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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12: 김복도(金福道, 男, 1923年 11月25日生 경남 통영시 미수1동) | |
*최초증언일: 1996. 9. 21 | *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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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할 때부터 부산을 향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선실 안쪽에서 화약냄새가 풍겨났습니다- |
[다음은 생존자 김복도씨가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에 보낸 편지임]
『저는 우키시마호 폭파 사건 때 그 배에 탔다가 살아남은 사람 중의 한사람입니다. 저는 16세 되던 해인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당시에는 누구나 그랬듯이 일본인들의 박해와 수탈로 형편이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려고 일본으로 밀항하여 전전긍긍하다가 히로시마에서 선주인 호리모토 류타로 라는 사람 소유의 250톤급 배를 타며 기관사로 일할 때에 사세보 해군본부에서 그 배와 선원 모두를 징발하여 다른 배 50척과 함께 1개 선단으로 구성하여 아오모리 해군본부로 끌고 갔습니다. 오미나토에서 치시마열도까지 오가며 군수품을 여러 부대로 운반하는 일을 하던 중 1945년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 때 당시 일본에 있던 한국인 즉 강제징용자, 군속등 일체의 한국인을 고국으로 송환한다며, 그 해 8월18일에 우키시마호가 오미나토에 입항하여 8월22일까지 조선인을 싣고 출항하였습니다. 당시 그 배에 탔던 인원을 추정하건데 약 7천명 이상의 조선인과, 들리는 소문에는 한국에 가족을 둔 일본인 군인이 약 5백명 정도가 함께 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배가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가기 앞서 선내방송으로 들려오는 말이 ‘오후 5시까지 250톤 이상의 배는 항구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미군비행기가 모두 폭파한다.’고 한다면서 ‘우키시마호도 지금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배가 출항한 지 이틀 뒤인 8월24일 마이즈루항에 도착한 직후 배 중앙이 폭파되어 두 동강이 났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헤엄치거나 또는 민간인 어선으로 구조되어 해군시설부에 수용되었는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그 배에 타고 있던 일본인은 한명도 죽지 않았다고 들었고 또 사고로 희생된 한국인을 구덩이 세 개를 파고 한꺼번에 묻어버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생각해 보아도 나는 수년 동안 일본 근해에서 기관사로 일하며 배를 탔기 때문에 항로를 훤하게 알고 있는데 당시 우키시마호는 출항할 때부터 부산을 향하는 방향이 분명히 아니었고, 그들의 말로는 미군이 투하한 기뢰에 배가 폭파되었다고 하지만 항구에 기뢰가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그 배는 일본해군들이 고의로 폭파했다는 말이 당시에 생존자들 사이에 빈번히 나돌았습니다. 내가 배 중앙부에 있다가 마이즈루항을 구경하려고 배 앞쪽으로 가서 서자마자 배가 폭파되는 바람에 몸이 공중으로 떴다가 떨어질 때 충격으로 허리를 다쳐 귀국한 뒤로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으나 지금까지 완치되지 않고 후유증과 고통 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을 뒤돌아 볼 때 일본인들의 잔악성과 비열함에 지금도 분노의 치가 떨리며 저주하고 싶은데 아직도 잘못을 반성할 줄 모르고 오히려 망언으로 일관하는 저 일본놈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라도 부디 이번 일을 주관하는 관계자 여러분께서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의 참혹함을 규명하여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이 있도록 힘써 주시고, 또 희생된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성의를 가지고 적극적인 진상조사를 통하여 암울했던 과거를 똑바로 청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복도씨의 편지를 받은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대표 전재진은 1996년 9월21일 부산에 거주하는 이창식씨와 함께 김복도씨를 방문 취재하였다.]
