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고승전(高僧傳) 제6권-석혜교
2. 의해 ③
1) 석혜원(釋慧遠)
혜원의 성은 가(賈)씨이며 안문(雁門)의 누번(婁煩)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주옥같은 문장 솜씨가 뛰어났다. 열세 살에 외삼촌인 영호(令狐)씨를 따라 허ㆍ락(許洛:許昌과 洛陽)에 유학하였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여러 서생들을 위하여 널리 6경(經)을 종합해 연구하였다. 게다가 『노자』와 『장자』에도 빼어났다.
성품과 도량이 넓으며 기풍과 조감(照鑑)이 밝고 빼어났다. 비록 오래 공부한 선비로서 뛰어난 이라 할지라도, 그의 깊은 조예에 감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스물한 살에 강남을 건너 범선자(范宣子)에게 나아가, 함께 세상을 피해 숨자고 약속하려 하였다. 마침 석호(石虎)는 이미 죽었고 중원은 난리가 일어나, 남쪽 길이 막혀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당시에 사문 도안(道安)이 태행산맥의 항산(恒山)에 절을 세웠다. 불법을 널리 찬양하여 명성이 매우 뚜렷하게 알려졌다. 혜원은 마침내 그를 찾아가 귀의하였다. 한번 만나자마자 공경을 다하여 진정한 나의 스승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도안의 『반야경』 강의를 듣고 툭 트이면서 깨달아 곧 탄식하였다.
“유학이나 도가 등의 구류(九流)는 모두가 쌀겨와 술지게미에 지나지 않는다.”
곧 아우인 혜지(慧持)와 함께 비녀[簪: 선비의 상투에 꽂는 비녀]를 팽개치고, 머리를 깎고서 목숨을 바쳐 수업하였다. 이미 불도의 문에 들어와서는 우뚝 드러나 무리에서 벗어났다. 항상 불법의 벼리를 모두 거둬들이고자 대법(大法: 대승법)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외우며 간직하기를 밤으로 낮을 이었다.
가난한 나그네라 자본이 없어 늘 따뜻한 비단옷을 입지 못하였다. 그러나 혜원과 혜지, 두 형제가 삼가하고 공손하여 시종 게으르지 않았다. 사문 담익(曇翼)이 늘 등불과 촛불의 비용을 공급해 주었다. 도안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담익도사는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인물이다.”
혜원은 지혜가 전생의 인연에 바탕을 두었고, 수승한 마음을 오랜 세월[曠劫]토록 일으켰다. 그러므로 정신이 빼어나게 뛰어넘고, 근기의 조감(照鑑)은 멀고도 깊었다. 도안은 항상 그를 찬탄하였다.
“우리 동쪽 중국에 도를 유통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혜원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나이 스물네 살에 곧 강설의 자리에 나아갔다. 어느 날 어떤 손님이 강론을 듣다가 실상(實相)의 뜻을 질의하여, 혜원과 문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 손님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 나고 어두운 부분이 더욱 많아졌다. 혜원이 곧 『장자(莊子)』의 내용을 인용하여 비슷하게 연계시켰다. 이에 의혹을 품던 이가 환하게 깨달았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도안은 세속의 책을 덮어두지 않았으면 하는 혜원의 바람을 특별히 들어주었다.
도안의 제자에 법우(法遇)ㆍ담휘(曇徽)가 있었다. 모두 풍채와 재주가 환하게 빛나고, 지조와 업이 맑고 민첩하였다. 둘 다 혜원을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그 후 도안을 따라 남쪽 번면(樊沔)지방을 떠돌아다녔다.
위진(僞秦, 符堅이 세운 나라)의 건원(建元) 9년(373)에 진(秦)의 장군 부비(符丕)가 양양(襄陽)을 침략하여 합병하였다. 도안은 주서(朱序)에게 끌려가서 길을 떠날 수 없었다.
이에 마침내 대중을 나누어 각기 갈 곳을 따라 떠났다. 떠나는 길에 임하여 모든 장로대덕[長德]들은 도안으로부터 가르침과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혜원은 한 마디의 가르침도 받지 못하였다. 이에 꿇어앉아 말씀드렸다.
“저에게만 홀로 훈계와 도움의 말씀이 없으십니다. 저는 사람의 예가 아닌 성싶어 두렵습니다.”
도안은 말하였다.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 어찌 다시 근심할 일이 있겠는가?”
혜원은 이에 제자 수십 명과 함께 남쪽 형주(荊州)로 가서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그 후 나부산(羅浮山)으로 가고자 심양(潯陽)에 이르렀다. 여산(廬山)의 봉우리가 맑고 고요해 마음을 쉴 만하다 싶어서, 비로소 용천정사(龍泉精舍)에 머물렀다. 이곳은 물과의 거리가 크게 멀었다. 혜원이 곧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만약 이곳이 우리가 깃들어 머물 만한 곳이라면, 곧 썩은 땅에서라도 샘물을 뽑아 주십시오.”
