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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 단편청소년소설 수상작]
「똥통에 살으리랏다」최영희
「밀림, 그 끝에 서다」정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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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통에 살으리랏다」/ 최영희
“하모요, 단디 해서 나쁠 거 없지요. 그라믄 이따가 헨진이 보내겠십니더. 들어가이소.”
엄마는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입언저리를 씰룩거렸다.
“서울 것들은 귓구녁이 먹었나. 사람 말도 몬 알아듣고. 안헨진이라 불러 줬으면 안, 현, 진 하고 찰떡겉이 알아묵어야지.”
수도 양장점 아줌마랑 통화를 한 모양이다. 엄마가 서울 것들이라 칭할 사람은 이 근처에서 그 아줌마밖에 없으니까.
“양장점 아줌마가 뭐라 캤십니꺼?”
나는 국에 밥을 톡톡 말다 말고 물었다.
“니 교복에 이름 새기다가 확인차 전화했단다. 헨진이가 한진인지 현진인지 헷갈린다꼬.”
엄마는 총각김치를 우적거렸다. 엄마가 전방 45도 각도로 시선을 유지한 채 알타리무를 씹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나는 얼른얼른 밥을 먹었다. 요즘 우리 집은 온통 지뢰밭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른다.
먹다 보니 울컥했다. 평생에 한 번뿐인 고등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격려와 현금과 상품권에 파묻혀 지내도 모자랄 판에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다. 사실 어제 넌지시, 돌려 돌려서 엄마한테 말하긴 했다.
“옴마, 가방이나 하나 살까 합니더. 진주 지하상가 요새 세일 한답니더. 뭐, 진주 나간 김에 신발도 하나 사고 그랄라는데…… 기태하고 예지도 간다든데예.”
하지만 돌아온 건 엄마의 돌직구였다.
“아들, 곶감 파묻은 구딩이에 흙도 안 말랐다. 개 대가리 찜쪄 묵는 소리 그만하고 책이나 봐라.”
염병할 곶감.
아빠가 딸기 하우스를 처분하고 근처 곶감 공장을 인수한 건 지난여름이었다. 아빠 말로는 하동 대봉 곶감은 값이 비싸도 없어서 못 파는 상품이라 했다. 아빠는 용달을 끌고 이 동네 저 동네 찾아다니며 대봉감을 맞추었다. 감을 따기 전에 나무째 사들이는 거다.
11월에 접어들 무렵 아빠는 굵고 단단한 대봉들을 따 날랐다. 건조기를 쓰지 않고 건조장 가로대에 일일이 매달아 말리는 게 하동 대봉 맛의 비결이라며, 이모와 이모부까지 나서서 밤낮으로 일했다. 그때는 나도 잠시 헛꿈을 꿨던 것 같다. 잘나가는 곶감 공장 사장 아들, 뭐 재벌 2세 내지는 지역 유지랄까. 하지만 늦가을 장마가 복병이었다.
보름 가까이 내린 비로 곶감이 제대로 건조되지 못하고 곪아 버린 것이다. 비가 그치자 아빠는 그 많은 곶감을 모조리 땅에 파묻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세 달 가까이 지나도록 아빠는 술에 절어 산다.
“밥 다 묵었으면 느 아부지 깨배라.”
“옴마가 깨배이소.”
나는 그 말만 남기고 슬그머니 내 방으로 와 버렸다. 엄마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사단이 날 징조다.
“인나라. 해가 중천이다.”
희미하지만 퍽퍽 소리가 났다. 엄마가 발길질을 날리는 모양이다. 저럴 때마다 예지랑 결혼하겠다는 내 인생 계획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학교 친구랑 결혼했다가 아빠 짝 날까 봐 걱정이다.
“니만 힘드나? 니는 술 처묵고 자빠져 자면 고만이지만, 내는? 내는 울면서도 밥하고 가슴 땅땅 치면서도 빨래 널고, 니랑 똑 닮은 저 새끼 때매 천지사방 뛰다녀야 된다. 그란께 엄살 고만 피고 인나라.”
무슨 마트 원 플러스 원 상품도 아니고, 엄마가 아빠한테 성질을 부릴 때면 나까지 묶음으로 욕을 먹는다.
“헨진이 데리고 가서 교복이나 찾아 온나. 니 아들 다음 주면 평안고 입학이다. 알고는 있나?”
정적이 흐른다. 아빠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모양이다.
아빠의 용달을 타고 평안고등학교 앞 수도 양장점에 갔다. 아빠는 턱으로 양장점을 가리켰다. 나 혼자 들어갔다 오란 거다.
커피 잔을 들고 둘러앉은 아줌마들, 교복을 찾으러 온 애들, 괜히 묻어 온 어린애들까지 양장점 안은 미어터졌다.
“교복 찾으러 왔니? 이름이 뭐였지?”
양장점 아줌마가 손끝으로 나를 콕 가리키며 물었다.
“안헨진이요.”
“아, 그…….”
그 뭐? 곶감 공장 말아먹은 안 씨 아들? 보면 볼수록 정이 안 가는 아줌마다.
나는 교복 값이 담긴 봉투를 건네주고 내 교복을 받아 들었다. 안현진, 군청색 재킷에 새겨진 이름 석 자도 확인했다. 안녕히 계시란 인사는 안 했다. 나도 뒤끝 있는 남자다.
교복을 들고 나왔는데 아빠가 없었다. 휴대폰으로 아빠에게 전화를 했더니 엄마가 받았다. 아빠가 사라졌단 말은 할 수가 없어서 대충 둘러대다 전화를 끊었다.
시장 골목을 나와서 농협 사거리를 뒤지다 보니 저 멀리 공터에 파란 용달이 보였다.
“아빠, 아, 진짜 이러깁니꺼?”
나는 짜증을 내며 아빠에게 교복을 떠안겼다. 아빠는 말없이 종이 가방을 받아 들더니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커다란 현수막이었다.
평안고의 자랑. 길지윤. 진주 교대 합격!
“니는 저걸 보면 뭐가 느껴지노?”
“뭐, 딱히……. 아, 엄마 아빠도 평안고 출신이니까, 자랑스럽겠네예.”
하지만 아빠는 고개를 저었다.
“아들아, 아빠 말 단디 새기라. 세상에는, 상대적 똥통과 절대적 똥통이 있는 기라. 저어기 서울에 경기고등학교나 숙명여고랑 괜히 가까이 있어가가 비교당하고 욕먹는 학교들은 상대적 똥통이라. 그란데 주변에 다른 학교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데도 지 혼자 썩어 문드러지는 학교가 있거등. 그기이 바로 절대적 똥통이라. 그라면 헨진아, 평안고등학교는 절대적 똥통이겄나, 상대적 똥통이겄나?”
이거였나? 엄마 아빠가 내 입학을 개 밥그릇에 남은 밥풀만도 못하게 여긴 이유가? 절대적 똥통이라서? 나는 인정하기 싫었다. 인정하는 순간 난 똥이 되니까.
“잘 모르겠십니더. 공부 잘해서 교대 가는 누나도 있고…….”
아빠가 내 말을 툭 자르고 나섰다.
“자슥아, 그기이 바로 평안고등학교가 절대적 똥통이라는 증거다. 진주 교대 한 명 드갔다꼬 현수막 내거는 학교가 어딨노? 하바드도 아이고, 서울대도 아인데.”
평안고의 자랑 길지윤 누나가 절대적 똥통의 증인이라니. 얼굴도 모르는 누나에게 미안한 맘이 들었다.
아빠는 집에 가는 내내 평안고가 똥통임을 역설했다. 슬쩍슬쩍 나를 보는 아빠의 얼굴엔 뜻밖에도 생기가 돌았다. 작년 가을, 용달 끌고 다니며 대봉감 따 모을 때의 표정이다. 뭔가 꺼림칙하다.
그날 이후 아빠는 확실히 달라졌다. 틈만 나면 인터넷으로 뭔가를 찾고, 세 끼 밥도 꼬박꼬박 먹었다. 엄마도 아빠가 기운을 차린 게 좋은 모양인지, 오가며 훈수를 두었다.
“새 사업 구상하나? 이번엔 새 판을 짤라고만 하지 말고, 우리한테 있는 걸 활용하는 방향으로다 해 보자. 내 생각에는 저짝 산자락 밭에다가 야콘을 좀 심으까 싶은데, 우떻노?”
마침내 입학을 딱 사흘 앞둔 날, 아빠는 새벽부터 엄마와 나를 깨우더니 새 사업 브리핑을 했다.
“우리 있는 거 다 처분하고 서울 가자. 일생에 한 번은 자식 교육에 모든 걸 쏟아붓는 시간도 있어야 되는 기라. 내가 몇 날 며칠 생각해 봤디만, 애시당초 내 인생은 꼬이게 돼 있었더라. 니하고 내가 평안고등학교를 입학한 순간, 우리 인생은 딱 결정됐던 기라.”
이 시점에서 아빠는 손끝으로 자신과 엄마를 가리켰다.
“똥통에 드가서 인생 대충 사는 법을 딱 체득한 기라. 내 생각엔 요 팔랑귀 두 짝도 그 똥통에서 맹글어진 기다. 곶감 공장 안 해 볼라요, 그 한 마디에 홀딱 넘어가가 멀쩡한 딸기 하우스 팔아묵었제. 와! 대가리에 똥만 들었거등. 똥!”
