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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역사바로세우기—제10탄]
김좌진 사후 음해
1. 김좌진 사후 음해 정형
⑴김좌진 사후 음해는 일제 특수경찰(조선총독부 고등경찰)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그 추종 언론에 의해 왜곡,조작,자녀증발,가짜등장 등이 시작되었다.
⑵우익테러암살단인 백의사 총사령 염응택에 의해 음해되었다.
⑶김두한에 의해 김좌진의 유택이 조작되었다.
⑷김을동에 의해 김좌진의 가족사진이 조작되었다.
⑸친일정권에 부역한 일부 강단사학계의 무성의가 음해했다.
⑹친일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설가, 작가들에 의해 음해당했다.
⑺영화계의 검증 없는 무모한 각본은 김좌진사후음해로서 국민기만에 해당된다.
⑻중국 동포사회의 연구조사자들은 한국의 문헌을 답습했고, 한국의 학자들은 중국 동포사회 조사자들의 음해행위를 묵인하고 연구성과로 평가해 왔다.
⑼가짜후손과 안동김가 문중의 침묵과 중립은 곧 김좌진사후음해에 해당된다.
⑽조선공산당만주총국 조공고려청년회 소속 양환준의 음해가 정설돼 있음이 문제다.
⑾충남 홍성군이 발행한 “대한독립군총사령관 백야김좌진장군전기”가 가장 종합적으로 치명적인 음해를 가했다.
⑿행정기관인 홍성군, 충청남도, 국가보훈처의 방치,방임,체념도 김좌진사후음해이다.
※인터넷 카페라는 특성으로 문헌 주석은 생략한다.
2. 구체적 음해 사례
⑴매일신보 1930년 2월 13일자
《유족은 4명 애아(愛兒)는 실종. 금번에 피살된 김좌진의 유족으로는 ▲모이씨(68) ▲처오씨(45) ▲제동진(34) ▲자두한(11)의 네 사람이 있는데 어머니와 아내와 동생은 그가 피살된 산시 근처에서 거주하고 있다 하며 그의 아들 두한은 생모인 전조선권번기생 김계월과 함께 어디가 있는지 이삼년째 행위불명이 되어 있다.》
▶배경 해석
⑴기사에서 “…있다 하며…”라는 표기는 직접 취재를 하지 않은 것이며, 상부기관한테 기사를 하달받은 것으로 본다.
⑵김계월과 김좌진이 동침한 사실이 성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김계월을 등장시켰다.
⑶김두한이 김계월의 아들이라는 근거도 없이 아들로 등장시켰다. 철저한 조사를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
⑷밑도 끝도 없이 4명의 가족만 보도한 것은 조선총독부의 의도적인 음해전략이다.
(2) 백의사 염응택의 “장군의아들만들기”도 음해이다.
①“죽은자 말이 없다.” 했던가! 기고만장하던 염응택의 시나리오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짐으로서 역사는 입을 열기 시작한다.
[백의사: 백의사는 염응택의 주도로 1945년 11월 서울에서, 월남한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북한지역과 남한지역에서 공히 활동한 극우반공테러공작단이다. 백의사(白衣社)라는 명칭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반공지하공작단체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한 것이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평안남도 도위원장 현준혁을 암살한 것으로 알려진 대동단이 백의사의 전신이고 염응택, 박고봉, 백관옥, 선우봉, 박진양 등이 대동단의 주요 인물들이다. 백의사는 현준혁 암살사건 직후 대동단의 관련자들이 월남하여 개칭·정비한 동일 성격의 단체이다. 조직의 구성을 보면 총사령 염응택, 부사령 박진구, 고문 유진산·백창섭, 조직국장 안병석, 정보국장 김명욱, 집행국장 한승규, 비서실장 백관옥, 훈련국장 선우봉, 총무국장 정병모 등이다.
백의사는 반공·반탁·반북을 기치로 한 대북 테러·암살·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첩보원들을 훈련시켜 북한지역에 파견하였고 파견된 요원들은 토지개혁 반대선동, 신탁통치 반대활동, 주요 지도자 및 조직·단체에 대한 정보수집, 임시정부 지지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내무상 신익희가 조직한 정치공작대와 협력하여 김일성 암살 시도(1946년 3월 1일), 최용건 자택 습격(1946년 3월 5일, 7일) 김책 자택 습격(1946년 3월 9일), 강양욱 자택 습격(1946년 3월 12일) 등을 감행하였다.
백의사는 남한 지역에서도 동일한 반공활동을 폈는데, 특히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경찰과 국방경비대, 노동총연맹 등에 구성원들을 가입시켜 활동하도록 하였다.
백의사는 미군 방첩대(CIC)의 지원을 받아 대북 첩보·정보활동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 지속되었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백의사의 성원 상당수가 미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KLO: Korea Liaison Office) 부대로 흡수되었다.
②이때부터 김두한은 장군의 아들행세를 하게 된다.
작가 이영신의 “현대사 발굴-비밀결사 백의사” 208~209쪽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김두한을 노려보고 있다가 다시 호통을 쳤다. “이놈! 세상에 네놈처럼 불효막심하고 우둔한 놈은 처음 보겠다!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자가 공산주의자 놈이었거늘, 네 이놈! 아무리 막돼먹었기로 공산주의자들의 본색이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원수놈들의 편에 서서 앞잡이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뭐라구요?”
김두한은 혼비백산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누구한테 암살을 당했다는 얘기는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암살자가 공산주의자였다니! 그게 사실일까?’
김두한은 염응택의 표정에서 진실을 가려내기라도 하는 듯이 날카롭게 쏘아보며 물었다.
“여보슈. 우리 아버지를 공산주의자가 암살했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안단 말이오?”
염응택이 대답하기 전에 오동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군. 자네 이 어른이 뉘신 줄 아나? 이분은 바로 김좌진 장군이 이끌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하시던 염동진 선생이시네.”
“아버지 밑에서 중대장을?”
김두한은 거듭 놀랐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가 하는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은 무조건 옳은 것으로 믿어오던 아집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조급하게 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염응택은 다소 누그러진 표정이 되어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가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지 않았다면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김좌진 장군의 묘소까지도 알고 있어!”
김두한은 갑자기 염응택을 향해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더니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 인용문에는 염응택(=염동진), 오동진, 김두한 세 사람이 등장한다. 이영신은 “현대사 발굴-비밀결사 백의사”의 작가로서 감각적으로 장르의 기교를 살렸다고 볼 수 있으나 이 또한 만만찮은 묘사이다. 하지만 등장인물 세 사람의 대화만큼은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먼저 염응택이 어떤 인물인가를 살펴보면 위 인용문은 거짓역사의 한 장면에 불과한 허구라는 점이 금방 나타난다. 문제는 이 같은 허구와 조작이 사실로 받아들여져 국민의 가슴속에 파고들어 “장군의 아들, 야인시대, 왕초” 등과 같은 영화로 상영되어 90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의 뇌리에 엉거주춤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월간 민족21”은 정병준의 논문을 2001년 10월호에 게재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염동진은 누구인가?
본명은 염응택(廉應澤, 閻應澤). 염동진은 이명이다. 본적은 평남 중화군 중화면 초현리 82번지. 주소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문산리 54번지(선린상업학교 졸업 후 임시 주소)로 돼 있다. 1909년 2월14일생. 염도열(廉道悅)의 3남이다.
학력은 중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연도 미상)하고 1926년 4월1일 선린상업학교 본과 1학년에 입학하여 1931년 3월에 졸업한 후 파주에 머물다 상해로 건너갔다. 1932년 2월 이청천 계열의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해 같은 해 4월9일 졸업했다.
낙양군관학교 졸업 후 남경에 체류했는데 일제 자료에 따르면 군관학교 졸업 후 “불령단체”에 가담한 혐의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수배를 받았다. 1936년 11월 시점에서도 수배 중인 것으로 확인된다. 백의사 출신자들의 증언(백관옥, 백근옥, 최의호, 조재국, 선우길영)에 따르면, 염동진은 “요춘택이란 중국식 이름으로 변성명하고 중국군 남경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에서 일했다. 그 후 남의사(藍衣社)에 들어갔고, 1937년 중일전쟁 후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에서 일하다가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해방 직전 평양에서 박고봉 등과 함께 대동단 조직. 1945년 9월3일 백관옥을 통한 현준혁 암살에 관여한 후 월남했다. 1945년 11~12월경에 백의사를 조직. 사령이 되었다. 1947년 7월 여운형을 암살하는데 사용한 45구경 권총을 암살범들에게 제공하기도 했으며 마침내 1949년 6월 김구 암살에도 개입한다. 6•25 전쟁 시 인민군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인용문에서 나타나는 장면들은 작가 이영신의 의도가 아니라 이영신이 발굴한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현대사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염응택이 고안한 각본이 아니고서야 이런 연출은 쉽게 형성될 수 없다. 한마디로 잘라 말해서 1909년에 태어나 1931년에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염응택이 어떻게 10살이 되던 1919년에 북로군정서에서 중대장으로 활동했단 말인가? 장군이 순국하시던 1930년에는 선린상업학교 재학생이었잖은가 말이다. 이렇게 하늘과 땅이 뒤바뀔 거짓 시나리오로 김두한은 장군의 아들로 해방정국에서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변신시킨 것은 염응택(=염동진)이었고, 기고만장한 김두한은 10년이 지난 뒤에 장군의 오숙근 여사 유령 장례식, 유택조작, 김좌진의 아들로 보훈처 등재 등의 작업을 서슴없이 진행했다.