말이 끝나자 맑은 물이 솟아 나와 금방 개울을 이루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심양 땅에 큰 가뭄이 들었다. 그가 멀리 못 옆으로 가서 『해룡왕경(海龍王經)』을 읽었다. 그러자 갑자기 거대한 뱀이 못에서 공중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큰 비가 내렸다. 그 해는 풍년이 들었다. 그러므로 그대로 거처하던 곳의 호로 삼아 ‘용천정사(龍泉精舍)’라 하였다.
당시 사문 혜영(慧永)이 서림(西林)에 자리 잡았다. 혜원과는 동문제자로 예전부터 친한 사이였다. 그가 혜원에게 요청하여 마침내 함께 머물렀다. 이때 혜영은 자사(刺史) 환이(桓伊)에게 말하였다.
“혜원은 바야흐로 불도를 널리 펼칠 만한 인물입니다. 지금 문도의 권속들이 이미 광범해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바야흐로 많습니다. 그러나 빈도가 깃들어 있는 곳은 비좁아서 서로 거처할 만한 곳이 못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환이는 곧 혜원을 위하여 다시 여산(廬山)의 동쪽에 승방과 불전을 건립하였다. 동림사(東林寺: 여산의 東南方에 있는 大刹ㆍ淨土宗의 本據地)가 그곳이다.
혜원이 처음 정사를 조성할 때 산수의 아름다움을 훤히 다하였다. 뒤로는 향로봉(香爐峯)을 등에 업고, 옆으로는 폭포가 떨어지는 구렁을 끼었다. 바위에 의지하여 기단을 쌓고, 소나무로 집을 마름하고 얽었다. 맑은 개울물이 섬돌을 에워싸고, 흰 구름이 방에 가득하였다.
다시 절 안에 따로 선림(禪林)을 설치하였다. 빽빽한 숲에는 아지랑이가 엉키고, 널찍한 바위자리에는 이끼가 꼈다. 보고 밟는 모든 사람들은 다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엄숙해졌다.
혜원이 듣기에 천축국에 부처님의 영상(影像)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께서 예전에 독룡(毒龍)을 교화하실 때 남기신 영상이다. 북천축국(北天竺國) 월지국(月氏國) 나갈가성(那竭呵城)의 남쪽 옛 신선의 석실 속에 있으며, 지나는 길은 고비 사막에서 서쪽 15,850리에 있다. 매양 기쁜 감회가 가슴에 교차하여, 뜻을 세워 우러러 그 영상을 늘 한번 보고자 하였다. 때마침 서역의 도사가 있어 그 빛나는 모습을 말해 주었다.
혜원은 이에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 곳에 감실(龕室)을 만들어 지었다. 미묘한 솜씨를 지닌 그림쟁이를 시켜 담담한 채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빛깔이 허공을 쌓은 듯하고, 바라보면 연가나 안개와도 같았다. 빛나는 형상이 밝고 아름다워, 숨어 있는가 하면 뚜렷이 나타났다. 혜원이 이에 곧 명(銘)을 지었다.
하나
넓고도 크도다. 부처님이여,
진리는 현묘하나 이름이 없어라.
신이 되어 변화하시어
그림자 떨어져 몸을 떠났네.
층층바위에 빛으로 돌아와
빈 정자에 그림자로 엉킨다.
그늘졌어도 어둡지 않고
어둘수록 더욱 밝아져
하늘하늘 허물 벗은
모든 신령의 조종이라
감응 같지 않아
자취 아득하게 끊어졌네.
둘
아득하게 빈 우주에
권하거나 장려하지도 않아
맑고 빈 듯한 모습 그려내어
허공을 쓸어 모습을 전하네.
상호 갖추어지고 몸은 미묘하여
치솟는 자태 스스로 밝다.
흰 터럭은 빛을 토해
어두운 밤중에도 상쾌하다.
정성이 사무치면 곧 응하고
정성으로 두드리면 메아리 일으키네.
남기신 음성 산굴에 머물러 있어
깨달음의 나루에서 남몰래 완상하네.
만남의 기약이야 있다지만
전생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공덕이런가.
셋
발꿈치 돌려 공경함을 잊고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아
해와 달과 별은 빛을 감추어
온갖 모습들 한 빛깔이라네.
뜰과 집에는 어둠이 자욱하여
돌아갈 길 헤아릴 수 없어라.
텅 비움으로 이를 깨닫고
힘으로 이를 열어
지혜의 바람 비록 멀어도
티끌 번뇌 쉬게 하니
성인의 그윽한 살핌이
누가 그 극치로 부채질하나
넷
희유한 음성 멀리 흘러와
마침내 동방을 돌아보시니
기풍을 기뻐하고 도를 사모하여
우러러 현도를 모범으로 삼는다.
