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언자 이사야와 그가 활동했던 시대 배경
이사야 예언서는 이사야라는 인물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예언서는 그가 아모츠의 아들이며, 우찌야부터 히즈키야에 이르는 네 명의 유다 임금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라는 사실만을 전해줄 뿐이다. 유다교의 전통에 따르면, 이사야 예언자의 아버지 ‘아모츠’는 우찌야 임금의 선대 임금인 아마츠야의 형제이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찌야 임금과 사촌 사이다. 이사야 예언자가 왕족 출신이라는 전승은, 그가 아하즈 임금과 히즈키야 임금을 쉽게 만나고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사 7장 ; 36-39장)에서 가능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야 예언서 전체가 아닌 1-39장에서만 등장한다. 주목할 점은, 이사야 예언자의 이름이 머리글의 형식에서 언급되는 구절(1,1 ; 2,1 ; 13,1)을 제외하고, 정치∙외교적으로 중요한 사건과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이다. 이사야는 시리아-에프라임 전쟁(기원전 734-732년) 가운데 아하즈 임금을 만나고(7,3),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필리스티아 지역의 봉기(기원전 713-711년)가 일어나는 가운데 상징적 행위를 보여주며(20,2-3), 아시리아의 산헤립 임금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기원전 701-700년) 히즈키야 임금과 만난다(37,2.5-6.21 ; 38,1.4.21 ; 39,3.5.8). 이처럼 그가 등장하는 장면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있는 순간이다. 아울러 이사야 예언서를 읽기 위한 결정적인 역사적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에 맞춰서 이사야 예언서의 시기를 구별해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 연구방법론에 대한 간략한 언급
여기서 성경 연구방법론의 두 가지 접근법을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통시적(通時的) 방법’이다. ‘dia(통해)+chron(시간)’이 조합된 ‘통시적 diachronic’은 ‘시간을 통해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본문의 생성 배경과 형성 과정에 주목한다. 다른 하나는 ‘공시적(共時的) 방법’이다. ‘syn(~와 함께)+chron(시간)’이 조합된 ‘공시적 synchronic’은 ‘시간과 함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 앞에 놓인 최종본 형태의 본문이 지닌 동시성(同時性)에 주목한다. 곧 통시적 방법론은 성경의 저자 혹은 저자의 ‘삶의 자리’에 관심을 두고, 공시적 방법론은 본문의 내용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이사야 예언서를 시대적 배경에 따라 제1부, 제2부, 제3부로 나누는 방법이 통시적 방법에 따른 대표적인 것이다. 통시적 방법에 따르면, 우찌야 임금부터 히즈키야 암금 시대까지의 이야기와 유배 시기와 유배 이후의 이사야 예언서는 서로 상관없는 분리된 책으로 나뉘게 된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기본적으로 ‘공시적’ 관점에서 이사야 예언서에 접근하여 해설하고자 한다. 이사야 예언서는 분리된 세 권의 책이 아니라, 1,1부터 66,24까지 구성된 한 권의 책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이 제시하는 이사야 예언서 해설의 기본 원칙이다. 다만 필요에 따라 본문의 ‘삶의 자리’를 언급하는 가운데 통시적 방법이 반영된 공시적 방법을 통해 이사야서에 다가갈 것이다.
(1) 이사야 활동의 첫 시기(기원전 740-736년)
이사야는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하느님으로부터 파견을 받는다(6,1). 그러므로 1-5장의 선포가 이 시기에 속한다. 이사야는 이 시기에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불의가 지닌 위험을 바라보고 이 불의를 강하게 비판한다. 이사야의 선포는 심판과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심판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을 통한 회개 촉구가 이 시기 예언의 본질이다. 아울러 회개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종교∙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2) 시리아-에프라임 전쟁 시기(기원전 734-732년)
이사야서의 머리글(1,1)에 이어 6,1은 우찌야 임금의 죽음을 언급하여 이사야서의 두 번째 연대기를 제공한다. 우찌야 임금의 통치 기간은 다윗 왕조에서 두 번째로 긴데(기원전 773-736년), 가장 긴 기간을 통치한 임금은 므나쎄이다(기원전 696-642년). 우찌야 임금은 재위 기간 중 나병에 걸려, 마지막 17년 동안 아들 요탐(기원전 756-741년)과 손자 아하즈(기원전 744-736/736-725년)가 다스리는 가운데 섭정을 하게 된다.
우찌야 임금이 죽은 이후에 남유다 왕국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은 기원전 734-732년에 있었던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이다. 이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임금 페카와 다마스쿠스 임금 르친이 일으킨 전쟁으로, 그들은 남 왕국 유다에게 반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할 것을 요구하였다. 연대기에 따르면 이 시기(734-732년)에 남유다는 아하즈 임금의 통치 아래 있었다. 이때 위협을 받은 아하즈는 아시리아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아시리아의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는 다마스쿠스로 올라가서 그곳을 점령하고 다마스쿠스의 임금 르친을 죽였다(2열왕 16,7-9 ; 2역대 28,16-21).
