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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묵상글(강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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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3일 수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시작입니다. 1,1-3.6-12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2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6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11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12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복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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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코 12,18–27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여인이 차례로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된 경우를 들어 부활 때에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겉으로는 율법 문제를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활 신앙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려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믿기보다 현세의 질서를 그대로 연장하여 영원의 신비를 재단하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 부활한 이들은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모세의 떨기나무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 하신 말씀을 들어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하느님의 신비를 말할 때 언제나 인간의 사고가 하느님의 생명을 다 담아낼 수 없음을 기억했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사두가이들의 문제는 단지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을 너무 작은 인간 계산 안에 가두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을 현세의 반복으로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지금 여기의 소유 관계와 제도적 관계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되는 생명의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하신 말씀은 매우 깊습니다. 성경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 안의 살아 있는 하느님을 놓칠 수 있고, 신앙을 말한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능력을 내 상식 안에만 가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리오는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겸손과 경외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논리 한 조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를 넘어 생명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맺어진 관계가 죽음으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속한 생명은 무덤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 안에서는 조상들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기억도, 언약도, 사랑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은 단지 먼 미래의 위안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신 하느님 안에 우리 존재가 붙들려 있다는 고백입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의 관점에서 보면 부활은 단순히 죽은 뒤 다시 시작된다는 뜻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신비입니다. 인간은 이 땅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그 관계의 최종 완성은 소유와 배타, 혈연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더 깊은 친교로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지금의 관계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더 밝게 드러냅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서로를 살리는 친교라는 사실입니다.
영적 성찰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내가 얼마나 자주 하느님의 일을 내 익숙한 틀 안에만 가두려 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부활도, 은총도, 공동체도 내 경험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은 죽은 습관과 굳은 사고 속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성찰은 바로 내 신앙이 살아 있는가를 묻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에 열려 있는지, 아니면 이미 닫힌 결론 속에 스스로 갇혀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의 관점에서도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전통과 언어, 관습 때문에 갈라지기 쉽지만 모두가 믿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참된 일치는 서로를 논리로 제압하는 데 있지 않고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서 함께 경외하고 함께 듣는 데서 자랍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면 교회도 살아 있어야 하고 관계도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너무 작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살아 계신 하느님보다 내 계산과 익숙한 틀만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관계를 소유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하느님 안의 친교로 배우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죽음의 논리보다 생명의 진실을 더 크게 들려주십니다.
주님, 제 좁은 생각 안에 당신을 가두지 않게 하시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능력에 마음을 열게 하소서. 죽은 습관과 굳은 판단에서 벗어나 당신 안에서 새로워지는 생명을 믿게 하시며 관계를 소유가 아니라 친교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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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가면 ‘지도 신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게 됩니다. 순례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순례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돌아가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단순한 말이지만, 교우들에게는 ‘왜’ 순례하는지를 성찰하게 하는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건강입니다. 낯선 곳에서 순례는 자칫 긴장하게 됩니다. 시차도 있고, 음식도 달라서 적응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평소에 먹는 약이 있으면 꼭 챙겨 먹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순례 중에 몸이 아프면 본인은 물론 함께 순례하는 동료에게도 어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소지품입니다. ‘여권, 지갑, 스마트폰’은 꼭 챙겨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특히 여권은 분실하면 순례에 큰 차질이 생길 수 있으니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세 가지만 잘 지키면 은혜로운 성지순례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35년 동안 성지순례를 여러 번 다녔지만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이런 원칙을 늘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례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은 ‘미사와 기도’입니다. 미사 중에 강론과 더불어 순례의 여정을 되풀이해 줍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디를 다녀왔는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몇 번씩 다녀온 저도 그렇게 되풀이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곤 합니다. 이동 중에 버스 안에서는 ‘묵주기도’를 하자고 합니다. 처음에는 제가 기도를 인도하지만, 나중에는 조별로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권고합니다. 묵주기도와 성가는 순례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기도 하며, 왜 여기에 있는지 돌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이번에는 하지 못했는데 순례의 마지막 날에는 전체가 모여서 다과를 나누며 소감 발표를 합니다. 