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천 홍범도(汝千 洪範圖)
출생일시 1868(고종 5), 평양
사망일시 1943
국적 한국
요약
의병전쟁 및 항일독립전쟁기의 대표적 장군으로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민족주의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무장투쟁노선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891년경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2년간 상좌로 있으면서 지담(止潭)으로부터 학습하고 승군(僧軍)의 활동 등에 대해 들으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1907년 의병을 모집 투쟁하다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1920년 청산리에서 일본군37여단 1만 5,000여 명을 맞아 싸워 3,000여 명을 살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으로 옮겨져 연금으로 생활했다. 1943년 10월 크슬오르다에서 사망했다.
일명 범도(範道). 청년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집에 기거했다. 1883년(고종 20) 평양우영(平壤右營)에서 나팔수로 복무하다 탈영하여 황해도 수안 총령(蔥嶺)의 제지소에서 3년간 일했다. 1891년경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2년간 상좌로 있으면서 지담(止潭)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승군(僧軍)의 활동 등에 대해 들으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강원도 철령(鐵嶺)에서 소규모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이듬해 14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 석왕사(釋王寺)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석(柳麟錫) 의병과 연합하여 싸웠다.
을미의병 해산 이후 체포를 피해 돌아다니다 북청에서 산포수(山砲手) 생활을 하면서 소규모 항쟁을 계속했다.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일제는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만들어 항쟁의 확산을 저지하려 했다. 이를 계기로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 등과 함께 북청 후치령(厚峙嶺)에서 포수·농민들을 모아 다시 기병했다.
처음에는 600~700명의 부대원들을 이끌고 기동 유격전술을 펼쳤으나, 일본군이 대규모 토벌 공세에 나서자 소규모 부대를 중심으로 한 매복·기습 전술로 전환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7년 12월 삼수 전투에서 일본군 함흥·북청·갑산 수비대를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이원·단천·혜산 등지에서 37회에 걸친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진회원(一進會員)들을 사주하여 아내 이씨(李氏)를 체포·처형했다.
이후 갑산·무산·종성에서 전투를 벌이다 국내에서의 항쟁의 한계와 근거지 건설에 기반을 둔 지속적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느껴 지린[吉林]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해외무장투쟁
1911년 망명 직후 서간도 만간구(萬干溝)에서 차도선·김택룡(金澤龍)·홍사현(洪思鉉) 등과 함께 의병 중심의 친목회를 조직하여 독립군으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두·광산·농업 노동자로 일하는 한편 노동회(勞動會)를 조직, 임금의 일부를 군자금으로 비축했다. 아울러 이종호(李鍾浩)·이상설(李相卨) 등이 중심이 된 권업회(勸業會)의 사찰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니콜리스크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했다. 1918년 8월 일본군이 러시아 10월 혁명을 탄압하고 백위파(白衛派)를 지원하면서 한인(韓人) 민족운동을 말살하려고 연해주 지방에 침입하자, 홍범도는 김만겸(金萬謙) 등이 주축이 되어 건설한 대한국민회의(大韓國民會議) 간도·훈춘[琿春] 지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100여 명의 대원을 이끌고 적군(赤軍)과 함께 반일·반백위군 투쟁을 벌였다.
1919년 우수리스크를 거쳐 중국령 따차무정재[草帽頂子]·하마탕[蛤莫塘]을 경유하여 국내로 진군하면서 부대를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으로 개칭·재편했다. 같은 해 8~10월 혜산진·만포진·자성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다음해 3~6월 온성·종성 일대로 진격했다. 이어 1920년 5월 28일 봉오동에서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武都督府),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부대 및 신민단(新民團) 독립부대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고 북로제일군(北路第一軍) 사령부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6월4일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중대병력을 궤멸시키고 다음날 후안산(後安山)에서 적 대대병력을 격파했다. 이어 추적해오는 일본군 19사단 병력을 7일 새벽 봉오동으로 유인, 매복전술로 적 300여 명을 사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대한독립군의 근거지를 옌지 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이도구(二道溝)로 옮기면서 같은 해 9월 신민단·의군부(義軍府)·국민회군·한민회군(韓民會軍) 등 800여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김좌진(金佐鎭) 부대, 최진동 부대와 연합하여 청산리의 백운평(白雲坪)·완루구(完樓溝)·천보산(天寶山)·고동하곡(古洞河谷) 등에서 일본군 37여단 1만 5,000여 명을 맞아 싸워 3,000여 명을 살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제는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해 독립군 토벌에 끌어들이는 한편,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 대병력을 투입하여 보복했다.
일제의 학살 만행 및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 공세로 인해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말까지 안투[安圖]를 거쳐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여 재집결했다. 1921년 4월 이만에서 노령·만주의 36개 독립운동단체가 모여 창설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에서 부총재로 선출되었다. 1921년 3월 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혁명군정회의(臨時高麗革命軍政會議)를 조직하고 만주·노령의 독립군부대들을 자유시(自由市)로 불러들였다.
같은 해 6월 브라고예시첸스크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상해파(上海派)를 지지하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측과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는 소련 적군과의 충돌로 인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으로 많은 독립군부대가 피해를 입었으나, 그의 부대는 엄격한 중립을 지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21년 11월 독립군부대들이 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의해 소비에트 적군 제5군단 직속 한인 여단으로 개편되자, 그 대표로서 레닌과 면담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또 유동열(柳東說)·김만겸·김표돌 등과 함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오하묵(吳夏默)측에 가담했다. 다음해 1월 하순에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인대표로 참석했고, 브라고예시첸스크에서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이 통합하여 조직한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에 참여하여 최고려(崔高麗)와 함께 고등군인징모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22년 볼셰비키 정권이 일본의 시베리아 철수 조건으로 내건 한인독립군의 해산을 받아들여 이를 명함에 따라 이후 무장투쟁 활동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말년
1923년 연해주 이남 구역 차우돈카에서 농업 콜호스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1927년 정식으로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으로 옮겨져 연금으로 생활했다. 1943년 10월 크슬오르다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만주독립군의 얼을 기리고 이어받아 나라를 부강시켜 조국통일을 이루고 일본제국을 종식시켜 세계에 평화의 종을 울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