하느님의 궁전처럼 갖가지 화만과 갖가지 채색포의 천개(天蓋)가 장엄되어 있고, 잘 정리되고 깨끗하고 마음에 들게 배치된 침상과 의자가 있고, 여기저기 방향을 위해 흩뿌려진 꽃들의 향기로 아주 향기롭고, 보기만 해도 희열과 환희가 생겨나는 그러한 곳이 적합하다.
99. 그이 처소로 가는 길도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평탄하고, 장엄된 곳이 적합하다. 처소의 비품은 [109] 이곳에서는 곤충과 빈대와 뱀과 쥐들이 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분이 없이 단, 하나의 침상과 의자로도 적합하다. 의복은 그에게는 지나포, 쏘마라포,675) 비단, 면포, 섬세한 마포 등의 우아한 것, 그러한 것으로 만든 홑옷이나 겹옷으로 가볍고 수행자에게 알맞게 잘 물들인 청정한 색깔의 옷이 적합하다. 발우는 물거품처럼 잘 모양지어진고, 보주처럼 잘 연마되고, 흠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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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 cīnapaṭṭasamārapaṭṭa : 지나포(支那布 : cīnapaṭṭa)는 중국비단을 말하고 쏘마라포(somārapaṭṭa)는 어떠한 천인지 불분명하다.
수행자에게 알맞게 아주 청정한 색깔의 철발우가 적합하다. 탁발하러 가는 길은 위협이 없고 평탄하고 마음에 들고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이 좋다. 탁발하러 가는 마을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이제 존자께서 오시겠지.’라고 생각하며 물을 뿌리고 청소한 곳에 자리를 마련하고 마중한 뒤에 발우를 받아들고 집안으로 인도하여 마련된 자리에 앉히고 정중하게 손수 시중드는 그러한 곳이 적합하다.
100. 그리고 그에게 시중드는 자는 아름답고 품위있고, 잘 목욕하고, 잘 기름 바르고, 연향이나 꽃향의 방향이 나게 하고, 더러움이 없이 깨끗하고 쾌적한 여러 가지 치장을 하고 장식을 하고, 공손하게 일하는 그러한 자가 적합하다. 죽이나 부드럽고 단단한 음식은 색깔과 향기와 맛을 갖추고, 자양이 풍부하고, 마음에 들고, 일체의 유형이 탁월하고, 원하는 만큼 있는 것이 적합하다. 그의 위의 자세는 눕는 것이나 앉는 것이 적합하다. 명상대상은 푸른 색등에 대하여 색깔의 두루채움 가운데 어떠한 것이든 아주 청정한 색깔이 적합하다. 이러한 것이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 적합한 것이다.
101.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의 처소는 사방으로 향해서 막힌 곳이 없고, 그곳에 앉으면 사방이 열린 것처럼 보이는 곳이 적합하다. 위의 자세 가운데서는 경행이 적합하다. 그의 명상대상은 체의 구멍만하거나 찻잔만한 자은 것은 적합하지 않다. 협애한 공간에서는 마음이 점점 우치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크고 광대한 두루채움676)이 적합하다. 나머지는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에 대해 이미 언급한 것이 적합하다. 이러한 것이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 적합한 것이다.
102. 신앙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는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에 대하여 이미 설한 방법이 적합하다. 그의 명상대상에 대해서는 새김의 토대가 적당하다. 지성적 성향을 지닌 자는 처소 등에 관해서는 부적합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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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 kasiṇa : 열 가지 두루채움(十遍處 : dasakasiṇāyatana)의 수행에 관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Vism. 110/3 : 105 이하를 참조하라.
사유적 성향을 지닌 자는 처소가 사방으로 확 트이고, 그곳에 앉으면 [110] 아름다운 정원이나 숲이나 연못이 보이고, 마을이나 도시나 지방이 이어져 있고, 푸르게 빛나는 산들이 보이는 곳은 적합하지 않다. 그러한 것이 그의 사유가 달려가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핫타꿋치빱바라677) 협곡의 마힌다구하678) 동혈과 같은 깊숙하여 동굴입구가 숲으로 가려진 처소가 적합하다. 그의 명상대상도 광대한 것은 적합하지 않다. 그러한 것은 사유가 달려가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것은 적합하다. 나머지는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 적합한 것이다. 이러한 것이 ‘자신의 성향에 적합한 것’679)이라는 이것에 대하여 전해온 성향들의 종류, 원인, 판별, 적합을 구별하여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성향에 따른 명상주제는 모든 유형에서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어서 등장하는 논의의 주제에 대한 구절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자명해질 것이다.
[마흔 가지 명상주제]
103. (4) [마흔 가지 명상주제] 그러므로 ‘마흔 가지 명상주제680) 가운데 어떤 것을 들고’681)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① 명칭의 해석의 관점에서, ② 근접삼매와 근본삼매를 가져오는 것의 관점에서, ③ 선정의 구별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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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7) Hatthikucchipabbhāra : 한역에서는 상복산굴(象服山窟)이라고 하며, 쭐라방싸(Cūḷavaṁsa)에서는 상복사(象服寺)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마힌다구하(Mahansaguhā)라는 동혈이 있는 깊은 계곡에 둘러싸인 협곡이다.
678) Mahindaguhā : 스리랑카의 쩨따야기리비하라(Cetiyagirivihāra) 사원에 주석하는 마힌다(Mahinsa) 장로의 동굴이었다.
679) attano cariyānukūlan’ti : Vism. 101/2 : 74
680) cattālīsa kammaṭṭhānāni : 『청정도론』에는 사십업처(四十業處)인데 비해, 『해탈도론』은 삼십팔행처(三十八行處)라고 되어 있다. 그 숫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십편처(十遍處)의 최후의 둘을 광명편처(光明遍處), 허공편처(虛空遍處)를 이무색정(二無色定)에 포함시키느냐 별도로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Ats. 168에는 삼십팔업처(三十八業處)라고 되어 있다.
681) cattālīsāya kammaṭṭhānesu aññataraṁ kammaṭṭhānaṁ gahetvāti : Vism. 89/3 : 28
④ 초월의 관점에서, ⑤ 확장과 불확장의 관점에서, ⑥ 대상의 관점에서, ⑦ 세계의 관점에서, ⑧ 파악의 관점에서, ⑨ 조건의 관점에서, ⑩ 성향에 적합한가의 관점에서, 이와 같이 열 가지 유형에 따라 곧, 명상주제에 대한 판별을 해야 한다.