아빠는 내 어깨를 힘주어 잡으며 브리핑을 마무리했다.
“아들아, 니는 달라야 안 하겄나. 우리, 학군 찾아 떠나 보자.”
심란해 할 틈도 없었다. 아빠는 우리를 용달에 몰아넣고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 사전 답사 차원으로 가는 기다. 가서 서울 물이나 묵고 오자.”
아빠는 선글라스를 끼었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엄마의 반응이었다. 엄마는 옥종 양장점 아줌마한테 야매로 시술한 눈썹에 덧칠도 못한 채 용달에 앉아 있었다. 붉은 눈썹을 검게 칠하지 않고는 현관문 밖에도 나가지 않던 엄마였다.
“옴마, 아빠 좀 말리 보이소.”
“가만있어라, 고마. 느 아부지가 어데 빈말할 사람이가? 학군! 학군 찾아간다 안 하나.”
엄마는 엉킨 단발머리를 손끝으로 빗으며 말했다.
“삼 일 있으면 입학인데, 인제사 이라면 우짭니꺼? 까딱하다 입학도 못하는 거 아입니꺼? 아, 딱 돌겠네.”
정말 울고 싶었다.
나 안현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인생 계획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평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까운 대학 아무 데나 진학해 놓고, 아빠의 곶감 농장을 물려받을 생각이었다. 무조건 도시로 나가야 한다고 우기는 친구들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촌에서 돈 벌고, 촌에서 살고, 도시는 가끔 놀러나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앞 동네 육길이 아저씨가 내 롤모델이다. 육길이 아저씨는 파프리카를 일본에 수출하여 떼돈을 벌었다. 여섯 시 내 고향, 전국 노래 자랑 등 쟁쟁한 공중파 방송물도 마신 사람이다. 육길이 아저씨는 일할 땐 일하고, 농한기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괌, 사이판, 세부 안 가는 데가 없다. 나도 육길이 아저씨처럼 살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지가 평안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난 예지랑 결혼할 거다. 이 근방에서 예지만큼 예쁜 애는 없다. 물론 이의를 제기하는 애들도 있다. 이를 테면 기태 같은 놈 말이다. 기태는 내가 예지 얘기만 하면 놀려 댔다.
“니, 그 치고녀 좋아하제?”
“치고녀? 그기 뭔데?”
“촌애치고 예쁜 편, 촌애치고 하얀 편, 촌애치고 키 큰 편, 그런 거 말이다. 우헤헤.”
나는 기태 놈 엉덩짝을 걷어차 버렸다. 예비 형수님을 우롱한 대가였다.
아무튼 내 인생 계획은 푸르고 짱짱했다. 그 빌어먹을 곶감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일이 꼬이다 꼬이다 이제는 입학을 사흘 앞두고 상경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내 인생 설계대로라면 서울은 예지랑 KTX 타고 가야 하건만, 좌 아빠 우 엄마 상태로 용달을 타고 가다니, 내 팔자야.
인삼랜드 휴게소에 들러 볼일을 보았다. 엄마는 화장실에서 세수를 했는지 눈썹이 축축하고 더 붉었다. 우리는 핫바와 빨대 커피를 사서 용달에 올랐다.
대전을 지날 무렵 아빠가 말했다.
“서울 사람들은 어중간한 서울말 싫어한다더라. 그란께 고마 펭소처럼 당당히 말해라. 알긋나?”
“니, 내하고 아들을 등신 축구로 아나? 니가 잔소리 안 해도 다 알아서 한다, 고마.”
엄마가 짜증을 냈다.
이러구러 우리는 서울에 도착했다. 그런데 내려서 보니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구리시였다.
“우찌된 일이고?”
엄마가 묻자 아빠는 좀 애매하게 웃었다.
“그기 말이다, 알아보니까 서울 전셋값이 장난이 아이라. 뭐 한다꼬 서울 기들어 가서 생고생하겄노? 일단 이쯤에 자리 잡고, 헨진이를 잘 가리치서 서울 입성시키면 되는 기다. 구리시에서 서울까지 딱 9리란다. 9리면 헨진이 중학교 통학 거리만도 못하다 아이가. 학군이 그리 처지지는 않을 기다.”
엄마는 전셋값이란 말에 살짝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우리는 24시간 영업을 한다는 설렁탕집으로 들어갔다.
“아따, 꼬신 냄새 난다.”
“학군 두 번만 찾았다간 굶어 죽겄다.”
아빠 엄마의 대화를 듣고 카운터에 있던 젊은 아저씨가 말했다.
“경상도 어디쯤에서 오셨나 봅니다.”
“하동에서 왔십니더.”
엄마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카운터 아저씨는 하동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엄마가 슬쩍 덧붙였다.
“대봉 곶감의 고장 하동 말입니더.”
그제야 카운터 아저씨가 환히 웃었다.
“아아, 곶감! 그럼 경북 상주 근천가 봅니다.”
엄마는 뭐라 대꾸도 못하고 자리에 가 앉았다. 아빠는 지갑과 휴대폰을 밥상에 탁 올려놓고는 그대로 드러누웠다.
기태야, 헹님 서울 왔다.
예지야, 오라버니 서울 왔다.
문자 두 통을 보내고 고개를 들어 보니 엄마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종업원이 갖다 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다 말고 컵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뭐어? 곶감 하면 하도옹? 대봉 곶감의 고장 하동 하면 서울 근방서 모리는 사람이 없다꼬? 그 예편네가 공갈을 쳤다 이기제?”
엄마의 숨소리가 거칠다는 걸 알았는지 아빠도 벌떡 일어났다.
“와 그라노? 예편네 누구?”
“누구긴 누구겠노? 수도 양장점 그 예편네지.”
처음 수도 양장점이 문을 열었을 때 엄마는 양장점 아줌마를 서울 디자이너라 불렀다. 그러다 ‘서울 것들’을 거쳐 마침내 ‘예편네’가 되었다.
“그라면 곶감 사업 하라꼬 니를 꼬드긴 게 그 예편네가?”
아빠도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쪽팔려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지만 종업원들이 눈이 죄다 우리에게 쏠려 있었다.
엄마는 자기 가슴을 땅땅 치고는 또 찬물을 들이켰다. 아빠도 찬물을 들이키고는 소리쳤다.
“야, 등신아, 서울서 온 예편네가 농사에 대해 뭘 알 기라꼬, 그 예편네 말에 홀딱 넘어갔노?”
엄마는 금세 눈가가 붉어지더니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나는 냅킨을 서너 장 뽑아 엄마에게 주었다. 엄마는 코를 팽 풀고는 울먹였다.
“니는? 니 잘못은 없는 줄 아나? 내는, 서울서는 하동 대봉 곶감이 억수로 유명하단다, 그 말밖에 안 했다. 딸기 하우스 팔아 치운 것도 니고, 곶감 공장 인수한 것도 니다. 와 나한테만 그라노?”
엄마는 아예 밥상에 엎드려 울었다.
종업원들이 슬그머니 설렁탕 세 그릇을 내려놓고 갔다.
“인나라. 일단 묵자. 묵고 정신 채리야지. 내가 말 안 하드나. 니나 내나 대가리에 똥만 들어 그렇다. 그래서 여까지 왔다 아이가. 내 아들은 똥통에 보내지 말고, 제대로 가리치고 제대로 된 대학에 보내자고.”
아빠는 엄마 몫의 설렁탕에 숟가락을 꽂아 주었다. 엄마는 코를 마저 풀고는 설렁탕을 먹었다. 내가 끼어들 타이밍이 아니란 건 알지만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아빠, 지는 촌이 좋십니더. 앞 동네 육길이 아제맹키로 촌에 살면서도 뽀대 나게 살면 된다 아입니꺼? 그라니까 자꾸 우리 학교 보고 똥통, 똥통 하지 마이소.”
내 말에 아빠는 잠시 멈칫했다. 아차 싶었다. 육길이 아저씨는 아빠의 라이벌이다. 아니 육길이 아저씨는 모두의 라이벌이다. 내 롤모델이 아빠가 아니라 아빠의 라이벌이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으니 아빠는 상처 받았을 것이다. 아빠는 수염이 푸릇한 턱을 북북 긁으며 말했다.
“헨진아, 육길이 그눔아 말이다, 서울서 고등학교, 대학교 다 나왔다. 즈그 아부지가 고령토 사업 말아묵고 빚 도망 갈 때만 해도 거지꼴이었는데, 그래도 서울 물 묵고 살았다꼬 촌에 와서 보란 듯이 성공하더라. 니가 와 서울로 고등학교를 가야 하는지 이제 알긋제?”
허를 찔렸다. 육길이 아저씨가 서울에서 학교를 나왔다니, 나는 아빠 친구들이 죄다 평안고등학교 출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선 안 된다. 평안고등학교 말고 다른 학교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공부를 아주 잘했으면 애초에 진주나 창원 쪽 고등학교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내 성적은 중하위권이었고, 고집을 부려 진주나 창원으로 간다 해도 다른 애들 깔판 신세가 될 게 뻔했다.
깔판이 되느니, 평안고의 주역이 되겠다는 게 내 포부였다. 기태와 예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기태하고 예지하고 약속했십니더. 우리 진짜 열심히 함 해 보자고 말입니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숟가락 옆면으로 설렁탕 그릇을 땅땅 치며 일갈했다.
