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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천상제(九天上帝)님께서 도력(道曆)기원전 38(단기 4204, 서기 1871)년 세차 신미(歲次辛未) 음력 9월 19일, 양력 11월 1일 병오(丙午)일진 무자(戊子)시에 당시의 조선국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全羅北道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에 강세(降世)하시니 성은 강(姜), 본관은 진주(晉州), 어휘(御諱)는 일순(一淳), 어자(御字)는 사옥(士玉), 어호(御號)는 증산(甑山)이시니라.
2. 상제님의 신격위(神格位)는 “무극주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상제(无極主 九天應元 雷聲普化 天尊上帝)님”이시고, 인격위(人格位)는 “강성증산상제(姜聖甑山上帝)님”이시니, 삼계(三界)의 최고위(最高位)이신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 강성상제(九天應元 雷聲普化 天尊 姜聖上帝)님” 이시니라.
3. 객망리는 상제님 강세 전에는 선망리(仙望里)였으나 강세 후에는 객망리로 고쳐지고, 화천(化天) 후에는 신기리(新基里) 또는 신월리로 변경 되니라. 고부에는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삼신산(三神山)이 있으니 이는 방장(方丈)?영주(瀛洲)?봉래(蓬萊)의 삼산이며 그 주산인 방장산의 산맥이 동북으로 망제봉(望帝峰)을 이루고, 다시 그 연맥(連脈)이 객망리 뒤에서 시루산 즉 증산(甑山)을 이루니라. 객망리 근처에 연촌(硯村)?강동(講洞)?필동(筆洞)?배장곡(拜將谷)과 부정(扶鼎)?팔선(八仙)?용곡(龍谷)?용두(龍頭) 등의 마을이 있으니라.
4. 상제님께서 현화인신(現化人身)하신 부친의 휘(諱)는 문회(文會), 자는 흥주(興周), 도호(道號)는 진당대부(震堂大父)이시니, 용모는 호상(虎相)이시며 음성은 웅대(雄大)하시고 기골이 강장(强壯)하시며 성품이 강직하셔서 그 위엄이 인근에 떨쳐, 당시에 성행하던 도적들도 두려워 침범하지 못하니라.
5. 모친께서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시고 휘는 양덕(良德), 도호는 선정대모(宣政大母)이시니, 용모와 성품이 단아 온순하셨으며, 친가는 현 정읍군 이평면 팔선리(八仙里) 서산(西山) 또는 서산(書山)으로서 이곳은 시루산의 북으로 뻗은 연맥이 휘감아 돌아서 태극의 형국을 이룬 마을이니라.
6. 상제님 인신(人身)의 시조는 중국의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휘 궤(軌)이시라 하며, 중시조는 고구려의 병마도원수 휘 이식(以式)이시고, 22대조 휘 계용(啓庸)은 고려 국자박사로서 진산부원군에 봉작(封爵)되셨으며, 16대조 휘 회중(淮中), 호 통계(通溪)는 조선 태조가 병판으로 징초(徵招)하였으나 불응하시고, 14대조 휘 이온(利溫)은 도승지로서 연산조의 혹화(酷禍)를 입으셨다가 중종반정 시(反正時)에 진천군에 봉작되셨으며, 12대조 휘 세의(世義)는 충순위선략장군으로 고부에 낙향하셔서 후손이 세거(世居)하게 되시니라. 11대조 휘 우(雨), 10대조 휘 윤상(允常), 9대조 휘 영(穎)은 3대를 연속하여 사용(司勇)이셨고, 고조 휘 위거(渭擧), 증조 휘 석장(錫章), 조부 휘 한중(漢重)은 모두 선비로서 고부에서 농업을 경영하셨으며, 조모는 의성 김씨(義城金氏)시니, 상제님 인신의 세계(世系)는 13대조 좌랑공 휘 부(溥)의 종손이시니라.
7. 선정대모께서 서산리 친가에 근친(覲親)으로 가서 계실 때에 하루는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서 몸을 덮고 천지가 광명하여지는 꿈을 꾸셨더니, 그로부터 태기가 있으셔서 열석 달 만에 상제님을 낳으시니라.