104. 1. [명칭의 관점에서] ‘명칭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마흔 가지 명상주제 가운데 언급된 것으로서 거기에는 마흔 가지 명상주제 곧, ① 열가지 두루채움, ② 열 가지 부정, ③ 열 가지 새김, ④ 네 가지 하느님의 삶, ⑤ 네 가지 비물질계, ⑥ 수렴적 지각, ⑦ 분석적 규명682)이 있다.
105. 1) 거기서 땅의 두루채움, 물의 두루채움, 불의 두루채움, 바람의 두루채움, 푸름의 두루채움, 노랑의 두루채움, 붉음의 두루채움, 흼의 두루채움, 빛의 두루채움, 한정공간의 두루채움이 있는데, 이러한 것이 열 가지 두루채움이다.683) 2) 부풀어 오른 시체의 지각, 푸른 어혈을 지닌 시체의 지각, 고름이 가득 찬 시체의 지각, 단편으로 절단 된 시체의 지각, 동물이 뜯고 남은 시체의 지각, 사지가 흩어진 시체의 지각, 난도되어 갈라진 시체의 지각, 피가 흐르는 시체의 지각, 벌레가 우글거리는 시체의 지각, 해골이 드러난 시체의 지각이 있는데, 이러한 것이 열 가지 부정(不淨)이다.684) 3) 부처님에 대한 새김, 가르침에 대한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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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 dasa kasiṇā, dasa asubhā, dasa anussatiyo, cattāro brahmavihārā, cattāro āruppā, ekā saññā, ekaṁ vavatthānam‘ ti : 각각 한역에서 일반적으로 십편(十遍), 십부정(十不淨), 십수념(十隨念), 사범주(四梵住), 사무색(四無色), 일상(一想), 일차별(一差別)이라고 한다. 『해탈도론』은 각각 십일체입(十一切入). 십부정상(十不淨想), 십념(十念), 사무량심(四無量心), 이무색(二無色), 일상(一想), 일차별(一差別)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수렴적 지각은 역자가 일상(一想)을, 분석적 규명은 일차별(一差別)을 번역한 것으로 그 이유와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Vism, 110/3 : 105와 그 주석을 참조하라.
683) pathavīkasiṇaṁ, āpokasiṇaṁ, tejokasiṇaṁ, vāyokasiṇaṁ, nīlakasiṇaṁ, pītakasiṇaṁ, lohitakasiṇaṁ, odātakasiṇaṁ, ālokakasiṇaṁ, paricchinnākāsakasiṇanti ime dasa kasiṇā : 한역에서는 지편처(地遍處), 수편처(水遍處), 화편처(火遍處), 풍편처(風遍處), 청편처(靑遍處), 황편처(黃遍處), 적편처(赤遍處), 백편처(白遍處), 광명편처(光明遍處), 허공편처(虛空遍處)의 십편처(十遍處)라고 한다. 마지막에는 공편처(空遍處), 식편처(識遍處)가 대체되기도 한다.
참모임에 대한 새김, 계행에 대한 새김, 보시에 대한 새김, 천신에 대한 새김, 죽음에 대한 새김, 신체에 대한 새김, 호흡에 대한 새김, 적멸에 대한 새김이 있는데, 이러한 것이 열 가지 새김이다.685)
4) 자애·연민·기쁨·평정이 있는데, [111] 이러한 것이 네 가지 하느님의 삶이다.686) 5) 무한공간의 세계, 무한의식의 세계, 아무 것도 없는 세계,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가 있는데, 이러한 것이 네 가지 비물질계이다.687) 6) 자양에 대한 혐오의 지각은 수렴적 지각이다.688) 7) 네 가지 세계에 대한 분석은 분석적 규명이다.689) 이와 같이 명칭의 해석에서 명상주제를 판별해야 한다.
106. 2. [근접삼매와 근본삼매를 가져오는 것의 관점에서] ‘근접삼매와 근본삼매를 가져오는 것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신체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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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4) uddhumātakaṁ, vinīlakaṁ, vipubbakaṁ, vicchiddakaṁ, vikkhāyitakaṁ, vikkhittakaṁ, hatavikkhittakaṁ, lohitakaṁ, puḷuvakaṁ, aṭṭhikan’ti ime dasa asubhā :한역에서는 각각 팽창상(膨脹想), 청어상(靑瘀想), 농란상(膿爛想), 단괴상(斷壞想), 식잔상(食殘想), 산란상(散亂想), 참작이산상(斬斫離散想), 혈도상(血塗想), 충취상(蟲聚想), 해골상(骸骨想)의 십부정(十不淨)이라고 한다. 상세한 것은 Vism. 178/6 : 1 이하를 참조하라.
685) buddhānussati, dhammānussati, saṁghānussati, sīlānussati, cāgānussati, devatānussati, maraṇānussati, kāyagatāsati, ānāpānassati, upasamānussatī’ti imā dasa anussatiyo : 한역에서는 불수념(佛隨念), 법수념(法隨念), 승수념(僧隨念), 계수념(戒隨念), 사수념(捨隨念), 천수념(天隨念), 사수념(死隨念), 신지념(身至念), 안반념(安般念), 적지수념(寂止隨念)의 십수념(十隨念)이라고 한다. 상세한 것은 Vism. 197/8 : 1 이하를 참조하라.
686) mettā, karuṇā, muditā, upekkhā’ti ime cattāro brahmavihārā : 한역에서는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사범주(四梵住)라고 한다. 상세한 것은 VIsm. 295/9 : 1 이하를 보라.
687) ākāsānañcāyatanaṁ, viññāṇañcāyatanam, ākiñcaññāyatanam, nevasaññānasaññāyatananti ime cattāro āruppā : 한역에서는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4무색계(四無色界)라고 한다. 상세한 것은 Vism. 326/10 : 1 이하를 보라.
688) āhāre paṭikūlasaññā ekā saññā : 한역에서는 식염상(食厭想)을 일상(一想)이라고 한다. 자양에 대한 혐오의 지각이 ‘하나의 지각’이라는 것인데, 개념적으로 애매하므로 역자는 ‘자양에 대한 혐오의 지각’은 ‘수렴적 지각’이라고 번역한다.
689) catudhātuvatthānaṁ ekaṁ vavatthānan’ti : 한역에서는 ‘4계차별(四界差別)이 1차별(一差別)’이라고 한다. ‘네 가지 세계에 대한 분석은 하나의 차별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난해하므로, 역자는 ‘네 가지 세계에 대한 분석은 분석적 규명이다.’라고 번역한다.