붓끝의 오묘함 다하여
흰 비단에 미묘하게 운용하고
텅 비운 경지 기탁하니
하늘의 안개처럼 어리어리.
자취는 참모습을 본떴으니
진리는 그럴수록 깊어간다.
기묘한 흥취에 옷깃을 열고
상서로운 바람 길을 인도하네.
맑은 기운 마루처마를 돌고
어둠이 교차한 아직 먼 새벽
흡사 신묘한 용모를 빼닮으니
공경한 만남을 방불케 하네.
다섯
이에 명하고 이를 그려서
무얼 영위하고 무얼 구하겠냐만
신께서 들어주시어
그대 닦음 비추어
이 티끌세상의 자욱에다
저 그윽한 흐름 비추기를 바라노라.
맑고 신령한 못에서 양치질하고
화기를 마셔 부드러움에 이르리.
허공을 비추고 가려 감응하여
지혜 내리시어 마침내 두루하리.
깊은 그리움 남몰래 전하며
신의 노님 그윽이 상상하여
목숨 다하도록 뵐 수만 있다면
온갖 근심 길이 떠날 터인데.
또한 예전에 심양의 도간(陶侃:東晋의 名將)이 광주(廣州)에 주둔하러 지나갈 때의 일이다. 어떤 어부가 바다 가운데서 저녁마다 신비한 광명이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열흘이 지나자 더욱 그 광명이 크게 일어났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도간에게 아뢰니, 도간이 그곳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불상에서 일어나는 광명이었다.
이에 그는 이 불상을 영접해 돌아와서 무창(武昌)의 한계사(寒溪寺)로 보냈다. 한계사의 주지인 승진(僧珍)이 어느 날 하구(夏口)에 갔다가 밤에 꿈을 꾸니, 절이 화재를 만났다. 이 불상을 모신 집만 홀로 용신(龍神)이 에워쌌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승진이 달려서 절로 돌아와 보니, 절은 이미 모두 불타버리고, 오직 이 불상을 모신 집만 남았다.
그 후 도간이 주둔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 이 불상에 위엄스러운 영험이 있다고 하여 사자를 보내어 영접하였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불상을 들어 강가에 이르러 배에 올려놓자, 배가 거푸 뒤집혀 침몰하였다.
이에 사자는 무섭고 두려워 돌아왔고, 끝내 불상을 싣고 오지 못했다. 도간은 어려서부터 씩씩한 무인의 기질이 뛰어났으나, 평소에 신심이란 거의 없었다. 그런 까닭에 형주와 초나라 일대에서 이를 빗대어 노래가 불려졌다.
도간은 오직 검의 영웅
불상은 신령함을 드러내네.
구름이 진흙땅 위로 날아가니
아득함이 어찌 그리도 멀고 멀까?
정성으로는 이룰 수 있어도
힘으로 부르기는 어렵다네!
그 후 혜원이 절을 창건하여 이미 이루어지자, 마음으로 받들고자 기원하며 청하였다. 곧 바람에 날리듯 불상이 저절로 가벼워져서, 가고 오는데 지장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비로소 혜원에게 신령한 감응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 그 증거가 민간을 떠도는 노래에 남은 것이다.
이에 대중들을 거느리고 밤에서 새벽까지 끊임없이 불도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이 남기신 교화가 여기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윽고 부지런히 계율을 지키며 번뇌의 마음을 쉬려는 선비와, 티끌세상을 끊고 맑은 믿음을 지닌 손님들이 모두 기약 없이 찾아왔다. 멀리서도 도풍을 바라보고 모여들었다.
팽성(彭城)의 유유민(劉遺民)ㆍ예장(豫章)의 뇌차종(雷次宗)ㆍ안문(雁門)의 주속지(周續之)ㆍ신채(新蔡)의 필영지(畢穎之)ㆍ남양(南陽)의 종병(宗炳)ㆍ장래민(張萊民)ㆍ장계석(張季碩) 등도 모두 세속과 영화를 버리고, 혜원에 귀의하여 노닐었다.
이에 혜원은 곧 정사의 아미타불앞에 재(齋)를 건립하였다. 서원을 세워 함께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빌었다. 그리고는 유유민(劉遺民)에게 그 글을 짓게 하였다.