8. 이때 진당대부께서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보시니, 두 선녀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산모를 간호하셨으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뻗쳐서 7일 동안 계속 되니라.
9. 상제님께서 차츰 자라시매 성품이 후유(厚裕)하시고 혜식(慧識)이 초인(超人)하시며, 재예(才藝)가 총명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경애(敬愛)를 받으시니라. 더욱 성장하시매 옥안(玉顔)이 원만 준수하셔서 금산사 미륵불과 흡사하시며, 양미간(兩眉間)에 불표(佛表)가 있으시고 아랫입술 속에는 여의주를 숨기셨으며 왼손바닥에는 임(壬)자 무늬, 오른손바닥에는 무(戊)자 무늬가 있으시니라.
10. 어리실 때부터 호생(好生)의 덕이 많으셔서 나무심기를 즐기시고, 어리고 약한 초목이나 미세한 곤충이라도 해치지 아니하시며, 위기에 빠진 생물이 있으면 반드시 구하시니라.
11. 정축(丁丑 : 도기전 32, 서기 1877)년에 농악을 보시면서 기뻐하고 감동하시더니, 성장하신 후에도 다른 구경은 아니 하셨으나 농악은 자주 구경하시니라.
12. 이해에 진당대부께서 훈장을 구하셔서 상제님께 천자문을 가르치게 하셨는데, 하늘 천(天)자와 땅 지(地)자를 가르칠 때에는 따라 읽으셨으나 검을 현(玄)자와 누를 황(黃)자는 따라 읽지 아니하시므로 훈장이 아무리 타일러도 끝내 읽지 아니하셔서 할 수 없이 그만 두니라.
대부께서 상제님께 그 연고를 물으시니 말씀하시기를 “하늘 천자에 하늘의 이치와 땅 지자에 땅의 이치를 알았사오니 더 배울 것이 없음이옵니다. 남의 마음을 알지 못한 훈장이 가르치는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오리니 돌려보내사이다.” 하시므로 부득이 그 훈장을 보내시니라.
13. 아홉 살 되시던 기묘(己卯 : 도기전 30, 서기 1879)에 대부께 청하여 후원에 별당을 짓고 홀로 거처하시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시고, 하루 건너마다 까투리 한 마리와 비단 두 자 반씩을 구하여 들이시더니, 두 달 후에 문득 어디로 나가셨는데 방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라.
그 후에 집으로 돌아오셔서 스스로 남의 글방에 다니시며 글을 배우시니라. 이때 유가(儒家)의 경서(經書)와 불가서(佛家書),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 등을 두루 섭렵(涉獵)하시니라.
14.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실 때 훈장으로부터 한번 들으시면 곧 깨달으시고, 학우들과 더불어 글을 겨룰 때는 항상 장원을 하시니라. 하루는 훈장이 다른 학부형들에게 미움을 받을까 염려하여, 문장이 다음가는 학동에게 장원을 주려는 뜻으로 글을 꼲았으나 또 상제님께서 장원하시니, 이는 훈장의 속뜻을 미리 아시고 문체와 글씨를 바꾸어 분간하지 못하게 하신 까닭이니라. 모든 일에 이와 같이 혜명(慧命)하시므로 사람마다 신기하게 여기니라.
15. 진당대부께서 정읍 읍내 박 부자에게 수백 냥 빚이 있으셔서 독촉이 심하여 걱정으로 지내시는데, 상제님께서 대부께 청하시어 우선 50냥을 준비하여 박 부자에게 가서 돈을 주신 다음, 그 사숙(私塾)에서 학동들과 함께 지내시니라.
마침 훈장이 운자(韻字)를 불러 학동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니, 상제님께서도 함께 짓기를 청하셔서 낙운성시(落韻成詩)하시매 시의 격식이 절묘하므로 훈장과 학동들은 물론, 박부자도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집에 머무르며 자기 아들들과 함께 글 읽기를 권 하니라. 상제님께서 그 권유에 따라 며칠 동안 머무르시면서 빚을 걱정하시니, 박 부자가 그 인품과 언행의 뛰어나심에 감복하여 드디어 빚을 탕감(蕩減)하고 채권문서를 불사르니라.