“시끄럽다. 지리산 돌대가리 원, 투, 뜨리. 느그 셋이 작당을 하면 그기 무슨 유비, 관우, 장비 같을 줄 알았나? 꿈 깨라, 자슥아. 아빠가 기회를 주겄다 할 때 잡아라. 옴마도 실패뿐인 인생 신물 난다. 니라도 좀 잘 살아라.”
아들의 결심을 저리 무참히 짓밟아도 되는 건가. 작년에 청산한 사춘기가 다시 도질라 그런다.
잠시 후 아빠가 결정타를 날렸다.
“헨진아, 내는 승승장구하는 육길이 그눔아가 부럽다. 니는 몇십 년 후에 아빠 꼴 나지 말고 잘 살아야지.”
아빠는 부러 후루룩 소리를 내며 설렁탕을 먹었다. 가슴이 저릿했다. 나는 내 설렁탕 그릇에서 밥을 건져서 아빠 그릇에 담아 주었다.
“니나 무라. 아빠는 됐다. 한창 크는 놈이 더 묵어야지.”
“아이라예. 아빠가 나보다 크니까 더 드이소.”
아직은 아빠가 나보다 크니까…….
설렁탕집에서 나온 뒤 우리는 공원 주차장에 용달을 세워 놓고 학원가로 갔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도착한 곳은 고층 아파트가 에워싼 상가 지역이었다. 평안고등학교 앞에 있는 거랑 똑같은 편의점이 이곳에도 있다. 아빠는 담배를 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야, 여만 와도 학군 쥑이네.”
“어데요? 어데 학군이 있다 그랍니꺼?”
내가 물었다.
“눈깔 뒀다 어데 쓸라 그라노? 자슥아, 니 눈에는 저 학원들이 안 보이나? 건물마다 수학학원, 영어학원, 입시학원, 저런 기 바로 학군이다. 평안고등학교 주변에 뭐가 있는지 생각들 해 보라모. 불닭 치킨, 미니스카트 다방, 옥종 양장점, 수도 양장점, 농기계 수리 센타. 내사 마 일일이 꼽기도 입 아푸다.”
“옴마야, 진짜네. 그란데 자기야, 수학학원 밑에는 스크린 골프, 영어학원 밑에는 카페, 저어기 논술학원 밑에는 노래방, 뭔가 좀 이상하다. 학원 간 아 기다림시로 한 곡 땡기라는 기가?”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가 한 팔로 엄마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그래, 니도 그동안 농사짓고 헨진이 키운다꼬 고생 많았으이까, 인자 도시서 좀 편하기 살아라. 저짝에 전신 마사지 가게도 있네. 저런 데도 다니고.”
“에헤, 지랄. 도시에서 니 혼자 벌어 우찌 사노. 내도 벌어야지.”
말은 그리 하면서도 엄마는 헤벌쭉 웃고 있었다. 일이 점점 이상하게 꼬여 간다. 중학교 때 선생님들이 나만 보면 단세포 새끼라 그랬는데, 그게 유전인 모양이다. 폭폭 한숨이 나왔다. 그때였다. 예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야, 좋은 데 가면 나도 데꼬 가야지. 니 완전 치사하다. 누구랑 갔노?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숨이나 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예지 말이 옳다. 서울 오려면 예지도 데리고 왔어야 한다. 그게 내 인생 계획이니까. 어떻게든 엄마 아빠의 맘을 돌려야 한다.
고향 친구들 깔판 노릇도 거부한 난데, 이 먼 경기도 땅까지 와서 다른 놈들 깔판이 될 순 없다. 평안고 입학은 내가 주눅 들지 않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다. 나는 평안고에서 내 인생을 준비할 것이다. 그런데 머릿속이 하얗기만 하다. 나는 속으로 돌대가리를 외치며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 순간 아까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리산 돌대가리 원, 투, 뜨리.
나한테는 기태와 예지가 있었다.
기태와 예지에게 문자를 날렸다.
엄마 아빠가 내를 경기도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시킬라 함. 우짜노. 빨리 아이디어 하나씩 내 봐라.
메시지를 찍었다.
갑자기 와? 이유가 뭐꼬?
예지였다. 나는 곶감, 똥통, 육길이 아저씨로 이어지는 긴 스토리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두 녀석에게 날렸다. 곧바로 기태에게서 답이 왔다.
육길이 아제 뒤를 좀 캐 보까? 그 있다아이가, 학력 위존가? 육길이 아제가 에나로 서울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왔는지 조사해 보께.
기태 녀석, 역시 남다른 구석이 있다. 삼 년 뒤 평안고등학교 앞 사거리에 기태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내걸릴 것만 같다. 평안고등학교의 자랑, 김기태 진주 교대 합격? 뭐, 어쨌거나.
나는 예지에게도 육길이 아저씨의 뒷조사를 부탁했다.
영어학원 건물 앞을 지날 때쯤 엄마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어데 좀 들어가 앉아 있자. 동네가 좀 춥네.”
아닌 게 아니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두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명문대 입시 전문 간판이 나붙은 건물 1층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달달한 거 세 잔 주이소.”
종업원은 잠시 난처한 얼굴로 아빠를 보더니 이내 활달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카페 모카 세 잔이요. 만 이천 원입니다.”
카페 모카 세 잔을 두고 둘러앉자 아빠가 심란한 얼굴로 말했다.
“느그,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다 무라. 이기 돈이 만 이천 원어치다. 물가 한번 학을 떼게 비싸네.”
나는 이때다 싶어서 치고 들어갔다.
“그라니까 아빠, 고마 하동에서 사입시더.”
“됐다, 자슥아. 이런 걸 투자라고 하는 기다. 당장에야 좀 힘들겄지만 몇십 년 후에 니가 떵떵거리고 살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제.”
아빠는 건배라도 하듯 커피잔을 내 잔에 부딪쳤다.
크림을 걷어 먹을 때까진 좋았는데 커피를 홀짝이자 배가 살살 아팠다. 화장실로 튀어가 변기에 앉았다. 설사다. 핫바, 빨대 커피, 설렁탕, 카페 모카까지 오늘 내가 먹었던 걸 되짚어 보니 설사가 안 나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푸실푸실 설사가 한창인데 기태에게서 문자가 왔다.
육길이 아제 서울서 학교 나온 거 확실. 면사무소 댕기는 우리 삼촌한테 직접 확인.
기태였다.
큰일을 다 보고 물을 내리는데 예지에게서도 기별이 왔다.
육길이 아제네 부모님 서울서 개고생 쩔었다 함. 폐휴지 줍고, 고물상 했다 함. 두 분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언은 육길아, 니는 고향 가서 살아라! 완전 슬프제? 이거 우리 옴마가 이모한테 들은 거임.
예지네 이모라면 옥종 양장점 아줌마다. 정보통, 마당발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다. 난 처음부터 아줌마 편이었다. 수도 양장점이 새로 오픈하여 옥종 양장점 고객을 다 빼내 갈 때도 나는 옥종 양장점을 응원했다. 비록 옥종 양장점 아줌마가 우리 엄마 눈썹 문신을 희한하게 해 놓은 뒤로 어른들끼리는 사이가 틀어졌어도 나까지 아줌마를 싫어했던 건 아니다. 그분은 예지의 이모가 아닌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교복 재킷도 옥종 양장점에서 맞추고 싶었다. 어차피 유명 브랜드 교복 업체에서 취급하지도 않는 교복이라면, 지역 자본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했어야 했다. 수도 양장점 아줌마가 버는 돈은 서울에서 대학교 다니는 아들들 학비로 다 나가니까. 옥종 양장점 아줌마 딸은 평안고등학교 선배님이다.
나는 손을 닦으며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현수 아저씨네 부모님이 고물상을 했다면, 우리 엄마 아빠도 고물상 하지 말란 법 없다. 이거야말로 엄마 아빠와 이 도시를 의절시킬 최대의 비기다. 예지 만세!
이제 남은 문제는 언제 터뜨리느냐 하는 것뿐이다.
아빠는 우리를 태우고 서울 시내로 들어갔다. 서울대학교를 내게 보여 주겠노라 했다. 서울을 구석구석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유명한 남산 타워도 있고, 동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 경복궁, 하다못해 한강 고수부지도 있는데 서울대학교라니?
한남대교가 꽉 막혀 차가 옴짝달싹을 못했다. 수능을 보고 가나, 용달을 타고 가나 서울대학교 가는 길은 험난했다. 아빠가 경적을 빵빵 울려 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명절도 아인데 길이 와 멕히노? 다리 하나를 몬 건너고 이기 뭐꼬?”
아빠는 휴지에 침을 퉤 뱉었다.
“서울 것들은 참말 성격도 좋은 갑다. 이런 걸 우찌 참고 사노? 내사 마, 두 다리로 뛰어갔으면 갔지 이리는 몬 있겄다.”
엄마도 신경질적으로 껌을 질겅거렸다. 나는 때가 왔음을 알았다.
“옴마, 육길이 아제네 부모님 서울서 고물상 했다는 게 사실입니꺼?”
나는 그리 포문을 열었다.
“그랬다 하대. 참말 지독하게 고생했는 갑더라. 두 분 다 오래 몬 사셨다지 아마.”
엄마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아직 고물상과 자신을 연결 짓지 못하는 모양이다.