“유세(維歲) 섭제격(攝提格:古甲子의 寅年) 칠월(七月) 무진삭(戊辰朔: 초하루날의 日辰) 28일 을미(乙未)일에, 법사 석혜원은 곧은 감흥이 그윽하고 멀게, 묵은 심회가 특별히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목숨을 이으려는 동지와 번뇌를 쉬게 한, 곧은 신심의 선비 123명과 여산의 북쪽 반야대정사(般若臺精舍) 아미타불 불상 앞에 모였습니다. 다 함께 향화를 올리면서 공경히 서원하옵니다. 오직 이 한 모임의 대중들이 무릇 시주하는 이치가 밝다면, 삼세(三世)의 이어짐이 드러날 것입니다. 감응을 옮길 수 있는 운수와 부합한다면, 선악의 보응도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공경히 손을 잡고 숨겨져 가라앉은 이치를 미루어, 무상(無常)의 시기가 절박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삼보(三報)의 서로 무너짐을 살펴, 험한 세계에서 몸을 뽑아내기 어려움을 알았습니다. 이곳의 여러 뜻을 같이하는 현인들은 그런 까닭에 저녁에는 두려워하고, 아침에는 부지런히 하여, 우러러 제도할 것을 생각하나이다.
무릇 신(神)이라는 것은 감응으로는 교섭할 수 있어도, 자취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에 감응하는 사물이 있으면 어두운 길도 지척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를 찾더라도 주체가 없다면, 멀고 아득한 황하의 나루가 될 것입니다.
지금 다행히 도모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사람이 마음을 서방정토에 두었습니다. 책을 두드리고 믿음을 열어서, 밝은 마음이 천연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기연의 모습은 꿈에 그리던 것에 통하고, 흐뭇한 기쁨은 집 나간 아들이 찾아온 것보다 백 배나 더 합니다.
이에 신령한 그림은 빛을 드러내고, 그림자는 신의 조화와 짝을 이루었습니다. 공덕은 진리로 말미암아 함께 하였습니다. 이 일은 사람이 운용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하늘이 그 정성을 열어서 보이지 않는 운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사로운 마음을 이겨내어 정밀하게 생각하기를 거듭하여, 그러한 생각들을 모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크고 빛나는 업적은 들쑥날쑥하며 공덕은 한결같지 않습니다. 비록 새벽의 기원은 같았다 하더라도, 저녁에 돌아가는 곳은 현격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스승과 벗들이 돌아보아 참으로 슬퍼할 만한 일이니, 이 때문에 강개함에 젖습니다.
운명을 기다리며 법당에서 옷깃을 바로잡고, 다같이 한 마음을 베풉니다. 그윽함의 극치에 회포를 머물고서, 이 동지들이 멀리 떨어진 세계에서 함께 노닐기를 맹세하옵니다.
놀랍게도 무리에서 뛰어난 사람이 나와 가장 먼저 신령한 세계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구름 위 높은 산에서 홀로 거룩하여, 그윽한 골짜기에서 함께 보전하자는 맹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서 나아간 이들이라면, 뒤에 오는 이들과 더불어 힘써 채찍질하여 나아가는 도리를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미묘하게 부처님의 자태를 관하여, 마음을 열어 곧게 비출 수 있습니다. 그런다면 깨달음으로 알음알이가 새로워지고, 교화로 말미암아 몸이 바뀔 것입니다. 연꽃을 흐르는 물 속에 깔개로 삼거나, 옥구슬 나뭇가지 그늘에서 시를 읊으며, 구름옷을 팔방에 표표히 나부끼거나, 향기로운 바람에 떠다니면서 삶을 다 미칠 것입니다.
몸은 편안함을 잊되 더욱 편안하고, 마음은 즐거움을 뛰어넘되 저절로 기쁠 것입니다. 3도(途)에 다다르더라도 멀리 그곳을 떠나고, 하늘 궁전에서 오만하게 속세와는 길이 이별할 것입니다. 뭇 신령의 뒤를 따라, 그 법도를 이어 태식(太息: 궁극의 休息)을 지향하기를 기약할 것입니다. 이 도리를 궁구하는 일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혜원은 고상한 풍모에다 엄숙하고 행동거지가 방정하고 곧았다. 바라보는 이들 누구나 마음과 몸이 떨려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한번은 어느 사문이 대나무로 만든 여의(如意:講說에 쓰는 僧具)를 가지고, 그것을 혜원에게 바치고자 산에 들어와 이틀 밤을 묵었다. 그러나 끝내 말을 하지 못하였다. 가만히 구석자리에 머물다가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
혜의(慧義)란 법사는 강직하고 올바른 이로서 두려워하는 일이 적었다. 산에 찾아가면서 혜원의 제자인 혜보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범용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서, 혜원의 풍모만 바라보고도 추대하여 복종한다. 이제 시험 삼아 내가 어떻게 하는지 한번 보라!”
산에 이르러 혜원이 『법화경』을 강의하는 때를 만나, 늘 어려운 질문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마음이 떨리고 땀이 흘러내렸다. 끝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산에서 나와 혜보에게 말하였다.
“정녕코 놀라운 분일세.”
그가 남들을 굴복하고 대중을 덮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은중감(殷仲堪)이 형주로 가는 길에 이 산을 지나다가 공경을 표시하였다. 혜원과 더불어 북쪽 개울에서 『주역』의 바탕을 논하였다. 해가 저물도록 싫증내지 않았다. 이에 찬탄하였다.
