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란타우 트레일-1
길은 물처럼 흘러가고, 그 길끝에는 부처의 향기 넘치고
홍콩 트레킹 이틀 째, 우리는 아침 일찍 란타우섬으로 향한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아침식사도 란타우섬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이른 아침 6시 30분에 호텔에서 출발했는데도 벌써부터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홍콩섬에 있는 중심가 센트럴(中環)역에서 지하철을 환승하여 종점인 퉁충(Tung Chung, 東涌)으로 향한다.
지하철은 란타우섬에 들어서면서부터 지상을 달린다. 란타우섬에 솟은 수많은 산은 아래쪽은 삼림이 울창하지만
봉우리 부위는 푸른 초원을 이루고 있어 제주도 오름 같은 느낌이 난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가면서 오전만이라도 비가 그치기를 기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저녁부터
홍콩지역에는 상당한 비가 내렸고, 우리가 호텔을 출발할 때에도 빗방울이 오락가락했기 때문이다.
아열대 기후인 홍콩은 여름이면 한 달에 20일 가까이 비가 내린다.
홍콩의 여름비는 하루 종일 내리지 않고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란타우섬은 총 260여 개의 섬을 가지고 있는 홍콩에서 가장 큰 섬으로 섬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란타우섬에는 홍콩국제공항(첵랍콕공항)이 자리하고 있다. 1998년 란타우 섬에 첵랍콕국제공항이 들어선 이후
해변 휴양지인 디스커버리 베이(大白灣), 홍콩 디즈니랜드, 세계 최장 케이블카인 옹핑 360 등 레저 시설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그 전까지는 정치적 망명자들이나 범법자들이 많은 홍콩 내 불모지였던 란타우섬은 이제 쾌적한 환경을 자랑하는
신도시로 각광받고 있다.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고 한적하며, 산과 해변으로 이어지는 자연경관이 빼어난 섬이다.
지하철 종점인 퉁충역에 도착하니 홍콩시내로 출근하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란타우섬 거주자 6만 명 중
대부분이 이곳 퉁충 신도시에 거주한다. 근래에 신도시로 개발된 퉁충에는 고층 아파트와 상가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다.
지하철 역사를 이루고 있는 복합건물과 주변에는 상가와 식당들이 즐비하다. 우리는 역사 앞 레스토랑에서
빵과 소시지, 우유 등으로 아침식사를 하고서 퉁충역 앞 버스터미널에서 팍쿵아우로 가는 시내버스에 오른다.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산봉우리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버스는 산비탈을 구불구불 돌고 돌아
고갯마루에서 우리를 내려준다. 해발 300m 쯤 되는 팍쿵아우(伯公坳)는 란타우 섬 제1봉 봉황산과
제2봉 대동산을 이어주는 고개다. 팍쿵아우에 내리자마자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고갯마루에서는 ‘봉황산 4.5km’라 쓰인 이정표가 가야할 길을 제시해준다.
1984년 오픈한 란타우 트레일은 란타우섬을 순환하는 약 70km에 달하는 코스로 ‘홍콩의 허파’라 불린다.
란타우 트레일은 12구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오늘 우리가 걷게 될 구간은 그중 3구간인 봉황산 트레일 코스다.
산길로 접어들자 홍콩섬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열대성 상록활엽수들이 숲을 이뤄 상큼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큰 나무 아래에는 고사리와 비슷하게 생긴 고비가 잎을 활짝 피운 채 땅을 푸르게 덮고 있다.
줄기가 큰 나무에는 앙증스런 잎을 가진 콩란이 딱 달라붙어 건강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콩란은 나무줄기나 바위에 줄기를 뻗어 살아가는 전형적인 기생식물이다.
중간 중간 쉼터들이 있어 잠시 쉬었다 가기도 한다.
오른쪽으로 퉁충의 고층건물과 홍콩국제공항이 내려다보인다. 국제공항 뒤편 바다 건너로
구룡반도 신계지역의 산들이 하늘과 경계를 이룬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산은 점차 나무가 적어지고 초원지대로 바뀐다.