“옴마,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예, 옴마 아빠도 괜히 저 땜에 서울 왔다가 죽도록 고생만 하는 건 아입니꺼?”
“참말 벨 걱정을 다 한다. 우리가 언제 촌에서는 고생 안 하고 살드나?”
엄마는 피식 웃었다. 맙소사, 최후의 무기가 불발탄이었다니.
서울대 앞에 도착했을 땐 우리 셋 다 녹초가 돼 있었다. 관악산 주차장에 용달을 대 놓고 서울대 입구로 갔다. 서울대 정문은 커다란 ‘샤’였다. 입에 담는 순간 진이 쏙 빠지는 주문 같았다.
“와 보이 우떻노?”
아빠가 물었다.
“뉴스에서 보던 기랑 똑같네예.”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헨진아, 저 헹님들 좀 봐라. 참말, 누구 아들들이까? 쟈들 옴마는 가마이 있어도 배부를 기다. 옴마야, 헨진아, 저 누야들 좀 봐라. 얼굴도 이쁘다.”
엄마는 ‘샤’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아들아, 평안고등학교 다녀 봤자 이런 학교는 꿈도 몬 꾼다. 옴마 아빠도 평안고 출신 아이가. 그래서 누구보다 그 학교를 잘 아는 기라. 니, 평안고등학교 교복이 와 딸랑 마이 하난 줄 아나?”
아빠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어차피 내 대답을 기대한 질문 같지 않아서 잠자코 있었다.
“와이셔츠, 넥타이, 바지 그란 거 해 봤자 입는 놈들이 아이거등. 똥통이 괜히 똥통이겄나. 다 전통과 이유가 있는 기다. 그 학교 오는 선생들부터가 학생들을 가리칠 맘이 없거등. 시골 학교가 교사 점순가 그런 거 따는 데 유리하다꼬 한 번씩 들어오는 기다. 네 생각엔 그 학교가 우떤 것 같노?”
내 생각……. 울컥했다. 어디 생각뿐인가. 내 창창한 계획까지 두 사람이 통째로 흔들어 놓고선. 기분이 똥이다.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학교가 우떤지 제가 우찌 압니꺼? 아직 시작도 못해 봤는데예. 평안고가 지한테 똥통이 될지 호박 구딩이가 될지 우찌 압니꺼? 전에 아빠가 말해 줬다 아입니꺼. 냇가에 똥구딩이를 맹근 다음에 흙을 덮고 호박씨를 뿌리면 태풍도 견디는 호박이 열린다꼬. 공부 잘하는 애들 모아 놓은 학교 가 봤자 지는 바닥에서 빌빌댈 거 뻔한데 와 자꾸 그쪽으로만 가라 그랍니꺼? 집 가까운 데서 댕김시로 아빠 일도 배우고 싶은데…….”
“이 자슥이! 오늘 아빠가 한 말들 저짝 귓구녁으로 다 흘맀나? 아빠 일 배워서 뭐할라꼬? 해마다 빚만 늘어 가는 거 니 몰라서 그러나?”
아빠는 주위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소리쳤다.
“와 그라노? 쪽팔리고로.”
엄마는 아빠를 잡아끌었다.
우리는 용달을 타고 해장국 집으로 갔다.
“기분도 꿀꿀한데 니, 아들하고 술 한 잔 해라. 내리갈 때는 내가 운전하께.”
엄마는 해장국 세 개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소주가 나오자 아빠는 내게 술을 따라 주었다. 나도 아빠 잔에 술을 따랐다. 소주보다는 맥주가 입맛에 맞는다고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참았다. 엄마 아빠는 아직 내가 술을 못하는 줄 안다.
아빠와 건배를 했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소주를 마셨고, 엄마 아빠는 그런 나를 보고 웃었다. 맛이 지독한 소주 덕분에, 저절로 술 처음 먹는 애 같은 리액션이 나왔다. 아마 맥주였으면 첫 모금에 들통 났을 것이다.
“니, 아까 아빠 일 배운다 그랬나? 그래, 뭔 일을 배울래?”
아빠가 물었다.
“곶감 사업 배울랍니더.”
“뭐, 곶감?”
아빠 목소리가 해장국집에 쩌렁쩌렁했다.
“대봉이야 해마다 열리는 거 아입니꺼. 올 가을에 또 깎아 매달면 됩니더. 올해는 잘될지 누가 압니꺼?”
“자슥아, 그기이 무슨 딱지치긴 줄 아나? 오늘 몬 따면 내일 따면 되구로.”
아빠는 소주잔을 털어 마시고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 버렸다.
이제껏 밥을 깨작이던 엄마는 내 술잔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소주를 따랐다.
“옴마, 운전은 우짤라꼬요?”
“내사 마, 모린다. 내도 한 잔 하자. 퍼마시고 우리도 서울 사람들맹키로 찜질방 그런 데 가서 자지 뭐.”
엄마는 연거푸 세 잔이나 마셨다.
아빠가 다시 왔을 땐 엄마가 소주를 두 병이나 더 시켜 놓은 뒤였다.
“이거 누가 다 묵을라꼬 시킸노?”
“내! 내가 묵을란다. 서울 오면 가심이 탁 트일 줄 알았드만 것도 아이라. 하긴, 촌에서 몬살던 년놈이 서울 온다꼬 별 수 있겄나.”
“별 수 없다. 그란께 헨진이 저 놈이라도 가르치자는 거 아이가. 그래, 한 잔 해라.”
아빠는 엄마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시작된 술잔은 소주 다섯 병이 비도록 이어졌다. 엄마는 다 식은 해장국을 떠먹다 말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뭐꼬. 이제 보이 뚝배기도 곶감 색깔이네! 헨진아, 이거 퍼뜩 내 눈앞에서 치아라.”
“니, 취했다. 인나라. 찬바람이나 쐬자.”
아빠는 엄마를 부축했다. 우리는 칼바람 부는 길거리로 나왔다.
엄마는 아무나 붙잡고 늘어졌다.
“보이소, 지 하동에서 왔십니더. 하동 알지예? 대봉 곶감의 고장 하도옹!”
그때마다 아빠가 엄마를 붙들었지만 비틀거리기는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릴 피해 갔지만 더러 욕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
화장품 가게 앞을 지나고, 편의점 앞을 지나고, 카페 앞을 지나도록 엄마는 계속 사람들을 붙들었다. 그러다 마침내 엄마 말을 받아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한 오십 정도 돼 보이는 아줌마였다.
“하모, 알지예. 하동 대봉 곶감 유명하다 아입니꺼.”
아줌마의 맞장구에 엄마는 울음을 터뜨렸다. 처음 보는 아줌마 품에서 엉엉 울었다. 내가 잡아끌면 엄마는 내 손을 뿌리치고 또 울었다. 아빠는 술이 확 깬 얼굴로 멀뚱하니 엄마를 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줌마가 말했다.
“내가 사천 사람이라, 하동을 좀 안다.”
나는 웃고 말았다. 서울 복판에서 하동 대봉 곶감을 아는 사람을 처음 만났는데 알고 보니 하동에서 머잖은 사천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칠 거다.
아줌마는 고맙게도 엄마를 다독여 주고 갔다.
나는 엄마 아빠를 데리고 카페에 들어갔다. 엄마 아빠는 소파 하나씩을 차지하고 코를 골았다. 두 사람은 절대 곶감 공장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다. 엄마 말마따나 곶감 파묻은 구덩이에 흙이 안 말라서, 아직 두 사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뿐이다.
잠든 엄마 아빠를 보고 있자니 나도 졸음이 밀려왔다. 게임이라도 하면서 버텨 볼 참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기태와 예지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진주 지하상가에 다녀왔는지 둘 다 인증샷을 보내왔다. 기태는 검은색 뿔테 안경 대신 무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기태 녀석, 사진만 봐서는 공부 좀 하는 애 같다. 예지는 새로 산 운동화를 찍어 보냈다. 하늘색 바탕에 분홍색 끈이 있는 운동화였다. 예지가 새 운동화를 신고 드나들 학교, 거기가 똥통일 리 없다.
자정 무렵, 카페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우린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나는 잠이 덜 깬 아빠를 대신해 엄마를 업었다. 날은 춥고 엄마는 무거웠다. 우린 결국 찜질방을 못 찾고, 허름한 모텔에 들어가 잤다. 학군 답사인지 내 입학 기념 여행인지 모를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예정대로 평안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침밥 먹을 때만 해도 똥통 학교 입학식에 뭐 하러 가느냐던 아빠는 입학식 내내 내 사진을 찍어 댔다. 입학식이 끝나자 엄마가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아들, 축하한다. 니 한 몸 불살라서 평안고 이미지 한번 바까 봐라.”
갑자기 힘이 솟는 느낌이었다. 나는 딸깍, 가스라이터로 불 켜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내 딴에는 내 한 몸 불사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는데 엄마의 눈길이 단박에 험악해졌다. 너 이 자슥,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담배만 피고 댕깄나? 엄마가 텔레파시로 일갈했다. 나는 교복 재킷을 추스르며 기태와 예지를 찾아 내뺐다.
군청색 재킷에 꽃다발을 든 애들이 여기저기서 웃고 있었다.
똥통은 없다.
