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국 속으로 ⑩> 장산국과 신라불교
장산국 불국토 사상 신라로 계승
만 마리 물고기로 유명한 삼랑진 만어사 창건설화를 보면 허황옥이 국제결혼을 위해 금관가야로 입국한 시점인 서기 48년보다 2년이 더 앞선다. 서기 46년, 김수로왕이 부처의 힘을 빌려 독룡과 나찰녀를 물리친 결과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럼 가야로 불교가 전해진 것은 언제일까?
법흥, 진평, 선덕으로 이어진 왕명
우리나라 불교 전파에 대해선 중국에서 고구려를 통한 육상전파설이 통설이지만 인도로부터의 해상전파설도 있다. 불교 승려였던 허황옥의 사촌오빠 장유화상은 금관가야 지역에 장유암(長游庵)이란 사찰을 짓고 불상을 모셨으며, 이후 가야 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현재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암(長游庵) 경내에는 장유화상사리탑이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왕세자와 허씨 성을 따른 두 아들 외 일곱 아들은 허황옥의 권유로 불교에 귀의하여 하동 칠불사에서 성불했다고 전한다. 만어사 창건설화를 떠나 허황옥에 의해 불교가 가야에 전해졌다고 해도 우리나라 불교 전파는 서기 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만일 장산국이 불교국인 가야의 귀족에 의해 설립된 것이라고 본다면 신라로 불교가 전파된 사실도 더 빨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흔히 신라불교는 지증왕을 지나 법흥왕(재위 514년~540) 때 공인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신라 불교의 정확한 전달 과정이나 공인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불교 공인을 성공적으로 이끈 법흥왕의 법흥[법명은 법공(法空)]은 불법이 흥한다는 뜻으로 장산국의 불국토와 맞닿아 있다. 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진평 역시 불교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진평왕의 이름은 석가모니 부친의 이름인 ‘백정’이요, 그의 부인은 석가모니 모친의 이름인 ‘마야부인’이다. 왕즉불(王卽佛)사상으로 신라를 통치하던 진평왕이 만약 아들을 낳았다면 그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났으니 그가 곧 선덕여왕(재위 632~647)이다. 선덕여왕의 이름인 ‘덕만’이나 시호 ‘선덕’부터 모두 불교적인 호칭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이라는 이름은 여왕 즉위를 정당화시켜 줄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열반경’에 등장하는 덕만 우바이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덕만 우바이는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고자 일부러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불제자다. 중생 교화를 위해 여인의 몸을 받아 태어났다는 점에서 여성 성불(成佛)의 가능성을 여는 동시에, 원래 남자였다는 상징성으로 ‘덕만’이라는 이름에 왕위계승의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또한 덕만은 부처님 당시 신심 깊은 불제자였던 석가족 공주의 이름이기도 하다.
선덕이라는 왕명도 ‘대방등무상경’ 선덕바라문에서 취했다. 선덕바라문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이로, 부처님 열반 후 사리를 공손히 받들며 도리천의 왕이 되고자 발원했다고 한다. 즉위 3년(634년)에는 ‘향기로운 여황제의 절’ 분황사(芬皇寺)가 세워졌고, 이듬해 ‘영험하고 신묘한 여황제의 절’ 영묘사(靈妙寺)가 창건됐다. (참조 법보신문)
이같이 법흥왕, 진평왕, 선덕여왕에 이르기까지 왕명이 너무나 불교적인 사실은 우연일까?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시기는 역사에 기술된 국가적 공인 시기보다 훨씬 빨랐다. 혹시 해상을 통해 가야로 들어온 불교가 장산국을 거쳐 신라로 전파되지는 않았을까?
우리 역사에서 장산국과 신라처럼 불국토를 위한 국가는 보이질 않는다. 장산국은 국가 이름 자체가 불국토이며, 장지(불법을 널리 전하다) 마을이나 장지봉이 현재도 남아 있다. 신라는 왕의 이름으로 불국토를 건설하려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 예성탁 발행 ·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