김좌진과 김두한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조작된 개인의 가족사이지만 김좌진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한 가정의 문제를 넘어 역사이기도 하다. 김좌진은 가족을 구하려고 일제와 맞서 전투한 것이 아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민족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반일무장투쟁 노선을 걸었다는 점으로 말이다. 역사는 정직하고 확실하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면, 정부와 김두한의 유족 그리고 일부 언론과 역사학자들이 오히려 사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셈이 아닌가.
염동진은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이후 일제의 밀정 노릇까지 한 인물이었다. (중략)염동진은 해방 후 자신이 친일 밀정이었다는 점을 전혀 드러내지도 반성하지도 않았다. 염응택은 친일친미정권에 빌붙어 반공을 면죄부로 삼아 독립운동에 종사했던 정치인들을 무참히 암살했다. (중략)염동진과 함께 주목을 끄는 조직은 백의사白衣社였다. 이 지하조직의 기본목적은 ‘공산주의자들’과 ‘반정부 정치인’을 암살하는 것이다. (중략)“조직(백의사) 내부에는 혁명단이라고 불리는 ‘특공대(Special Attack Corps)’가 존재한다. 특공대는 모두 5개 소조로 구성되어 있고, 각 소조는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략)나는 안두희가 정보원(informer)일 때부터 알았으며, 후에 그는 한국주재 CIC의 요원(agent)이 되었다. 그 역시 염동진이 명령을 내리면 암살을 거행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청산리대첩 영웅 아버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중대장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김두한은 기고만장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염응택이 내리는 명령을 불평 없이 좇았을 것이다. 이 또한 염응택은 장군이 순국하는 그 해에 선린상업학교 재학생이었음에도 장군의 반일무장전투부대에서 중대장으로 활동했다며, 대종교적 민족주의자로서 결코 공산•사회주의혁명에 동의하지 아니한 김좌진의 생애를 철저하게 짓밟은 것이다. 단순히 김두한을 대한민청으로 전향시키려는 수단으로 새빨간 거짓말을 백주의 대낮에 연출한 것이다. 염동진은 김좌진이 명실상부한 대한독립군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물론 김좌진은 공산주의 혁명에 동의하지 않았고, 공산주의 혁명보다는 민족독립이 먼저임을 강조했다. 이것은 김좌진이 일제타도가 먼저임을 강조한 것이다. 해방정국은 공산주의를 반대했고 남측 이승만 정부는 소련과 적대관계인 미군의 비호 아래 대화나 타협의 여지도 없이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워 암살하는 지경이었다. 김좌진은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일제타도로서 민족독립을 목표로 한 독립군사령관이었다. 그런데 염동진은 침략전쟁 A급전범 히로히토를 살려주고, 대한민국의 영토를 38선으로 자르고, 맥아더가 점령군사령관으로 인천상륙을 감행하여 버젓이 조선총독부 경찰들을 등용하여 미군정을 단행한 미국의 비호 아래에 있는 이승만 친미친일정권에 얼토당토않은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이라며 끌어들인 것은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사자의 명예훼손》임이 명명백백하다.
김을동은 “내가 김좌진 장군의 손녀이며 장군의 아들인 김두한의원의 딸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고 말했으며, “오늘 이후 제가 한 말에 대해서 도올과 그의 추종자들이 또 어떤 기상천외한 괴변을 늘어 놓으며 저를 비난할지 모르지만, 저는 이것만이 진실이기에 그것을 감수하면서라도 밝히는 것입니다. 도올이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조그만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면 자신이 무책임하게 내뱉은 잘못된 정보를 스스로 수정하는 것은 물론 가족사를 난도질당한 저의 집안에 대해서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고 당시 성명서를 내놓았다. 그렇다면 그 주인공인 김을동의 주장이 법률적, 의학적, 역사적, 생물학적으로 사실과 달라 주인공이 바뀐다면 김을동은 자신이 피력한 대로 상대에게 지금까지의 잘못을 수정하고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⑶김두한이 장군의 유택을 조작한 것도 사후음해에 해당된다.
이 문제는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전제한다. 오숙근 여사는 큰아들 창렬이 1947년 중공 토지개혁 때 항일련군 가족인 허기호의 동생 허기훈한테 검거되어 만금산에서 맞아 죽었는데 이 광경을 보시고 몸저 누워 일어나지 못하시고 그 후 두 달 뒤에 사망하였고, 둘째아들 창규와 인척으로 지내던 오춘택이 보청현에서 인근 야산에 매장 장례를 치렀다. 훗날 김장춘은 필자에게 할머니의 묘소도 놈들이 파헤칠까 우려되어 위장했기에 찾기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홍성군 발행 책 459쪽에는 “오숙근 여사도 노령이 되어 1958년 음1월15에 사망했다. 당시는 광복된 뒤였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오숙근 여사의 장례를 위하여 서울에서 별도의 기차 한 량을 배려해 주었다. (중략)오숙근 여사의 장례열차가 홍성역에 도착하자 김좌진 장군의 유해도 함께 모시고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철도 위에서 장군 내외분의 시신을 함께 모셨다.”고 기록했다.
이에 대한 진위를 확인하기 위하여 김장춘의 주장과 중국공산당 보청현 만금산남향총지위원회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 우선 김장춘은 《김두한에게 안동김가 김좌진의 피가 섞였다면 즉 진정 장군의 아들이라면 장군의 부인 오숙근 여사의 장례를 조작할 수 있을까! 오숙근의 묘는 북만에 있기에 오숙근은 아니다. 오숙근은 한국에 가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1958년 7월29일자로 된 김좌진의 손자 김명환에 대해 김명환의 주변 사람 허준씨가 중국공산당 보청현 만금산남향총지위원회에서 진술한 기록을 살펴보면
《*증인 : 허준, 57세, 빈농, 농민 출신, 문화기간 2년, 조선족. 현재 보칭현(寶淸縣) 완진산향(萬金山鄕) 오성사(五星社) 사원(社員)이며 김명환(金明煥)과 동향관계(同鄕關係)임.(증인은 일반 대중임)
문: 김명환의 정황을 설명하라.
답: 김명환의 가정은 빈농이고, 김명환 본인은 학생 출신이며, 위만주국 강덕11년(1944년)에 쉬마쌘즈(徐馬架子)에 거주했다. 그때 김명환은 겨우 10세였다. 가족이 4명이었는데 김명환 본인과 할머니와 삼촌과 그의 아버지였다.
문: 김명환은 광복 후 무슨 일을 했나?
답: 그 사람은 공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1948년에 숙부(叔父)를 따라 쉬마쨔즈(徐馬架子)를 떠나 쐉야산(雙鴨山)으로 갔다. 그 후로는 그 사람의 정황을 모른다.
문: 김명환의 아버지가 위만에서 간첩으로 활동했던 사실을 아는가?
답: 예.
문: 정황을 말하라.
답: 김명환의 아버지는 김창렬과 김뢰진으로 이름이 두 개였다. 위만 후진현(富巾縣에서 3~4년간 특무로 살았다.(시기는 강덕 원년(1934년)부터 3년 전후)
문: 이 사람이 특무로서 어떤 죄악이 있는가?
답: 이 사람은 위만주국 후진현(富巾縣)에서 특무로 있을 때 나의 항일련군 제7군의 조선족 간부 2명을 일본인에게 신고(告報)해 일본사람이 조선족 항일련군 2명을 잡아가 참살했다.
문: 이 두 명의 항일련군은 모두 어느 지방 사람인가? 성은 뭔가?
답: 우리 보청현 동방촌(東方村)의 허기호와 보청현에 있는 림씨인데 모두 조선족이다.
문: 김뢰진은 어떻게 두 사람이 항일련군이라는 것을 알았는가?
답: 그 사람은 원래 보청현(寶淸縣)에서 살다가 후진(富巾)으로 가서 간첩활동을 했기에 알고 있었다.
