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님 소천님을 찾아 뵙고 나서(류의 발언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은, 소공님 소천님에 대한 신비화를 조장할 가능성이 다분하여 가급적 삼가려 하였으나, 결국 이와 같이 실패하고야 만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왜'를 분석하는 것보다, '어떻게'에 대해서 가감없이 기록하여, 수행 임상일지를 남겨본다.
1. 억압의 구조물의 붕괴
내 기억과 경험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심리적 억압의 기제가 있었고, 그로 인해 발생된 여러 신경증들을 겪은 바 있었다. 소공님 소천님과 말씀을 나눈 던 중, 이 억압기제에 대해서 태어나 처음으로 '심드렁'하게, 마치, 동네 이장님께 우리집 밭농사 사정을 말씀드리 듯, 별 저항없이 말씀을 드릴 수 있었는데, 그 발화 이후로, 마치 철옹성과 같았던 해당 기제가 모래성마냥 스르륵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참고로, 소공님 소천님께서는 나의 이 '기제'에 대해서 분석이나 조언을 해주신 것이 아니고, 그냥 들어만 주셨다. 동네 이장님께 우리집 밭농사 사정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장님이 우리집 밭에 뛰어들어 무얼 해주시는 게 아니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시다가, 정신차려보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안 계시 듯).
2. 빈터를 비추는 생명의 빛, 인연의 물결
억압의 구조물이 붕괴된 것을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하였다. 이 사실을 알아채게 된 것은, 매우 좁고 옹색하다고 여겨졌던 내 무의식과 내면의 '평수'가 문득 확장되어 있음을 체감한 뒤에 사후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정말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전의 내 생활에서 운용할 수 있었던 삶의 '실평수'가 체감상 약 10평 정도 였는데, 소공님을 뵙고 난 뒤에, 갑자기 체감 실평수가 1000평 정도로 뒤바뀐 것이다. 예전에는, 어떤 인연들, 어떤 기회들, 어떤 상황들을 내 생활에 진입시키거나 배치시킬 수가 없었고, 그 이유는 단순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자리'가 없었다. '나'를 지탱하고 있던 억압의 구조물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이 어마어마 했기 때문에, 내가 그나마 운용해 볼 수 있는 '빈터'가 물리적으로 매우 타이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억압의 구조물이 붕괴되고 나자, 갑자기 빈터가 여기저기 드러나기 시작했다. 단 한번도 경작되지 않은 채 너무 오래 묵혀두어서 무얼 심어도 잘 자라날 것만 같이 풍요로운 터전들의 실체가, 억압의 구조물로 드러나지 않던 너른 앞마당의 정체가, 그제사 발굴되었다. 빈터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그곳으로 눈부신 빛이 들어오고, 생명이 자리한다. 할일없는 동네 건달 강아지들과 도둑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리며 기웃댄다. 휘파람새도 은근슬쩍 출몰한다. 뒤늦게 등장한 동백꽃은 이게 뭔 일이냐 저희들끼리 수런대며 붉게 벙그고 난리다.
나는 이 인연의 물결을, 모두를, 환대한다. 빈터가 나의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환대하지 않을 수 없다.
3. 눈의 비늘과 신뢰
이것은 믿거나 말거나인데, 소공님을 뵙고 나서, 소공님의 블로그 글들이 너무도 확연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려고 소공님의 글들을 애를 써가면서 어렵사리 읽어갔으나, 어느 순간, 고동이나 소라와 같이 먹기 힘든 음식을 요령껏 뽑아내어, 감칠맛이 담긴 쌉싸름한 부분까지 음미하는 일련의 리드미컬한 과정을 통해 그 맛과 질감을 온전히 향유하게 되듯이, 몹시 즐겁고 유쾌하게 소공님의 글들을 향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어떤 글들은 너무도 '맛'이 좋아서, 필사를 해보는 중이다. 눈으로만 읽어내는 것으로는 그 맛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기 때문에.
한마디로, 소공님을 뵙고 나서 '눈의 비늘'이 벗겨진 것인데,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소공님께서 특별히 수행법이나 공부에 대해 조언을 해 주신 일이 없다. 온라인 문답이나 카톡 질의, 짧은 통화 등을 통해 소공님께 전해 들었던 말씀들과, 소공님을 직접 뵙고 들었던 말씀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 이 지점에서 내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역시나, 형식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모든 발화는 행위를 수행한다"는 Austin의 화행이론(Speech Act)을 상기해보자면, 소공님의 말씀 대부분이 수행발화(performative utterance)적인 차원에서, 다시 말해, 말씀 자체로 이미 수행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고 밖에 볼 수가 없었다. '어떤 말씀'을 해주셨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들을 통해 '어떤 효과'가 발현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 화행이론의 요체로써, 바로 이 관점에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희유한 대화의 신비는, 단순히 수행발화를 분석하기 위한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진리조건 외에, 청자와 화자의 신뢰관계가 적정조건(felicity condition)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으며, 이 조건의 다른 이름이 행복조건(happyness condition)임을 언급할 필요도 있겠다.
소공님을 만나, 눈의 비늘이 벗겨지고, 말 그 자체에 담긴 수행력을 체감하기까지, 소공님의 글과 말, 그리고 수행의 이력에 대한 '신뢰'가 적정조건으로 작동한 셈인 것이며, 더 나아가, '청라'라고 하는 별 미덥지 못한, 어디선가 굴러온 알지못할 타인에게 당신들의 삶의 일부를 아무런 조건없이 내어주셨던 소공님과 소천님의 불가사의한 신뢰가 없었다면, 행복조건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신뢰하는 일은, 신을 믿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노릇이다. <울타리>의 수행은, 어찌보면, 아무런 의심없이 '신'을 신앙하고 추종하던 미신으로부터, 위험과 의심을 감내하며 '인간'을 신뢰하는 습관을 새로이 구성해 나가는, 지극히 인문주의적인 실천의 한가지 양상일지도 모른다.
4. 의심
이 글을 작성하는 청라는, 이 모든 꿈같은 경험을 의심한다. 소공님 소천님을 직접 뵈었다는 사실마저도 부러 의심한다. 그 만남 이후로 발생하는 모든 변화들을 의심한다. 그것만이, 소공님과 소천님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감사'라는 말 대신, '의심'이라는 숙제를 지속해 나가기 위해, 먼바다 안개(海霧)를 배경삼아 심산유곡에서 소공님 소천님을 뵈었던 11월 어느 날의 기억과, 짭조롬한 바다향을 품은 채 여태 불어오는 그 이후의 사연들을, 어떤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적바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