「일본으로 가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화물선 식당에서 일하는 선원으로 요청받고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겝니다. 당시는 총독부 통치시대라서 국내에서는 할 일이 신통치 않았거든요. 선원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 일본으로 가면 일자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것이지요.」
「일본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같이 건너간 사람들은 그들대로 어디론가 가고 혼자 남게 되었어요. 열여섯 살의 어린 몸에 히로시마廣島까지 가서 막일을 하는데 이건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거예요. 위험하기 짝이 없어 이러다가는 죽을 것만 같아 오사카大板로 빠져 나갔죠. 거기서 조선사람 몇 명을 만났는데 그들도 일자리가 없어 그저 돌아만 다니더라구요. 그러다가 히로세 주물점에 들어가 2년간 일하고 그 뒤에 배를 타게 된 것입니다.」
「오미나토와 치시마열도를 오가며 군수품을 나르던 일을 좀 설명해 주십시오.」
「50여 년 전의 일이라 정확하게는 말 할 수 없지만 오미나토에서 치시마열도를 왕복하는 데는 3일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치시마에 가면 세 개의 섬이 나란히 있는데 모두 일본 해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군수품을 내리고 곧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섬에 내려 본 적은 없습니다. 식량과 의복, 과일 따위를 실어 날랐죠.」
「선원으로 다른 한국 사람도 있었습니까?」
「선원 7명 가운데 목포사람이 한명 있었지요.」
「일하던 배가 마침 오미나토에 정박했는데 그 경위는요?」
「내가 일하던 배는 장연호長連丸였습니다. 오미나토와 치시마를 오가며 군수품을 실어 날랐는데 해방소식은 모르는 상태에서 치시마를 출발하여 아오모리항에 도착할 때 미군의 폭격을 한번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곧 바로 오미나토항으로 옮겨 정박하던 때에 해방된 것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네요만 장연호가 치시마에 있었다면 우키시마호를 타지 못했을 테지요.」
「어떤 점으로 보아 우키시마호 항로가 부산을 향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나는 일본 해상에서 오랫동안 선원으로 일했고, 사세보佐世保 해군군부에 징발당한 뒤로는 오미나토를 기점으로 군수품을 운반하는 배에서 3년여 동안 기관사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웬만큼 먼 항로도 육감으로 알 수 있지요. 우키시마호가 출항하여 하루가 채 안 지났을 때 나는 배가 부산을 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배가 해안선을 멀리하면서 오른쪽 방향으로 항해해야 부산으로 갈 수 있는데 계속해서 일본 본토의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했거든요. 당하고 보니 생각나는데. 내가 뱃놈 아니오? 항로가 틀렸어요.
(이 때 방바닥에 펼쳐 놓은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우키시마호의 항로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함) 이 점이 바로 우키시마호가 항해 초기단계부터 한국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겁니다. 내가 뱃놈이 아니라면 배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다시 말하면 일본의 항로 방향을 알기 때문에 애초부터 부산행이 아니었고 이것이 바로 배가 폭파침몰당한 것은 계획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간다는 방송은 몇 시쯤에 있었습니까?」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으니까 오후 3시가 조금 지났을 때로 기억됩니다. 그 때 그 방송내용은 변명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 군항으로 입항할 때 입항 항로의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보십시오.」
「친구가 “육지가 보인다니 밖으로 나가 구경이나 하자.”고 하여 갑판위로 나왔지요. 그런데 배가 들어가다가 일단 한번 멈췄는데 다시 천천히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 멈췄을 때 폭파되었습니다.」
「기뢰일까요? 아니면 폭탄장치에 따른 자폭일까요?」
「기뢰냐고요. 내 생각으로는 기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미나토에서도 기뢰를 제거했기 때문에 무사히 빠져 나왔거든요. 하물며 마이즈루라는 군항에서 안전항로를 확보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다른 배들도 왔다 갔다 했으니까 기뢰가 없는 안전항로 아니겠습니까?」
「폭발소리가 들릴 때 물기둥은 보았습니까?」
「물기둥은 없었습니다.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침몰 원인이 촉뢰가 아니라면 그 견해는 무엇입니까?」
「폭발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야단법석일 때 선실 쪽을 들여다보았는데 안쪽에서 화약냄새가 풍겨났습니다. 확실하다구요.」
「구조된 뒤 상황은 어떠했는지요?」
「벌거벗은 채 맨발로 약 3km 정도를 걸어가 보니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 헌옷을 얻어 입었습니다. 다음 날 수용소를 빠져 나와 바닷가에 가 보았는데 죽은 사람을 모두 매장하더군요. 살아남은 사람이 1천명도 채 안된다는 말이 자자했습니다.」
[이 날 아버지의 생사와 우키시마호 사건과의 관계를 확인하려고 부산에 거주하는 이창식씨가 취재에 동참했다. 여기서 이창식씨에게 몇 가지 물었다.]