문: 그 사람은 후진(富巾)에서 간첩활동을 하는 것 외에 또 뭘 `했나?
답: 아편장사를 했다. 강덕11년에 쉬마쨔즈(徐馬架子)로 이사 와서 농사만 지었다. 1947년 토지개혁 때에 항일련군 가족인 허기호(許基浩)의 동생 허기훈(許基訓)이 김창렬을 검거하여 만금산(萬金山)으로 끌고 가 조선족들이 김창렬을 때려 죽였다.
문: 당신은 어떻게 상술한 그런 상황을 알고 있는가?
답: 내가 후진(富巾)에 있을 때 김뢰진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가 광복투(光復鬥)했던 상황 때문에 나는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가 광복투(光復鬥) 시기였으므로 나는 잘 알고 있다.)
문: 김명환에게 또 다른 사회관계는 있는가?
답: 다른 것은 없다. 그냥 숙부 김창규가 위만주 기간에 그의 형 김뢰진의 집에서 아편장사를 도와준 것인데 그 외 다른 일은 해 본 적이 없다. 조국 광복 후에는 일하기 싫어하고 하루 종일 돈을 요구했다.
문: 허기훈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
답: 치치할(齊齊哈爾)에 살고 있는데 상세한 주소는 모른다.
문: 또 무엇을 알고 있나?
답: 다른 건 아는 게 없다.
이 기록은 본인이 정확하게 읽었으며 기록이 틀림없다.
증인 : 허 준 / 1958. 7. 29
이 사람은 우리 향의 5성으로서 정치가 매우 믿음직하므로 이 자료를 참고로 제공한다.
중국공산당 보청현 만금산남향총지위원회》
또한 중공추이란삼림공업위원회 조직부에서 김명환을 조사한 기록용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삼림공업국 조직부에서 김명환에게 물었다. 김명환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토지개혁 때인 7월에 보청현(寶淸縣) 제3지구 동광촌(東光屯)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오전에 아버지를 체포하여 보청현 구류소에 감금하였고, 보청현 만금산(萬金山)으로 끌고 가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그 후 두 달 뒤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아버지가 특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금현(富金縣)에서 내가 5살 때 아버지는 아편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성이 상씨인 특무(이미 사망)가 보청이 살기 좋다고 해서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보청으로 옮겼다. 하지만 생활이 안 좋아 1년 후에 아버지는 거지생활을 하게 되었고, 나는 다시 시골로 내려갔는데 아버지는 보청에 있으면서 후에 막일을 하였다. 우리는 개척단(開拓團)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으며 후에는 다시 보청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다. 우리 가족의 과거와 이사 다닌 것을 근거로 해서 일반 사람들은 아버지가 절대로 특무(간첩)일 리 없다고 말했다. 나의 성분에 대하여 말하면 나는 어릴 때부터 숙부와 함께 생활하였고 빈농인 숙부를 따라다녔다. 나의 아버지는 집안일을 하지 않고 주로 숙부에게 의지해 살았다.》
추이란翠蘭삼림공업국은 김명환의 직장이었다. 김명환은 조사된 가계도상 김좌진의 장남 창렬의 둘째아들이며 김장춘의 아버지이다. 김명환은 자녀 5남매를 두었다. 김명환은 자녀에게 유서처럼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의 할아버지(祖父)는 김좌진(金佐鎭)이다.
나의 아버지(父)는 김창열이다. 삼촌(叔父)은 김창규이다.
나의 할머니(祖母)는 ........,오(吳).
내게는 고모(姑母) 한 분이 있고 고모부의 성은 박씨이다.
고모와 고모부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
1940년인지 몇 년인지 그 시기에 고모와 고모부가 어디론가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일본 침략시기에 헤어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1936년 흑룡강 송강성 부금현(黑龍江 松江省 富錦縣)에서 세 살 때 모친 사망 후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祖母)와 아버지(父)는 1947년에 보청현(寶淸縣)에서 사망했다.
할머니(祖母)께서 생전에 제게 하신 말씀이 하나 기억나는데 “일본 침략 전부터 할아버지(祖父)는 조선과 중국에서 큰 인물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 뒤에 우리 가족은 소련 블라디보스톡에 갔다가 다시 동북 부금현(東北 富錦縣)으로 돌아왔다. 나는 할머니(祖母)한테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그 때 당시 나는 어린 나이라서 기억이 나지 않아 잘 모르겠다.
김좌진의 손자 (金佐鎭之孫) / 김명환 (金明煥)
1990년 8월 18일 / 이춘(伊春)
중국공산당 보청현 만금산남향총지위원회와 추이란삼림공업위원회 조직부에서 조사한 내용을 살펴보면 1944년 당시 흑룡강성 보청현에 살던 김좌진의 유족으로는 부인과 큰아들 창렬, 둘째아들 창규, 창렬의 아들 명환이었음이 확인되며, 김창렬은 1947년 토지개혁 때 잡혀가 몽둥이로 맞아 죽었고, 그 광경을 지켜본 할머니(장군의 부인 오숙근여사)는 두 달 만에 돌아가셨음을 알 수 있다. 오숙근 여사의 장례는 둘째 아들 김창규와 오영선씨의 아들 오춘택씨가 치렀고 오숙근 여사의 묘소는 현재 흑룡강성 보청에 있다고 김장춘이 말했다.
그런데 김두한은 오숙근 여사가 돌아가신 1947년보다 10년 뒤인 1958년에 오숙근 여사의 장례식을 충남 보령시에서 치렀다. 이때 오숙근 여사는 이미 중국 흑룡강성 보청현에서 사망하였고 묘소도 보청현에 있다고 김장춘은 말하고 있다. 더구나 김두한은 이 장례식 때 김좌진 장군 유체와 합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김장춘은 “누구의 시신을 장군과 합장했단 말입니까? 누구든지 저와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조상의 묘에 조상이 아닌 다른 사람의 뼈가 묻혀있다면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열을 올렸다. 김두한이 1958년에 오숙근 여사의 장례를 치를 때 중국에서 유체를 모셔오지 않았다거나 그 밖의 검증할 방법이 없다면 이는 명백한 《김좌진장군 사후 음해》에 해당된다. 대한민국 유사 이래 이 같은 범죄사례는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⑷김을동의 가족사진 조작도 김좌진 음해이다.
이 또한 웃지 못할 《김좌진장군 사후 음해》에 해당된다. 김을동씨는 자신이 김좌진 장군의 손녀라며 유일한 증거물로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이에 대하여 근거를 제시하는 김장춘의 대응 또한 만만치 않다. 인터넷방송 서울의소리(대표:백은종)에 통신영상으로 출연한 김장춘의 주장과 대전MBC다큐멘터리에 출연한 김을동씨의 발언을 근거로 한다.
[도입-1]: 김장춘의 주장
《내게 오숙근 할머니의 사진이 있었다. 김을동이 내놓은 사진 속에는 할머니 얼굴이 없다. 그 사진은 완전 조작품이다.》
[도입-2]: 김을동의 발언
《우측부터요 이분이 백야장군 부인 오숙근여사, 그 다음은 어머님 한산이씨 할머니. 저에게는 진주할머니가 되네요. 저의 어머니. 그리고 저 6살 때 못난이네요.》
김을동씨가 장군의 부인 오숙근 여사와 6살 때 찍었다는 사진을 살펴보면, 김을동씨가 1945년생이므로 사진을 찍은 해는 1950년이 된다. 오숙근 여사는 이미 1947년에 큰아들 김창렬이 중국 토지개혁심판대 야외심판장에서 몽둥이로 처참하게 맞아 죽는 광경을 목격하고 몸져누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시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김장춘은 “어떻게 그런 사진이 성립될 수 있는가?”고 반문한다. 김을동씨가 공영방송(MBC-TV 대전방송)에 출연하여 오숙근 여사와 사진을 찍었다고 공개한 것은 완전 사기이므로(김장춘 주장) 이 또한 《김좌진장군 사후 음해》에 해당된다.
김장춘이 인터넷에서 추출했다는 사진과 김좌진평전을 쓴 박환의 책 197쪽에 게재한 사진과 김을동이 대전MBC-TV 다큐멘터리에서 공개한 사진이 일치하므로 사진 공개와 더불어 각 측의 주장을 소개하면, 김장춘은 상술한대로 시기적으로 김을동이 주장하는 사진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고, 김을동은 위 [도입-2]대로 주장하는 것이고, 박환은 책 197쪽 사진 설명에 “김좌진 장군의 가족사진. (좌로부터 김을동, 김두한 부인 이재희 여사, 장군의 모친 한산이씨, 장군의 부인 오숙근 여사)”라고 썼다.