새김과 호흡에 대한 새김을 제외하고 여덟 가지 새김과 자양에 대한 혐오의 지각과 네 가지 세계에 대한 분석의 열 가지 명상주제는 근접삼매를 가져오고 나머지는 근본삼매를 가져온다. 이와 같이 근접삼매와 근본삼매를 가져오는 것에 따라서 판별해야 한다.
107. 3. [선정의 구별의 관점] ‘선정의 구별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근본삼매를 가져오는 것들 가운데690) 호흡에 대한 새김과 열 가지 두루채움은 모두 네 선정691)에 속한다. 신체에 대한 새김과 함께 열 가지 부정(不淨)은 첫 번째 선정에 속한다. 앞의 세 가지 하느님의 삶은 선행하는 세 선정은 속한다. 네 번째 하느님의 삶과 네 가지 비 물질계는 네 번째 선정에 속한다.692) 이와 같이 선정의 종류에 따라 판별해야 한다.
108. 4. [초월의 관점에서] ‘초월의 관점’이란693) 이와 같다. 두 가지 초월이 있는데, 선정고리에 따른 초월과 명상대상에 따른 초월이 있다.694) 그 가운데 선행하는 세 선정과 네 선정을 모두 가져오는 명상주제들에는695) 선정고리의 초월이 있다. 사유와 숙고 등의 선정고리를 초월하여 동일한 명상대상에 대하여 두 번째 선정 등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하느님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도 자애 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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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 appanāvahesu : 근접삼매를 가져오는 열 가지 명상주제를 제외한 서른 가지 명상주제 가운데에서 라는 뜻이다.
691) catukkajjhānikā : 첫 번째 선정에서 네 번째 선정까지의 네 가지 선정(四種禪)을 모두 말한다.
692) catutthabrahmavihāro cattāro ca āruppā catutthajjhānikā’ ti : 네 가지 선정(四種禪)으로만 분류할 경우에 비물질계의 네 가지 선정은 미세한 물질계의 네 번째 선정(第四禪)에 포함된다.
693) samatikkamato : 일반적 한역에서 초월(超越)을 해탈도론은 ‘이정월(以正越)’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694) aṅgasamatikkamo ca ārammaṇasamatikkamo ca : 한역에서의 지초월(支超越)과 소연초월(所緣超越)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월색(越色), 월사(越事)라고 번역하고 있다.
695) tikacatukkajjhānikesu kammaṭṭhānesu : 네 가지 선정(四種禪)의 선행하는 세 선정에 속하는 것[첫 세 가지 하느님의 삶]과 네 가지 선정 모두에 속하는 것[호흡의 새김과 열 가지 두루채움]을 말한다.
바로 그러한 명상대상에서 만족을 초월하여 도달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네 가지 비물질계에는 명상대상의 초월이 있다. 앞의 아홉 가지 두루채움에서 어느 하나를 초월하여 무한공간의 세계 등에 도달해야 하는 까닭이다. 나머지의 경우에는 초월은 없다. 이와 같이 초월에 따라 명상주제를 판별해야 한다.
109. 5. [확장과 불확장의 관점에서] ‘확장과 불확장의 관점’이란656) 이와 같다. 이러한 마흔 가지 명상주제 가운데 오직 열 가지 두루채움만이 확장해야 하는 것이다. 두루채움을 통해 공간을 확장한 만큼, 그 범위 안에서 하늘귀로697)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하늘눈으로698) 형상을 볼 수 있고 마음으로 다른 뭇삶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까닭이다.
110. 그러나 신체에 대한 새김과 부정(不淨)은 확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이익이 없는 때문이다. 그것들의 공간이 한정되는 것은 수행방법에서699) 밝혀질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확장되면, [112] 시체더미만 확장되지 어떠한 이익도 확장되지 않는다. 「쏘빠까700)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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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6) vaḍḍhanāvaḍḍhanato : 한역은 증부증(增不增)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영증장(令增長)이라고 되어 있다.
697) dibbāya sotadhātuyā : 한역은 천이계(天耳界)로 상세한 것은 Vism. 373/12 : 2 이하를 참조하라.
698) dibbena cakkhunā : 한역의 천안(天眼)으로 상세한 것은 Vism. 373/12 : 2 이하를 참조하라.
699) okāsena paricchannatā bhāvanānaye : Vism. 128/4 : 40-41, 139/4 : 79, 249/8 : 83, 264/8 : 138을 참조하라.
700) Sopāka : 확실하지 않지만, Thag. 33에 등장하는 묘지기의 아들로 태어난 장로 쏘빠까일 수 있다. 그는 고따마 부처님께서 탄생할 물렵, 싸밧티 시의 한 불운한 여인의 태에 입태했다. 어머니가 열 달 동안이나 태를 돌보았고, 성숙한 태에서 출산할 때가 되었으나 아기를 낳지 못하자, 혼절하여 오랜 시간 죽은 자처럼 누어 있었다. 친지들이 ‘그녀는 죽었다.’라고 생각하여 묘지에 가져가, 장작을 쌓고 불을 지피려했다. 그러나 천신들의 싸움으로 비바람이 일어나 불을 지피지 못하고 그 곳을 떠났다. 아이는 최후의 삶이었기 때문에
서701) 설한 것과 같다. 거기에 “세존이시여, 형상의 지각은 명료하지만, 해골의 지각은 명료하지 않습니다.”라는702) 말이 있는데, 그 경우에 형상의 지각은 인상의 확장의 의미에서 명료한 것이고, 해골의 지각은 인상의 불확장의 의미에서 불명료한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
111. 그런데 “오직 해골의 지각으로 이 대지를 덮었다.”라고703)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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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의 힘으로 어머니의 태에서 건강하게 출생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죽었다. 천신은 그를 데리고 인간의 모습을 하고 묘지기의 집에 살게 하고, 며칠 동안 천상의 음식으로 키웠다. 그 후 묘지기가 그를 자신의 아들로 삼아 키웠다. 그는 성장하면서 묘지기의 아들 쑵삐야(Suppiya)와 함께 놀았다. 그는 묘지에서 태어나 성장했기 땜누에 ‘쏘빠까’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세존께서 새벽녘에 앎의 그물을 펼쳐서 제도해야 할 반연자들을 살피다가 앎의 그물 안에 들어온 일곱 살 된 그를 보고, 묘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이는 예전의 인연을 동기로 청정한 믿음의 마음을 내어 스승에게 다가가서 예경하고 서 있었다. 스승은 가르침을 설했고 그는 가르침을 듣고는 출가를 요청했다. ‘아버지가 출가를 허락했는가?’라고 말하자 아버지를 스승 앞에 데려왔다. 그의 아버지는 스승에게 다가와 예경하고 ‘세존이시여, 이 아이를 출가시켜 주십시오.’라고 허락했다. 스승은 출가 시키고 자애수행을 닦으라고 그를 격려했다. 그는 자애의 명상주제를 잡아 묘지에서 지내다 머지않아 자애에 의한 선정을 발전시켜 단계적인 선정을 닦아 통찰을 계발하여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Ap. Ⅱ. 396) 거룩한 님이 되어 그는 다른 묘지에 사는 수행승들에게 자애의 수행법을 가르치면서 이 시(Thag. 33)을 읊었다.