16. 하루는 진당대부께서 벼를 말리시는데 닭과 새떼가 몰려들므로 심하게 쫓으시니라. 상제님께서 보시고 만류하시기를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 먹는 것도 살려고 함이오니 너무 심히 마옵소서. 금수를 애련(愛憐)하시는 마음이 곧 사람을 구하는 마음이 아니오리까?” 하시니라.
대부께서 듣지 않으시고 굳이 쫓으시자 뜻밖에 우레가 일며 소나기가 쏟아져서 말리던 벼가 무수히 떠내려 가니라.
17. 열세 살 되시던 계미(癸未 : 도기전 26, 서기 1883)년에 대모께서 친히 짜신 모시 베 60자를 상제님께서 한 마을의 유덕안(兪德安)에게 들리시고 정읍 장에 팔러 가셨는데, 덕안은 일이 있어 다른 곳에 가고 상제님께서 모시 베를 놓고 잠시 옆을 보시는 사이에 잃으시니라.
덕안이 이 말을 듣고 찾았으나 날이 저물고 사람이 많아 찾을 수가 없어 귀가하시기를 청하여도 듣지 아니하시고, 즉시 고창(高敞)으로 가시며 말씀하시기를 “내일 귀가하리라.” 하시므로 덕안이 할 수 없이 혼자 돌아 오니라.
이튿날 상제님께서 모시베 값을 가지고 돌아오셔서 대모께 올리시므로 온 집안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어머님께서 몸소 고생하시며 짜신 직물을 잃었으므로 얼마나 애석하실까! 생각하고, 오늘이 마침 고창장이라, 장에 나올 듯하여 바로 갔더니 다행히 찾아서 팔아 왔나이다.” 하시니라.
18. 상제님께서는 본댁이 가난하셔서 을유(乙酉 : 도기전 24, 서기 1885)년에 학업을 중단하시고, 사방으로 주유(周遊)하시다가 정읍군 입암면 거사막(巨沙幕)에서 보리걷이 시기를 당하여 남의 집 보리 거둠도 하시고, 장성군 백양사(白羊寺) 부근 부여곡(夫餘谷)에서 벌목도 하시니라.
19. 여러 서당으로 자주 다니시며 글을 읽으시는데, 학문이 뛰어나시므로 혹 누가 상제님께 글 쓸 일을 부탁드리면 써 주시되, 반드시 끝에 한두 자 쓸 만한 여백을 남기시니라.
20. 정해(丁亥 : 도기전 22, 서기 1887)년 어느 날 외가에 가셨을 때, 어떤 주정꾼이 상제님께 까닭 없이 행패를 부렸으나 아무 대항도 아니 하시더니, 갑자기 어디선가 큰 돌 절구통이 날아와 주정꾼의 머리를 덮어씌우므로 주정꾼이 그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곳으로 가시니라.
21. 젊으셨을 때에는 기력이 강장하셔서 힘겨루기와 같은 놀이를 좋아하시더니, 숙항(叔行) 되는 강성회(姜聖會)도 또한 그러하여 가끔 서로 힘을 겨루시니라. 한번은 맷돌 밑짝의 중쇠를 이로 물어 올리셨으며, 어느 때에는 마당에 서서 발로 처마 끝을 차기도 하시고, 또 한 팔은 뒤로 땅을 짚으시고 발꿈치를 땅에 붙이신 채 장정 10여인을 시켜 힘껏 허리를 누르게 하셨으나 요동하지 않으시니라. 어느 때에는 여러 사람과 힘겨루기를 하시는데 돌절구를 머리에 쓰시고 상모(象毛) 돌리듯 하시니라.
22. 하루는 청도고개에서 명리(命理)를 판단하시니 그 신통하심을 사람마다 탄복 하니라. 어떤 사람이 운명을 여쭈매, 상제님께서 “복채(卜債)를 내어 놓으라.” 하셨으나 그 사람이 돈이 있으면서도 없다고 속이자 “그대가 돈은 아끼는 거나, 내가 재주를 아끼는 것은 마찬가지니라.” 하시고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먼저 바른말을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느니라.” 하시니라.