동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번 순례가 얼마나 은혜로운지 새삼 알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듯이, 순례의 여정 중에 교우들은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사도로서 몇 가지를 당부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감옥에 갇힌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박해받고, 고난받는 것이 오히려 은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칼을 오래 쓰면 칼날이 무뎌지듯이, 우리의 몸과 마음도 편안함에 익숙해지면 나태해지고, 세상의 유혹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 중에도 자칫 쇼핑에 눈이 먼저 가거나, 이웃의 작은 허물을 지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실과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지순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허락하시고, 시간을 허락하시고, 능력을 허락하셨기에 성지순례를 올 수 있었기에 더욱 감사드리자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불교는 ‘윤회’를 이야기합니다.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되풀이되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생로병사’의 수레바퀴가 계속 돌아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내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고통이 반복되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은 이런 번뇌를 벗어나는 길은 ‘깨달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마치 달걀이 병아리가 되듯이 전혀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듯이 전혀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의 삶도 그와 비슷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확실하게 보일 것입니다.” 깨달음의 삶, 부활 이후의 삶은 죽어서만 아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라가는 것이 바로 부활 이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인, 성녀가 걸어갔던 길이 바로 부활 이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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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불신의 페러다임’과 ‘믿음의 페러다임’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곡된 신앙’(잘못된 신앙)이 가져온 불신, 곧 ‘잘못된 생각’에 구속되어 버린 ‘영적무지’와 믿음이 가져온 ‘신적지혜’의 자유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성경과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였고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로써 이해하려 했으며, 내세와 부활과 영적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수혼법’(신명 25,5-10 참조)으로 부활에 대해 따집니다. 곧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인 <탈출기>(3,6)를 인용하여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으며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느님 능력’에 대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고,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겼스 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되살아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52)
그렇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 권능에 대한 불신’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하오니, 주님! 저희를 신적 지혜로 이끄소서. 당신을 참되게 믿고, 당신의 능력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주님! 제 안에 당신이 얼마나 생생히 살아 계신지를 알게 하소서. 제 생각에 빠져 허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소서. 제 생각이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영적 무지와 불신을 몰아내소서. 믿음으로 기뻐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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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부유한 귀족 계층이었고, 성전과 대사제직의 권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권력과 협력하며 특권을 지키는 데 익숙하였기에, 신앙의 열정보다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오직 모세오경, 곧 토라만을 하느님의 계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부활이라는 빛을 꺼뜨리려는 시험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신명기의 결혼 규정을 꺼내 듭니다(25,5-6 참조). 죽은 뒤에도 이 세상의 질서가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부활을 모순으로 몰아가려 합니다. 질문은 논리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속에는 믿음을 조롱하려는 차가운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부활은 그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새롭게 보여 주시는 존재의 방식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 땅의 삶을 되풀이하며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토라에서 증거를 찾으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15–16; 4,5) 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오래전에 죽은 이들의 이름을 당신의 이름 안에 품고 계신다면, 그들은 사라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신 이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시고, 죽음조차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기억과 사랑을 끊어 내지 못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손을 끝까지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그 손을 놓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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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성령께서는 우리를 다시 빚어 주십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오랫동안 고수해 온 우리의 신앙적 확신이 변화하는 과정은 영혼을 뒤흔드는 영적 지진과도 같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양극적 사고를 넘어서는 길 성령께서는 우리를 다시 빚어 주십니다. 2026년 6월 2일 화요일 성공회이 마이클 커리 주교(Rt. Rev. Michael Curry)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지식과 확신을 넘어, 더 깊은 신앙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묵상합니다: 어느 순간, 하느님의 인도하심은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는 길을 벗어나, 때로는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하고 우리 자신마저 흔들리게 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오랫동안 붙들어 온 신앙적 확신이 변화하는 과정은 영적 지진과 같아, 우리의 정체성의 지층이 흔들리고 새롭게 자리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성령의 은총 안에서 통과할 수 있다면,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그 보상은 성경이 말하는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화"—우리가 모순을 넘어서서 사랑의 길을 살아간다는 확신에서 오는 평화—를 나누게 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모순으로 가득한 존재입니다. 저 자신도 그렇고, 경험은 제가 혼자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관계를 설명할 때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복잡하다." 그렇습니다. 관계는 복잡하고,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마이클 커리(Rt. Rev. Michael Curry)는 2000년에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의 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LGBTQ 신자들의 완전한 포용과 평등 문제를 놓고 깊은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지요. 