이로써 얼굴 생김새는 나중에 따지는 것으로 하더라도, 어쨌든 오숙근이라는 성명을 가진 여자가 김좌진의 정실부인으로서 존재했음이 확인된 셈이다. 그러나 얼굴이 확증되지 아니한 오숙근 여사의 두 아들과 딸은 한국사학계의 문헌이나 자료나 문중에도 온데간데 없다. 오로지 북만주 흑룡강성 중국공산당 당안과 김창규의 친구 이철우 외 2인의 자술서와 왕청현 교육국 향토사학자 문호갑 선생과 연변대학민족연구소 박창욱 교수와 용정3.13의사기념사업회 최근갑 회장이 전하는 증언에 그 사실이 존재하고 있다.
⑸친일정권에 부역한 일부 강단사학계의 의도성 조작 시나리오도 음해했다.
①조작된 김좌진 가족 해후설의 일례
책 “위대한 한국인 백야 김좌진, 저자 윤병석(인하대 교수)” 338~339쪽을 이흥룡 저술에서 재인용하여 살펴보기로 하면.
-16년만의 해후
북만주의 망명지 김좌진의 집에는 때 아닌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돼지를 잡고 떡을 쪘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김좌진이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아무리 영문을 물어 보아도 막무가내로 시종 하나같이 묵묵부답이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도착했다. 행상대원들이 말달구지를 옹위하여 김좌진의 집 앞에 밀려들었다. 그 말달구지에는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그의 노모, 아내 김계월 여사 그리고 낮선 소녀 하나가 타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감격적인 가족상봉은 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려 16년만의 극적인 상봉이었다. 16세의 처녀티가 나는 용남은 바로 16년 전 황망히 고향을 등지고 떠날 때 엄마의 뱃속에서 고고의 성을 지를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들의 딸이었던 것이다.
▶배경 해석
*용남이가 고고의 성을 지른 엄마의 뱃속은 누구의 뱃속이란 말인가? 김계월이 함께 간 것으로 돼 있으므로 16살 용남이는 김계월이 낳은 딸이라는 말일 것이다. “엄마의 뱃속에서 고고의 성을 지를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들의 딸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는 김좌진과 김계월을 지칭한다. 정말로 김계월의 뱃속이라면 김두한과 이란성 쌍둥이여야 한다. 김두한이 여자와 이란성 쌍둥이라는 사실은 기록이나 구전으로도 나온 적이 없다.
*또한 김계월이 김두한을 낳았다는 것이므로 첫 출산은 김두한의 생년월일인 1918년 5월15일이므로, 16년만의 해후는 1934년 즉 김좌진 장군이 서거한 지 4년 뒤이다. 유령이 아니라면 이런 해후는 있을 수 없다. 당시 인하대학교 윤병석 교수의 자질이 의심된다.
*김계월이 갔다면 김두한이 왜 빠졌을까?
“1917년 10월말 서울 계동에서 그 어린 것 김계월을 데리고 단장斷腸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홍성군 발행 책 225~227쪽. (중략) 계월이 붓을 놓고 다가왔다. “지금 몇 달 되었지?” 김좌진이 불어 오른 계월의 배를 가리켰다. “두 달 되었어요.” 이어서 김좌진은 “아들을 낳으면 두한이라 하고 딸을 낳으면 옥한이라 부르게 하라”고 했다.” 용남은 누구이고 옥한은 또 누구인가?
윤병석 교수님! 이렇게 아들을 낳으면 두한이라 하라고 이름까지 지어놓고 떠났는데, 김계월은 그 소중한 아들은 왜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요?
②만주 반일무장독립전쟁사 조사,연구의 허술
김좌진과 관련하여 출판된 서적으로서 홍성군 발행 《대한독립군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전기》는 우선 시대와 시기를 표시한 숫자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고, 특히 가족사는 어처구니없이 기록하였다. 내포구비문학연구소를 설립한 김정헌의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은 가족까지 희생하며 차가운 땅 만주에서 침략왜군왜경밀정들의 추격과 생명위협을 무릅쓰고 싸운 김좌진이라는 실존인물을 마치 동화나라 사람으로 전락시켜 “자녀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책”이라 야심을 밝혔지만 결국 2차 3차로 김좌진을 능멸했으며 국민기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하나의 책으로 충청남도와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2020년 8월에 발행한 《충청남도 독립운동가 이야기 청산리 영웅 김좌진》은 “1958년 1월 오숙근 여사가 타계하자 아들 김두한이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0번지로 이장해 오숙근 여사와 합장했다.”고 130쪽에 밝히고 있다. 조사와 연구와 근거가 없는 왜곡조작된 문헌을 답습한 데 그쳤다.
더욱 서글픈 일이 있다. 2020년 4월 이후 필자가 홍성군과 충청남도에 청산리독립전쟁 100주년에 김좌진의 가족사를 바로 잡아 그의 명예를 회복하는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자고 제의했으나 완전 묵살당했고,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필자를 제외한 토론회를 한 것으로 알고 있음) 특히 홍성군은 김좌진의 가족사를 바로 잡을 담당부서가 없다는 답변이고, 충청남도는 “행정기관에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문중의 일이다.” 라는 최종답변이다. 김좌진의 묘역은 충청남도기념물제73호로 지정돼 있는데도 충청남도라는 행정기관에서는 조작된 장군의 유택을 진상규명할 일은 하지 않는단다. 이같은 방치방임체념도 김좌진 사후음해에 해당된다.
김좌진이 군사부 사령관을 맡은 북로군정서는 서일과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일가의 헌신이 없었다면 그 군사기지 터와 훈련과정과 무기구입까지 불가능한 군사체계였다. 이런 부분은 모두 누락되었다. 오로지 김좌진만을 청산리전투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청산리독립전쟁 이후 신민부에서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하던 김혁과 이대성의 발해농장을 근거지로 군자금 확보와 모집을 맡았던 윤자형은 명실상부한 장군 지위임에도 모두 누락되었다.
⑹친일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설가, 작가들에 의해 음해당했다.
⑺영화계의 검증 없는 무모한 각본은 김좌진사후음해로서 국민기만에 해당된다.
⑻중국 동포사회의 연구조사자들은 한국의 문헌을 답습했고, 한국의 학자들은 중국 동포사회의 음해행위를 묵인하고 연구성과로 평가해 왔다.
⑼가짜후손과 문중의 침묵과 중립, 진상규명 회피는 곧 김좌진사후음해에 해당된다.
⑽조선공산당만주총국 산하 조선공산당고려청년회 소속 양환준의 음해가 정설로 된 것이 문제다.
이번엔 조공고려청년회의 김좌진 음해설에 대해 분석하겠다. 모두가 다 김좌진 장군의 서거 이후에 벌어진 모함과 음해이다.
“청백전가팔백년”의 가풍에서 자란 김좌진이 북만주에서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일제침략군과 수차례 전투를 벌였고, 경신년간도참변과 자유시참변을 직접 목격하며 체험했고, 반일무장투쟁을 우선주의로 했던 김좌진에게 변절이라든가 일제주구라는 말은 그에게 너무나 큰 형벌일 것이다. 그가 암살당하자 그 다음 해에 만주침략 구실을 만들어 낸 류탸오후사건柳条湖事件이 일본제국 관동군의 자작극이었다는 점으로 봐도 김좌진 장군의 비중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좌진이 살아있을 때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더니 장군이 암살당하여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이유였을까 이곳저곳에서 음해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이 음해설은 김장춘씨가 유물로 물려받은 김좌진 장군의 유품인 《①장군의 가족사진, ②장군이 말타고 찍은 사진, ③장군이 부인과 같이 말타고 찍은 사진, ④부대원들과 찍은 사진, ⑤장군의 크고 작은 군사일기책(8권 분량), ⑥군사작전지도, ⑦또 다른 지도 2장, ⑧김창규 일기장》이 강용권의 손에서 깡그리 사라지고, 이 같은 김좌진 장군의 유품들을 연구•분석•검증을 완료하고 김장춘과 함께 한국행을 기다리던 문호갑 선생이 세상을 떠난 그 다음 해인 1993년 7월에 개최한 “김좌진학술연토회”에서 강용권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김좌진장군 음해설》이라 하는 것이며 그 실상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⑴김좌진장군의 인격 모독과 음해
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 강용권은 자신이 양환준과 대담한 내용이라며 1993년 7월 4~5일 양일간에 흑룡강성 영안현 해림시에서 요령성 신빈현과 중국조선민족사연구소가 공동으로 개최한 김좌진학술연토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책 《김좌진평전. 선인. 박환》 166쪽~168쪽을 인용한다. 뒷장에 기술한 유물폐기사건이 강용권의 소행이라는 점으로 의도적인 음해성 발표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문(강용권): 김좌진은 어느 조직에서 암살하였습니까?