23. 24세 되시던 갑오(甲午 : 도기전 15, 서기 1894)년에 금구군 초처면 내주동(內住洞)에 있는 처남 정남기(鄭南基)의 집에 서당을 여시고, 아우 영학(永學)과 이웃 학도들에게 글을 가르치시니 그 교법이 탁월하시므로 여러 사람들이 칭송 하니라.
24. 이해에 고부사람 전봉준(全琫準)이 동학당(東學黨)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시정(時政)에 항거하니 세상이 흉흉하니라. 이때에 금구사람 김형렬(金亨烈)이 상제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뵌 후, 당시의 소란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 가서 함께 공부하기를 청하므로 서당을 폐지하시고 전주군 우림면 동곡(銅谷) 구성산(九星山) 학선암(學仙庵)으로 가셨으나, 그곳도 번잡하여 다른 곳으로 떠나시니라.
25. 5월 어느 날 밤 꿈에 한 신선이 나타나서 “저는 후천진인(後天眞人)으로서 천지현기(天地玄機)와 천하대세를 은밀히 의논하고자 하옵는 바, 먼저 무극(无極)의 체(體)를 설(設)하시면 후에 태극(太極)의 용(用)으로 화(化)하리이다.” 하니라.
26. 7월 어느 날 밤에는 어두운 가운데서 원신(元神)을 묵운(默運)하시더니, 문득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 선우야둔도(單于夜遁逃) 욕장경기축(欲將輕騎逐) 대설만궁도(大雪滿弓刀)” 라는 옛 시가 불빛처럼 환하게 보이시니라. 이로 인하여 동학군이 눈 내릴 때에 관군에게 패망할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예시(豫示)하시며 동학군에 가담하지 말라고 타이르시더니, 과연 이해 겨울에 동학군이 패망하고 상제님의 말씀에 순응한 사람은 전쟁의 화를 모면 하니라.
27. 10월에 태인 동골의 동학 접주(接主) 안윤거(安允擧)를 방문하시니, 마침 닥뱀이 안필성(安弼成)이 한 마을의 동학신도 최두연(崔斗淵)과 함께 와서 윤거의 도담(道談)을 듣고 있으니라.
상제님께서 윤거와 성명을 통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동학군이 황토현(黃土峴)에서는 승리하였으나, 필경 패망을 면하지 못하리니 이곳 동학군의 발원지에 타이르러 왔노라. 그대가 접주라 하니 무고한 생민을 몰아 전투에 참가시켜 전화(戰禍)를 입게 하지 말라. 섣달이 되면 정녕코 전패하리라.” 하시고 돌아오시니라.
윤거는 이 말씀을 믿어 접주를 사퇴하고 전란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두연은 믿지 않고 접주 겸 명사장(明査長)이 되어 병마를 인솔하고 출전 하니라.
28. 필성은 “남원으로 와서 종군(從軍)하라.”는 두연의 명령을 받고 20일 남원으로 가던 중 전주 구이면 정자리(亭子里)에 이르니, 상제님께서 길가에 서 계시다가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올 줄을 알고 이곳에서 기다렸으니 함께 가자.” 하시며 데리시고, 임실 마군단 주막에 이르셔서 “날씨가 차니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면 남원에서 만날 사람을 절로 만나게 되리라” 하시니라.
필성이 “노자가 부족하오니 두연을 만나야 하겠나이다.” 하고 아뢰니 “숙식(宿食) 걱정은 말라.” 하시니라.
두어 시간이 지난 후에 총포소리가 나더니 두연이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주막 앞을 지나가며 “남원으로 가지 말고 전주로 따라오라.” 하니라. 상제님께서 필성에게 “병마의 뒤를 따라감이 불가하니 떨어져 천천히 가자.” 하시고 전주 수통목에 이르셔서 “오늘은 전주에서 소란이 일어 살상(殺傷)이 있으리니 여기서 쉬고 내일 감이 옳으리라.” 하시며 함께 수통목에서 쉬시니라.