초원을 이룬 산줄기는 자신의 곡선미를 그대로 드러내준다. 붕긋붕긋 솟은 봉우리들은
어머니의 젖가슴마냥 부드럽고 포근하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봉황산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을 올라야하는
만만치 않은 길이 이어진다. 봉황산은 팍쿵아우에서 올라갈 때 다가오는 모습만 부드럽고,
다른 방향에서는 가파르고 뾰족하게 보인다.
길은 봉황산으로 연결된 능선을 따라 작은 봉우리들을 넘고 또 넘는다.
란타우섬 남쪽해변은 작은 만(灣)과 해안선을 이루고, 바다위에서는 작은 섬들이 재롱을 부린다.
구불구불 이어가는 길은 물이 흘러가듯 유연하다. 그래서 산길은 정답고 예쁘다.
길은 정상인 봉황산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점점 인간세계와 멀어지고 선계(仙界)에 가까워진다.
등 뒤에서는 우리가 출발했던 고개인 팍쿵아우(伯公坳)를 사이에 두고 이곳 봉황산과 쌍둥이처럼
우뚝 서 있는 대동산(Sunset Peak, 869m)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 대동산 역시 구름에 뒤덮여
좀처럼 정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이 우리의 숨을 헐떡거리게 한다.
봉황산 남쪽 아래로 펼쳐지는 바다는 여전히 장관이다. 좁고 깊게 만을 이룬 쉬하우완(水口灣)과
뱀의 머리처럼 뻗어나간 산줄기가 어울리고, 바다에는 10여 개의 작은 섬들이 군도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한편의 아름다운 풍경화다. 정상까지는 초원을 걷는 길이라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인다.
동쪽과 서쪽에서는 봉황산과 대동산 등 높은 산들이 산군(山群)을 이루고, 남쪽은 작은 섬과 광활한 바다가,
북쪽은 퉁충의 고층건물들과 홍콩국제공항이 다가온다. 남쪽 바다에서는 종종 작은 배들이
하얀 물길을 내면서 지나갈 뿐 한적하고, 북쪽에서는 홍콩국제공항을 오가는 비행기들이 분주하다.
푸른바다는 시원하고, 초원을 이루고 있는 산은 곡선미를 이루어 유려하다.
정상으로 통하는 길은 초원 가운데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산줄기 양쪽으로는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정상 근처 산비탈은 기암괴석이 숭엄한 기운을 뿜어내기도 한다. 봉황산에서 바다를 향해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몇 개의 작은 봉우리를 이룬 후 바다로 빠져드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정상을 향하여 한참을 걷고 있는데 그동안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봉황산 정상이 갑자기 구름을 벗고 눈앞에 등장한다.
완전체로 등장한 봉황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신성한 기운이 느껴진다. 봉황산(鳳凰山)이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다.
봉황산 정상에 올라가면 우리도 신선이 될지 모르겠다. 뒤돌아보니 건너편 대동산도 구름을 벗었다.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다. 신속하게 우의를 입었지만 바람은 세차다.
사람을 날려버릴 것만 같은 기세다. 비가 내리기 전 잠시나마 이국땅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봉황산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정상에 도착했으나 한치 앞이 안 보인다. 정상에 오르면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시야는 오리무중이다.
짙은 구름 속에서도 봉황산(鳳凰山, Lantau Peak, 934m)라 쓰인 표지목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란타우섬 최고봉인 봉황산은 홍콩에서는 구룡반도의 대모산(大帽山, 957m)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정상이 구름으로 뒤덮이지 않았다면 그동안 보여주었던 풍경뿐만 아니라 북서쪽 산중턱에 자리 잡은
포린사와 청동불상까지 내려다볼 수 있었겠지만 오늘은 상상만 할 따름이다.
화창한 날이면 멀리 마카오도 보인단다. 비는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