701) Sopākapañhābyakaraṇe : Stn. 1119 등의 주석서에서 언급되지만, 그 출처가 불명확하다.
702) vibhūtā bhagavā rupasaññā avibhūtā aṭṭhikasaññā’ti : 「쏘빠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경에서 인용된 것이지만 출처불명확하다.
703) kevalaṁ aṭṭhisaññāya, apharī pathaviṁ iman’ti : Thag. 18 이 시는 원래 하늘 사람이 존자 씽갈라까삐따(Siṅgālakapitā)에 대하여 읊은 것이다. ThagA. Ⅰ. 74에 따르면, 그는 지금부터 94겁 전에, 싸따랑씬(Sataraṁain)이라고 하는 홀로 깨달은 님께서 탁발하며 유행하는 것을 보고 청정한 믿음의 마음을 내어 예경하고 손에 있든 야자열매를 보시했다. 그 공덕으로 천상계에 태어나 계속해서 공덕을 쌓고 좋은 곳으로 윤회하다가 깟싸빠부처님 당시에 인간의 태에서 태어나 가름침에 믿음을 내어 출가하여 싸밧티 시의 한 가정에 태어나 청년이 되어 젊은 여자와 결혼한 뒤에 한 아들을 얻어 ‘씽갈라까’라고 이름지었다. 그래서 그를 쌍갈라까삐따-씽갈라까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말년에 재가의 속박을 끊고 가르침에 출가하였다. 세존께서는 그의 성향을 간파하고 그에게 해골에 대한 명상(白骨觀 : aṭṭhikasaññā)이라는 명상주제를 주었다. 그는 그것을 붙잡고 박가 국의 쑹쑤마라기리(Suṁsumāragiri) 시에 있는 베싸깔라바나 숲에서 지냈다. 그대 숲에 거주하던 하늘사람이 ‘용맹정진하기 위해 수행력이 머지 않아 손 안에 잡히리라.’라고 그 의취를 한정적 지혜로 설명하면서 이 시(Thag. 18)를 읊었다. 장로는 이 시를 듣고 ‘이 하늘사람은 나에게 정진이 생겨나도록 이렇게 읊었다.’라고 생각하고 통찰수행을 하여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Ap. Ⅰ. 249 참조)Ⅰ
것은 그것을 얻은 자에게 나타난 유형에 따라 말한 것이다. 마치 아쇼카 왕 시대에 가릉빈가704) 새가 사방이 거울로 된 벽 가운데에서 자신의 영상을 보고 모든 방향에서 가릉빈가를 지각하고, 감미로운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장로도 해골의 지각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방향에서 나타난 인상을 보면서 “모든 대지가 해골로 가득 찼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12. 만약 그렇다면, “부정(不淨)을 통해 생겨난 선정은 무량한 명상 대상을 가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모순되지 않는다. 어떤 자는 커다란 부풀어 오른 시체나 커다란 해골이 드러난 시체에서 인상을 취한다. 어떤 자는 작은 부풀어 오른 시체나 작은 해골이 드러난 시체에서 인상을 취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어떤 자에게는 작은 명상대상을 지닌 선정이 있고, 이떤 자에게는 무량한 명상대상을 지닌 선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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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4) karavīka : 한역의 가릉빈가(迦陵頻伽)이다. 인도의 뻐꾸기의 이름이다. 그 목소리가 듣기에 좋고 청아하다. Pps. Ⅲ. 382-383에 그 가릉빈가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 가릉빈가 새가 부리로 달콤한 맛을 내는 망고를 부리로 쪼아 떨어지는 즙을 맛보고 날개를 퍼덕거리며 노래를 시작하자. 동물들이 미치듯이 도약했다. 목장에서 풀을 뜯고 있는 네발 달린 동물들이 입에 잔디를 물고 소리를 들었다. 작은 동물을 사냥하는 맹수들은 한 발을 들어 올린 채 멈추어 섰다. 쫓기던 동물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잃고 발을 멈추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날개를 펼쳤다. 물속의 물고기는 지느러미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다. 가릉빈가의 노래가 너무 아름다웠다. 야쇼카의 왕비 아싼다밋따(Asandhamittā)가 스님들에게 물었다. ‘존자들이여, 부처님처럼 소리내는 것이 있습니까?’ ‘가릉빈가입니다.’ ‘존자들이여, 그 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히말라야입니다.’ 그녀는 왕에게 말하였다. ‘폐하, 가릉빈가의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왕은 황금새장을 파견하면서 ‘가릉빈가를 오게 해서 새장 안에 앉게 하라.’라고 명령했다. 그 새장은 여행하다가 가릉빈가 앞에서 멈추었다. 가릉빈가는 ‘새장이 왕의 명령에 따라 왔다. 가지 않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며 들어갔다. 새장이 돌아와서 왕 앞에 서서 멈췄다. 그러나 가릉빈가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릉빈가가 소리를 내도록 할 수 없었다. 왕이 가릉빈가에게 ‘언제 소리를 내느냐?’라고 묻자, 가릉빈가는 ‘친척들을 보고 있을 때’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가릉빈가를 반사거울로 둘러쌌다. 그 자신이 반사된 영상을 보고 친척들이라고 생각하고 날개를 퍼덕이며 수정으로 만든 나팔을 부는 것처럼 승묘한 목소리로 울었다. 그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미친 듯이 도약했다. 아산다밋따는 ‘이 뭇삶의 소리가 이렇게 미묘한데, 전지의 영광에 도달한 세존의 말씀은 얼마나 아름다울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줄어들지 않는 행복을 누리며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
그것을 확장하는데 위험을 보지 못하면서 확장하는 자가 있는데, 그에 관하여 ‘무량한 명상대상을 가진 자’라고705) 설했다. 그러나 이익이 없기 때문에 확장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113. 이러한 것들과 같이 나머지들도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가운데 호흡의 인상을 확장시키는 자에게는 바람의 더미만 확장되고 공간은 한정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위험이 있고 공간이 한정되기 때문에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삶들은 뭇삶을 명상대상으로 삼는다. 그것들의 인상을 확장시키면 뭇삶의 크기만 확장할 수 있을 뿐, 그것으로 인해 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도 확장해서는 안 된다.