29. 이튿날 필성과 함께 전주에 이르셔서 조용한 곳에 숙소를 정하시고, 저녁에 필성에게 말씀하시기를 “거리에 나가면 볼 것이 있으리라.” 하시며 함께 한 곳에 이르시니 세 사람의 머리가 길바닥에 버려져 있으니라. 이를 가리키시며 “저것을 보라.
이렇게 험난한 때에 어찌 경거망동(輕擧妄動)하리요?” 하셨으나 필성은 듣지 않고 이곳에서 상제님과 작별 하니라.
30. 그믐께 동학의 대군이 전주를 떠나 경성(서울)으로 향할 때, 필성이 종군하여 여산(礪山)에 이르니 상제님께서 또 기다리셨다가 필성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제 종군하는 이 길이 크게 불리하니 각별히 조심하라.” 하셨으나 필성은 상제님을 다시 작별하고 종군 하니라.
진잠(鎭岑)을 지나 유성(儒城)장터에서 쉬고 다음날 새벽에 청주(淸州) 병영을 공격할 때 30리가량 못 미친 곳에 상제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필성에게 “너희 군중에 한 중이 있느냐?” 하시므로 “있나이다.” 하고 아뢰니 “너는 이 길을 따르지 말라. 저 자들이 요승(妖僧)의 말을 믿다가 멸망을 당하리라.” 하시니라.
필성이 여쭈기를 “이런 중대한 거사를 어찌 불길하게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너는 어찌 나의 말을 믿지 않느냐? 내가 저들을 미워함이 아니라, 저들의 불리함을 알고 한 사람이라도 화를 면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니라.
다시 여쭈기를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무슨 일로 험난한 길을 이곳까지 오셨나이까?” 하니 “나는 동학군에 관여함이 아니라. 너희들을 구하러 옴이니라.” 하시니라.
31. 이때 김형렬이 상제님께 인사를 드리니 형렬에게도 종군하지 말라고 타이르시니라. 필성과 형렬은 상제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종군하여 청주병영 앞의 산골에 이르니 좌우에서 복병이 일어나 포화(砲火)를 퍼부어 동학군의 죽는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으니라.
필성과 형렬이 황겁하여 소나무숲 속으로 도망가니 상제님께서 그곳에 계시다가 “너희들은 잘 도망하여 왔도다.
이곳은 안전하니 안심하라.” 하시매 형렬이 비로소 상제님의 지감(知鑑)에 감복 하니라. 두 사람이 종일 먹지 못하여 허기를 이기지 못함을 보시고 돈을 주시며 “저곳에 가면 떡 점이 있으리니 주인이 없을지라도 떡값을 그릇에 넣어 두고 가져오라” 하시므로 필성이 명하신 대로 하니 상제님께서 두 사람이 나누어 먹게 하시니라.
32. 상제님께서 두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동학군이 미구에 쫓겨 오리니 우리가 먼저 감이 옳으리라.” 하시며 두 사람을 데리시고 진잠에 이르셔서 “동학군이 이곳에서 또 많이 죽으리라.” 하시니라.
두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심히 불쾌하게 생각하므로 “저희들을 미워함이 아니라, 사태의 기미를 말함이니 비록 듣기 싫을지라도 불쾌하게 여기지 말라.” 하식 산중 깊숙한 곳에서 쉬시는데, 잠시 후에 총성이 일어나며 격전 끝에 동학군이 많이 살상 되니라.
33. 이곳을 떠나 살길로 드렸는데 목탁 소리가 들리므로 찾아가시니, 바로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해는 아직 이르나 더 가면 피해를 입으리니 이곳에서 자고 감이 옳으리라.” 하시고 머무르시니라.
이윽고 한 중이 와서 “동학군이 노성(魯城)에 진을 치고 도망하는 군사를 붙잡는다.” 하므로 필성과 형렬이 크게 근심하는데 “이곳에서 쉬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화를 피하게 함이니 내일 아침에 떠나면 사고가 없으리라.” 하시니라.
34. 이튿날 아침에 갑사를 떠나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이로부터 큰 화가 없으리니 각기 헤어져 가도 되리라.” 하셨으나, 두 사람은 두려워하여 상제님께 수행하기를 원하므로 허락하시니라.