「여기까지 취재에 참여하셨는데 그 사정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나는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오늘 취재에 참여했습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오시지 못한 것은 우키시마호 사건과 연루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내가 두 살 때 일이었으므로 아버지가 일본으로 끌려가던 상황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어찌되었던 아버지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았고 그 뒤로도 수 십 년간 생사를 확인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린 시절을 다 보내고 철이 들었을 때 일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연행되었다가 우키시마호 사건을 체험한 동네 어른들의 얘기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이 말하기를 “동준이도 배 타고 나왔는데. 동준이는 먼저 나갔는데. 왜 아직 돌아오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준’은 이창식씨 부친의 이름임) 그래서 그 뒤로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었고 오늘과 같은 기회가 있기를 기다려왔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 동네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아십니까? 찾을 수 있을까요?」
「글쎄요. 찾지 못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 다 돌아가셨겠지요.」
「부친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경상남도 창녕입니다.」
「부친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어떤 일을 해 왔습니까?」
「아무데도 등록되지 않았더군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도 신고했고, 충남 천안에 있는 ‘망향의동산’에 가서 확인해 봤고, 부산시립공원묘지에 가서도 열람해 봤는데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우키시마호 사건과 관련된 것이 틀림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결되기를 바라십니까?」
「이 사건은 국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개인이 사비를 털어가며 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나는 ‘유골만이라도 돌려받아야 되지 않겠느냐.’하는 바램이지요. 자식된 도리로서 지금으로서는 그게 전부입니다. 모든 걸 떠나서도 이 문제는 해결돼야 합니다. 정부에서는 우리나라가 세계로 나가는 국가라고 말하지만 “이게 무슨 짓이냐! 이런 문제 하나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 세계적인 국가라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런 겁니다.」
「이창식 선생님 같은 경우는 부친에 관한 얘기를 했던 분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 분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디서 증인을 찾을 수 있을지 길이 묘연하군요. 당시 부산은 일본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강제징용은 어느 지역보다도 자주 발생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행방을 찾으시려고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앞으로도 이 사건에 관심을 가져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또 정부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주시하시다 보면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김복도씨에게 대화를 청하여 물었다.)
「사건 해결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왜놈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우키시마호에 승선시킬 때 명단이 있었을 텐데. 공개하지 않는 것이 문제지요. 괘씸하기가 짝이 없이 괘씸한데. 하여튼 저놈들이 계획적이었던 것은 확실한데.......,」
「계획적이라고요? 천천히 말씀해 보십시오.」
「처음부터 계획적이라는 것은 출발할 때부터 부산 방향으로 항해해야 하는데 방향이 너무 엉뚱하니까 그런 것이고, 처음에 닻을 놨을 때에 왜놈들은 피신시켰고, 멈춰 섰을 때 폭발했잖느냐 이거고, 또 기뢰를 제거했으니까 배가 오간 것이고, 왜 물기둥이 솟지 않았느냐 이거요. 기뢰라면 물기둥이 솟아야 하는데 솟아오르지 않았거든. (잠시 긴 한숨을 몰아쉬며 허탈해 함) 그 날 다른 배도 여러 척이 마이즈루만을 오갔는데 왜 하필이면 한국 사람이 많이 탄 배만 기뢰에 닿았다고 하느냐고요.」
「그 동안 허리 부상으로 고생이 많았을 텐데요? 치료는 어떻게 받았습니까?」
「그래요. 배가 터질 때 충격으로 허리를 다쳤는데 그게 이토록 낫질 않아요. 부산과 서울 보훈병원에서 세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완전하지 못합니다. 7년간 치료하면서 있는 재산 다 없애다시피 했지요.」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야죠?」
「세상이 나를 속이면 속였지 나 자신에게는 거짓이 없습니다. 일본이 지금까지 사망자 명단들과 같은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사건의 진상이 온 세상에 알려져 명쾌하게 밝혀져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배상을 받겠습니다. 세월이 흘러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곤란해질 것입니다. 종군위안부 문제도 같은 차원에서 하루속히 해결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