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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세조실록 1권, 세조 1년 7월 24일 정유 1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겸판예조사 강맹경 등이 왜 호군 등구랑에게 구주의 토지·부락에 관하여 묻다
겸판예조사(兼判禮曹事) 강맹경(姜孟卿)·참판(參判) 하위지(河緯地)·참의(參議) 홍윤성(洪允成) 등이 왜 호군(倭護軍) 등구랑(藤九郞)을 접견(接見)하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모두 본조에 새로 취임하여 구주(九州)의 토지의 대소 및 부락(部落)의 수효를 알지 못하고 있어 이를 듣고자 한다. 너는 우리 나라에 힘을 다한 지 오래이니, 상세히 말해 주기 바란다. 또 말하고자 하는 바 있거든 꺼리지 말고 하라."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동철(銅鐵)을 관에 납부하고 면포(綿布)를 받는 것이 소원입니다. 제가 호군(護軍) 벼슬을 받았으니, 국은(國恩)이 지중한데 어찌 다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경상도(慶尙道)의 여러 포구(浦口)의 선부(船夫)는 각종 요역(徭役)이 번다하고 무거워 항상 배 위에 있지 않으니, 이는 몹시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항상 배 위에 있으면서 엄중히 경계하고 수비하게 하면, 왜인이 스스로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다시 말하기를,
"종상사무씨경(宗像社務氏經)이 왕년에 통신(通信)을 보내 왔고, 이제 종상조신씨정(宗像朝臣氏正)이 사자를 보내 왔는데, 이는 그 자손인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종상전(宗像殿)은 다만 한 조신씨(朝臣氏)의 정통파의 후손입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사무씨(社務氏)와 조신씨(朝臣氏)가 무엇이 다른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사무씨(社務氏)라고 이르는 것은 성황(城隍)의 제사를 주관하기 때문에 사무씨라 일컫는 것입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토지와 군병(軍兵)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토지는 넓지 않고 병력은 1만 명 정도 낼 수 있습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듣건대 종금(宗金)이란 자가 부호로 살고 있다는데, 어떤 사람이며 자손도 있느냐?"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부유한 사람입니다. 또 자손이 있는데, 지난해 8월에 죽었습니다. 종금이 이르기를, ‘아들 3인은 모두 조선국(朝鮮國)을 알현하였는데, 유독 말자(末子)만이 아직 알현하지 못하고 있어 장차 도서(圖書)208) 를 말자에게 줄 것이니, 조선국에 가서 알현하라.’ 하고 면전에 불러서 당부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종금에게 어서(御書)를 하사하였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모두 후대하며, 옛날 대내전(大內殿)과 소이전(小二殿)이 서로 싸울 때도 다른 부호는 병화(兵禍)를 면치 못하였는데, 종금(宗金)만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일기도(一岐島) 안에서는 누구의 세력이 강대한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일기도는 조그마한 섬입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묻기를,
"지좌(志佐)는 어느 계층의 사람이냐?"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일기(一岐)의 태수(太守)입니다. 비주(肥州) 상송포(上松浦)에 살고 있으며, 진궁(眞弓)으로 하여금 그의 관직을 대신하게 하여 이 지방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관서도(關西道)는 누구의 땅이냐? 듣건대 원교직(源敎直)이 도원수(都元帥)라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나이 겨우 30세를 지났사온데, 옛 국왕의 형의 직손(直孫)으로 구주(九州)의 군병(軍兵)을 통찰하고 있으며, 국왕의 문서가 다 이로부터 발락(發落)되고 있어서, 비록 대내전(大內殿)이라고 할지라도 역시 추앙하고 있으며, 또 겸창전(兼倉殿)이 관동(關東)에 있으면서 원교직(源敎直)과 더불어 똑같이 동서(東西)를 나누어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원지직(源持直)과 원교직(源敎直)은 족친(族親)인가? 대소의 관계는 어떤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족친이 아니며 원교직(源敎直)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라면, 원지직(源持直)은 경주 부윤(慶州府尹)과 같아서, 크고 작은 것이 본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지좌(志佐)와 원지직(源持直)과의 관계는 어떤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지좌는 원지직만 못합니다. 원지직은 1만 1천 명의 병력(兵力)을 낼 수 있으나, 지좌는 5, 6백여 명의 병력을 내는 데 불과합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원지직(源持直)와 등희구(藤熙久)와는 어떤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같기는 하나 등희구는 산고을[山郡]에 있어 양곡의 저축이 없어서 원지직만은 못합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전에 듣건대, 호자(呼子)·염진(鹽津) 주포화겸(周布和兼)은 원교직(源敎直)과 같다고 하였는데, 과연 네 말과 같다면 호자(呼子) 등은 같지 못할 것이다."