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남(金悌男)
[문과]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丁酉) 별시(別試) 병과(丙科) 10위(16/19)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AE40C81CB0A8B1562X0
자(字) 공언(恭彦)
시호(諡號) 의민(懿慜)
생년 임술(壬戌) 1562년 (명종 17)
졸년 계축(癸丑)【補】(주1) 1613년 (광해군 5)
향년 52세
합격연령 36세
본인본관 연안(延安)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이조좌랑, 돈녕부도정, 영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언(恭彦). 할아버지는 김안도(金安道)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김오(金祦)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권상(權常)의 딸이다. 선조의 장인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4년 의금부도사·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을 지냈다.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01년 정언·헌납·지평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602년 둘째딸이 선조의 계비(仁穆王后)로 뽑힘으로써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책비(冊妃)주 01)되자 영돈녕부사에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아 사사되었으나, 1616년에 폐모론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관참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관작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제남(金悌男))]
[진사]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3위(8/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19명 [甲1‧乙5‧丙13]
전력 현감(縣監)
관직 이조정랑(吏曹正郞)
관직 의민(懿慜)
봉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타과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3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오(金祦)
[조부(祖父)]
성명 : 김안도(金安道)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전(金銓)
[외조부(外祖父)]
성명 : 권상(權常)[進]
본관 : 안동(安東)【補】
[처부(妻父)]
성명 : 노계(盧洎)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형(兄) : 김효남(金孝男)【補】
제(弟) : 김신남(金信男)【補】(주3)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을유8월사마방목(乙酉八月司馬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532])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안항 : 『을유8월사마방목(乙酉八月司馬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532])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김안도(金安道)
[생원]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6위(46/10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AE40C548B3C4U9999X0
자(字) 백유(伯由)
본인본관 연안(延安)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전(金詮)[生]
품계 : 자헌대부(資憲大夫)
관직 : 이조판서(吏曹判書)
겸직 : 겸 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
겸직 :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출전]
『정덕8년계유8월20일생원진사방(正德八年癸酉八月二十日生員進士榜)』(여주이씨 옥산문중 전적(驪州李氏玉山門中典籍)-사마방목(司馬榜目)[보물 제524호])
윤원형(尹元衡)
[문과] 중종(中宗) 28년(1533) 계사(癸巳) 별시(別試) 을과(乙科) 2[探花郞]위(03/14)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24C6D0D615D1565X0
자(字) 언평(彦平)
졸년 을축(乙丑)【補】(주2) 1565년 (명종 20)
본인본관 파평(坡平)
거주지 한성([京])【補】(주1)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예조참의,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평(彦平). 형조판서 윤계겸(尹繼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욱(尹頊)이다.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이며, 어머니는 이덕숭(李德崇)의 딸이다.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다.
1528년(중종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3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1537년 권신인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파직, 유배되었다가 이 해 김안로가 사사되자 풀려나왔다. 그 뒤 수찬·교리·지평·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세자(世子, 뒤의 인종)를 폐위하고, 문정왕후의 소생인 경원대군 이환(慶原大君 李峘, 뒤의 명종)을 세자에 책봉하려는 모의를 진행하면서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과 알력이 생겼다. 이에 1543년에는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 하여 외척간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이 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좌부승지·좌승지·공조참판이 되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장악하게 된 대윤의 송인수(宋麟壽)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인종이 8개월 만에 붕어하고, 11세의 어린 나이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이를 계기로 득세해 예조참의에 복직되었다.
대윤 일파를 숙청하기 위해 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임백령(林百齡)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안으로는 자신의 첩 정난정(鄭蘭貞)을 궁중에 들여보내 대비와 임금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다.
일찍이 이기가 병조판서가 되려 할 때 유관(柳灌)이 이를 방해했고, 임백령은 기생첩 때문에 윤임과 다툰 일로 원한을 품었으며, 정순붕은 평소부터 사림들을 미워해 언제든지 한번 분풀이를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이에 이들과 결탁해 윤임을 제거하는 동시에 유관·유인숙(柳仁淑) 등에게까지 화가 미치도록 음모를 꾸몄다.
음모의 내용은 “임금(인종)의 병환이 위중할 때에 윤임이 장차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임금의 아우(명종) 대신 계림군 유(桂林君留)를 세우려고 하였다. 여기에 유관과 유인숙도 협력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문정왕후는 예조참의로 있던 윤원형에게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처치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그러나 처벌을 반대하는 공론이 일기도 하였다. 즉 승정원을 거치지 않아 세인의 의혹을 피할 길이 없고, 또 신하의 의리는 자기가 섬기는 사람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인데 이제 와서 그 당시 대행왕(大行王)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에게 심한 죄를 주는 것이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 그리고 왕실 외척간의 문제로 왕의 덕에 누가 된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결국 8월 29일 궁중에서 의금부에 전지를 내려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사사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윤원형은 4, 5명의 악한 무리를 심복으로 삼아 평소에 원한 있는 이들을 유배 또는 삭직해 적대 세력을 도태하였다.
을사사화 후 그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3등이 되고,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으로 개봉(改封)되어 서원군(瑞原君)에 봉해졌다.
위력과 권세가 높아지자 뇌물이 폭주해, 성안에 집이 열 여섯 채요,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는 것이 다 윤원형의 손에서 나왔다.
또, 아내를 내쫓고 기생첩 정난정을 정경부인에 봉하니, 권력을 탐하는 조신들은 그 첩의 자녀와 혼인을 하였다. 생살(生殺)의 권한을 잡은 지 20년에 사람이 원한을 품고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1546년(명종 1) 형인 윤원로와 권력을 다투었으나 윤원로가 유배되자 더욱 세력을 굳히고, 1547년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 벽서의 내용은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라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봉성군 이완(鳳成君 李玩)과 참판 송인수 및 이조좌랑 이약해(李若海)는 사형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滋)·이염(李爓)·임형수(林亨秀)·노수신(盧守愼)·정황(丁熿)·유희춘(柳希春) 등 잔존 인물을 숙청하였다.
한편, 동지춘추관사로서 『중종실록』·『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1548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55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직하고 1557년 영중추부사, 이듬해 다시 우의정, 1560년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63년 영의정에 올라 영화를 누리다가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실각해 관직을 삭탈당하고 향리로 쫓겨났으며, 강음(江陰)에 은거하다가 죽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윤원형(尹元衡))]
[생원] 중종(中宗) 23년(152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9위(69/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14명 [甲1‧乙3‧丙10]
전력 생원(生員)
관직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문과시제 논(論)
타과 중종(中宗) 23년(152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39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윤지임(尹之任)
[조부(祖父)]
성명 : 윤욱(尹頊)
[증조부(曾祖父)]
성명 : 윤계겸(尹繼謙)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덕숭(李德崇)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김안수(金安遂)
본관 : 미상(未詳) 연안(延安)
[안항(鴈行)]
형(兄) : 문정왕후(文定王后)【補】
[주 1]거주지 : 『가정7년무자2월24일생원진사방목(嘉靖七年戊子二月二十四日生員進士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174])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2]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첫댓글 김제남이 3세에 고아가 되어, 종조모인 김안수의 처 강씨께서 키우셨으며, 김안수는 윤원형의 처부(장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