“식견이 진정 깊고도 밝구나. 참으로 그와 같이 되기란 거의 어려운 일이다.”
사도(司徒) 왕밀(王謐)과 호군(護軍) 왕묵(王黙) 등도 모두 그의 풍모와 덕을 공경하고 사모하여, 멀리서 스승으로 공경하는 예를 보내었다. 왕밀은 편지를 보냈다.
“나이는 이제 막 40줄에 접어들었지만, 노쇠하기는 60세 노인과 같습니다.”
혜원이 회답하였다.
“옛사람들은 사방 한자나 되는 구슬을 아끼지 않고, 극히 짧은 순간 순간을 무겁게 여겼습니다. 그대가 품고 계신 바를 살피건대, 나이 들도록 살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 같군요. 시주께서 순리를 밟아 본성에 노닐거나, 부처의 이법을 타고 마음을 부려서, 이와 같이 하기를 미루어 간다면, 다시 어찌 나이가 더하기를 부러워하겠소이까? 애오라지 이러한 이치를 생각하기를 오래하노라면, 어느새 깨달음을 터득할 것입니다. 부쳐 오신 소식에 답장 드릴 뿐입니다.”
노순(盧循)이 처음 남쪽으로 내려와 강주성에 있을 때, 산에 들어와 혜원을 찾았다. 혜원은 어릴 때 노순의 부친인 노하(盧瑕)와 함께 서생으로 지냈다. 그리하여 노순을 만나자 기뻐하면서 옛 이야기를 나눴다. 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에 어떤 승려가 혜원에게 간하였다.
“노순은 나라의 외적입니다. 그와 교분을 두터이 나누시면 의혹을 사지 않겠습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우리 불법에는 감정으로 취하고 버리는 법이 없다. 어찌 알 만한 이들이 살피지 못하겠는가? 이는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 후 송의 무제(宋武帝, 420~422)가 노수를 토벌하고자 뒤쫓아 와서, 상미(桑尾)에 장막을 설치하였다. 측근들이 말하였다.
“혜원은 평소 여산의 주인인데, 노순과 교유가 두터웠습니다.”
송의 무제가 말하였다.
“혜원은 세상 밖의 사람이다. 반드시 나와 남이란 차별은 없는 이이다.”
곧 사신을 파견하여 편지를 보내 공경의 뜻을 표시하였다. 아울러 돈과 쌀을 보냈다. 이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비로소 그의 밝은 견해에 굴복하였다.
처음 경전이 강동 지방에 전해질 때에는 대부분 미비한 점이 많았다. 선법(禪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또 율장은 듬성듬성 빠져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혜원은 불교의 도에 결함이 있는 것을 개탄하였다. 마침내 제자인 법정(法淨)ㆍ법령(法領) 등을 시켜 멀리 여러 경전을 찾았다. 그들은 사막과 설산을 넘어, 오랜 세월 후에 비로소 돌아왔다. 모두가 범어(梵語) 원본을 가져 왔으므로 번역할 수 있었다.
예전에 도안 법사가 관중(關中)에 있을 때, 담마난제(曇摩難提)를 초청해서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세상에 내놓았다. 중국말에 빼어나지 못하여 자못 의심나고 막힌 곳이 많았다. 그 후 계빈국(罽賓國) 사문 승가제바(僧伽提婆)가 여러 경전에 박식하였는데, 진(晋) 태원(太元) 16년(391)에 심양(潯陽)을 찾아왔다. 혜원은 그를 초청하여 다시 『아비담심론』과 『삼법도론(三法度論)』을 번역하였다. 이에 두 가지 배움이 곧 일어났다. 아울러 서문을 짓고 종지를 드러내어 학자들에게 남겼다. 부지런히 도를 위하고 불법을 펴기에 힘썼다.
매양 서역에서 오는 손님을 만나기만 하면, 간곡하게 정성을 다하여 묻고자 방문하였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관중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다. 곧 편지를 보내 인사[通好]하였다.
“저 혜원은 머리 조아려 아룁니다. 지난해 요좌군(姚左軍)의 편지를 받고, 자세히 덕스런 분의 물음에 받들어 봅니다. 어진 분께서는 전에 다른 지역에 계셔서 왕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의 경계선을 넘어 오셨습니다. 이때는 통역[音譯]을 주고받을 형편이 못되었지만,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다만 강호가 어렵고 어두워 형세가 어그러진 것을 한탄할 따름이었습니다.
요즘 크게 막힌 것을 회통하려는 모임을 이르시려, 보배를 품고 이곳에 오시어 머물고 계신 것을 압니다. 질문이 있으면 하루에 아홉 번 달려간다 하니, 문도들은 마음으로 아름다운 맛을 흐뭇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모두가 찾아갈 길이 없으니, 눈을 들어 멀리 길을 바라보면서 우두커니 바라보는 고단함만 더할 따름입니다.