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미치지 못할 정도가 아니고 아주 멀리 떨어집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진궁(眞弓)은 호자·염진 주포화겸과 비해 어떤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진궁이 비록 권세는 잡았으나, 이는 지좌(志佐)의 대관(代官)이라 호자·염진 주포화겸의 독단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원납(源納)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병력이 강한 자로서 호자와 더불어 서로 대등(對等)합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오도(五島)의 우구수(宇久守)는 어떤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비록 작긴 하나 이미 오도(五島)를 장악(掌握)하고 있어 지좌(志佐)와 서로 대등합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다다랑조신(多多郞朝臣)은 어떤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대내전(大內殿)의 형입니다. 대우전(大友殿) 땅에 우거(寓居)하고 있으면서 겸하여 그 반(半)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단후 태수(丹後太守) 원성(源盛)은 어떤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지좌와 동등(同等)한 사람입니다. 5백여 명의 병력을 낼 수 있습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원덕의영(源德義永)과 목산원실(牧山源實)은 어떤 사람이냐?"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원덕의영은 알지 못하며, 목산원실은 호자(呼子)의 대관(代官)으로서 일기도(一岐島) 안에서 부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군병은 없습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소이전(小二殿)은 어디에 살고 있느냐?"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비전주(肥前州)의 평호전(平戶殿)에 우거(寓居)하고 있는데, 비록 땅은 잃었으나 인민은 잃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근자에 듣건대, 소이전(小二殿)이 대내전(大內殿)과 더불어 서로 싸운다고 하는데, 사실이 그런가?"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그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국왕이 소이전에게 옛 땅으로 도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갔는지의 여부는 아직 자세히 모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옛날 이예(李藝)가 대내전과 소이전이 서로 싸울 때 사명(使命)을 받들고 일본(日本)으로 갔는데, 조선(朝鮮)에서 사명을 받들고 온 사람이라 하여 침범하지 않고 호송하였다 합니다. 더욱이 지금은 모든 섬에서 지성껏 그 성의(誠意)를 보이고 있으므로, 비록 일본으로 사명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적대시(敵對視)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모든 섬을 대하기를 한집이나 다름없이 해 왔고, 또 너와 같은 사람들이 힘을 다하고 딴 마음이 없음을 알고 있는 터이므로 진정 이러한 염려는 하지 않는다."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계해년209) 에 적왜(賊倭)210) 를 추쇄(推刷)할 때 제가 향도(鄕導)가 되어 구주(九州) 등지에서 많이 체포한 바 있습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생각하기를, 우리들 신임 관원이 너희들의 이러한 공로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말한 것이라고 할 것이나, 어찌 모르겠느냐?"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양국(兩國)이 영구히 통호(通好)하여 변방에 위급함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입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대하는 법은 시종 무엇이 다르겠느냐? 다만 너희들의 성의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내 생각으로는 대마도(對馬島)는 의복과 음식을 오로지 우리 나라에 의뢰해 살고 있으므로 절대로 어기고 거역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만약 조금이라도 거역하는 일이 있게 되면 기해년211) 정벌(征伐)이 이미 명감(明鑑)이 될 것이다."
하니, 등구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강맹경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병선(兵船)이 할 일 없는 상태에 있다고 말하니 기쁘다. 그러나 나라의 변방(邊方) 대비책(對備策)이란 어느 일단(一端)만이 아니므로 소홀한 형편에는 이르지 않으며, 그 사이의 방략(方略)을 일일이 열거(列擧)할 수 없다."
하니, 등구랑이 머리가 땅에 닿게 절하고 나갔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7책 73면
【분류】
외교-왜(倭)
[註 208]도서(圖書) : 조선 군대 왜인(倭人)이나 야인(野人)의 유력자(有力者)에게 내려 주던 동인(銅印).
[註 209]계해년 : 1443 세종 25년.
[註 210]적왜(賊倭) : 도둑질한 왜인.
[註 211]기해년 : 1419 세종 원년.