여산 근처에 이르셔서 “읍내를 지나가면 옷을 빼앗기리라.” 하시고 사잇길로 드셔서 고산(高山) 인내장터로 향하시니라. 이때 여산 읍으로 지나는 동학군은 모두 읍내에서 옷을 빼앗기고 벗은 몸으로 흩어져 가게 되니 이는 지난번에 동학군이 북진할 때에 읍민의 옷을 빼앗은 보복이니라.
35. 전주에 이르셔서 두 사람을 각기 돌려보내실 때 노자가 없음을 걱정하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곳에 있으니 염려 말고 돌아가라.” 하시므로 이에 상제님께 작별인사를 드리고 형렬은 동곡으로, 필성은 닥뱀이로 각기 돌아 가니라. 이 후에 동학 패잔군이 다시 모였으나 10월 13일에는 원평에서, 15일에는 태인에서 연전연패하여 패망 하니라.
36. 을미(乙未 : 도기전 14, 서기 1895)년 봄에 고부지방 유생(儒生)들이 평란(平亂)을 축하하여 두승산(斗升山)에서 시회(詩會)를 열므로, 상제님께서도 임어하셨더니 한 노인이 조용한 곳으로 모신 다음, 작은 책 한 권을 올리므로 상제님께서 받아 통독(通讀)하시니라.
37. 하루는 전주 소양면(所陽面) 송광사(松廣寺)에 가셔서 여러 날 유어(留御)하시는데, 승려들이 무례하게 대하므로 상제님께서 진노하셔서 꾸짖으시기를 “사망(邪妄)한 무리들이 산속에 모여 불법(佛法)을 빙자하고 백악(百惡)을 자행하여 세간에 해독을 끼치니 이 소굴을 뜯어 없애리라.” 하시고 법당기둥을 손으로 잡아당기시니 기둥이 한 자나 물러 나니라.
여러 승려들이 대경실색하고 몰려와서 절하며 사죄하므로 노여움을 그치시니라. 그 후에 법당을 여러 번 수리하여도 물러난 기둥은 원상대로 복구되지 아니하니라.
38. 전주에 가셔서 백남신(白南信) 아우의 소실인 기생 춘월의 친정에 처소를 정하시고 오래 유어하실 때, 춘월이 상제님의 준수하신 의표를 흠모하여 어느 날 밤에 침소에 들어오므로 너그러이 꾸짖어 보내시니라. 그 후에도 누차 찾아왔으나 더욱 엄중히 타이르셔서 돌려보내시니라.
39. 정유(丁酉 : 도기전 12, 서기 1897)년 초에 다시 남기의 집에 서당을 여시고, 아우 영학과 형렬의 아들 찬문(贊文)과 이웃 학도들을 가르치시니라. 이때 다시 유불선(儒佛仙) 음양(陰陽) 참위(讖緯)의 서적을 섭렵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또한 광구천하(匡救天下)에 도움이 되리로다.” 하시니라.
40. 갑오동학란 후에 국정(國情)은 더욱 부패하고 세속(世俗)은 날로 악화하여 관헌(官憲)은 포학(暴虐)과 토색(討索)을 일삼고, 선비는 허례만 숭상하며 불교는 혹세무민(惑世誣民)만 힘쓰고, 동학은 혁명 실패 후에 기세가 꺾여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서교는 세력신장에 진력하니 민중은 도탄(塗炭)에 빠져 안도하지 못하고, 주위의 현혹에 의지할 곳이 없이 위구(危懼)와 불안에 동요하므로 상제님께서는 분연히 광구천하의 뜻으로 주유(周遊)의 길을 떠나시니라.
41. 충청도 연산(連山)에 이르셔서 역학자(易學者) 김일부(金一夫)에게 들르시니, 일부는 그 전날 밤 꿈에 하늘로부터 사자(使者)가 내려와서 옥경(玉京)에 올라오라는 상제(上帝)의 명을 전하므로 사자를 따라 옥경의 요운전(曜雲殿)이라는 장려(壯麗)한 금궐(金闕)에 가서 상제를 뵌 일이 있었는데, 이제 상제님을 뵈니 그 용모가 꿈에 옥경에서 뵈었던 상제와 같으시므로 매우 신이하게 여기며 공손히 맞아 요운(曜雲)이란 호를 올리고 경대(敬待)하니라.
