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사제가 된 기쁨을 안고 성탄을 보냈다. 이후 바로 전주로 와서 당시 지목구장인 주재용 신부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첫 발령지인 정읍본당으로 부임했다. 이때가 1945년 1월 5일로 당시 교구 관리국장이셨던 김현배 신부와 함께 발령을 받았다. 김현배 신부는 당시 맡은 일이 많아서 법적 본당신부처럼 계셨고 나는 실무를 맡아보게 됐다.
나는 사제생활 중 10개 본당 사목을 맡았었는데, 모두가 어려웠던 시대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본당이 성당도 없고 모든 체계를 다시 잡아야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문제거리를 안고있는 본당들도 꽤 있어 사제 생활 중 화를 낸 기억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호랑이 신부'라는 소리를 많이 듣기도 했다.
정읍성당과 사제관은 산 밑에 위치한 약 30평 가량의 오래된 함석집이었다. 주변에도 판잣집 밖엔 없었다.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부딪히고 보니 생활이 막막했다. 식사는 아침, 저녁 두끼도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친척 집을 돌며 쌀과 식기, 가재 도구 등을 얻어와서야 가능했고, 땔감도 없어 갈퀴와 망태를 시장에서 사가지고와 직접 나무를 했다. 게다가 그때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라 군자금 명목으로 가재도구는 물론 곡식을 모두 공출해 콩깻묵조차도 한참 후에야 배급받았다. 교회 사정도 말이 아니었고, 교무금을 받기보다 도리어 신자들을 도와줘야 할 형편이었다. 난 이 정읍본당 사목시절부터 절약을 위하여 저녁은 콩나물죽을 먹기 시작해 본당 사목시절에는 거의 콩나물국밥 등으로 저녁을 때웠다.
그해 부활을 준비하며 판공을 주기 위해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등천리 등내 포교소(공소)를 방문하는데 형사들이 쫓아왔다. 행여 신자들 중 일제를 반대하는 반국가관을 가진 사람이 없는 지 감시하는 눈치였다. 시작을 잘 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꼬투리를 잡힐듯 해 나는 공소회장을 시켜 됫박 두개를 가져다 놓게 하고 하나는 내가 앉고 또 하나는 형사를 앉게 한 후 고해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고해성사를 일부러 교리 찰고처럼 진행하니 한 20여명쯤 성사를 받자 형사는 지겹고, 엉덩이도 쑤시는지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난 아직 사람들이 80명이나 남았고 그중에 혹시 반국가 사범이 있을지도 모르니 끝까지 고해성사를 들으라고 했다. 그 형사는 당황해하며 성사가 다 끝날 때까지 앉아 있다가 저녁식사까지 같이 하고 떠났다. 형사를 보내고 나서 나는 다시 신자들에게 정식 고해성사를 줬다. 그 형사는 아주 혼이 났는지 이후 다시는 공소를 순방할 때 나타나지 않았다.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독립이 되고, 10월에는 미군이 와서 군정을 실시했다. 다행히 그 부대에는 그랠런 화이트 군종신부와 당시 정읍, 고창, 부안군 군수였던 스택 대위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있어 교회에 큰 도움을 줬다.
성당건물이 형편없음은 물론이고 위치가 전교에는 아주 열악해 사람들이 모여있는 중심가쪽으로 옮길 필요가 있었는데, 미 군종신부와 신자들이 당시 정읍에선 제일 잘 지어진 양옥건물을 마련해줘 성당 봉헌식도 거행했다.
신자들은 모두들 열심이었고 전교에도 애썼다. 교구장 주재용 신부님을 초빙해 한글강습 등을 마련한 것이 계기가 됐는지 주민들 사이에 천주교가 널리 퍼져 예비신자들도 많이 늘었다. 교구장께서는 교구 내 모든 본당들이 정읍 본당처럼 전교에 힘쓰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1947년 4월 나는 영어를 좀 할 줄 안다는 이유로 군산본당(현재의 둔율동 본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군산본당은 첫 발령 이상으로 기억에 많이 남는 본당이었다.
당시 군산은 말썽이 많은 본당으로 알려져 어른 신부님들은 나같은 풋내기 신부에게는 너무 힘든 곳이라며 걱정했다. 아니나다를까 군산에 도착했을 때 나를 맞아 주는 사람은 본당회장과 노인 몇 분이었다. 당시 군산에는 개신교 터가 셌지만 신자수는 시내에 약 500명, 공소에 약 300명 정도로 꽤 있었다.
저녁 때 10여명의 청년들이 "귀때기 새파란 젊은 신부가 왔으니 몇 근이나 되는지 달아보자"고 하며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쳐들어왔다. 난 화도 나고 겁도 났지만 "남의 집에 들어오면 인사부터 제대로 하고 앉아야 예의"라며 조용히 타이르고는 "난 군산에 대해 잘 모르니 여러분들이 잘 가르쳐달라"고 먼저 인사를 청했다. 청년들은 의외의 반응에 놀란 눈치였다. 함께 담소를 나누다가 마침내 내가 "달아보니 몇 근이나 됩니까?"하고 물었더니 모두들 얼굴을 붉혔다. 내가 "당신들이 주인이고 난 머슴살러 온 것이니 달아보는 것이 정상"이라고 얘기하며 나에게 욕을 했던 청년과 악수를 나누자 모두들 "신부님 보통이 아니십니다. 저울눈이 없어요. 무근입니다"라며 웃었다.
군산본당에서도 신자수 배가운동을 전개해 많은 예비신자들을 인도했다. 교회사가 김구정 선생님을 예비신자 교리교사로 초빙해 순교사기 등을 들려주니 예비신자는 갈수록 늘었고 1949년 성탄 전날에는 191명의 성인이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많은 성인이 세례를 받은 것은 한국교회 창립 이래 처음이었다. 세례식 때는 조선천주교연합청년회 축하객을 비롯해 전국에서 축하객과 축전이 쇄도했다. '경향신문'은 제1면에 "전교 배가 운동, 드디어 군산본당에서 성공"이라는 제목으로 전면 톱기사를 실었다. 50년 부활절에도 80여명의 성인이 세례를 받았다. 또 본당 신자 배가운동 뿐 아니라 교무금 배가 운동도 펼쳐 1947년에 신자 300여명이 교무금 15만원을 돌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