답(양환준): 조선공산당만주총국(화요계)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암살했습니다.
문: 총을 쏜 사람은 누구입니까?
답: 공도진입니다. 공도진은 화룡구 서성동 명암촌에서 나와 함께 자란 친구였으니 잘 아는 사이입니다. 공도진이 김좌진을 암살했습니다.
문: 공도진이 김좌진을 암살했다는 양환준 선생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답: 이 문제를 알려면 그 당시에 내가 뭘했는가부터 말해야겠습니다. 나는 1929년에 고려공산청년회 동만주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30년 초에 만주총국의 부름을 받고 흑룡강성 아성현 소해구로 갔습니다. 총국에서는 나에게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선전부장의 중책을 맡겼습니다. 당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부서를 보면, 책임비서 김백파(원명은 김병묵), 조직부장 강화린, 군사부장 최석천(최용건), 위원 이계동, 김성(김책의 형), 등이었습니다. 내가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선전부장을 맡았으므로 그 후부터는 많은 일을 알게 되었고 많은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①김좌진한테 총을 쏜 사람이 공도진이라는 것을 두 곳에서 들었습니다. 하나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인 김백파한테서 들었는데 그는 “공도진은 내가 파견하여 김좌진을 암살하게 하였다.”고 말하였고, 다른 하나는 1931년초에 내가 공도진을 만났는데 그가 직접 말한 것입니다. 공도진이 말하기를 “총국에서 나에게 특수임무를 주었기에 나는 ②김좌진이 꾸리는 정미소에 근 1년간 잠복해서 일만 하는 사람으로 알게했다. ③1929년 음력 설 밑의 어느 날 신민부 고관들이 화의를 하고 휴식하다가 정미소로 시찰하러온 기회에 김좌진을 명중하고 도망쳐 나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러고 보면 김백파의 말과 공도진의 말이 다 일치합니다.
문: 공도진은 어떤 가명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답: 최동범, 이복림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문: 김좌진을 암살하게 된 주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답: 책임비서였던 김백파는 나에게 “내신 정보에 의하면 ④김좌진은 일제와 결탁한 주구이다. 김좌진은 하얼빈 OO일본여관에서 조선총독부 만주파견원 마쯔시마와 밀담하였다. 마쯔시마가 『돈은 근심 말라. 독립군에 관한 정보보다도 공산당에 관한 정보가 퍽 중요하다. 조직의 명칭과 부서 조직들간의 합작관계 등을 제공해 달라.』고 했는데 ⑤김좌진은 이 요구를 접수하고 활동경비를 받아 그 돈으로 산시에 정미소를 꾸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놈의 주구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근거라면 지혜겸 선생(같이 공산당을 했고 조국이 광복된 후에 연변대학 역사과 주임교수가 됨)이 말씀하기를 “김좌진이 마쯔시마와 밀담한 후 ⑥목단강으로부터 횡도하자에 이르는 철도선 내에서 여객열차 안에 신민부 경비대원을 파견하여 많은 공산당원들을 잡아다 죽였다는 죄입니다. 한번은 금방 조선에서 망명해 들어오는 사람을 붙잡아 내리고 공산당 혐의분자라고 때리다가 공산당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자 돈 500원을 내면 놓아준다고 했답니다. 그의 가족이 급히 ⑦조선으로 되돌아나가 안달복달 500원을 구해 가지고 돌아와 보니 사람은 벌써 죽은 뒤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왜놈의 주구에다 공산당을 보기만 하면 잡아 죽이니 공산당에서 이 장애를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1980년도에 지혜겸 선생이 나와 이야기할 때 “김좌진이 중동선에서 공산당을 많이 죽였으니 만약 화요파에서 죽이지 않았더라면 우리 ML파에서 죽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상 남색으로 처리한 문답은 강용권이 당시 김좌진을 암살하였다고 지목되고 있는 공도진(=최동범, 이복림)과 중국공산당 활동을 같이하였다는 양환준을 만나 대담한 것을 강용권이 “김좌진학술연토회”에서 발표한 것이다. 강용권의 질문에 양환준이 대답한 것이다. 위의 문답을 요약•정리하여 그러했을만한 배경과 이유를 상호 반대급부를 포함하여 분석해 보겠다.
①김좌진한테 총을 쏜 사람이 공도진이라는 것을 두 곳에서 들었습니다. 하나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인 김백파한테서 들었는데 그는 “공도진은 내가 파견하여 김좌진을 암살하게 하였다.”고 말하였고, 다른 하나는 1931년초에 내가 공도진을 만났는데 그가 직접 말한 것입니다.
김춘선은 《1930년 1월 김좌진이 암살되자 김종진은 부위원장 권화산과 함께 비상간부회의를 열고 군사위원장 리붕해를 중심으로 청장년들을 뽑아 임시치안대를 조직하였으며, 그날 밤으로 해림역 부근에 있는 김봉환의 거처를 습격하여 김봉환 외 1명을 학살하였다.》고 했다. 공도진, 박상실, 이복림, 최동범이 네 개의 가명을 쓴 공도진이라는 인물이라면 1930년 1월에 김봉환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살해되었을 것이므로, 1931년 초에 양환준이 만났다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김좌진 암살 용의자는 김봉환과 함께 한족총연합회 임시치안대한테 살해되었는데 어떻게 1년 후에 만났단 말인가?
반면에 백야 김좌진씨가 피해를 당한 현장에 있던 (부하 청년) 안이근安利根이 그 범인을 추격하는 동안 중국 육군 7~8명이 같이 추격하여 남으로 삼십리나 수색하였으나, 마침 저녁이 되어 범인을 체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
②김좌진이 꾸리는 정미소에 근 1년간 잠복해서 일만 하는 사람으로 알게했다.
문제는 “공도진이 말하기를 『총국에서 나에게 특수임무를 주었기에 나는 김좌진이 꾸리는 정미소에 근 1년간 잠복해서 일만 하는 사람으로 알게 했다.』”에서 “근 1년간”이라는 말은 시기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금성정미소는 재만 한인 농민들이 농사지어 수확한 벼를 중국인이 경영하는 정미소에서 도정搗精하고 삯을 내느니, 한족총연합회가 설치한 정미소에서 도정하면 그 이익금을 군자금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인 농민들에게도 경비를 절감해 줄 수 있다는 취지였다. 한족총연합회에서는 1929년 10월 농촌자치조직하에서 생활하고 있는 농민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산시참山市驛에 정미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1929년 7월에 한족총연합회가 조직되었고, 10월에 한족총연합회가 정미소를 설치했다. 그러니까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한 1930년 1월까지는 불과 3개월 정도 기간인데 “근 1년간”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김좌진이 조선총독부 만주파견원 마츠시마에게 공산당 정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받은 돈이 아니라 한족총연합회에서 설치•운영하였다는 점도 확인되는 것이다.
③1929년 음력 설 밑의 어느 날 신민부 고관들이 화의를 하고 휴식하다가 정미소로 시찰하러온 기회에 김좌진을 명중하고 도망쳐 나왔다.
신민부 고관들 여럿이 시찰왔다면 어떻게 그곳을 향하여 총을 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금성정미소는 한족총연합회에서 설립하였으므로 이미 해체된 신민부와는 관련이 없었을 것이다.
1928년 12월 김좌진 등은 우선 군정파를 해체하고 개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독립운동단체 창립을 주장하는 참의부 김승학, 정의부의 김동삼 등과 연합하여 《혁신회의》를 조직하였다. 1928년 12월부터 1929년 3월까지 민족유일당 창립 및 삼부통합운동 동안에도 전후로 두파(신민부 군정파와 민정파)가 전부 해체되었다. 신민부는 1928년 2월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경리부 위원장 유정근과 김윤희, 박경순, 한경춘, 남중희, 리종순, 리정화, 남극 등 중앙간부들이 석두하자에서 일경과 중국 군경들한테 체포된 이후로 수난을 겪다가 이렇게 해체되었다. 양환준의 말대로 1929년 음력 설 밑의 어느 날이라면 양력으로는 1929년 1월 말이나 2월초쯤이다. 이때는 신민부 군정파는 완전히 해체되었고, 금성정미소는 차려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근 1년간 잠복할 수 있었단 말인가? 더구나 《1929년 음력 설 밑의 어느 날 신민부 고관들이 화의和議를 하고 휴식하다가 정미소로 시찰하러 온…》 이라는 즉 신민부 고관들이 함께 정미소를 시찰왔다는 그런 뚱딴지 같은 말을 하는가 말이다. 정미소를 꾸리지도 아니하여 없는데 어떻게 시찰하러 왔단 말인가! 조선일보 김연파 특파원이 안이근을 만났다면 이 정도의 실황 취재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인데, 《백야 조문 가는 길에 ⑴~⑺》에는 사건 당일 신민부 고관들이 화의하고 정미소를 시찰했다는 내용이 없다. 양환준의 말은 완전 조작이다. 이렇게 조작된 말을 양환준과 대담록이라며 강용권은 김좌진학술회의에서 발표했고, 한국의 모대학 교수는 이를 연구성과라고 평가했다.