116.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8월 9일 임자 2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병조 판서 이계전 등이 육조 직계의 불가함을 청함에, 수창자 하위지를 하옥하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갔는데,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계전(李季甸)·참판(參判) 홍달손(洪達孫)·참의(參議) 이예장(李禮長)·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인손(李仁孫)·참판 권자신(權自愼)·형조 판서(刑曹判書) 권준(權蹲)·참의 윤사윤(尹士昀)·예조 참판(禮曹參判) 하위지(河緯地)·이조 참의(吏曹參議) 어효첨(魚孝瞻)·공조 참의(工曹參議) 박쟁(朴崝)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육조(六曹)에 전지하신 것을 엎드려 보니, 각기 그 직무(職務)를 직접 계달(啓達)하여 시행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우리 나라가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하시면서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정부(政府)로 하여금 의논하여 계달하도록 하였는데, 갑오년294) 에 이르러 태종(太宗)께서 혁파(革罷)하였다가 세종조(世宗朝) 때 다시 세워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옛 그대로 하소서."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 박원형(朴元亨)을 불러서 이계전(李季甸) 등에게 전교하기를,
"옛날에 삼공(三公)은 이치(理致)를 강론(講論)하여 나라를 경륜(經綸)하였고, 육경(六卿)은 각기 직임(職任)이 나누어져 있었으니, 내가 이 제도를 좇으려고 한다. 경들이 만약 육조(六曹)의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겠거든 사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이계전이 대답할 말이 없어 하위지(河緯地)를 돌아보고,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장차 어떻게 아뢰어야 되겠는가?"
하니, 하위지가 아뢰기를,
"주제(周制)에 삼공(三公)295) 은 항구한 이치를 강론(講論)하여 나라를 경륜하고, 삼고(三孤)296) 는 이공(貳公)으로서 교화(敎化)를 넓혔고, 육경(六卿)은 직임(職任)을 나누어 맡았는데, 삼공(三公)과 삼고(三孤)가 비록 직사(職事)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총재(冢宰)297) 가 사실은 겸임하여 다스렸습니다. 신은 원컨대, 주제(周制)를 따르소서."
"이와 같이 오활(迂闊)한 말을 누가 먼저 꺼냈느냐?"
하였다. 이계전이 황공하고 두려워하며 아뢰기를,
"하위지가 신과 더불어 한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즉시 이계전 등을 불러들였다. 임금이 하위지에게 명하여 관(冠)을 벗게 하고 이르기를,
"총재(冢宰)에게 위임한다는 것은 임금이 훙(薨)하였을 때의 제도이다. 너는 내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느냐? 또 내가 아직 어려서 서무(庶務)를 재결(裁決)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끝내 대권(大權)을 아랫사람에게로 옮겨 보겠다는 말이냐?"
하고는, 위졸(衛卒)에게 명하여 곤장(棍杖)을 치게 하였다.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가 아뢰기를,
"하위지의 죄가 비록 중하나, 군주(君主)가 신하에게 이와 같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청컨대 유사(有司)에 회부(回付)하소서."
하니, 임금이 박원형으로 하여금 머리채를 꺼두르고 끌고 나가 의금부(義禁府)에 가두게 하고는, 전지(傳旨)하기를,
"하위지(河緯地)가 대신(大臣)에게 아부(阿附)하여 나를 어린아이에 비유하고 망령되게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스스로 현명함을 자랑하여 국가의 모든 사무를 다 정부(政府)에 위임하려고 하였으니, 이를 추국(推鞫)하여 계달(啓達)하라."
하고는, 이어서 박원형(朴元亨)과 영천 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에게 명하여 가서 신문(訊問)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계전(李季甸) 등에게 이르기를,
"경 등은 하위지(河緯地)를 현량(賢良)하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만 얽매여서야 옳겠는가?"
하였다. 또 사인(舍人) 조효문(曹孝門)을 불러 당상(堂上)에게 전교하기를,
"경들로 하여금 일을 서리(署理)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권한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니, 혐의(嫌疑)하지 말라. 하위지는 내일 마땅히 극형(極刑)에 처할 것이니, 그리 알라."
하고, 드디어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이달 10일에 하위지(河緯地)를 조시(朝市)298) 에서 목베어서 후일에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을 경계하라."
하였으나, 종친(宗親)들이 하위지의 죄를 용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전지를 도로 거두고, 홍달손(洪達孫)을 불러 말하기를,
"내 친히 하위지를 신문(訊問)할 것이니, 네가 가서 데리고 오라."