114. 그런데 ‘자애의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고’라는706) 등으로 설한 것은 그것의 포괄을 통해 설한 것이다. ‘한 처소, 두 처소 등으로 차례로 한 방향의 뭇삶을 파악하여, 익히면서 한 방향을 가득 채우고’라고 한 것이다. 인상을 [113] 확장하면서가 아니다. 더구나 거기에는 확장해야 할 대응인상707)도 없다. 또한 그 작거나 무량한 명상대상도 여기서는 그러한 포괄의 방식을 통해서 알려질 수 있다.
115. 비물질계의 명상대상 가운데 허공은 두루채움이 제거된 것일뿐인 까닭이다.708) 그것은 두루채움의 제거를 통해서만 정신활동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확장해야 할 어떠한 것도 없다. 의식은 고유한 본성의 상태를 지닌 것이고,709) 고유한 본성의 상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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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5) appamāṇārammaṇan’ti : Dhs. 55
706) mettāsahagatena cetasā ekaṁ disaṁ pharitvā’ti : Vibh. 272; DN. Ⅰ. 250 등을 참조하라.
707) paṭibhāganimitta : 한역에서 사상(似相)이라고 한다. 『해탈도론』에는 분별(分別)이라고 되어 있다.
708) ākāsaṁ kasiṇigghāṭimattā : 무한공간의 세계의 명상대상인 허공은 두루채움이 제거된 까닭에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709) viññāṇaṁ sabhāvadhammattā : 무한의식의 세계의 명상대상인 의식은 고유한 본성의 상태(第一義的存在物)이기 때문에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두루채움(十遍處)의 인상은 고유한 본성(自性)의 상태가 아니고 가설(假設)된 것이므로 증대시킬
지닌 것은 확장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의식의 배제도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 뿐인 까닭이다.710)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세계의 명상대상은 고유한 본성을 지닌 까닭에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
116. 나머지 것들은 인상을 여읜 까닭이다.711) 대응인상은 확장될 수 있으나, 부처님에 대한 새김 등은 결코 대응인상을 지닌 명상대상이 아니다.712) 그러므로 그것은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확장과 불확장에 따라서 판별해야 한다.
117. 6. [명상대상의 관점에서] ‘명상대상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이러한 마흔 가지 명상주제 가운데 열 가지 두루채움, 열 가지 부정, 호흡에 대한 새김, 신체에 대한 새김의 스물 두 가지는 대응인상을 명상대상으로 가진다. 나머지는 대응인상을 갖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열 가지 새김 가운데 호흡에 대한 새김과 신체에 대한 새김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 새김, 자양에 대한 혐오의 지각, 네 가지 세계의 분석, 무한의식의 세계,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의 이러한 열두 가지는 고유한 본성의 상태를 명상대상으로 삼는 것들이다. 열 가지 두루채움, 열 가지 부정, 호흡에 대한 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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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뻬 마웅 띤(PPtin. 132)은 ‘고유한 본성(its intrinsic Nature)’, 니야나띨로까(WRtil. 135)는 ‘실제적 상태(ein realer Zustand)’라고 번역했고, 미즈노코겐(남청1권225)은 한역에 따라 ‘자성법(自性法)’, 니야나몰리(PPmol. 107)는 ‘개체적 본질을 구성하는 상태(astate consisting in individual essence)’, 크리스쫑 마스(CPmaës. 142)는 ‘고유한 본성(L’état de une Natur intrinsèque)’이라고 번역했다. 테라바다에 본질주의적 관점의 도입으로 오해될 수 있는 이 ‘고유한 본성(自性)’이라는 용어를 니야나띨로까만이 ‘실제적 상태’라고 번역한 것은 초기불교의 철학적 이해에서 그의 신중한 탁월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710) viññāṇāpagamo viññāṇassa abhāvamattattā : 아무 것도 없는 세계의 명상대상인 의식의 배제는 의식이 없는 것일 뿐이므로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711) sesāni animittattā : 나머지 부처님에 대한 새김 등의 열 가지 새김은 대응인상을 대상으로 하지 못한다.
712) buddhānussati-ādīnañca neva paṭibhāganimittaṁ ārammaṇaṁ hoti : 부처님에 대한 새김 등은 부처님의 덕성 등을 대상으로 하고 대응인상을 명상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신체에 대한 새김의 스물두 가지는 인상을 명상대상으로 삼는다. 나머지 여섯은 분류될 수 없는 것을 명상대상으로 삼는다.713) 또한 고름이 가득 찬 시체의 지각, 피가 흐르는 시체의 지각, 벌레가 우글거리는 시체의 지각, 호흡에 대한 새김, 물의 두루채움, 불의 두루채움, 바람의 두루채움, 빛의 두루채움에서 태양 등의 빛무리를 명상대상으로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들은 여덟 가지 동적 명상대상이다. 그러나 앞 단계에는 그렇지만, 대응인상은 고정된 것이 된다. 나머지는 부동적 명상대상을 지닌다. 이와 같이 명상대상에 따라서 판별해야 한다.
118. 7. [세계의 관점에서] ‘세계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여기에는 열 가지 부정이 있다. 신체에 대한 새김, 자양에 대한 혐오의 지각의 열두 가지는 천상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열두 가지와 호흡에 대한 새김의 열세 가지는 하느님들의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비 물질곙의 존재에게는 네 가지 비 물질계와 다른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계에서는 모든 것들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세계에 따라서 판별해야 한다.