④김좌진은 일제와 결탁한 주구이다. 김좌진은 하얼빈 OO일본여관에서 조선총독부 만주파견원 마쯔시마와 밀담하였다.
조선총독부 만주파견원 마쯔시마와 김좌진이 할빈의 OO일본여관에서 밀담한바 마쯔시마가 말하기를 “독립군에 대한 정보보다도 공산당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면 돈을 주겠다.”는 것인바 일제는 봉오동전투 참패 이후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林에게 압력을 가하여 일본군의 지도하에 중국군을 출동시켜서 독립군을 학살하자는 대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1920년 7월 하순부터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이라는 일본군의 직접 출동에 의한 독립군 학살계획을 입안하여 8월에 이를 확정하고 학살을 시작했다.
1925년 6월11일 당시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츠야 미야마츠三矢宮松와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張作霖 사이에 비밀리에 협약을 체결하고, 중국 군경과 합동으로 독립군부대와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는 때였으므로 김좌진과 같은 중죄인을 현장에서 체포하지 아니하고 밀담密談하였다는 것은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감행하던 일본군의 전략으로 보아 설득력이 없다. 미츠야협약이 체결된 후 만주의 관리들은 이 협약이 체결된 후부터 독립군 적발에 혈안이 되었으며, (일제가 대한독립군과 항일첩보활동 조선인을 신고하거나 검거해 오는 중국인 군경에게 포상금을 지급하던 때였음: 필자 주) 그 결과 일반 조선인 농민들에게도 누명을 씌워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장쭤린의 강력한 독립활동 단속으로 만주에 있던 독립군의 기세는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일반 조선인이 받은 피해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은 1927년 지린吉林의 대검거 사건이었다. 장쭤린은 일본에게 만주지방에서의 여러 가지 이권을 얻게 해 준 대가로 일본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한 인물이다. 김좌진은 아홉 차례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수백 명을 살상殺傷하였으므로 중국 공산당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단순첩자로 이용할 인물이 아니었다. 일제침략자들에게 김좌진이라면 현장에서 보는 즉시 체포하여 오랏줄로 묶어 형무소로 압송될 중죄인이었다. 한족총연합회의 정강으로 보아도 김좌진은 일제주구가 될 나약한 인물이 아니다.
⑤김좌진은 이 요구를 접수하고 활동경비를 받아 그 돈으로 산시에 정미소를 꾸렸다.”고 했습니다.
위⑷에서 나타나듯이 김좌진이 마츠시마한테 돈을 받아 정미소를 차렸다는 것인바 마츠시마한테 돈을 받아 금성정미소를 차렸다면 김좌진과 마츠시마의 밀담시기는 1929년 10월 전후이어야 인과因果가 성립된다. 1928년 2월 신민부 김혁 중앙집행위원장 외 10여명이 일제에 체포된 이후 신민부가 해체되고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기까지는 전략적으로 군자금 사용처 정황으로 정미소를 차릴 겨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금성정미소는 이미 1929년 10월에 한족총연합회에서 연합회의 주요사업에 따라 설립했다. 김좌진이 정미소를 꾸렸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일제한테 돈을 받아 정미소를 차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한족총연합회에서 설립하고 김좌진에게 경영책임을 맡겼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신민부 수뇌부를 잃은 김좌진은 일제에게 쫓기는 마당에 경영책임도 맡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양환준의 말대로 김좌진이 일제경찰 경부 마츠시마한테 밀정노릇의 대가로 돈을 받아 정미소를 차렸다면 한족총연합회는 친일단체가 되는 것이다. 한족총연합회는 홍암 나철이 중광하고, 무원종사 김교헌, 단애종사 윤세복, 백포종사 서일이 종사해 온 민족종교를 밑바탕으로 한 반일무장독립군단체였지 친일단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김좌진이 일제측한테 돈을 받아 정미소를 꾸렸다는 말은 허구와 조작과 음해공작이다.
⑥목단강으로부터 횡도하자에 이르는 철도선 내에서 여객열차 안에 신민부 경비대원을 파견하여 많은 공산당원들을 잡아다 죽였다.
마쯔시마와 밀담을 마친 김좌진이 목단강에서 횡도하자에 이르는 철도선 여객열차 안에 신민부 대원들을 파견하여 많은 공산당원을 잡아다 죽였다는 것인바 “1928년 2월. 제1차,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검거사건으로 고려공산청년회의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의 대부분은 파괴되었다.”는 것으로 김좌진을 오해할 소지는 다분하다 하겠다. 그렇지만 김좌진이 이 사건에 개입할 수도 없거니와 지휘할 수도 없는 정황이었다. 당시 만주 일대(동만, 서만, 북만)에는 국제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 지부로 승인받은(1925. 7) 고려공산청년회만주총국(1925. 4. 18)이 사회주의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있었으며, 조선공산당만주총국(1926. 5)이 창립되었고, 신민부 군정파의 반대급부와 한인사회 인민들도 사회주의혁명에 깊이 젖어 있었다. 이들은 일제 타도와 대한독립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찾으려 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접수하지 아니한 김좌진의 편에 설 단체는 한족총연합회 조직에 참여한 대종교와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 중동선교육회 뿐이었고 규모 또한 쇠약해 갔다. 더구나 김좌진은 청산리전투 이후 일본군경의 추격을 받았으므로 가족을 만나기는커녕 외부 출타出他도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신민부도 해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객열차 안에 신민부 대원들을 파견하여 많은 공산당원을 잡아다 죽였다는 것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만주의 반일무장투쟁 정황에 비춰볼 때 개연성이 없다.
⑦조선으로 되돌아나가 안달복달 500원을 구해가지고 돌아와 보니 사람은 벌써 죽은 뒤였습니다.
조선에서 막 들어오는 사람을 붙잡아 공산당 혐의분자라며 금전 500원을 요구했는데 돈이 없어 가족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돈 500원을 가져왔으나 사람은 벌써 죽은 뒤라는 것인바 발표자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발표라면 이 또한 참으로 우둔하기 짝이 없는 음해공작이라 판단된다. 당시 군자금 의무금이 각 호마다 6원이었다. 이 6원도 내기가 어려워 총기살해사건까지 일어났다. 500원은 거금이었다. 어림없는 음해공작이다.
이 문답식 발표문에는 마츠시마와 김좌진이 밀담한 날짜가 명시되지 않았으며, 목격자나 제보자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자와 중국공산당 활동을 같이했다는 양환준의 진술일 뿐이다. 강용권의 질문에 대한 양환준의 답변은 객관성, 사실성, 상식성을 크게 벗어나며 개연성조차도 관찰되지 않는다. 다만 김좌진이 일제한테 돈을 받아 정미소를 차렸다는 것이므로 마츠시마와 밀담했다면 그 시기는 1929년 10월 이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대종교와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 중동선교육회 등의 요원들과 한족총연합회를 창립하고 분주히 움직일 때였다. 이렇게 반일무장투쟁과 민생과 교육과 경제를 살리려고 동분서주하며 분주한 김좌진에게 있을 법한 일이 아니다. 강용권이 김좌진연토회에서 허구적인 대담록을 서슴없이 발표한 것은 김좌진의 원전자료를 폐기한 자신의 중죄重罪를 은폐하고, 원전자료의 본 소유자인 김장춘金長春을 호도糊塗하여 매장埋藏하려는 악질적인 시도였다.
강용권이 발표문에서 양환준의 말을 빌어 암살자를 확정하였으나 이를 검증할 근거자료가 앞서 따라붙지 않았다. 그런 자료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박창욱 교수는 “박상실이 조선공산당총국에 자신의 공적을 세우려고 헛소리 칠 수 있다.”고 논평했다. 하여 상술한 김좌진 암살자가 확증되지 아니한 채 ①~⑩까지 나열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김좌진의 암살자가 누구라고 확정하는 문제는 아직 미결상태라고 주장한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암살의 배경이다.
양환준의 답변에 나타난대로 김좌진을 음해하고 암살한 세력이었던 조선공산당만주총국과 그 예하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는 1932년에 일제가 조직한 민생단을 조선인 민회, 금융부, 구제회, 상애회 등과 거의 동일시하고 《우리들의 혈육을 남김없이 착취하려고 하는 정책기관》으로 규정하였다.