하여, 홍달손이 하위지를 인솔하여 오니, 도로 가두고 국문(鞫問)하라고 명하였다. 조효문(曹孝門)이 당상(堂上)의 말을 가지고 아뢰기를,
"전지하시기를, ‘하위지가 대신(大臣)에게 아부(阿附)한다.’ 하시니, 신 등은 두려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날 밤 삼고(三鼓)에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하위지(河緯地)를 인솔하고 와서 기다리게 하였다. 다시 사고(四鼓)에 이르러서는 도로 하옥(下獄)시키고 즉일로 추국을 마치어 아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 이승소(李承召)는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말이 광명 정대하면 처음 듣기에는 좋을 것도 같지만, 그 실제를 추구하게 되면 현실과 배치(背馳)되어 마침내는 쓸 수 없는 것이 많다. 하위지의 말이 삼공(三公)에게 책임지운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세조(世祖)의 초기에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다. 노산군(魯山君) 당시에 태아(太阿)299) 를 거꾸로 잡고 이를 간신(姦臣)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군주는 그 손을 요동하지도 못하였고, 백관들은 명을 받을 겨를도 없이 턱으로 가리키고 눈치로 시켜도 감히 누가 무어라 하지 못하였으며 사람들이 정부가 있는 줄은 알아도 군주가 있는 줄은 모른 지가 오래였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그 폐단을 깊이 경계하여 먼저 정부에서 모든 일을 서리(署理)하는 법부터 폐지시켜 작록(爵祿)의 존폐(存廢)와 생살 여탈(生殺予奪)의 권한을 모두 군주에게 돌아가게 한 연후에,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정하여졌고, 상하(上下)의 심정이 편하게 된 것이다. 이는 세조가 그 형세로 인하여 기회를 타고 당시에 군주의 대권(大權)을 건진 것이니, 어찌 구구한 천견(淺見)으로 능히 헤아릴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세조의 고명(高明)한 학식으로 고금의 흥하고 망한 사유를 밝게 살폈을 것인데, 대저 어찌 삼공에게 맡길 만할 것임을 몰랐겠는가? 옛날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300) 가 ‘삼공(三公)에게 정사를 맡기지 않은 것은 역시 왕망(王莾)301) 의 난(亂)을 뒤이어서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인데, 이로 인해 정치가 대각(臺閣)에게 돌아가고 말았다.’고 말을 한다면, 이는 광무제의 죄가 아니고 계승한 자가 그 뒤를 잘 이어가지 못한 탓이다. 아! 모르는 자는 반드시 나의 이 말을 인후(咽喉)가 막혔다고 식음(食飮)을 폐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論理)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인후가 막혔을 때는 반드시 막힌 것을 먼저 치료한 뒤에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막힌 것을 다스리지 않고 음식을 먹이는 데만 힘쓰게 되면, 나는 아마도 그 막힌 것이 더욱 심해져서 마침내 전복(顚覆)하기에 이르지 않을까 두렵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4장 B면【국편영인본】 7책 77면
【분류】
정론(政論)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재판(裁判) / 역사(歷史)
[註 294]갑오년 : 1414 태종 12년.
[註 295]삼공(三公) :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
[註 296]삼고(三孤) : 소사(少師)·소부(少傅)·소보(少保).
[註 297]총재(冢宰) : 천관(天官)의 우두머리.
[註 298]조시(朝市) : 시가지.
[註 299]태아(太阿) : 중국 고대의 명검(命劍). 태아를 거꾸로 잡아 그 자루를 남에게 주는 것[倒太阿授柄]은 자기의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말함.
[註 300]광무제(光武帝) : 후한(後漢)의 시조(始祖).
[註 301]왕망(王莾) :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운 사람
117.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8월 10일 계축 4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의금부에서 하위지를 국문하여 아뢰니 용서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하위지(河緯地)를 국문(鞫問)하여 아뢰니, 하위지를 부르라고 명하고, 승지들에게 전교하기를,
"하위지의 일은 오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날 내가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바야흐로 충성을 다해 나라를 돕고 있는데도 하위지가 나에게 이르기를, ‘영상(領相)은 문종(文宗)의 자자손손(子子孫孫)을 마음을 다해 보필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것이 비록 취중(醉中)의 말이라 할지라도, 실상 나를 의심한 것이다. 또 문종조 때 내가 하위지와 더불어 《병요(兵要)》를 편찬하고는 함께 일한 자를 내가 증질(增秩)307) 해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는데, 유독 하위지만이 이를 사양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잘못이다. 이제 또 용서하지 못할 죄가 있으나, 이 사람이 본래 정직하다는 이름이 있었으니, 나는 내 과실을 듣고자 하기 때문에 특히 너그러운 법[寬典]을 좇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승지(承旨)를 시켜 하위지에게 전교하기를,
"오늘의 일로 해서 나의 과오를 말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다만 이와 같은 일은 다시 또 말하지 말라. 너는 학술(學術)이 바르지 못하니, 마땅히 속히 이를 고쳐야 할 것이다."
하고, 곧 명하여 직임에 나가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7책 78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왕실-국왕(國王) / 역사(歷史)
[註 307]증질(增秩) : 품질(品秩)을 더하는 것.