<제11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 수상 소감>
너흴 응원해 / 최영희
폭설이 내리던 날, 우리 동네 중학생 여럿이 눈사람을 만들었어요. 키가 3미터에 달하고, 가슴이 커다란 글래머 눈사람이었어요. 그 애들은 진짜 예술가였어요. 하지만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예술가들을 쫓아내 버렸어요.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집에나 가라고요.
‘착하게만’ 자라던 조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어른들에게 말대답을 시작했어요. 속으로 손뼉 치며 응원했어요. 뭔가 통쾌했거든요. ‘착하다’는 말의 속살이 억압과 강요라는 걸 조카가 깨달은 거예요. 이제 우리 조카는 ‘착한 애’ 포지션을 버리고, 멋진 놈이 됐어요. 말대답을 해서가 아니라, 조금씩 ‘진짜 나’를 더듬어 가니까요.
전 청소년이 좋아요. 자기도 딱히 멀쩡하진 않으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어른들보단 청소년이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그 애들은 두려워하거든요.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가 자기 확신에 찬 어른이에요.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숨이 막혀요.
서른 후반 어른의 입장에서 청소년들에게 해 주고픈 말은 없어요. 전 그 애들과 한바탕 겪고 싶어요. 같이 웃고, 함께 대들고 싶어요. 제 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청소년들에게 답을 주는 글은 쓸 수 없지만, 그 친구들이랑 같이 뒷담화 하는 기분으로 쓰겠습니다.
제 꿈의 목록에 있던 푸른문학상을 안겨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가르쳐 주시고 믿어 주신 정해왕 선생님, 어린이책작가교실 동기들, 박효미 선배님 고맙습니다. 끝으로 내 삶의 중심인 우리 가족, 사랑합니다.
최영희
1976년에 태어났으며,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이십 대 때 잠시 소설을 쓰다가 그만두고, 그 뒤론 번역을 하고 칼럼을 쓰면서 살았다. <어린이와 문학>에 청소년소설과 단편동화가 추천되었으며, 2013년 단편청소년소설 「똥통에 살으리랏다」로 제11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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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 그 끝에 서다」/ 정인순
무장이 끝났다. 밀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완벽한 무장이 필요하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사바나란 없다. 그곳엔 늘 먹이 사슬이 존재하고, 때 아닌 스콜과 느닷없는 협곡이 나타나기도 했다.
오늘 밤, 윤재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밀림을 소리 없이 둘러봤다. 가벼운 흥분과 또 그만큼의 불안이 가슴을 핥고 지나갔다. 윤재가 불안을 털어내듯 목장갑 낀 손을 탁탁 부딪쳤다. 빨간 고무가 덧칠해진 장갑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낮게 울린 그 소리는 편의점을 되돌아와 윤재의 가슴에 가볍게 얹혔다.
12시 5분이다. 디지털시계가 소리 없이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윤재가 카운터에서 일어나 조리식품 매대 쪽으로 걸어갔다. 신선식품 냉장고에는 삼각 김밥 두 개와 샌드위치 세 개가 남아 있었다. 모두 유통기한이 5분 지난 것들이다. 방금 전 폐기 처리된 것들로 더 이상 팔아서는 안 된다. 혹여 구매를 원하는 손님이 있다 하더라도 바코드가 찍히지 않거나 모니터에 바로 경고창이 떴다. 윤재가 삼각 김밥과 샌드위치를 비닐봉지에 담았다. 그러다 문득 흘깃 뒤를 돌아봤다. 등 뒤가 뭔가에 쏘이는 듯해서였다. 윤재의 시선을 붙든 건 감시 카메라였다. 편의점에는 모두 다섯 대의 카메라가 작동 중이다. 출입문과 카운터에 각각 한 대씩, 그리고 나머지 세 대는 매장의 사각지대에 설치돼 있었다. 윤재는 감시 카메라가 늘 한곳만 바라보는 것이 안쓰럽다. 사람이나 움직이는 뭔가가 나타나지 않으면 죽은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는 정지화면 속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윤재가 그중 한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오늘도 북극곰이 나타날까?”
윤재가 감시 카메라를 응시한 채 중얼댔다. 매장의 오른쪽 벽과 정면 벽이 만나는 모서리에 설치된 녀석이다. 카메라 중 제일 한가해서인지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타는 놈이다. 그래서 윤재는 저 녀석과 자주 눈을 맞춰 준다. 녀석은 윤재가 북극곰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특히 귀를 세워 집중하곤 했다.
“근데 날씨가 쩐다 쩔어.”
“이런 날씨라면 북극곰도 움직이기 싫겠다.”
“배고픈 건 절대 못 참는 것 같던데.”
윤재의 목소리는 카메라 너머로 흡수됐다.
“그리고 그 녀석 한때 내가 입었던 교복 입고 다니더라. 요즘은 기타까지…….”
윤재가 카메라를 향해 또 다른 말을 시작하려 할 때, 출입문에 달린 종이 요란하게 딸랑댔다. 침입자다. 아니 손님이었다. 윤재가 피식 웃었다. 손님은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넥타이가 반쯤 풀린 취객이었다. 이 시간에 가장 익숙한 풍경이다. 윤재가 얼른 카운터로 향했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플라스틱 원탁에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대여섯 명 모여 있었다. 간단히 숙취를 해결하고 2차를 갈 모양이다. 샐러리맨이 냉장고 쪽으로 비틀대며 걸어갔다. 드르륵 문을 열더니 물병의 마개를 비틀었다. 몹시 갈증이 나는 눈치다. 반쯤 남은 물병과 숙취해소 음료 박스가 카운터 끝에 놓였다.
“삼만 구천 원입니다.”
스캐너가 삐 소리를 냈다.
“야, 이거 마시면 술 깨냐?” 거침없는 반말이다. 윤재는 술 깨는 음료수니 그럴 거라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말짱 헛소리인거 다 알아. 더러워서 내가 속아 준다.”
샐러리맨이 꼬부라진 말소리와 함께 카드를 탕 하고 카운터에 놓았다. 윤재는 대꾸 대신 카드를 긁었다. 한도 초과였다. 윤재가 다른 카드나 현금 없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샐러리맨이 현금을 달라고 한 건 탈세를 하기 위해서냐고 고함을 지르며 목에서 반쯤 풀린 넥타이를 잡아챘다. 넥타이가 날개 달린 뱀처럼 날아와 윤재의 목을 스쳤다. 윤재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너무 익숙한 풍경을 오랫동안 보게 되면 일종의 마비증이 일어난다. 그럴 때면 이상스런 사물에 의해서만 관심이 자극될 수밖에 없다. 특히 밀림에서는 더 그랬다. 독이 없는 물뱀이라 섣불리 생각했다가 카스카벨(방울뱀)이나 지보야(왕뱀)에게 물리면 끝장이다. 샐러리맨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카드를 집어 던지며 방금까지 썼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생떼를 썼다. 윤재는 대꾸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카드를 주워 와 다시 한 번 긁었다.
“더러워서 안 마신다.”
샐러리맨이 숙취해소 음료를 손으로 밀쳐냈다. 윤재는 이 소란을 밖에 있는 넥타이들이 알아채 주기를 바랐다.
“천 원입니다.”
윤재가 유리창을 흘깃대며 말했다. 하지만 유리 너머 사람들은 자기들 이야기에 빠져 있다. 카드를 챙긴 샐러리맨이 지갑 속을 이리저리 살폈다. 곧 샐러리맨 손에 오만 원권 지폐가 달려 나왔다. 윤재가 사만 구천 원을 거슬러 줬다.
“이 새끼가 사람을 놀려!”
샐러리맨이 반쯤 풀린 눈으로 윤재를 꼬나봤다. 윤재는 못 들은 척 검정비닐 봉지에 숙취해소 음료와 먹다 남은 물병을 챙겨서 건넸다. 그리고 만 천 원을 거슬러줬다.
“잘해라.”
샐러리맨이 으름장을 놓고 사라졌다. 넥타이가 혓바닥을 날름대는 물뱀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출입문이 방울뱀처럼 울다 조용해졌다.
윤재가 편의점에 온 지 이제 두 시간이 흐르고 있다. 윤재는 밤 열 시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다음 날 오전 일곱 시 반까지 이곳에서 보낸다. 낮 근무를 한 알바생과 교대를 하기 전, 사장은 금고를 열어 돈을 챙겼다. 언제나 그렇듯 사장이 금고를 털며 한마디 했다.
“내일은 나 찾지 마라.”
일요일이면 사장은 골프를 쳤다.
“장윤재, 좋은 밤 되길 빈다.”
“사장님도요.”
알바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난 교대 시간이었다. 천정에 걸린 TV에서 뉴스가 흘러 나왔다. 최저임금에 관한 거였다. 그 끝에 알바생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러자 골프채를 닦고 있던 사장이 한숨과 함께 진정어린 한마디를 했다.
“우리나라는 저래서 안 돼.”
윤재는 그때 안심이 됐다. 하지만 사장의 한숨은 그저 한숨일 뿐이었다. 시급은 그렇다 하더라도 식대와 누수된 물건 값을 제하고 나면 TV에 나와 인터뷰를 하던 알바생보다 못했다.
수익금을 챙긴 사장이 옆구리에 지폐가 든 가방을 끼고 편의점을 나섰다.
“잔반 처리 잘하고.”