이들은 1929년 6월 조선공산당만주총국위원회에서 《신민부 같은 부패한 민족단체는 매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소비에트 혁명의 기치를 내세우고 중•조 민중의 연합항일과 민족해방을 주장하면서 일제 비호하에서의 소위 민족독립 등은 일체 반대한다는 것이었고, 강도 일본제국주의와 주구무리들은 …자치촉진회, 한족연합회 및 기타 주구들을 집합시켜 민생단이라고 하는 큰 개굴狗巢을 만들고 일체 노력대중에 대한 압박책을 채취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기편(기만)하고 있다.이들이 김좌진의 신민부 군정파와 한족총연합회에 반기를 들었고, 반대급부로서 사회주의혁명을 주입하려 했던 세력들이다. 김좌진은 이 사회주의혁명을 극구 반대했다.
민생단이 조직된 배경을 살펴보면 만주침략(1931.9.18.)이 노골화되자 재만 공산세력은 중국공산당과 합작하면서 전반적인 항일전선을 구축한다. 이청천李靑天의 독립군은 왕덕림王德林의 중국인 항일구국군과 연합한 후 대전자령大甸子嶺 등에서 청산리대첩 이상의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1933.7.3)
이런 반일무장전선이 재구축된 상황에 한•중 양 민족의 이러한 접근 및 그들의 연합전선을 깨려고 조직된 것이 친일 민생단民生團이다. 이것은 최남선의 매부 박석윤朴錫胤이 동민회同民會 계열의 친일파 조병상曹秉相과 북간도의 친일파 김동한金東漢•김택현金澤鉉•이경재李庚在•이인선李仁善•최윤주崔允周등과 협의해서 만주사변 직후부터 조직준비를 시작했다. 경성(서울)갑자구락부甲子俱樂部의 이사 겸 민회이사 조병상과 《매일신보》사 부사장 박석윤은 리인선, 김동한과 함께 룡정에 도착하여 《일거에 간도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이미 조선총독부의 양해를 얻었다고 공언하면서 사회 각 계층을 방문하고 일본군의 동북 출병이 《동만 조선인의 권익확보를 기하는 좋은 기회》라고 선동하였다.이들은 조선총독부와 간도일본영사관의 후원과 조종 밑에서 1932년 2월5일 일본군 대좌 출신 박두영朴斗榮을 단장으로 하는 민생단을 용정龍井에서 발족시켰다. 민생단은 재만 조선인의 생활안정과 낙토건설을 표방했으나 실제는 한•중 이간으로 공산조직과 산하 대중단체를 파괴하려는 반공•친일의 간첩조직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조직이 강력했을 때 민생단은 힘을 쓸 수 없어서 1932년 7월에 사무소를 폐쇄했다. 일본헌병대는 이것을 다시 살려서 그 산하의 간첩조직으로 하여 중국공산당 조직 안에 계속 침투시켰다.
이로 인하여 결국 중국 공산당은 민생단을 감시•처단해야 했고, 일제는 조선인을 민생단원으로 하여 중국공산당 조직에 침투시켜 희생양으로 하였으니 만주 땅에서 죽어가는 생명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김좌진 순국 이전부터 조선공산당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는 코민테른의 지론에 따라 1국1당이라는 명분으로 모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0년 6월에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을 해체했다.
여기서 눈여겨 살펴볼 대목이 있다. 중국공산당에는 김좌진을 음해한 조선공산당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성원 대부분이 가입했고, 일제 친일파들이 조직한 민생단에는 1920년대 소위 민족주의 계열의 우익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혁명 노선을 추구하던 조선인 가운데 일부 변절자들이 일제주구가 되었다. 그렇다면 반일무장투쟁 우선주의를 주장했으나 민의民意에 따라 신민부 군정파를 해체하고,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한 김좌진은 이쪽으로 오나 저쪽으로 가나 미운오리새끼였을 것이다. 사실 바로 이같은 분위기가 신민부 해체 전후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김좌진은 만주 반일단체들의 토론문화 결핍으로 상호 양보와 지모智謀없는 쟁론만 펼치다가 간교한 일본제국의 이간질에 녹아나고, 음흉한 중국공산당에 이용만 당하였으니, 고향 떠난 타국 만리에서 불리한 점도 많았겠지만, 《일제와 소련과 중국공산당 3국의 중동철도 경제권 쟁탈, 소련의 남진정책, 일본제국의 대륙정복 흉계와 조선인 학살, 일제와 장쭤린의 합작군대의 조선인 탄압, 자유시에서의 민족분열, 코민테른의 개입, 내부 갈등으로 인한 신민부 해체, 민족유일당 결성과 3부통합 실패, 맑스-레닌 사회주의혁명론 등장, 조선공산당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와의 군권과 관할지역 쟁탈, 한•중 양국 일제주구들의 끊이지 않는 이간과 농간, 군자금태부족, 김좌진의 교육•인권•평등•경제•문화•농업 등을 향상•발전시키고자 하는 정책으로 중동철도권역에서 세력이 팽창될 것을 우려》등의 복합적인 정황이 김좌진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김좌진 사후 일제가 조종하고 지원하는 민생단은 더더욱 광기狂氣를 부려 무고한 조선 양민들만 일제의 잔인무도한 칼날 앞에서 죽어가야 했다.
김좌진 장군에게 총을 겨냥한 자는 조선인임에 틀림없다. 그는 공산사회주의 신봉자였으므로 공산당 사회주의 혁명에 동의하지 아니한 김좌진의 반대급부였다. 이처럼 같은 동족끼리 서로 이간하고 모함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이나 일본침략자들에게는 여간 잘된 일이 아니었다. 일본이 중국과 소위 불령선인을 같이 토벌하자고 협약했고, 중국공산당은 이를 수락하였기에 김좌진은 중국측에서 보나 일본측에서 보나 그의 가족을 포함하여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직접 나서서 김좌진을 암살하지 못할 정도로 김좌진은 국제적 지명도知命度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여 중국과 일본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술책을 써서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의 일원을 매수했다고 볼 수 있다. 김좌진은 일본이 주도하여 중국이 매수했거나 중국과 일본의 합작 매수에 걸린 조선인 밀정과 주구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살해범이 명확하지 않고 국적이 확인되지 않은 이상 일본인이거나 중국인일 수 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
이 밖에도 양환준은 맑스-레닌 공산사회주의 신봉자이며, 일제의 사주를 받은 자로서 대종교적 민족주의자인 김좌진이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한 것도 조선민족에게 반동적 죄를 지은 것이라 했다. 조선공산당만주총국 화요파와 고려공산청년회는 김좌진이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를 확장•발전시킬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만행을 저질렀을 것으로 판단된다. 양환준의 김좌진 장군 음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양환준은 김좌진 장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두 음해성이다.
①남만의 신빈현 왕청문에서 정의부 무장대는 리활민 이하 혁명군 중 13명을 살해하였고, 동 시기 류하현 삼원포에서 한청옥, 박기주 등 12명을 살해한 류혈참안을 빚어냈다.
②신민부의 반동두목 김좌진은 1929년에 할빈 주재 일본총사령관 경찰부장 마츠모도(松本 또는 松島라고 함)와 결탁하여 수치스러운 민족의 역적으로 되었다.
③김좌진은 마츠시마한테 받은 돈으로 산시에서 정미소를 차리고 첩을 얻어 타락한 생활을 하는 한편 동청철도호로군사령부와 결탁하여 중동선의 횡도하자로부터 해림에 이르는 구간의 객차에 신민부 무장사복대를 파견하여 조선공산당원들을 마음대로 수색하고 체포하여 치떨리는 살인사건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④김좌진과 그 부하들은 소련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밀산 경내에 머물면서 밀산지역의 상점과 양식상점을 털어먹었다. 서일은 이 사실을 듣고 비분에 차 밀산현 당벽진에서 굶어 자진했다.
⑤김좌진은 부하 수십 명을 데리고 목릉현에 가서 성동사관학교를 꾸렸으나 군중들이 반대하고 농민들이 식량과 경비를 내지 않아 폐교하고 말았다.
⑥1925년 산시 일대에 가서 통치식 단체인 신민부를 세우고 스스로 총사령이 되었으나 밀산, 목릉, 동녕, 영안과 주하 아성 등지의 조선족 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납부하지 않아 아주 고립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⑦신숙, 정신 등 인과 가장 반동적인 한족총연합회를 성립하였다.
이상 ①~⑦은 『김상구. 정치깡패 깡패정치인 김두한 출세기. 책과나무. 130~131쪽』에서 인용하였다. 양환준이 나열한 김좌진의 변절행각은 《기흥학회 홍성지부 설립, 호명학교 설립, 대한광복회 길림지부 부사령, 대한군정부 사령부 사령관, 북로군정서 군사부 총사령관,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소장, 청산리독립전쟁 통합전투단 북로독군부 제2연대장, 밀산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자유시 대한독립단 참모부장, 신민부 군사부 총사령관, 성동학교 부교장, 한족총연합회 주석》을 두루 역임한 김좌진의 행위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중국공산당과 일제침략자들의 입지를 두둔하면서 자신의 공적을 세우려는 중상모략 행태라고 봐야 한다.