118.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8월 10일 계축 4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의금부에서 하위지를 국문하여 아뢰니 용서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하위지(河緯地)를 국문(鞫問)하여 아뢰니, 하위지를 부르라고 명하고, 승지들에게 전교하기를,
"하위지의 일은 오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날 내가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바야흐로 충성을 다해 나라를 돕고 있는데도 하위지가 나에게 이르기를, ‘영상(領相)은 문종(文宗)의 자자손손(子子孫孫)을 마음을 다해 보필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것이 비록 취중(醉中)의 말이라 할지라도, 실상 나를 의심한 것이다. 또 문종조 때 내가 하위지와 더불어 《병요(兵要)》를 편찬하고는 함께 일한 자를 내가 증질(增秩)307) 해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는데, 유독 하위지만이 이를 사양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잘못이다. 이제 또 용서하지 못할 죄가 있으나, 이 사람이 본래 정직하다는 이름이 있었으니, 나는 내 과실을 듣고자 하기 때문에 특히 너그러운 법[寬典]을 좇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승지(承旨)를 시켜 하위지에게 전교하기를,
"오늘의 일로 해서 나의 과오를 말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다만 이와 같은 일은 다시 또 말하지 말라. 너는 학술(學術)이 바르지 못하니, 마땅히 속히 이를 고쳐야 할 것이다."
하고, 곧 명하여 직임에 나가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7책 78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왕실-국왕(國王) / 역사(歷史)
[註 307]증질(增秩) : 품질(品秩)을 더하는 것.
119.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9월 1일 계유 1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헌릉·영릉에 제사하고, 상왕의 제사 참여를 의논하도록 하다
임금이 친히 헌릉(獻陵)388) ·영릉(英陵)389) 에 제사를 지내고,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과 예조 참판(禮曹參判) 하위지(河緯地)에게 전교하기를,
"모든 능(陵) 및 문소전(文昭殿)·종묘(宗廟)에 상왕(上王)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어떠한가? 현릉(顯陵)390) 과 소릉(昭陵)391) 에는 더욱 제사하지 않을 수 없다. 고제(古制)와 조종(祖宗)의 고사(故事)를 참고(參考)하여 의논하여 계달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는 사냥하는 것을 보려고 했는데, 이제 제사를 파하고 나니 처창(悽愴)한 생각이 들어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곧장 어가(御駕)를 돌렸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7책 84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註 388]헌릉(獻陵) : 태종(太宗)의 능.
[註 389]영릉(英陵) :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능.
[註 390]현릉(顯陵) : 문종(文宗)의 능.
[註 391]소릉(昭陵) :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능.
120.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9월 2일 갑술 1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병조 판서 이계전 등에게 명하여 관제를 편찬하게 하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계전(李季甸),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 예문 제학(藝文提學) 박팽년(朴彭年), 예조 참판(禮曹參判) 하위지(河緯地),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김예몽(金禮蒙)·송처관(宋處寬), 직제학(直提學) 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 직집현전(直集賢殿) 이승소(李承召), 응교(應敎) 서거정(徐居正), 수찬(修撰) 심신(沈愼)·김수령(金壽寧), 부수찬(副修撰) 정효상(鄭孝常)·성간(成侃)에게 명하여 관제(官制)를 편찬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7책 84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출판-서책(書冊)
121.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2월 16일 을묘 3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상왕의 사은 예물의 증감을 의논하다
구례(舊例)로는 상왕(上王)이 사은(謝恩)하는 예물(禮物)은 어전(御前)에는 황세 저포(黃細苧布) 30필, 백세 저포(白細苧布) 50필, 흑세 마포(黑細麻布) 1백 필, 활 흑세 마포(闊黑細麻布) 10필, 황화석(黃花席)·만화석(滿花席)·잡채 화석(雜彩花席) 각 15장(張), 석등잔(石燈盞) 4벌[事], 잡색마(雜色馬) 40필을, 황태후(皇太后)와 중궁(中宮)에는 각각 홍세 저포(紅細苧布)·백세 저포 각 10필, 흑세 마포 20필, 만화석·잡채 화석 각 10장씩이었다.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증감(增減)을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좌의정 한확(韓確), 예조 참판 하위지(河緯地)는 말하기를,
"칙서(勅書)가 있고 상사(賞賜)가 있으면, 예물(禮物)은 구례(舊例)에 의하고, 비록 칙서는 없더라도 상사(賞賜)가 있으면, 또한 이 예(例)를 따르되, 단지 말 10필만 감하게 하소서."
하고, 우의정 이사철(李思哲)·좌찬성(左贊成) 윤사로(尹師路)·좌참찬(左參贊) 강맹경(姜孟卿)·예조 판서 김하(金何)·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김황(金滉)은 말하기를,
"비록 칙서는 없더라도 상사가 있으면 구례(舊例)에 의하소서."
하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使) 이계전(李季甸)·우찬성 정창손(鄭昌孫)·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청(金廳)·이변(李邊)은 말하기를,
"칙서가 있고 상사가 있으면 구례에 의하고, 비록 상사(賞賜)는 있더라도 칙서가 없으면 태종조(太宗朝)의 예(例)에 따라 사은(謝恩)을 제(除)하되, 비록 상사는 없더라도 칙서가 있으면 사은하게 하소서."
