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우창남
에스프레소 지나친 생각이 마음을 탁하게 만들 땐 산책하면서 들르는 곳이 있다. 묻어버린 철길에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마산 임항선 그린웨이를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인근 주민이나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아니면 오갈 일 없는 한적한 골목길. 이곳에 동네 사랑방 같은 카페가 있다. 두 평 남짓한 심플한 공간에 따스한 햇볕이 비추어 편안함을 주는 곳이다. 거리의 소음이 잦아든 모퉁이에서 구수하고 따뜻한 냄새로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짙은 커피 향은 길가에 핀 꽃송이들이 한꺼번 에 피워내는 감미로운 그들의 냄새인지도 모른다. 바깥에서도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솔직한 공간 안으로 들어서자 단정한 차림새의 인상 좋은 주인이 반갑게 맞이한다. 두세 사람 정도만 서 있을 수 있는 작은 카페이지만 커피에 대한 열정은 누구 못지않다. 이곳에는 특별한 풍경이 하나 있다. 바로 매장 앞쪽 야외 벤치에 앉아 편안하게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노상 커피’ 문화다. 외부에도 의자를 두어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들의 일상이 묻어나는 곳, 주민들이 편하게 휴식을 취하다 가는 공간이다. 언제 들러도 편안하고 행복한 곳이 될 수 있길 바라는 주인의 노력이 드러난 모습이기도 하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목련이 녹아 흐르는 따사로운 오후, 가로수 이파리는 아기 피부처럼 싱그럽게 빛나고 멀리 보이는 무학산 은 수채화처럼 산뜻하고 선명해 보인다. 공기는 깊게 들이마시고 싶을 정도로 감미롭다. 아름드리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부서지는 빛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휴식의 한 종류를 또 경험한다. 커피를 마시는 일은 순간을 누리는 일이다. 좋아하는 공간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 순간의 행복은 더욱 짙어진다. 커피를 마시다가도 가게 앞을 지나는 낯익은 얼굴에 반가운 손인사를 건넨다. 마산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저 산과 이곳 사이의 거리를 괜스레 가늠해보며 커피 한 잔이 주는 여유에 푹 잠겨 찰나의 포근함을 붙잡는다. 소담한 벤치에서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이곳에서는 햇살과 바람까지도 기억에 새겨진다.
항상 그랬듯이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그것도 더블샷으로. 대개 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시키면 직원이 살짝 당황하면서 묻는 다. “양이 조금 적은 거 아시죠?” 다소 못 미더운 표정으로 확인하 는 게, 머리털이 허옇게 센 늙은이가 주문하니 독특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에스프레소는 아주 진한 이탈리아 정통 커피이다.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부은 것이다. 흔치 않은 아주 작고 깜찍한 잔에 담긴 커피는 육수처럼 걸쭉하고 표면에는 기름이 둥둥 떠 있다. 색깔은 검다 못해 매력적인 황금빛이 감돈다. 에 스프레소 잔을 들고 한입 머금자마자 그 향기가 입안을 습격해 온다.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매혹적인 느낌이다. 그 여운을 잠시 음미 하다가 다시 남은 반 잔을 원 샷. 더 이상 말이 필요하랴. 지옥의 쓴맛과 악마적인 고소함이 혀를 자극한다. 혈관 속으로 고급 에스프레소 커피를 흘려보낸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처럼 전신에 퍼지는 커피 향. 잔을 든 채로 눈을 감는다. 코끝을 맴도는 커피 향으로 삶의 냄새를 맡는다. 커피는 내 안에 있는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나게 해주는 수단이다. 각자의 안에는 결코 들여다볼 수 없는 블랙홀 같은 부분이 있고 그것이 일으키는 힘이 앞으로 나아가게 한 다. 커피의 검은 액체를 들여다볼 때마다 매일 조금씩 내면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렇게 인생을 들이킨다.
내가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만 고집하면 처음 들어보는 커피라고 다들 신기해한다. 손바닥에 올릴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전용잔에 담겨 있는 모습과 적은 양에 놀란다. 그리고 강렬한 쓴맛에 또 한 번 놀란다. 커피 맛은 취향의 영역인데 에스프레소 맛을 설명 해달라고 할 때마다 난처하다. 좋아하는 운동선수를 왜 좋아하는지 설명해야 하는 것과 비슷한 난처함이다. 그리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사람이 내가 한 설명으로만 그 맛을 한정 짓게 될까 봐 조심스럽다. 분명 맛이라는 것은 표현될 수 있는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일 테니까.
나는 스스로에 질문을 던졌다. 왜 에스프레소만 마시는지. 그것은 에스프레소만큼 색이 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강렬한 에스프레소 한잔처럼 누군가의 목구멍에 타들어 가듯 인상을 남기는 삶. 그래서였을까? 나는 너무 강하고 뜨거웠다. 진정성이 없는 것은 거부했으며 진한 원액 같은 감성만을 추구했다. 의도도 순수하고 틀리지 않았지만, 한쪽으로 조금 치우쳤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극명하게 갈렸으니까. 그러다 글을 쓰게 되면서 더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 하기 시작했다. 타인을 향해 품을 크게 펼칠 줄 아는 사람, 상상만 으로도 멋진 인격이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도 성장하고 있다고 느낀다.
커피, 그중에서도 에스프레소를 마시지 않고서는 머리와 마음 에 차오른 문장이 손끝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도는 것 같다. 살포시 올라앉은 보드라운 황금색 거품을 호호 불면 부드럽게 흩날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보글보글 끓어오른 거품보다는 결이 고와 착 감기는 포근한 감촉. 벨벳 같은 거품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그 향미가 마음에 떠오르는 감성이 되어 새로운 문장으로 피어나는 것 같다. 정서, 전율, 감성, 관능, 감정의 순화. 에스프레소는 글의 물결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