42. 그곳에서 며칠을 유어하신 후에 다시 길을 떠나셨는데, 도중에 여비로 인하여 대통교(大通橋)의 한 서당에서 명리(命理)를 판단하시니, 소문이 공주 부중에 선전되어 운명을 묻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신통하신 판단에 감복 하니라.
또 이곳 사람들은 8월 추석을 당하여 소를 잡아 상제님께 헌상(獻上)하니라.
43. 다시 각지로 주유하시다가 전주(全州)에 이르시니 부중사람들이 신인(神人)으로 우러러 뵈었는데, 어떤 사람이 기생 자매를 자신의 딸이라 속이고 운명을 여쭈니라. 상제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왜 나를 속이느뇨?” 하셨으나 그 사람이 바른 대로 아뢰지 아니하므로 “이것은 화류(花柳)의 운명이라. 이렇게 천한 여자를 딸이라 하니 그대가 실로 천인(賤人)이로다.” 하시니 그 사람이 탄복하고 부끄러워하니라.
44. 이후로 전라?경상?충청?경기?강원?황해?평안?함경 등 팔도 각지를 차례로 주유하시니, 박학광람(博學廣覽)하시고 타심통(他心通)이신 상제님의 혜식에 모든 사람이 신인이시라고 칭송 하니라.
45. 3년을 주유하시고 경자(庚子)년에 북도(北道)로부터 고향에 돌아오셔서 시루 산에 조모의 산소를 면례(緬禮)하시니, 묘 자리는 지사 유서구(柳瑞九)가 잡으니라.
이 무렵 상제님께서 시루산 상봉에서 호둔공부(虎遁工夫)를 하실 때, 마침 나무하던 사람들이 보니 방금 공부하시던 자리에 큰 호랑이가 도사리고 있으므로 기겁을 하고 쫓겨 와서 대부께 “아드님의 공부 자리에 큰 범이 앉아 있더이다.” 하고 아뢰니라.
대부께서 당황하여 시루봉에 올라가시니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상제님께서는 태연히 공부하고 계시니라. 이때 상제님께서 요술공부를 한다 하여 고부 경무청에서 포교들이 잡으러 어면 상제님께서는 삿갓을 쓰시고 안개를 지으시매 길가에 앉아 계셔도 그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시니라.
46. 전주 이동면 전룡리(田龍里)에 사는 이치안(李治安)이 구혼(求婚)하고자 충청도로 향하다가, 주막에서 상제님을 만나 수인사도 없이 하룻밤을 함께 유숙하고 이튿날 떠나려 하매,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구혼하려고 길을 떠났으나 반드시 허행이 되리니 집으로 가라. 그러면 전날부터 의혼(議婚)하던 매파가 와서 정혼을 청하리라. 만일 이 기회를 놓치면 혼사 길이 막히리니 빨리 돌아가라.” 하시니라.
치안은 상제님께서 자신의 사정을 환히 아시고 가르치심을 신기하게 여겨, 비로소 성명을 고하고 상제님의 처소를 자세히 여쭈어 본 다음, 집으로 돌아가니 과연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라.
47. 얼마 후에 치안이 상제님의 신성(神聖)하심을 흠모하여 자기 집으로 모셔 오니라. 이때 치안의 아들 직부(直夫)는 그 마을 이장으로서, 마침 마을 인구를 긴급히 조사할 일이 있다 하므로 상제님께서 영산수법(靈算數法)으로 호수와 남녀인구를 일러 주시고, 3일 안에 한 사람이 줄 것을 말씀하시니라.
직부는 믿지 아니하고 온 마을을 돌아 낱낱이 조사하니 과연 한집 한사람도 틀림이 없었으며, 또 3일 만에 한 사람이 사망하므로 비로소 상제님의 신이하심에 감복하고 부자가 함께 상제님을 우러러 받드니라.