하고, 우참찬 황수신(黃守身)은 말하기를,
"칙서가 있고 상사가 있으면 구례에 의하고, 비록 칙서는 없더라도 상사가 있으면 또한 이 예(例)를 따르되 단지 말 10필, 흑마포(黑麻布) 50필은 감하고 석등잔(石燈盞)은 제(除)하게 하소서."
하니, 이사철 등의 의논을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15면
【분류】
외교-명(明) / 무역(貿易)
122.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3월 12일 신사 1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사정전에 나아가 신숙주·권남에게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어 신숙주·권남(權擥)을 위로하니, 세자(世子)와 더불어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경녕군(敬寧君) 이비(李)·함녕군(諴寧君) 이인(李䄄)·익녕군(益寧君) 이치(李)·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창군(義昌君) 이공(李玒)·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우의정 이사철(李思哲)·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좌찬성(左贊成) 윤사로(尹師路)·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송현수(宋玹壽)·판중추 원사 이계전(李季甸)·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좌참찬(左參贊) 강맹경(姜孟卿)·호조 판서 이인손(李仁孫)·우참찬(右參贊) 황수신(黃守身)·예조 판서 김하(金何)·형조 판서 권준(權蹲)·호조 참판 권자신(權自愼)·병조 참판 홍달손(洪達孫)·공조 참판 우효강(禹孝剛)·대사헌(大司憲) 노숙동(盧叔仝)·형조 참판 박팽년(朴彭年)·예조 참판 하위지(河緯地)·이조 참판 어효첨(魚孝瞻)·도승지(都承旨) 박원형(朴元亨)·좌승지(左承旨) 구치관(具致寬)·우승지 한명회(韓明澮)·좌부승지(左副承旨) 성삼문(成三問)·우부승지(右副承旨) 조석문(曹錫文)·동부승지(同副承旨) 윤자운(尹子雲)·첨지중주원사(僉知中樞院事) 이흥상(李興商)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친히 신숙주·권남 등에게 술을 내려 주고, 또 명하여 서장관(書狀官) 이하 수종자(隨從者)에게 빈청(賓廳)122) 에서 주과(酒果)를 내려 주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7책 119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註 122]빈청(賓廳) : 조선조 때 삼의정(三議政)이 정무를 보던 곳을 말함.
123.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5월 11일 기묘 4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후궁을 들이는 것과 공신을 만나 정을 나누는 일에 대해 불윤하다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강맹경(姜孟卿)·예조 참판(禮曹參判) 하위지(河緯地)가 아뢰기를,
"신 등이 전일에 후궁(後宮)을 들일 것을 청하였는데 아직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고례(古禮)에 제후(諸侯)는 한 사람이 아홉 여자에게 장가든다고 하였는데, 그 수는 너무 많습니다. 지금 비록 고례(古禮)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하여도, 청컨대 조종(祖宗)의 예를 따르소서."
하고, 강맹경이 또 아뢰기를,
"전일에 윤사로(尹師老)가 선전(宣傳)하기를, ‘근일에 공신(功臣)들을 만나보고 잠저(潛邸)의 옛 정을 펴고 싶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대군(大君)과 공주(公主)의 창진(瘡疹)이 이미 나았고, 또 고명(誥命)은 국가의 큰 경사이니, 청컨대 풍정(豐呈)282) 을 올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수찰(手札)을 내려서 말하기를,
"제후(諸侯) 한 사람이 아홉 여자를 취하는 것은 후사(後嗣)를 넓히려는 것이니 그 뜻이 은미하다. 지금 아뢴 말이 매우 의(義)에 합당하나, 내가 본래 색(色)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또 임금으로서 〈나를〉 모시는 여자가 없음을 걱정하지 아니하니, 경 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오래도록 공신(功臣)들을 보지 못하여 마음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 경사로 인하여 한 차례 모이어 잠저 때의 옛 마음을 나누고 싶다. 그러나, 국가에 일이 많고 민간에서는 먹기 어려우니, 우선 연락(宴樂)을 정지하고 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5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31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註 282]풍정(豐呈) :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신하들이 임금에게 물건을 바치던 일.