저는 늘 불법이 베풀어지고 유포되어, 3방(方)이 함께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비록 시운은 말세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불법의 종취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고르다 하겠습니다. 참으로 아직 깨달음의 나루터를 미묘한 문에서 두드려, 부처님께서 남기신 신령함과 사무치게 교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슴을 비우고 기약을 남기기에 이르러서는, 하루도 그 생각을 품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무릇 전단(旃檀)을 옮겨 심으면, 다른 물건도 함께 향기가 몸에 배입니다. 마니보주(摩尼寶珠)가 빛남을 토해내면, 뭇 보배들이 스스로 쌓여집니다. 이것이 오직 가르침에 들어맞는 도리라서, 마치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가르침의 근본은 하나의 형상도 없는데다, 응험은 정으로써 하지 않는 데에 있어서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불법을 짊어진 사람은 반드시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삼습니다. 어진 마음으로 벗을 사귀는 사람은 공덕을 자기 것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만약에 법륜이 8정도(正道)에서 수레바퀴를 멈추지 않고, 삼보가 세상이 다하는 시기에도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면, 만원(滿願: 부루나존자)이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용수(龍樹)보살이 어찌 전시대의 발자취에서 유독 홀로 거룩하겠습니까?
지금 어림짐작해서 마름한 옷을 보내니, 높은 자리에 오르실 때 이를 입기 원합니다. 아울러 빗물을 여과(濾過)시키는 그릇은 이미 법물(法物)입니다. 이것으로 애오라지 나의 마음을 표시합니다.”
구마라집이 회답하였다.
“구마라집은 공경하게 절하옵니다. 아직 만나서 말한 일도 없습니다. 또한 글과 문장도 지나치게 막혀서 인도하는 마음을 통할 길이 없거니와, 뜻을 얻을 인연도 무너져 끊겼습니다. 역마(驛馬)로 전해온 정황으로, 거칠게나마 덕스런 풍모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요즘은 또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나를 들으면 반드시 백 가지를 덮을 수 있는 재능을 갖추셨다고 들었습니다. 불경에 ‘말세에 동방에 반드시 호법보살이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빛나도다! 어진 분이시여! 그대는 훌륭히 그 일을 넓히셨습니다.
무릇 재물을 얻으려면 다섯 가지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 계율, 너른 견문, 말솜씨, 깊은 지혜[福ㆍ戒ㆍ博聞ㆍ辯才ㆍ深智]입니다. 이것을 겸비한 이라야 도를 융성하게 하지만, 갖추지 못한 사람은 의심으로 막힙니다. 어진 분이시여, 그대는 이것을 갖추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음을 기탁하여 우호를 교통하고, 통역을 통해[因譯] 뜻을 전하였습니다. 제가 어찌 그 뜻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만, 거칠게나마 보내오신 뜻에 보답할 따름입니다.
짐작하여 마름하신 옷을, 조금 손보아 법좌에 오를 때 입고자 합니다. 이것이 보내오신 뜻에 맞을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 물건에 맞지 않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제 전에 늘 사용하던 놋그릇으로 만든 쌍구조관(雙口澡灌:入口가 둘인 세숫대야)을 보내오니, 법물의 수에 갖추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보냈다.
이미 더럽게 물든 즐거움을 버린다면
마음을 훌륭히 거두지 않겠는가?
만약 치달려 흩어지지 않음을 얻는다면
깊이 진실한 모습에 들어서지 않겠는가.
필경공의 상 가운데서는
그 마음 즐거워할 곳 없어라.
만약 선의 지혜 즐긴다면
이는 법성이라서 비출 곳조차 없으려니
허망한 거짓 등은 참이 아니라서
또한 마음을 머물 곳이 아닐러라.
어진 분께서 터득한 법
그 요체를 보여 주기 바란다오.
혜원은 다시 구마라집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날이 서늘한데 요즘은 또 어떻게 지내십니까? 지난달 법식(法識)도인이 이곳에 와서 그대가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소식을 전하길래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앞서 듣기로는 그대가 바야흐로 크게 여러 경전을 번역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시면 서로 묻고 구하고자 하였습니다. 만약 지금 전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수많은 한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문득 수십 조의 일을 묻사오니, 여가가 있으면 한두 가지라도 풀어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비록 경전 가운데 나오는 큰 문제점은 아니지만, 그대의 결정을 취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구마라집의 게송에 회답하였다.
근본과 말단은 필경 무엇으로부터
일어남과 스러짐이 있음과 없음의 즈음이라
한 티끌이라도 흔들리는 경계를 건넌다면
이것은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를 이루리.
미혹된 생각이 거듭 서로를 탄다면
부딪치는 이치마다 절로 막힘이 생겨나리.
인연에는 비록 주체가 없다지만
길을 여는 것은 한 세간만으로는 안 되어라.