119. 8. [파악의 관점에서] ‘파악의 관점’이란 [114] 이와 같다. 보는 것과 닿는 것과 듣는 것에 의한 파악을 통해서 명상주제를 판별해야 한다. 그 가운데 바람의 두루채움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홉 가지 두루채움, 열 가지 부정의 이러한 열아홉 가지는 보는 것을 통해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앞 단계에 눈으로 쳐다보고 그들에 대한 인상을 파악하여야 한다. 신체에 대한 새김 가운데 피부-오개조714)를 봄으로써 파악해야 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듣는 것을 통해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것의 명상대상은 보는 것과 듣는 것을 통해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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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 sesāni cha navattabbārammaṇāni : 네 가지 하느님의 삶과 무한공감의 세계와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여섯 가지는 고유한 본성의 상태로도 인상으로도 분류될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는 뜻이다.
714) tacapañcaka : 1. 머리카락(kesa). 2. 몸털(loma), 3. 손발톱(nakha), 4. 이빨(danta), 5. 피부(taco)를 뜻한다.
호흡에 대한 새김은 닿는 것을 통해서, 바람의 두루채움은 보는 것과 닿는 것을 통해서, 나머지 열여덟 가지는 듣는 것을 통해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평정의 하느님의 삶, 네 가지 비물질계의 이러한 것들은 초학자가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715) 나머지 서른다섯 가지는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파악에 따라서 명상주제를 판별해야 한다.
120. 9. [조건의 관점에서] ‘조건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이러한 명상주제들 가운데 허공의 두루해움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홉 가지 두루채움은 비 물질계의 조건이 된다. 열 가지 두루채움은 곧바른 앎의 조건이 되고, 세 가지 하느님의 삶은 네 번째 하느님의 삶의 조건이 되고, 각각 하위의 비 물질계는 각각 상위의 비물질계의 조건이 되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는 소멸의 성취 즉, 멸진정(滅盡定)716)의 조건이 된다. 이 모든 것은 행복한 삶과, 통찰과, 존재의 성취의 조건이 된다.717) 이와 같은 조건에 따라 명상주제를 판별해야 한다.
121. 10. [성향에 적합한 것의 관점에서] ‘성향에 적합한 것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성향에 적합한 것에 따라서 명상주제를 판별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탐욕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는 열 가지 부정과 신체에 대한 새김의 열한 가지 명상주제가 적합하다. 분노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는 네 가지 하느님의 삶, 네 가지 색깔의 두루채움의 여덟 가지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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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 upekkhābrahmavihāro, cattāro ārupāti imāni cetta na dikammikena gahetabbāni : 평정의 하느님의 삶은 미세한 물질계의 네 번째 선정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네 가지 비물질꼐의 선정은 미세한 물질계의 선정을 얻은 후에 도달하는 것으므로 초학자에게 이들 다섯 가지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716) nirodhasamāpatti : 한역에서 멸진정(滅盡定)이라고 하는데, 상세한 것은 Vism 698(23 : 1) 이하를 참조하라.
717) sabbānipi sukhavihãravipassanābhavasampattīnan’ti : 행복한 삶과 통찰에 대해서는 Vism. 371/11 : 120 이하를 참조하라. 존재의 성취란 닦아서 미세한 물질계와 비물질계에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주제가 적합하다.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와 사유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는 한 가지 호흡에 대한 새김의 명상주제가 적합하다. 신앙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는 앞의 여섯 가지 새김이, 지성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는 죽음에 대한 새김, 적멸에 대한 새김, 네 가지 세계에 대한 분석, 자양에 대한 혐오의 지각의 네 가지가 적합하다. 나머지 두루채움과 네 가지 비 물질계는 모든 종류의 성향을 지닌 자에게 적합하다. 또한 두루채움 가운데 어떠한 것이든 작은 것은 사유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 무량한 것은 우치적 성향을 지닌 자에게 적합하다. 이와 같이 성향에 적합한 것에 따라 명상주제에 대하여 판별해야 한다.
122.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대치적(對治的)인 것을 통해서 또한 지극히 도움이 되는 것을 통해서 설한 것이다. 수행에 밝으면, 탐욕 등을 극복하지 않음이 없고 믿음 등을 돕지 않음이 없다. 메기야718)의 경719)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리를 더 닦아야 한다. 1) 탐욕을 제거하기 위해 부정(不淨)을 닦아야 한다. 2) 분노를 제거하기 위해 자애를 닦아야 한다. 3) 사유를 제거하기 위해 [115] 호흡에 대한 새김을 닦아야 한다. 4) ‘내가 있다.’ 자만을 제거하기 위해 무상의 지각을 닦아야 한다.”라고720) 설했다. 그리고 「라훌라721)의 경」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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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 Meghiya : 까삘라밧투 시의 싸끼야 족의 가문에 속했는데, 출가 후에 한 동안 세존의 시자로 있었다. 그는 잔뚜가마 마을로 탁발을 다니며 끼미깔라 강변의 망고나무 숲에서 명상하다가 ‘나는 믿음으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는데, 이와 같이 세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 예를 들어 감각적 쾌락에 매인 사유, 분노에 매인 사유, 폭력에 매인 사유에 사로잡혀 있따니, 오! 놀라운 일이다. 오!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라고 자신을 성찰하고 부처님을 친견하고 선지식을 사귀고 계행을 지키는 등의 수행을 닦고 그 위에 부정관·자애관·호흡관·무상관을 닦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듣고 정진하여 거룩한 님이 되었다.
719) Meghiyasutta : Ud. 34 : AN. Ⅳ. 354
720) cattāro dhammā uttari bhāvetabbā. asubhā bhāvetabbā rāgassa pahānāya. mettā bhāvetabbā byāpādassa pahānāya, ānāpānassati bhāvetabbā vitakkupacchedāya. aniccasaññā bhāvetabbā asmimānasamugghātāyā’ti : Ud. 38; AN. Ⅳ. 358
721) Rāhula : 부처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배우기를 열망하는 님 가운데 제일(aggo sikkhākāmānaṁ)’이다. Ppn. Ⅱ. 737에 따르면, 고따마 붓다(Gotama Buddha)의 외아들이다. 아버지가 출가하던 날 태어났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뒤 쑷도다나(Sudd hodana) 왕의 초청으로 까삘라밧투를 처음 방문했을 때 라훌라의 어머니는 아들을 부처님에게 보내서
에 “라훌라여, 자애에 대한 명상을 닦아라.”라는723) 등의 표현으로 한 사람에게 일곱 가지 명상주제724)를 설했다. 그러므로 말귀만을 고집하지 말고 모든 경우에 그 의도를 찾아야 한다. 이상이 ‘명상주제를 파악하고’라고 한 명상 주제론의 판별이다.