124.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5월 26일 갑오 2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시강관 양성지가 세종조에 상정한 의주를 책으로 만들 것 등을 청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가니, 시강관(侍講官) 양성지(梁誠之)가 아뢰기를,
"여름철에 반빙(頒氷)298) 할 때에 입직(入職)하는 군사에게도 또한 얼음을 내려 주고, 사부 학당(四部學堂)은 구례(舊例)에 의하여 여름철[夏天] 도회(都會)299) 를 열고, 세종 조에 상정(詳定)한 의주(儀註)는 문신으로 하여금 잘 베껴서 책을 만드소서. 중국에서는 이문(里門)을 설치하여 도둑을 막는다고 하니, 청컨대 도성(都城)에 이문(里門)을 설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의주(儀註)는 하위지(河緯地)로 하여금 집현전(集賢殿)에 나아가 찬록(撰錄)하게 하겠지만, 이문(里門)은 설치할 수가 없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9장 A면【국편영인본】 7책 133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치안(治安) / 역사-고사(故事)
[註 298]반빙(頒氷) : 나라에서 여름철에 조관(朝官)들에게 얼음을 내려 주던 일.
[註 299]도회(都會) : 서울의 사부 학당(四部學堂)이나 외방의 향교(鄕校)에서 매 철마다 생도(生徒)들을 모아 시문(詩文)의 제술(製述)과 경전(經典)의 고강(考講)을 하던 일. 한번 도회(都會)의 50일 안에 각각 우수한 자 3인을 뽑아서 바로 회시(會試)에 나가는 특전(特典)을 주었음. 봄철에 여는 것을 춘등 도회(春等都會), 여름철에 여는 것을 하천 도회(夏天都會), 가을철에 여는 것을 추등 도회(秋等都會)라고 하였음.
125.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2일 경자 2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성균 사예 김질과 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의 불궤를 고하다
성균 사예(成均司藝) 김질(金礩)이 그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정창손(鄭昌孫)과 더불어 청하기를,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하였다. 김질이 아뢰기를,
"좌부승지(左副承旨) 성삼문(成三問)이 사람을 시켜서 신을 보자고 청하기에 신이 그 집에 갔더니, 성삼문이 한담을 하다가 말하기를, ‘근일에 혜성(彗星)이 나타나고, 사옹방(司饔房)의 시루가 저절로 울었다니,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과연 앞으로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일까?’ 하였습니다. 성삼문이 또 말하기를, ‘근일에 상왕(上王)이 창덕궁(昌德宮)의 북쪽 담장 문을 열고 이유(李瑜)306) 의 구가(舊家)에 왕래하시는데, 이것은 반드시 한명회(韓明澮) 등의 헌책(獻策)에 의한 것이리라.’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그 자세한 것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왕(上王)을 좁은 곳에다 두고, 한두 사람의 역사(力士)를 시켜 담을 넘어 들어가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윽고 또 말하기를, ‘상왕(上王)과 세자(世子)는 모두 어린 임금이다. 만약 왕위에 오르기를 다투게 된다면 상왕을 보필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모름지기 그대의 장인[婦翁]을 타일러 보라.’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그럴 리가 만무하겠지만, 가령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장인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좌의정(左議政)307) 은 북경(北京)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우의정(右議政)308) 은 본래부터 결단성이 없으니, 윤사로(尹師路)·신숙주(申叔舟)·권남(權擥)·한명회(韓明澮) 같은 무리를 먼저 제거해야 마땅하다. 그대의 장인은 사람들이 다 정직하다고 하니, 이러한 때에 창의(唱義)하여 상왕(上王)을 다시 세운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 더불어 말할 때에는 성삼문은 본래 언사(言辭)가 너무 높은 사람이므로, 이 말도 역시 우연히 하는 말로 여겼는데, 이 말을 듣고 나서는 놀랍고도 의심스러워서 다그쳐 묻기를, ‘역시 그대의 뜻과 같은 사람이 또 있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도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을 집합시키게 하고, 급하게 승지(承旨)들을 불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우부승지 조석문(曹錫文)·동부승지 윤자운(尹子雲)과 성삼문(成三問)이 입시(入侍)하였다. 내금위(內禁衛) 조방림(趙邦霖)에게 명하여 성삼문을 잡아 끌어내어 꿇어앉힌 다음에 묻기를,
"네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
하니, 성삼문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청컨대 김질과 면질(面質)하고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김질에게 명하여 그와 말하게 하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삼문이 말하기를,
"다 말하지 말라."
하고서 이어 말하기를,
"김질이 말한 것이 대체로 같지만, 그 곡절은 사실과 다릅니다."
하였다. 임금이 성삼문에게 이르기를,
"네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혜성(彗星)이 나타났기에 신은 참소(讒訴)하는 사람이 나올까 염려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그를 결박하게 하고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내가 네 마음을 들여다보기를 폐간(肺肝)을 보는 듯이 하고 있으니, 사실을 소상하게 말하라."
하고, 명하여 그에게 곤장을 치게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신은 그 밖에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같이 공모한 자를 물었으나 성삼문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나를 안 지가 가장 오래 되었고, 나도 또한 너를 대접함이 극히 후하였다. 지금 네가 비록 그 같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내 이미 친히 묻는 것이니, 네가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네 죄의 경중(輕重)도 역시 나에게 달려 있다."