48. 신축(辛丑 : 도기전 8, 단기 4234, 서기 1901)년 여름에 본댁으로 돌아오셔서 선대의 공명첩(空名帖)을 불사르시니라.
영부인이신 선경부인(宣敬夫人) 정(鄭)씨께서 말씀드리시기를 “이제는 그만 눌러앉으셔서 남과 같이 집에서 재미있게 살림에 힘을 쓰사이다.” 하시니 “그렇게 작은 말이 어디 있소?” 하시고 이로부터는 본댁에 자주 들르지 아니하시니라.
49. 상제님께서 이때에 이르셔서 종전의 경륜(經綸)과 법술(法術)만으로써는 세상을 광구(匡救)할 수 없고, 오직 자유자재(自由自在), 무애무구(無碍無拘)한 권능(權能)으로라야 함을 깨달으시니라.
이에 전주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願寺)에 들어가셔서 주지 박금곡(朴錦谷)에게 명하여 조용한 칠성각을 비우게 하셔서 드신 다음, 출입문을 밖에서 잠그게 하시고, 문틈조차 밀봉하셔서 사람의 출입을 금하게 하시고 수도하시니, 금곡은 상제님께서 너무 오랫동안 불음불식(不飮不食)하심이 염려되어 초조히 지내니라.
50. 이와 같이 49일간을 두문수도(杜門修道)하시더니, 7월 초5일 자시에 두우성(斗牛星)이 섬광방전(閃光放電)하고 오룡(五龍)이 허풍(噓風)하며 천지가 뒤눕는 가운데, 탐음진치(貪淫瞋癡)의 사마정(四魔精)과 제귀악령(諸鬼惡靈)을 극복하시고, 몸소 삼계의 무극주(无極主)로서 구천상제의 당체(當體)이심을 대오(大悟) 자각(自覺)하시니라.
이때 천궤지축(天軌地軸)이 일시에 진동하는지라. 금곡이 놀라 상제님 공부실에 올라가 문틈으로 살피니 천안(天顔)이 햇빛같이 빛나고, 실내가 대낮처럼 밝으므로 저도 모르게 합장부복 하니라.
51. 밖으로 나오신 상제님께서는 장기간 불면불식(不眠不食)하셨으나, 조금도 초췌(憔悴)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옥안(玉顔)은 구슬같이 윤기(潤氣)가 나시고 눈빛은 샛별처럼 빛나시니라.
다만, 의복이 너무 남루(襤褸)하시므로 금곡이 급히 본댁으로 사람을 보내어 의복을 가져오게 하니, 본댁의 선경부인께서는 항상 상제님께서 불고가사(不顧家事)하심을 불만히 여기던 중이므로 의복을 내어 놓으며 불평하는 말씀을 하시니라.
금곡이 그 의복을 받아 상제님께 올리니 “이 옷에 방정스런 사(邪)가 붙었으니 속히 버리라.” 하시며 받지 아니하시니라. 금곡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그 사유를 전하니 선경부인께서 황공하여 참회하고 새 옷을 보내시니 그제야 가납(嘉納)하시니라.
52. 상제님께서 대각하신 후에 금곡이 시좌(侍坐)하여 여쭈기를 “선생님께서 제 일을 한 말씀 하교(下敎)하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전생에 일광대사(日光大師)인데 그 후신(後身)으로 대원사에 오게 되었으니 그대가 할 일은 이 절의 중수(重修)라. 그대의 수명이 요절(夭折)할 수이나 내 이제 90세가 넘도록 연장하여 주리라.” 하시고 이후에는 복서명리(卜筮命理)의 학술을 말씀하지 아니하시니라.
53. 이해 겨울에 비로소 본댁에서 삼계공사(三界公事)를 행하시며 창문에는 종이를 바르지 아니하시고, 방에 불을 때지 아니하시며 홑옷을 입으시고 식음을 전폐하시며 7일 간을 지내시는데, 벼 말리는 뜰에 새조차 내리지 아니하고 마을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문 앞을 지나다니기를 꺼리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