123. ‘파악하고’라는725) 이 말귀의 의미를 밝히면 이와 같다. ‘그 수행자는 명상주제를 주는 선지식을 가까이 하고’라는726) 표현으로 설한 방법대로 선지식을 가까이 하고 세존이신 부처님에게나 궤범사에게 자신을 헌신하고, 의향을 갖추고, 확신을 갖추고, 명상주제를 청해야 한다.
124. 여기서 “세존이시여, 저는 자신을 당신께 바칩니다.”라고 이와 같이 부처님이신 세존에게 헌신해야 한다. 이와 같이 헌신하지 않으면, 외딴 처소에서 지내면서 공포의 대상이 나타날 때, 굳건히 지킬 수가 없어서 마을로 내려와 재가자들과 사귀면서 삿된 추구에 빠져서 재앙을 초래하고 만다. 그러나 자기를 헌신한 자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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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의 승계를 요청했다. 부처님은 침묵한 채 공양을 들고 왕국을 떠났다. 라훌라가 따라 나서자 부처님은 마침내 싸리뿟따를 시켜 라훌라를 승단에 입단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어린 아이들의 출가는 부모의 허락을 맡아야 한다고 요청하자 부처님은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라훌라는 의미 출가했고 부처님은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전했다. 어렸을 대 라훌라는 한 줌의 모래를 집어 들고 ‘오늘 내가 이 모래알처럼 많은 가르침을 얻기를 바란다.’고 기도했다. 라훌라가 일곱 살이었을 대 부처님은 「암발랏티까에서 라훌라를 가르친 경」(Ambalatthikarāhulovādasutta : MN. Ⅰ. 414)을 설해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 것을 설했고, 라훌라가 열여덟 살 때 「라훌라에 대한 가르침의 큰 경」(Mahārāhulovādasutta : MN. Ⅰ. 420)을 통해 위빠사나 명상을 가르쳤으며, 나중에 지혜가 무르익었을 때 「라훌라에 대한 가르침의 작은 경」(Cūlarāhulovādasutta : MN. Ⅲ. 277)을 설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도록 했다. 라훌라는 밀행제일(밀행제일)의 제자가 되었다.
722) Rāhulasutta : Mahārāhulovādasutta(MN. Ⅰ. 420)을 말한다.
723) mettaṁ rāhula bhāvanaṁ bhāvehī’ti : MN. Ⅰ. 424
724) satta kammaṭṭhānāni : ① 자애 ② 연민 ③ 기쁨 ④ 평정 ⑤ 부정(不淨)의 지각 ⑥ 무상(無常)의 지각 ⑦ 호흡(呼吸)의 새김이다.
725) gahetvā’ti : Vism. 89/3 : 28을 참조하라.
726) tena yoginā kammaṭṭhānadāyakaṁ kalyāṇamittaṁ upasaṅkamitvā’ti : Vism. 97/3 : 57-73을 참조하라.
나더라도 두려움이 생겨나지 않는다. 오히려 “슬기로운 자여, 그대는 일찍이 자신을 부처님들에게 바치지 않았는가?”라고 성찰하기 때문에 그에게 만족이 생겨난다.
125.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최상의 까씨727) 산의 면포를 얻었는데, 쥐나 곤충들이 갉아 먹으면, 불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옷이 없는 수행승에게 보시하면, 그 수행승은 그것이 조각 조각 잘릴 때 그것을 보고도 만족을 일으킬 것이다. 이와 같이 그것도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26. 궤범사에게 헌신하는 자도 “존자여, 저는 자신을 당신에게 바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이 헌신하는 것이 없는 자는 경책을 받을 수 없고, 완고하고,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가고 싶은 대로 가거나 궤범사에게 묻지도 않고 원하는 곳으로 가는 자가 되므로, 궤범사가 그를 재물이나 가르침으로 돕지 않고, 심오한 서책728)도 배우지 못하고, 이러한 두 가지 도움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교학에서 발판을 [116] 얻지 못하고, 머지않아 계행을 저버리고 환속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헌신한 자는 경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없고, 스스로 가고 싶은대로 가지 않고, 유순하고 궤범사에게 의지하여 살고, 이러한 두 가지 도움을 얻기 때문에 교법에서 성장 증대 확장을 얻는다.
127. 장로 쭐라 삔디빠띠까 띳싸729)의 학인들과 같다. 전하는 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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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 kāsī : 부처님 당시의 16대국(十六大國) 가운데 하나였다. 수도가 바라나씨(Bārāṇasī)였다. 또한 그들 국가를 형성하는 종족의 이름이기도 하다. 부처님 당시 이 지역은 꼬쌀라 국의 왕 빠쎄나디의 부왕인 마하꼬쌀라(Mahakasāla)가 딸이 마가다 국의 빔비싸라 왕과 결혼할 때 까씨 국에 속해 있는 속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까씨 국은 전단향이나 섬세한 부드러운 옷으로 유명했다. 까씨 국의 옷은 비단 옷이 아니라 Srp. Ⅱ.158에 따르면, 목화(kappāsa)의 섬유로 짠 아주 섬세한 옷감을 말한다.
728) gūḷhagantha :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명상주제에 관한 책으로 심오하고 공성과 연관된 네 가지 거룩한 진리와 열두 가지 연기의 법칙을 다룬 책이다.
729) Cūḷapiṇḍapātikatissa : Vism. 191/6 : 77에 따르면, 그는 코끼리 사체에서 벌레가 우글거니는 시체에 대한 부정관을 일으켜서 수행했다.
의하면, 장로에게 세 명의 수행승이 있다. 그 가운데 한 분은 “존자여, 저는 당신을 위해서라면”이라고 말을 꺼내고 “백 길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존자여, 저는 당신을 위해서라면”이라고 말을 꺼내고 “제 자신을 발꿈치에서부터 돌 조각에 갈아서 남김없이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는 “존자여, 저는 당신을 위해서라면”이라고 말을 꺼내고 “호흡을 멈추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장로는 “이 수행승들은 가능성이 있다.”라고 생각하고 명상주제를 설했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에 정초해서 셋 모두가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이것이 자신을 헌신하는 자의 공덕이다. 그래서 ‘세존이신 부처님에게나 궤범사에게 자신을 헌신하고’라고 언급한 것이다.