하니, 대답하기를,
"진실로 상교(上敎)와 같습니다. 신은 벌써 대죄(大罪)를 범하였으니, 어찌 감히 숨김이 있겠습니까? 신은 실상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과 같이 공모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들뿐만이 아닐 것이니, 네가 모조리 말함이 옳을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유응부(兪應孚)와 박쟁(朴崝)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명하여 하위지를 잡아들이게 하고 묻기를,
"성삼문이 너와 함께 무슨 일을 의논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변(星變)의 일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전날 승정원(承政院)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변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변의 일로 인하여 불궤(不軌)한 일을 같이 공모했느냐?"
하였으나, 하위지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이개에게 묻기를,
"너는 나의 옛 친구였으니,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네가 모조리 말하라."
하니, 이개는 말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즉시 엄한 형벌을 가하여 국문(鞫問)함이 마땅하나, 유사(有司)가 있으니, 그들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하고, 여러 죄수가 나간 다음에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에 이유(李瑜)의 집 정자를 상왕(上王)께 바치려고 할 때에 성삼문이 나에게 이르기를, ‘상왕께서 이곳에 왕래하게 되신다면 참소하고 이간질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기에 내가 경박하다고 여기었더니 지금 과연 이와 같구나."
하였다. 임금이 윤자운(尹子雲)을 노산군(魯山君)에게 보내어 고하기를,
"성삼문은 심술이 좋지 못하지만, 그러나 학문을 조금 알기 때문에 그를 정원(政院)에 두었는데, 근일에 일에 실수가 많으므로 예방(禮房)에서 공방(工房)으로 개임(改任)하였더니, 마음으로 원망을 품고 말을 만들어내어 말하기를, ‘성왕께서 이유(李瑜)의 집에 왕래하는 것은 반드시 가만히 불측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하고, 인하여 대신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제 방금 그를 국문(鞫問)하는 참입니다."
하니, 노산군이 명하여 윤자운에게 술을 먹이게 하였다. 공조 참의(工曹參議) 이휘(李徽)는 사실이 발각되었다는 말을 듣고, 정원(政院)에 나와서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성삼문의 집에 갔더니, 마침 권자신(權自愼)·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자네는 시사(時事)를 알고 있는가?’ 하고 묻기에, 신이 ‘내가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성삼문이 좌중을 눈짓하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잘 생각하여 보게나.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그 의논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였더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박중림(朴仲林)과 박쟁(朴崝) 등도 역시 알고 있다.’ 하기에, 신이 곧 먼저 나와서 즉시 아뢰고자 하였으나,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즉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으로 나아가서 이휘를 인견하고, 다시 성삼문 등을 끌어들이고, 또 박팽년 등을 잡아와서 친히 국문하였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당여(黨與)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신의 아비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까지도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 시행하려던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성승·유응부·박쟁이 모두 별운검(別雲劍)309) 이 되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 시기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제 연회에 그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장소가 좁다 하여 운검(雲劍)을 없앤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어전(御殿)에서는 2품 이상인 무반(武班) 2명이 큰 칼을 차고 좌우에 시립(侍立)하게 되어 있다. 이날 임금이 노산군과 함께 대전에 나가게 되고, 성승·유응부·박쟁 등이 별운검(別雲劍)이 되었는데, 임금이 전내(殿內)가 좁다고 하여 별운검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성삼문이 정원(政院)에 건의하여 없앨 수 없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다시 전내(殿內)를 살펴보게 하고, 드디어 〈별운검이〉 들어가지 말게 하였다.】 후일에 관가(觀稼)310) 할 때 노상(路上)에서 거사(擧事)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개에게 곤장을 치고 물으니, 박팽년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金文起)만이 〈공초(供招)에〉 불복(不服)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모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좌참찬 강맹경(姜孟卿)·좌찬성 윤사로(尹師路)·병조 판서 신숙주(申叔舟)·형조 판서 박중손(朴仲孫) 등에게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호조 판서 이인손(李仁孫)·이조 참판 어효첨(魚孝瞻)과 대간(臺諫) 등과 함께 같이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유성원(柳誠源)은 집에 있다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7책 134면
【분류】
변란-정변(政變) / 사법-재판(裁判) / 과학-천기(天氣) / 왕실(王室)
[註 306]이유(李瑜) : 금성 대군(錦城大君).
[註 307]좌의정(左議政) : 한확(韓確).
[註 308]우의정(右議政) : 이사철(李思哲).
[註 309]별운검(別雲劍) : 운검(雲劍)을 차고 임금을 옆에서 모시던 무관(武官)의 임시 벼슬.
[註 310]관가(觀稼) : 임금이 농작물의 작황(作況)을 돌아보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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