윤재가 ‘잔반 처리’를 입속으로 중얼대다 대답 대신 고개를 꾸벅했다. 윤재는 종종 자신이 밀림에 사는 악어새라고 생각했다. 늪 속 악어의 이빨 사이를 청소해 준 대가로 동물의 사체를 먹고 사는 그런 악어새 같았다.
12시 50분, 불시에 허기가 찾아들었다. 사장이 말하던 잔반 처리를 할 시간이었다. 윤재가 비닐봉지를 들여다봤다. 김밥을 꺼냈지만 아무래도 쉽게 먹힐 것 같지 않았다. 입안이 깔깔하다. 샐러리맨이 뿌리고 간 모래를 아직도 씹고 있는 기분이었다. 속이 더부룩했다. 윤재는 컵라면이 쌓여 있는 진열장을 주욱 훑었다. 제일 싼 컵라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잠깐 망설였다. 순간 머릿속에서 700원이 빠르게 뺄셈 처리됐다. 윤재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삼각 김밥 비닐을 벗겨 냈다. 김밥에서 삭은 김 냄새가 났다. 컵라면 속 면발을 재빨리 저었다. 익숙한 조미료향이 올라왔다. 윤재가 덜 불은 면발을 서둘러 입속으로 밀어 넣고 있을 때 출입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연수 누나였다. 연수 누나는 편의점이 있는 건물 17층에서 홈쇼핑 콜센터 직원으로 일했다. 늘 야간 근무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시간에 편의점에 나타나 같은 장소에서 비슷비슷한 커피를 골랐다. 윤재는 혀에 감기지 않는 컵라면을 삼키며 프렌치카페 다섯 개를 계산했다. 아무 말 없이 커피를 챙긴 연수 누나가 밖으로 나가자 윤재는 습관적으로 모니터를 확인했다. 모두 제대로 작동되고 있었다. 정지된 듯 보이는 화면은 모니터 속에서 10초 간격으로 모습을 바꿨다. 출입구 쪽 카메라에 연수 누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윤재가 컵라면 용기를 재활용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라면 속 붉은 기름이 건더기 수프에 엉기고 있었다.
아버지는 지금쯤 저 혼자 떠들고 있는 TV 앞에 앉아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좋다, 못 먹어도 고고고!’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벽에는 더러운 작업복이 며칠째 목을 매고 있을 것이고, 방바닥에는 시큼한 막걸리 병이 뒹굴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는 일감이 없어 밖에 나간 지 한참이다.
아버지의 공장은 출발 지점에서 맴돌고 있는 배 같았다. 이제는 강의 굴곡 때문에 ‘에스티롱이스(지그재그)’가 서로 너무 접근되어, 저녁 무렵이 되었는데도 배는 아침에 출발했던 곳에서부터 겨우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중퇴했다. 윤재가 태어나기 전까지 기계공으로 여기저기를 전전했다. 그런 아버지가 주변 사람의 덕을 봤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덕을 베푼 사람은 다름 아닌 외할아버지였다. 평생을 땅만 파던 할아버지의 손끝에 돈이 생겼다. 상추가 자라던 땅에 신도시가 생겨났다. 아버지는 공장 부지를 얻고 기계를 사들였다. 윤재가 태어나고 크는 시간 동안, 아버지의 배는 넓게 펼쳐진 강을 따라 거칠게 항해했다. 집이 생겼고, 윤재의 방이 생겼다. 좁고 굴곡진 강이 나타날 때라도 아버지는 자신의 밀림에 놓인 늪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늪을 능숙하게 빠져나가는 ‘에스티롱이스’라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앞의 전망을 가려 버릴 만큼 커브가 심한 지점과 지점 사이의 항해 구간을 조심스럽게 운행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더 이상 강철을 깎지 않아도 됐다. 그 대신 사람을 부렸다. 적절한 시기에 대출을 받았고 골프를 쳤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경기가 급속히 나빠졌다. 그리고 아버지의 공장을 필요로 하던 기업들은 값싼 인력을 찾아 해외로 빠져나갔다.
지금 아버지는 골프채 대신 낡은 화투 패를 쥐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 앉아 고스톱을 친다. 아버지는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그곳에 붙들어 맸다. 손때가 묻어 반들거리는 그것들과 호흡하고 내통했으며 의기투합했다. 윤재는 어느 땐가 아버지의 손에서 그것들을 떼어 놓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모두 헛수고라는 것을 안지 오래다. 아버지는 화려한 시절의 한때를 붙들고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좋다, 못 먹어도 고고고!’를 외치고 있다.
2시 10분, 손님이 뜸한 시간이다. 윤재는 어제 다 끝내지 못한 재고 파악을 하기 위해 담배 매대로 몸을 돌렸다. 재고 조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했다. 누수된 상품의 금액은 알바생이 대신 채워 넣어야 했다. 윤재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며 꼼꼼히 담배 개수와 장부를 맞춰 나갔다. 윤재가 시계를 흘끔 쳐다봤다.
북극곰이 다른 날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윤재는 녀석을 볼 때마다 사바나에 살고 있는 동물을 모조리 떠올려 봤다. 하지만 도무지 어울리는 놈이 없었다. 녀석은 분명 성큼성큼 걷고 있지만 산만 한 덩치 때문인지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느긋하고 한가하게 걷는 것처럼 보인다. 날렵해 보이는 턱 선에 비해 순하게 보이는 얼굴이 영락없이 북극곰을 떠올리게 했다. 북극곰은 한때 윤재가 입었던 교복을 입고 다녔다. 거기다 요즘은 가방 대신 기타를 메고 다녔다. 기타를 멘 북극곰이라니…….
그때 밖에서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 피라니아 떼였다. 곧이어 출입문이 거칠게 열렸다. 피라니아들은 모두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윤재는 뻣뻣해지려는 몸을 달랬다. 그리고 카운터 아래에 있는 비상전화를 향해 발을 빠르게 놀렸다.
“움직이지 마라, 다친다!”
키가 멀대같은 녀석이 카운터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윤재가 재빨리 비상전화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멀대의 주먹이 빨랐다. 고개가 옆으로 휙 꺾인 채 윤재가 벽을 잡고 주저앉았다. 감시 카메라 모니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바람에 한눈에 화면이 들어왔다. 카메라가 흑백 영화 한편을 찍고 있었다. 매장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는 피라니아 떼가 보였다. 피라니아 떼는 밀림을 따라 흐르는 강에 산다. 강변을 따라 고기를 말리는 건어장이 이어지고 도살된 고기는 강물을 따라 피를 흘러 보냈다. 나머지 부산물과 뼛조각은 물속에서 천천히 썩어갔다. 그곳에 몰려드는 피라니아 떼는 황금빛 몸체를 번쩍이며 먹이를 향해 달려들곤 했다. 피라니아 떼는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피라니아 떼에게 잘못 물리면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 전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멀대가 금고를 거칠게 열었다. 눈앞에서 현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건 안…….”
윤재가 몸을 날렸다. 불이 번쩍하면서 귓불이 뜨거워졌다. 윤재는 벽을 붙잡고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나머지는 거스름돈 해라.”
금고에는 동전이 수북했다.
“얌마, 재수 좋은 줄 알아.”
“고롬, 고롬.”
매장을 돌아 나온 녀석들 손에 전리품이 가득했다.
“가자!”
밖을 살피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까딱했다. 순간 출입문이 조용히 열렸다. 북극곰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북극곰이 거기 서 있었다. 막 밖으로 나서려던 멀대가 편의점 바닥으로 나가 떨어졌다. 희희낙락대며 밖으로 나가려던 녀석들이 하나둘 전리품을 내던지고 북극곰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북극곰의 동작은 신중하고 또 정확했다. 윤재는 믿기지 않았다. 믿기기 않아서 옆에 있는 대걸레를 집어 들었다. ‘야 이, 새끼들아!’ 소리와 함께 앞뒤 안 가리고 대걸레를 휘둘렀다. 체면을 구긴 멀대가 벌떡 일어나다 윤재가 휘두른 대걸레에 맞아 다시 쓰러졌다. 멀대는 땅에 쓰러져 엉덩이를 쳐든 채 코를 잡고 몸을 뒤틀었다. 코피가 멀대의 볼을 적시고 있었다.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그리고 경찰관들이 매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상황 끝이었다.
“이런 씹새들, 두고 보자.”
피라니아 떼가 쌍욕을 퍼붓고 경찰과 함께 사라졌다. 대걸레를 손에 든 윤재의 무릎이 탁 꺾였다. 북극곰이 현금이 든 지갑을 건넸다. 지폐를 안은 윤재의 가슴에 땀이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뒤늦게 연락을 받은 사장이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잠을 자다 왔는지 머리에 빈 까치집이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사장은 들어오자마자 현금을 챙겼다.
“이런 피라미 떼 같은 새끼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사장이 편의점을 휘 둘러봤다. 피라니아 떼가 몰고 온 스콜은 위력적이었다. 매장 여기저기 물건이 떨어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사장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이렇게 물었다.
“못 쓰게 된 물건 많냐?”
사장은 이미 경찰서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왔을 게 분명한데 으름장이었다.
“하, 낼 골프 치는 데 지장이 많겠는데.”