때마다 깨달은 종사 없다면
누가 장차 그윽한 만남을 쥘 수 있으리.
찾아가 묻을 것 아직도 아득하오니
남은 생을 서로 더불길 기약했으면.
그 후 불야다라(弗若多羅)가 중국에 건너와 관중(關中)으로 가서는 『십송률(十誦律)』의 범본을 외웠다. 구마라집이 이것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3분의 2를 마쳤다. 바로 그때 불야다라가 세상을 떠났다.
혜원은 항상 그것이 미비한 것을 개탄하였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진(秦)나라로 들어와, 다시 이 부(部)를 훌륭히 외운다는 말을 들었다. 곧 편지를 써서 제자인 담옹(曇邕)으로 하여금 요청하여, 관중(關中)에서 다시 남은 부분을 번역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십송률』의 전부가 갖추어져 빠진 것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진(晋)나라 땅에서 얻은 원본은 지금까지 서로 전수한다. 파미르 고원의 현묘한 경전이 관중에서 빼어나게 번역하여, 남쪽의 이 땅까지 오게 된 것은, 혜원의 힘 덕분이다.
외국의 승려들이 모두 중국 땅에 대승 도사가 있다 칭송하였다. 매양 향 피워 예배할 때마다, 곧 동방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서 마음을 여산의 묏부리에 바치기에 이르렀다. 그의 신령한 이법의 자취는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앞서 중국 땅에는 아직도 ‘열반상주(涅槃常住)’의 학설이 없었다. 다만 수명이 길다는 말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혜원은 마침내 탄식하였다.
“부처란 지극함이다. 지극하면 변화가 없다. 변화가 없는 이법에 어찌 다함이 있겠느냐?”
이로 인하여 『법성론(法性論)』을 지었다.
“지극함은 변함 없음을 본성으로 삼는다. 본성을 얻음은 지극함을 이룸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구마라집이 논을 보고 찬탄하였다.
변두리나라 사람들이라 아직 경전을 지니지도 못했거늘
문득 모르는 사이에 이 법과 합치하니
어찌 절묘하지 않은가.
후진(後秦)의 주인인 요흥(姚興)은 덕과 명성을 흠모하고, 그의 재치 있는 생각을 찬탄하였다. 정중한 편지를 보내고, 믿음의 선물이 연이어졌다. 구자국(龜玆國)의 가는 실을 섞어 짠 변상(變像)을 증정하여, 그것으로 자기의 간곡한 마음을 표시하였다. 또 요숭(姚嵩)을 시켜 구슬로 만든 불상을 바쳤다.
『석론(釋論)』을 처음 번역하자, 요흥은 이 논을 보내고 아울러 편지를 보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새로운 번역을 마쳤다. 이는 이미 용수보살이 지은 것이며, 또한 대승 경전의 지귀(旨歸)이다. 그러니 한편의 서문을 지어서 지은이의 뜻을 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이곳의 여러 도사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추천하고 사양하여 감히 손을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 법사가 이를 위하여 서문을 지어, 후세의 배우는 이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좋겠다.”
이에 혜원은 회답편지를 썼다.
“저에게 『대지도론』의 서문을 짓게 하여 지은이의 뜻을 펴게 하시려 합니다. 그러나 빈도가 듣기에 큰 것을 품으려면 작은 솜옷으로는 싸안기조차 할 수 없고, 깊은 샘물을 길으려면 짧은 두레박줄로는 어림조차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내리신 글을 펴보던 날, 높은 명령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한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부딪치는 일마다 그만두어, 다시 뜻을 내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내려 보내 알리시는 인연의 중함으로, 대략 품은 생각만을 엮을 따름입니다. 연구의 아름다움에 이르려면, 마땅히 다시 여러 눈 밝은 대덕들에게 기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의 명성이 높고도 멀리 알려진 것이 본래 이와 같았다.
혜원은 항상 『대지도론』이 문구가 번다하고 광범위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뜻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곧 그 요점만을 초록하여 20권의 책을 썼다. 차례대로 드러낸 이치는 깊고 청아하여, 무릇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들이는 일을 절반이 넘게 쉴 수 있게 하였다.
그 후 환현(桓玄)이 은중감(殷仲堪)을 정벌하였다. 군사가 여산을 지나가면서 혜원에게 호계(虎溪)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혜원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에 환현이 스스로 산에 들어왔다. 측근들이 환현에게 말하였다.
“예전에 은중감이 산에 들어가 혜원에게 예를 갖추었습니다. 공은 그를 공경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환현이 대답하였다.
“어찌 그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은중감은 근본부터가 죽은 사람일 뿐이다.”
산에 이르러 혜원을 보자 모르는 사이에 공경을 표시하였다. 환현이 물었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은 함부로 헐거나 다칠 수 없다. 그렇거늘 어찌하여 수염을 깎고 머리를 잘랐는가?”