이상 살펴본바 이역만리 만주 땅에서 김좌진 장군을 이렇게 음해한 점에 대하여 김좌진의 후손들은 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는가? 왜 반박하지 않는가? 마땅히 강용권을 명예훼손으로 제소하여 그 진위眞僞를 밝혀야 할 문제 아닌가! 김좌진 장군의 장남으로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김두한씨도, 김두한씨의 딸 김을동씨도 국민적 영웅으로 된 할아버지가 저토록 허무맹랑한 음해를 당하였는데도 왜 말이 없는가? 혹자는 필자에게 “김을동씨가 진정 장군의 피가 섞였다면, 김동진의 후손들이 진정으로 혈족 가문이라면 입을 열지 않는 이유가 뭔가? 이건 참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를 반드시 밝혀 김좌진의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중국 길림성 왕청현 거주 김장춘씨 단 한사람 뿐이다. 그는 연변대학교 사학과 박창욱 교수와 왕청현 향토사학자 문호갑 선생의 연구와 분석에 준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김좌진의 최측근에 있었다고 할 이범석은 김좌진의 가족사에 대해 왜 말 한마디 없었는가? 김좌진 서거 당시 한족총연합회 간부들과 유가족을 만나 사건을 조사했고, 대변인으로 조문객을 맞았다는 이강훈도 김좌진의 가족사에 대해 왜 말 한마디 없었는가? 오숙근여사와 두 아들은 추가 테러를 우려하여 장례식에 참석을 못했기 때문에 거짓투성이인 나혜국을 상대로 조사했다 해도 이강훈은 김좌진의 정실부인과 두 아들을 알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이강훈도 오숙근여사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해방정국에서 이승만과 미국 방첩대(CIC : Counter Intelligence Corps)의 비호庇護를 받으며 활개를 치고 다니던 서북청년단, 대한민주청년동맹, 백의사 등의 단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인사들을 암살하는 등의 테러를 주도했다.
대한민청은 백의사의 각본에 따라 1947년 조선공산당 산하인 조선청년전위대의 정진영 등 살해사건을 일으켰고, 한국의 미군정 포고령 위반 혐의로 조직이 해체된 남로당의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미군정과 경찰에 잡히면 안심했고, 대한민청의 별동대에 잡히면 죽는다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김좌진은 만주에서 신민부를 창립하고 또 한족총연합회를 창립할 때도 민족독립을 우선으로 주창하며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이 앞장섰던 공산•사회주의혁명에 동의하지 않았다. 김좌진의 부하로서 활동한 이범석과 이강훈이 지하에서 가족사에 대해 피눈물을 흘릴 김좌진에 대해 언급을 회피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들이 김좌진의 역사적 사실을 은폐함으로서 해방정국에서 백의사 등의 음해의 수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군자금을 보내지 않은 점을 비추어 볼 때 김좌진을 아예 무시한 이유에 대해서도 향후 연구자들이 결론에 접근토록 해야 한다.
김두한이 김좌진의 서자임을 최초로 밝힌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뒤를 이어 보도에 열을 올린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도 그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매일신보 기사로서 김두한이 서자庶子라면 안동김씨 가문에서는 그 위대한 영웅 김좌진의 적자嫡子를 왜 찾지 않았는가? 매일신보가 김좌진의 적자를 보도할 리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일이다. 이범석과 이강훈과 안동김씨 가문은 대한민청의 살인적 동체動體에 미운털이 박힐까 우려했음도 짐작할만하다 하겠다.
김좌진평전을 저술한 수원대학교 박모 교수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1993년 7월4일과 5일 양일간 흑룡강성 영안현 해림에서 요령성 신빈현과 중국조선민족사연구소가 공동으로 개최한 ‘김좌진학술연토회’에서 발표된 글들 중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인 강용권의 연구성과다. 여기서 강용권은 당시 김좌진 장군을 암살하였다고 지목되고 있는 이복림(일명 공도진)과 중국공산당 활동을 같이 하였다는 양환준을 만나 대담한 내용을 보고하였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며 근거도 제시하지 아니한 강용권의 음해성 발표를 “연구성과”로 평가했다.
어쨌든 양환준은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화요파 선전부장이었다. 이들이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일본과 싸우려는 수단이었음을 인정하는 속에서 고려공산청년회는 반일무장투쟁이라는 점은 김좌진과 일치하지만 공산•사회주의혁명이라는 점은 김좌진의 노선과 상호 배치背馳되는 단체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강용권의 발표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 국민은 김좌진을 국민적 영웅으로 취급하면 안된다. 특히 김좌진의 고향 홍성군민은 역사에 기만당했잖은가 말이다. 김좌진이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과 전쟁하여 대승의 공적을 올렸다 해도 신민부를 창립하면서 대한독립군을 기만하고 일제에 빌붙어 대한독립군의 정보를 제공하고 일제한테 돈을 받아 정미소를 차렸다면 이는 일제주구 행위일 것이고, 정미소 설립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므로 이를 의결한 한족총연합회는 또 뭐란 말인가! 김좌진과 한족총연합회의 이러한 반민족적 행위를 조사도 검증도 하지 않고, 청산리대첩 영웅으로 추대하여 기념관을 짓고, 운용비를 해마다 투입하는 것은 국민 혈세 낭비에 해당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강용권의 발표문을 도입導入한 김좌진평전을 지은 ㅂ모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된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으므로 강용권이 1993년 발표 당시 제시한 근거자료를 함께 도입했어야 했다. 만약 강용권이 어떠한 근거자료도 제시하지 못했다면, 이러한 발표문을 도입한 점은 역사정의라는 객관적 관점에서 볼 때 무리가 따른다 하겠다. 상술한 강용권과 양환준의 문답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설 같은 시나리오에 불과한 “김좌진의 진짜후손 죽이기”에 해당한다는 비판을 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⑵김좌진장군 유물폐기 음해
참으로 공요롭게도 《장군의 가족사진, 장군이 말타고 찍은 사진, 장군이 부인과 같이 말타고 찍은 사진, 부대원들과 찍은 사진, 장군의 크고 작은 군사일기책(8권 분량), 군사작전지도, 또 다른 지도 2장, 김창규 일기장 》등이 1993년 7월 김좌진학술연토회에서 양환준과의 대담기록을 발표한 강용권의 손에서 깡그리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위에 기술한 김좌진 장군의 유물은 장군의 부인 오숙근 여사가 둘째 아들 김창규에게 물려줬고, 김창규는 손자 김장춘에게 물려줬다.
1988년 김창규가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얼마쯤 흘렀을 때 김장춘은 김창규의 유언대로 유물을 잘 간직하고 있었으나 차츰차츰 증조부 김좌진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여 장군의 유물을 왕청현 교육국 향토사학자 문호갑 선생에게 연구를 의뢰했다. 문호갑 선생은 고증과 현장조사를 마치고 김장춘과 함께 한국행을 준비하던 차에 강용권이 자신도 연구해 보겠다며 문호갑 선생한테서 장군의 유물을 모두 빌려갔다. 그 후 문호갑 선생이 강용권에게 자료 반납을 요구해도 반납하지 않았으며, 김장춘이 수차례 반납을 요구해도 강용권은 끝내 돌려주지 않았다. 이미 파기破棄하였기에 돌려줄 수 없었던 터였을 것이다. 이것은 만주독립운동사의 중대한 역사를 폐기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 뒤로 김좌진 장군의 유물은 만주벌판에서 종적을 감췄다. 그 해가 1992년이다. 그 뒤 문호갑 선생은 화병을 얻어 1992년에 세상을 하직하셨다. 결국 강용권은 김장춘이 김좌진 장군의 후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자료를 다 폐기하고, 문제의 전말을 증언할 사람인 문호갑 선생마저 돌아가신 1년 뒤인 1993년 7월에 양환준과의 대담록을 김좌진학술연토회에서 발표했다. 강용권은 자신의 발표문에 대해 반격反擊할 자가 없을 것으로 알았겠지만 역사정의는 죽지 않는다는 진리를 망각忘却했던 것이다.
⑾충남 홍성군이 발행한 “대한독립군총사령관 백야김좌진장군전기”가 가장 종합적으로 치명적인 음해를 가했다.
⑿행정기관인 홍성군, 충청남도, 국가보훈처의 방치방임체념도 김좌진사후음해이다.
결론
충청남도 홍성군과 충청남도는 김좌진의 독립운동 활동사와 가족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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