이 시기에 해당하는 본문은 이사 6,1-8,18까지이다. 이 본문에는 이사야의 소명(6,1-13),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의 위협 가운데 전개되는 이사야의 활동(7,1-25)과 예언서 기록에 대한 암시(8,1-18) 등이 담겨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사 6,1-8,18은 이사야서의 ‘비망록 Denkschrift’ 혹은 ‘임마누엘 문헌 Immanuelschrift’이라고 불린다. 이 본문은 이사야서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7,4.5.8.17 ; 8,6.7).
7-8장은 이사야 예언자에 관한 정보를 추가적으로 제공해준다. 그는 여예언자와 혼인하였으며(8,3), 그 사이에 ‘스아르 야숩’(7,3)과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8,3)로 불리는 아들 두 명을 두었다. 두 아들의 이름 사이에 중요한 이름이 등장한다. 그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7,14)이다. 임마누엘이라는 구원과 관련된 이름과 스아르 야숩과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가 지닌 심판의 의미는 구원과 심판이라는 이사야서의 주제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사야는 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자녀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세우신 표징과 예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 시기의 내용을 마무리한다(8,16-18참조).
(3) 필리스티아 지역의 반아시리아 봉기(기원전 713-711년)
아시리아가 고대 근동에서 영향력을 확장하자 유다 왕국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은 군사∙외교적으로 결속을 강화했다. 시리아-에프라엠 전쟁이 끝난 후에 다마스쿠스(아람 수도)는 멸망하였고(기원전 732년), 북 왕국 이스라엘도 오랜 저항 끝에 기원전 722년에 멸망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필리스티아 지역 국가들은 아시리아에 종속이냐, 저항이냐를 결정할 갈림길에 놓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상징적 행위를 보여준다. 그는 3년 동안 알몸과 맨발로 지냈다(20,3). 전쟁 포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행위로 그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가 아시리아에 종속되어 포로가 된다는 예표와 표징을 제시했다.
이사야의 행위에 대한 배경은 이렇다.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을 치른 아하즈 임금은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로 인해 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하즈는 도와준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쳤고,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성전에 아시리아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봉헌하여 하느님의 뜻을 거슬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하즈 임금은 죽었다(14,28). 이사야 예언서의 연대기에 따르면 14,28 이후의 본문은 머리글에서 네 번째로 언급된 히즈키야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기원전 713년경 필리스티아인들의 도시국가 아스돗이 주변 성읍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다. 이 연합은 이집트를 다스리기 시작한 에티오피아의 임금 샤바카의 후원에 기대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샤바카는 아스돗을 아시리아에 넘겼고 아시리아 임금 사르곤의 영향력은 필리스티아 지역에 계속 유지되었다. 이사야 예언자의 상징 행위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 의지하는 것이 유다 왕국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징적 행위
이사야는 3년 동안 알몸과 맨발로 보낸다. 이는 전쟁 포로의 모습인데, 아시리아를 거슬러서 필리스티아인들의 아스돗 봉기에 가담하게 되면 전쟁 포로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자의 행위로 예고한 것이다. 이처럼 예언자가 직접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방식은 ‘상징적 행위’라는 예언 문학의 고유한 장르이다. 예레미야와 에제키엘, 호세아는 일시적 행위뿐만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 상징적 행위를 보여준다(예레 13,1-11 ; 16,1-9 ; 19,1-2 ; 27,1-12 ; 28,10 ; 43,8-13 ; 41,49-64 ; 에제 4,1-3.4-8.9-17 ; 5,1-4 ; 12,1-7.17-20 ; 24,15-27 ; 호세 1,2-9)
(4) 산헤립의 포위 속에서 등장하는 이사야(기원전 701년)
기원전 705년 아시리아 임금 사르곤이 전사한다. 임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아시리아 내부에 어려움이 닥쳤다. 이 시기를 틈타 유다 왕국을 비롯한 팔레스티나에 있는 아시리아의 속국들은 아시리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기회를 엿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르곤에 이어 아시리아 임금이 된 산헤립은 기원전 701년 군대를 이끌고 유다 지역에 진격하여 유다 성읍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였다. 이 상황이 36-37장의 배경이다. 여기서 이사야가 다시 등장하고, 하느님을 향한 히즈키야의 신앙으로 예루살렘은 위협에서 벗어나고, 반면에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아들들의 칼에 죽는다. 이어지는 38장은 히즈키야의 발명과 치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예루살렘에 닥친 위협과 구원의 이야기(36-37장)와 병행하여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위협 속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증한다. 39장은 바빌론 임금 므로닥 발아단이 보낸 사절단의 방문 이야기다. 역사적으로 바빌론 사절단의 방문은 산헤립의 침략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지만, 열왕기와 이사야서는 바빌론 사절의 방문을 침략 이후의 이야기로 전해준다(2열왕 20,12-19 ; 이사 39,1-8).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사야 예언서는 예언자 이사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역사적 사건 전개에 이사야 예언자를 등장시켜 사건이 지닌 중요성을 드러낸다. 동시에 그의 등장은 유다 왕국의 구체적인 정치, 종교, 외교 상황에서 함께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증한다. 이로써 이사야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활동이 역사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의 주도권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는 신앙의 가르침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