사장은 윤재를 보며 어디 다친 데 없냐고 묻지 않았다. 윤재 이마에 난 상처를 흘긋 보고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후유증 생기면 자기만 골치 아파진다고 했다. 잠시 따뜻한 온기에 젖어 있던 윤재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 피라니아 떼를 쫓아낸 건우가 원망스러웠다. 이런 소리를 들을 바엔 차라리 매장에 나타난 그 녀석들을 내버려둘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쟨, 뭐냐?”
매장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던 사장이 건우를 발견하고 물었다. 역시나 경찰서에서 분명히 북극곰에 대해 듣고 왔을 텐데도 모른 척했다.
“친구예요.”
“니 친구?”
“오늘 쟤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났을 거예요.”
“큰일은 무슨! 고작 피라미 새끼들 가지고.”
사장은 계속 딴청이었다.
“쟤는 기타까지 깨져서 못 쓰게 됐어요.”
윤재가 구석에 있는 기타를 가리켰다. 북극곰이 기타를 감싸고 있는 커버를 벗겨 내고 있었다. 기타는 울림통 부분이 깨져 있었다. 보상은 그렇다 쳐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너무 당연한 거니까.
“그래? 암튼 고마운 친구네.”
사장이 깨진 기타 얘기는 못 들은 척하며 건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건우가 씁쓸한 얼굴로 사장의 손을 잡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고니까 알바비는 주던 대로 줄게.”
사장이 크게 인심 쓴다는 얼굴을 했다. 윤재는 흑백 화면처럼 돌아가던 모니터 속 영상을 사장 면전에 들이대고 싶었다. 그걸 보고도 저런 소리를 할지 의심스러웠다.
“낼 이거 가지고 병원 가라.”
사장이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윤재에게 내밀었다. 분명히 치료비 줬으니 더 이상 딴소리 말라는 뜻이다.
“에이 쌍, 빨리빨리 치워. 작살 난 물건들 하나도 버리지 말고 잘 챙겨 놔. 그 새끼들 다시는 못 그러게 왕창 독박 씌울 테니까. 알고 봤더니 엄청난 부잣집 도련님들이더구먼.”
사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똑바로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매장을 나갔다. 윤재가 사장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손에 들린 만 원이 같이 허리를 숙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북극곰이 왔다. 그것도 윤재가 제일 필요로 했던 순간에 영웅처럼 등장했다. 윤재는 진짜 한 편의 흑백 영화를 본 것만 같다. 아니 얼떨결에 북극곰과 함께 영화 한 편을 찍은 것 같았다. 윤재의 생각이 맞았다. 녀석은 진짜 북극곰이었다.
“오늘 진짜 고마웠어요.”
윤재가 북극곰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난 김건우야, 넌?”
북극곰의 목소리는 우렁우렁했다.
“장윤재요.”
“요?”
“아니, 그게 고마워서…….”
“그래서 말 높이게?”
“그건 아니고.”
예상대로 북극곰과 윤재는 열일곱 살 동갑이었다.
“야, 장윤재. 내가 뭐 좋아하는지 알지?”
그럼, 알고 말고였다. 녀석은 항상 조용히 출입문을 열고 들어와 어김없이 진열장 중앙을 향했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먹이를 챙겼다. 계산대에 나타난 녀석의 품에는 늘 그렇듯 즉석 식품과 과자가 한 아름이었다. 윤재가 감시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와 소통하듯 저 녀석은 과자와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윤재는 무심한 척 과자 봉지와 즉석 식품의 바코드를 스캔하곤 했었다.
윤재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녀석이 좋았다. 누군가 저렇게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지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윤재 자신 또한 누군가의 이름을 소리 내서 불러 본 지가 언제인지 아득했다. 윤재가 즉석 식품 코너로 달려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떡볶이랑 해물 스파게티를 꺼냈다. 냉동고에서 고기만두도 챙겼다. 그리고 또 이것저것 손에 집히는 대로 가슴에 안고 왔다.
“누굴 돼지로 아나.”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넣는 윤재를 보고 건우가 한마디 했다. 윤재는 대답 대신 웃었다.
‘넌 돼지가 아니라 설원을 활보하는 북극곰이야.’
중얼거리며 일회용 젓가락을 갈랐다. 젓가락을 손바닥 사이에 넣고 비비자 거스러미가 떨어져 내렸다. 매끈해진 젓가락은 음식을 집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윤재가 젓가락을 내밀었다. 건우가 그 젓가락으로 김 오른 떡볶이를 달게 먹기 시작했다. 윤재가 입맛을 다시며 음식 앞으로 다가들었다.
윤재는 빈 상자에 부서진 물건을 집어넣으며 깔깔하던 입맛이 다시 돌아와 다행이라 생각했다. 벌써 두 번째 상자가 채워지고 있었다. 건우 이마에도 땀이 비 오듯 했다. 깨진 물건을 치우며 건우가 드문드문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타고난 체격 덕분에 한때 유망한 유도 선수였던 건우, 그러나 지금은 기타를 치는 건우, 유도 선수에서 기타로 갈아타게 된 사연과 운동하던 때 먹던 습관이 남아 있어 지금도 배고픈 걸 못 참는다는 사연이었다. 유도 선수를 그만둔 건 누구한테 맞아서도,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도 아니라고 했다. 그저 자기답게 살고 싶어 한 선택이라고 했다. 윤재는 건우가 부러웠다. 자기다워지고 싶어 선택한 삶이라니…….
“그렇게 보지 마. 나도 충분히 힘들고 있거든.”
“충분히 힘들고 있어?”
“부모님과 여태 냉전 중이고, 나 스스로도 확신이 없어 여전히 질퍽거리고 있으니까.”
그래 그렇겠지. 쉽게 살아지는 인생이란 없는 법이니까. 윤재는 건우를 쉽게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진짜 건우를 오해할까 두려워서였다.
두 번째 상자가 반쯤 채워지고 있었다. 건우가 윤재를 툭 쳤다. 자꾸만 출입문을 서성이던 윤재는 건우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 기다려?”
연수 누나가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벌써 3시 50분이었다.
“도시락 심부름하는 사람.”
“편의점에서 배달도 해?”
건우가 의아해 했다. 연수 누나는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의 커피도 배달하고 야참으로 도시락도 배달했다. 사무실 사람들 중에서 제일 어린 모양이었다. 커피는 12시 30분쯤에, 도시락은 2시에서 3시 사이에 사러 왔다. 생리대를 사 가는 날도 많았다. 생리대는 모양이나 크기가 그때그때 달랐다.
“저 사람이야?”
건우가 눈짓을 했다. 열어 둔 출입문으로 연수 누나가 들어왔다. 여전히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곧장 도시락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연수 누나가 도시락 다섯 개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돈을 건네던 연수 누나의 눈길이 윤재의 이마에 있는 상처에 잠깐 머물렀다 거둬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무연해진 얼굴로 도시락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윤재는 괜히 이마를 만졌다.
“오토바이 녀석들 신고한 사람 같은데?”
윤재가 건우를 빤히 쳐다봤다.
“확실해, 아까 밖에서 분명히 ‘경찰서죠.’ 하는 말 들었어. 내가 그 말만 믿고 저돌적으로 돌진한 거라니까.”
윤재는 당연히 우연이라 생각했다. 연수 누나는 도시락을 사러 나오다가 피라니아 떼를 보고 경찰에 신고한 것일 뿐이다. 그래도 갑자기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우가 지핀 불씨에 연수 누나가 입김을 불어넣고 있었다.
“저 누나 좋아해?”
건우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윤재는 그게 아니라고, 그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는 느낌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거라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늘 곁에 있는 사람들보다 감시 카메라가 든든했던 게 사실이었다. 말이 필요 없으니 귀찮게 할 이유가 없었고, 무슨 얘기를 해도 토를 달지 않아서 좋았다. 윤재의 말을 듣고도 그저 묵묵히 견뎌 주고 지켜봐 줘서 더 좋았다. 그런데 북극곰과 연수 누나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윤재는 낯선 감정이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나쁘지 않았다.
새벽 5시, 짧은 여름밤이 물러나고 있었다. 편의점 주변으로 뭉근한 새벽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건우가 깨진 기타를 어깨에 메고 내일 밤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내일은 더 자세히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했다. 윤재는 그럼 모레는 내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윤재는 잠시만 카메라와 이야기하기로 했다. 밀림은 곧 밥벌이를 위해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 될 것이므로. 윤재가 카메라 앞에 섰다.
“다행이다. 역시 북극곰이었어.”
“걱정 마. 연수 누나랑 북극곰이 있어도 할 수 없는 말은 많을 거야. 어차피 인간은 그렇게 쉬운 존재들이 아니니까. 둘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말은 네게 할 거니까.”
“이제 외롭지 않을까? 그럴 리가…….”
윤재는 이번에도 카메라와 오랫동안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버지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기 때문이다.
‘당분간 못 보겠다. 일감이 생겼다고 공장에서 연락 왔다. 좋지? 아 참, 들어올 때 화투 한 벌 가져와라. 잊지 말고.’
윤재 얼굴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윤재가 카메라를 보고 ‘화투 한 벌, 화투 한 벌.’을 옹알거렸다. 윤재는 보너스 특쌍피가 여러 장 들어 있는 걸로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7시 10분, 연수 누나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퇴근 시간이었다. 택배 상자가 쌓인 곳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어, 올 때가 지났는데…….”