128. ‘의향을 갖추고 확신을 갖추고’730)라는 것은 이와 같다. 그 수 행자는 무탐 등을 통해서 여섯 가지 유형의 의향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의향을 갖추면 세 가지 깨달음 가운데 어느 하나를 얻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섯 가지 의향이 보살들731)을 깨달음의 성숙으로 이끈다. 무탐에 대한 의향을 지닌 보살들은 탐욕에서 허물을 본다. 무진에 대한 의향을 지닌 보살들은 분노에서 허물을 본다. 무치에 대한 의향을 지닌 보살들은 우치에서 허물을 본다. 출가에 대한 의향을 지닌 보살들은 재가에서 허물을 본다. 출리에 대한 의향을 지닌 보살들은 일체 존재의 운명에서 허물을 본다.”라고732) 설한 것과 같다. 어떠한 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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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 sampannajjhāsayena sampannāghimuttinā ca hutvā’ti : Vism, 115/3 : 123
731) bodhisattā : 『청정도론』의 주석에 의하면, 깨달음의 존재 또는 깨달음으로 확고하게 안착된 존재, 그것을 지향하고 그것으로 향하고 그것으로 기우는 존재(bujjhanakasattā, bodhiyā vā niyatabhāvena sattā laggā, adhimuttā tanninnā tappaṇā)를 뜻한다.
732) cha ajjhāsayā bodhisattānaṁ bodhiparipākāya saṁvattanti, alobhajjhāsayā ca bodhisattā lobhe dosadassāvino, adosajjhāsayā ca bodhisattā dose dosadassāvino, amohajjhāsayā ca bodhisattā mohe dosadassāvino, nekkhammajjhāsayā ca bodhisattā gharāvāse dosadassāvino, pavivekajjhāsayā ca bodhisattā sangaṇikāya dosadassāvino, nissaraṇajjhāsayā ca bodhisattā sabbabhavagatīsu dosadassāvino’ti
든 과거·미래·현재의 흐름에 든 님, 한번 돌아오는 님, 돌아오지 않는 님, 번뇌를 부순 님, 홀로 깨달은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그 모든 분들은 이러한 여섯 가지 유형으로서 각자 도달해야 할 승화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섯 가지 유형으로 의향을 갖추어야 한다.
129. 그러한 확신으로 확신을 갖추어야 한다. ‘삼매를 확신해야 하고, 삼매를 존중해야 하고, 삼매를 지향해야 하고, [117] 열반을 확신해야 하고, 열반을 존중해야 하고, 열반을 지향해야 한다.’라는733) 의미이다.
130. 이와 같이 의향을 갖추고 확신을 갖춘 자가 명상주제를 청하면, 타자의 마음을 읽는 궤범사는 그의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성향을 알 수 있다. 다른 자는734) “그대는 어떤 성향을 가졌는가? 그대에게는 어떤 사실이 자주 현행하는가? 그대가 어떻게 정신활동을 일으킬 때 편안한가? 어떠한 명상주제로 그대의 마음이 향하는가?”라는735) 등의 표현으로 묻고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알아서 성향에 적합한 명상 주제를 말해 주어야 한다. 설할 때는 세 가지 방식으로 설해야 한다. 자연적으로 명상주제를 파악한 자에게는 하나 둘 그 자리에서 외우게 한 뒤에 주어야 한다. 근처에 사는 자에게는 오고 갈 때 말해 주어야 한다. 파악한 뒤에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하는 자에게는 너무 간략하지도 너무 상세하지도 않게 말해 주어야 한다.
131. 거기서 땅의 두루채움을 설할 때 곧 ① 네 가지 두루채움의 허물, ② 두루채움을 만드는 것, ③ 만든 것의 수행방법, ④ 두 가지 인상, ⑤ 두 가지 삼매, ⑥ 일곱 가지 적합과 부적합, ⑦ 열 가지 근본삼매를 위한 기술, ⑧ 조화로운 정진, ⑨ 근본삼매를 얻는 지침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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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3) amādhādhimuttena samāghigarukena samādhipabbhārena, nibbānādhimuttena nibbānagarukena nibbānapabbhārena ca bhavitabban’ti
734) itarena : 타자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궤범사들을 말한다.
735) kiṁ caritosi, eke vā te dhammā bahulaṁ samudācaranti, kiṁ vā te manasikarotophāsu hoti, katarasmiṁ vā te kammaṭṭhāne cittaṁ namatī’ti
이러한 아홉 가지 유형을 설해야 한다.736) 나머지 명상주제에 대해서는 각각 그것에 알맞게 설해야 한다.737) 그 모든 것은 그것들의 수행규정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이와 같이 명상주제를 설명해 주면, 그 수행자는 인상을 파악하고 들어야 한다.
132. ‘인상을 파악하고’라는 것은 이와 같다. ‘이것은 앞의 구절이고, 이것은 뒤의 구절이고, 이것은 그것의 의미이고, 이것이 그것의 의도이고, 이것이 그것의 비유이다.’라고 이와 같이 각각의 측면에 연결시킨다는 뜻이다. 인상을 파악하여 공손하게 들을 때, 명상주제가 잘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에서 수숭한 것의 증득이 성취되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아니다. ‘이것을 파악하고’라는 이러한 구절의 의미를 밝힌 것이다.
133. 이상으로 ‘선지식을 가까이 하고 자신의 성향에 따라 적합한 것을 골라 마흔 가지 명상주제 가운데에 어느 하나의 명상주제를 파악하고’라는738) 이 구절에 대한 모든 형태의 상세한 논의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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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6) tattha pathavīkasiṇaṁ tāva kathentena cattāro kasiṇadosā kasiṇadosā, kasiṇakaraṇaṁ, katassabhāvanānayo, duvidhaṁ nimittaṁ, duvidho samādhi, sattavidhaṁ sappāyāsappāyaṁ, dasavidhaṁ appanākosallaṁ, vīriyasamatā, appanāvidhānanti ime nava ākārā kathetabbā : 이 모든 과정은 Vism. 118/4 : 1 이하에서 상세히 설명된다.
737) sesakammaṭṭhānasupi tassa tassa anurūpaṁ kathetabbam : Vism. 170/5 : 1 이하에서 상세히 설명된다.
738) kalyāṇamittaṁ upasaṅkamitvā attano cariyānukūlaṁ cattālīsāya kammaṭṭhānesu
이로써
선량한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지은
『청정도론』에서
「삼매수행론」 가운데
「명상주제의 파악」이라는
제 3장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