혜원이 대답하였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환현이 훌륭하게 여겨, 품었던 어려운 질문을 감히 다시 묻지 못하였다. 이어 은중감을 토벌하는 뜻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혜원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환현이 물었다.
“어떡하기를 바라십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나의 소원은 시주께서도 안온하시고 그[은중감]도 다른 탈이 없는 것입니다.”
환현이 산에서 나와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참으로 태어나서 아직 보지 못한 인물이다.”
환현은 그 후 임금을 두려워 떨게 하는 위엄으로써 모시려고 애썼다.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어 벼슬에 오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혜원의 대답이 견고하고 바르며 확고부동하여, 그 지조가 단석(丹石)보다 굳어 끝내 되돌릴 수 없었다.
그 후 환현은 승려들을 숙청하고자 관료붙이들에게 명령하였다.
“경전의 가르침을 펴서 진술하고 의리를 유창하게 설법할 수 있거나, 혹 계율의 행실[禁行:戒行]을 반듯하게 닦아 큰 교화의 베풂에 기여할 수 있는 사문들이 있다. 여기에서 어긋나는 자들은 그만두게 하여 돌려보내라. 오직 여산만은 도덕이 있는 사문이 머무르는 곳이다. 수사 간택의 예에 두지 말라.”
혜원은 환현에게 편지를 보냈다.
“불교가 허물어지고 더럽게 뒤섞여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하나 찾아질 때마다, 분개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하였습니다. 항상 뜻하지 않은 운수가 나타나서 불교가 가라앉는 일이 닥칠까 두려웠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청정한 여러 도인들의 가르침은 진실로 그들의 본심과 호응합니다. 무릇 경수(涇水)와 위수(渭水)가 갈라지면, 맑은 물과 탁한 물의 형세가 달라집니다. 굽은 마음을 곧은 마음으로 바로잡으면, 어질지 않은 것은 스스로 멀어집니다. 이 명령이 행해지면 반드시 한결같은 이치를 여기서 얻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거짓으로 꾸민 사람에게서는 거짓으로 통하던 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진실한 생각을 품은 사람에게서는 세속의 기대를 저버리는 혐의가 없어져, 도인과 세속이 번갈아 일어나서 삼보가 다시 융성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널리 승단의 조례와 규제를 세우자, 환현은 그의 말에 따랐다.
예전에 진(晋)나라 성제(成帝, 326~334)가 어렸을 때 유빙(庾氷)이 정치를 보좌하였다. 그는 ‘사문들이 마땅히 왕자를 공경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때 상서령(尙書令) 하충(何充)과 복야(僕射) 저욱(褚昱)ㆍ제갈회(諸葛恢) 등이 아뢰어, ‘사문은 왕자에 경례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관리들의 논의도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나 하충의 문하생들이 유빙의 뜻을 받들어 반박하였다. 같거나 다른 의견이 어지럽게 일어나서 끝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 후 환현이 고숙(姑熟)에 있을 때 공경을 다하고자, 곧 혜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문이 왕자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감정에 충실하지 않으며, 이치에 있어서도 밝지 않다. 한 시대의 국가 대사란 그 바탕을 진실하게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간 여덟 사문에게 편지를 띄웠고, 이제 그대에게도 부친다. 그대는 왕자를 공경하지 않는 입장에 대해 진술하도록 하라. 이것은 곧바로 실행해야만 할 일이니, 낱낱이 생각하는 바를 자세하게 진술하여, 반드시 그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었으면 한다.”
혜원이 답장을 썼다.
“무릇 사문이라 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두운 세속의 캄캄함을 열어주고, 세상을 교화하는 그윽한 길을 트여주어, 바야흐로 나와 남을 잊는 겸망(兼忘)의 도로써, 천하와 더불어 같이 갈 수 있는 존재를 일컫는 것입니다. 높은 경지를 희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유풍에 고개 숙이게 합니다. 개울물에서 양치질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남은 진액을 맛보게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비록 나라의 큰 일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초연한 발걸음의 자취를 볼 것입니다. 깨달은 것도 진실로 이미 넓어질 것입니다. 또한 가사(袈裟)는 조정과 종묘에서 입는 옷이 아닙니다. 발우(鉢盂)는 낭묘(廊廟)에서 쓰는 그릇이 아닙니다. 사문은 티끌세상 밖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왕자에게 공경하지 않아야 합니다.”
환현은 비록 구차하게 앞서의 자기 뜻을 고집하고, 곧바로 남을 따르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였지만, 혜원의 말뜻을 직접 보고는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얼마 안 되어 환현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자, 곧 교서를 내렸다.
“불법은 크고 위대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상의 마음을 미루어 받들었으므로 공경심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이 이미 내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마땅히 겸양하는 빛을 다하겠다. 그러므로 모든 도인들은 다시 왕자에게 예를 올리지 말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