여전히 혼잣말이었다. 연수 누나는 퇴근 시간에 택배를 찾아갔다.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수다를 떨거나 고객들 흉을 보는 것과 달리 연수 누나는 늘 혼자였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윤재가 따로 챙겨 둔 상자를 내밀었다. 택배의 대부분은 손바닥 크기의 시디 같았다. 가끔은 액세서리 상자도 있었다. 그러고 난 다음 날이면 손톱만큼 작은 별이 귀에 달려 있곤 했다.
“그리고 이 커피 드실래요?”
이제 막 출시를 앞둔 P사의 카페라떼였다. 연수 누나가 커피와 윤재를 번갈아 쳐다봤다.
“같이 마실까?”
의외의 대답이었다. 윤재가 커피에 빨대를 꽂았다.
“이거 잘 팔리겠다.”
연수 누나가 빨대에서 입을 떼며 말했다. 단맛 때문에 뒷맛이 개운하지 않던 기존의 제품과 확실히 다르게 깔끔했다.
“설문지 있지?”
“예?”
윤재가 손사래를 쳤다. 공짜이긴 해도 절대 그런 뜻은 아니었다.
“알아, 하지만 어차피 설문조사 다 해야 하잖아.”
연수 누나는 새침데기가 아니었다. 극도로 위축돼 있고 조심스러워하는 사람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그저 생각이 좀 많은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내일 보자, 아니 오늘인가?”
설문지를 다 쓴 연수 누나가 손을 흔들고 나갔다. 출입문이 맑은 소리를 냈다. 밖은 연수 누나가 안심하고 다닐 만큼 밝아 있었다. 다행이었다.
오전 7시 30분,
무장 해제다. 윤재가 손에서 목장갑을 벗었다. 손이 조금 부어 있었다. 윤재는 고무 냄새가 남아 있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문을 열자 더운 열기가 훅 끼쳐 왔다. 하지만 처서가 지났으니 이 지긋지긋한 더위도 며칠 가지 않을 것이다. 윤재는 그런 믿음으로 천천히 한길로 나섰다. 그러다 돌아서서 자신이 방금 빠져나온 숲을 바라봤다. 그곳은 여느 날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윤재는 어쩌면 자신이 악어새가 아니라 밀림을 아름답게 만드는 아라라 앵무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 피식 웃었다.
저녁 10시가 기다려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11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 수상 소감>
씨앗의 숙명은 땅을 뚫고 나오는 일이다 / 정인순
비가 내린다.
생명을 깨우는 봄비다. 얼음이 박힌 땅이 녹기 시작한다. 하지만 포실한 땅이 되기까지 얼고 녹기를 무수히 반복해야 할 것이다. 작은 생명 하나가 꿈틀댄다. 씨앗의 숙명은 흙을 뚫고 나오는 일이다. 나도 그렇다.
긴 터널을 지나왔다.
터널은 축축하고 때론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그곳을 지나는 동안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무수히 많은 분열을 일으키곤 했다. 가슴 속에 꿈틀대던 글 씨앗이 어렵게 나를 뚫고 나왔다. 튼실한 생명이 되기까지 아직 멀었다. 햇살과 바람이 필요한 새싹처럼 나도 그렇다.
미약한 내 글이 발화할 수 있도록 터널 밖으로 불러내 준 푸른문학상 관계자 여러분과 심사위원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이야기의 심’ 식구들과 힘들어 하는 제자를 묵묵히 지켜봐 주신 안점옥 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광주대학교 문창과 배봉기 교수님을 비롯한 모든 교수님들께도 이 영광을 돌린다. 그리고 인문학 스터디 ‘꿍꿍이’ 식구들과 이화경 교수님께도 이 기쁨을 전하고 싶다. 늘 한결같이 응원 아끼지 않는 가족들에게도 또한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 출발선에 섰다.
홀로 혹은 같이, 힘들게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과 기꺼이 호흡하고 싶다.
정인순
1966년 고흥에서 태어났으며,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이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동화「또아또 아줌마」가 당선되었으며, 2013년 단편청소년소설 「밀림, 그 끝에 서다」로 제11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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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청소년소설 부문 심사소감
청소년소설의 특성이 살아 있는 작품을 기대하며 / 강숙인
2013년 제11회 푸른문학상 상반기에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작품을 응모해 왔다. 보통 상반기보다는 장편도 같이 뽑는 하반기에 작품들이 훨씬 많이 들어오는데, 이번 상반기에는 하반기 못지않게 중단편동화와 단편청소년소설 응모작이 많이 투고되었다. 아동청소년문학 작가를 꿈꾸는 지망생들이 해마다 늘어가고, 그만큼 그 열정도 뜨겁다는 의미인 것 같아 반갑기도 하고 기대도 되었다.
특히 단편청소년소설 부문은 응모 작품 편수가 지난 하반기보다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동화에 비해 그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 청소년문학이 점점 그 기틀을 잡아가는 징조 같아서 든든했다. 물론 양적으로 늘어난다고 금세 질적인 향상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경쟁이 치열하다 보면 좋은 작품을 뽑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상반기 응모작들 중에는 지나치게 소설적인 작품이 많아 조금 우려가 되었다. 청소년소설이라는 명칭처럼 청소년문학이 동화보다는 소설에 가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소설은 아니다. 소설 형식에 주 독자인 청소년에 걸맞는 정서와 개성과 특성이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청소년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장편이든 단편이든 청소년소설을 쓰고자 하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작품을 쓰기 전에 먼저 자신이 선택한 장르의 특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탐구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번 상반기에 들어온 단편청소년소설은 총 36편(18명)이었다. 그중 최영희의 「똥통에 살으리랏다」, 정인순의 「밀림, 그 끝에 서다」, 하효림의 「나의 집」, 이소라의 「어떤 구피의 죽음」, 김노란의 「밤의 별」, 김선정의 「핫스팟」이 최종심에 올랐다. 이 중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 요즘 청소년의 세태를 그렸지만 구성이 산만하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핫스팟」과 이미 많은 사람이 써 온 ‘구도’라는 주제를 국적불명 시대불명의 이야기로 평이하게 쓴 「밤의 별」이 먼저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김선정의 경우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 역시 산만하고 가독성이 없었고, 김노란의 나머지 한 편은 많은 사람이 다룬 진부한 내용에 평이한 전개여서 더 이상 논의할 거리가 없어 남은 네 편으로 최종심을 했다.
이소라의 「어떤 구피의 죽음」은 청소년 임신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임신이 요즘 청소년에게 생길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인 만큼 다루어 볼 만한 주제이기는 했다. 작품 또한 별 무리 없이 무난했지만 진지한 주제에 비해 표면적인 이야기에만 그친 점이 많이 아쉬웠다. 결말 또한 설득력이 약했고, 함께 응모한 작품이 작가의 역량을 보여 주지 않아 제외되었다.
하효림의 「나의 집」외 1편은 나름대로 잘 읽히고 완성도는 있었지만 두 편 다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나의 집」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자극적인 설정이, 다른 한 편은 애매모호한 주제가 문제였다. 심사위원의 관점에 따라 두 편 중 「나의 집」을 고르기도 하고 나머지 한 편을 고르기도 했으나 결정적으로 두 편 다 적극적으로 밀고 싶은 장점이 없는지라 탈락이 되었다.
남은 「똥통에 살으리랏다」와 「밀림, 그 끝에 서다」 두 편은 완성도가 높고 각자 개성이 살아 있어 당선작으로 뽑았다. 정인순의 「밀림, 그 끝에 서다」는 편의점을 배경으로 소통 부재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다소 소설적이긴 하지만 현실감 있는 이야기와 묘사, 소통으로 나아가는 긍정적인 결말이 좋았고 기본기도 단단해서 미더웠다. 함께 응모한 작품이 너무 어둡고 자극적이며 청소년소설보다는 성인소설에 가깝기는 했지만 작가의 역량만큼은 충분히 보여 주고 있어서 「밀림, 그 끝에 서다」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최영희의 「똥통에 살으리랏다」는 이번 응모작들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고 빼어난 작품이어서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마치 한 편의 깔끔한 단막드라마처럼 유쾌하고 재미있으면서 나름 여운이 남아서 좋았다. 능란한 사투리 구사에 살아 있는 캐릭터,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 무엇보다 지나친 반항아나 문제아가 주인공인 대부분의 응모작들과는 달리 건강하고 평범한 청소년이 등장하여 자신에게 알맞은 고민을 해학적으로 풀어 나가는 점이 신선하고 돋보였다. 함께 응모한 작품은 전혀 경향이 다른, 추리소설 같은 긴장감이 있는 일종의 SF였는데 결말이 약간 미흡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완성도가 높아 작가의 역량에 믿음이 갔다. 응모작을 두 편씩 받는 것은 작가의 역량을 보기 위함인데, 대부분 비슷한 경향의 작품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작가는 전혀 다른 경향의 작품에서 거의 동일한 완성도를 보여 주고 있어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대가 된다.
제11회 푸른문학상 청소년 단편 부문에서 두 명의 신인이 등장했다. 신인은 막 솟아난 새싹이니, 꾸준히 노력하고 더욱 정진하여 언젠가는 큰 나무로 자라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에 응모했다 당선하지 못한 다른 지망생들도 지치지 말고 더 열심히 꿈을 향해 나아가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청소년소설은 소설과 다르다는 장르상의 특성을 이해하고 작품에 임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알찬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