커리 주교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너머로 인도하신다는 점을 강조하며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저는 오랜 경험과 우정을 통해 동성애자와 레즈비언도 다른 누구와 다름없이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배워 왔습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결합을 축복하는 문제(당시에는 혼인 성사까지는 논의되지 않았습니다)에 이르러서는, 제 성장 과정 속에 내재된 무언의 불승인에 갇혀 있었습니다. 제게 동성애는 제단 앞이 아니라 닫힌 문 뒤에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성장 과정 속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끊임없이, 강력하게 핵심 가치와 헌신으로 강조되었습니다. 그 확신은 저를 낳아 준 시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힘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늘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진리가 동성애자와 레즈비언 친구들에게도 모든 면에서 참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제게 깊이 와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교로서 저는 "교회의 신앙과 일치, 그리고 규율을 지키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했습니다. 동시에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가난한 이와 낯선 이에게 연민을 보이며, 도움이 없는 이들을 보호하겠다"는 서약도 했습니다. 저는 점차 이 두 서약의 문자와 정신에 충실하려는 길이 실제로는 깊은 모순으로 저를 이끌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성장하고 있었고, 제 신앙적 확신도 진화해 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저는 점점 더 하느님의 성령께서 제 안에 숨을 불어넣어 새롭게 빚으시도록 마음을 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안에서 참된 개인적 변화와 성숙, 그리고 끝없는 영적 변형의 근원이 드러납니다…. 고인이 된 [평신도 신학자] 버나 도지어(Verna Dozier)는 저에게 참된 멘토이자 스승, 그리고 영혼의 벗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 하느님의 꿈(The Dream of God)에서 이렇게 지혜를 전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희미하게 비친 거울을 통해서만 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나는 오늘 내가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는 것에 따라 살아갑니다. 내일 내가 틀렸음을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옳음"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기에, 틀렸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오래 전부터 제 성적 경향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느껴 왔습니다. 그것은 여러 방식으로 제가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깊이 체험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성공회 신자로 자라났지만, 동성애자로서의 제 경험을 나누는 데에는 저항이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 번 제 안의 빛—그리스도의 빛—을 등잔 밑에 감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어둠이 저와 저와 같은 이들을 향해 존재하지만, 이제는 퀴어(queer) 신자들을 받아들이는 새벽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자유롭게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희망 안에서 우리는 힘을 얻고, 더 넓어진 배움 속에서 참된 자아로 성장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William P. References Michael B. Curry with Sarah Grace, Love is the Way: Holding on to Hope in Troubling Times (Avery, 2020), 166, 171, 172–173, 178, 18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eth Macdonald,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강의 하구(河口)는 땅도 물도 아닌, 그 둘을 모두 넘어서는 세계를 드러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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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앎이 삶을 바꿉니다. http://www.ofmkorea.org/ofmkfb/580992 2026.06.02 08:25
앎이 삶을 바꿉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마지막 권고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충실하라고 당부합니다. "우리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 안에서 자라나십시오."(2베드 3,18) 베드로가 말하는 앎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을 배우고,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 자신이야말로 이 앎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과 함께 길을 걸었으며, 기적을 목격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어도 그는 예수님을 다 안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기대와 욕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베드로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자신의 실패와 가난을 통과한 뒤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숯불가에서 세 번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충성심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라고 고백할 뿐이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사람에서 예수님께 알려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이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서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움과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이미 도착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날마다 다시 길을 나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적 가난은 앎의 반대가 아니라 참된 앎의 시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가난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를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결국 그분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은 더 많은 교리를 쌓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이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더 깊이 용서하는 데 있습니다. 더 많이 내어주고, 더 많이 허용하고, 더 많이 형제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앎"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삶으로 흘러가는 앎입니다. 그리고 그 앎은 우리를 점점 작아지게 합니다. 점점 가난하게 합니다. 점점 겸손하게 합니다. 마침내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작은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을 알아 갈수록 저는 더욱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당신을 가까이할수록 저는 더욱 작아집니다. 당신의 사랑 안으로 들어갈수록 저는 더욱 빈손이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빈손 안에서 저는 가장 풍요롭습니다. 바로 그 가난 안에서 저는 당신을 만납니다. 바로 그 앎 안에서 저는 영원한 생명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를 마음에 새깁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충실하십시오. 그분의 은총 안에서 자라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더 가난하게, 더 겸손하게,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이 말씀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원한 생명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영원한 생명은 죽은 뒤에 받게 될 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이름과 이력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알고, 그와 사랑을 나누며, 그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를 삶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얼굴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는 삶으로 드러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볼수록 우리는 아버지를 알게 되고, 아버지를 알수록 예수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 앎을 관계의 체험으로 이해합니다. 가난한 이웃 안에서, 형제자매 안에서, 자연과 피조물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해 형제와 달 누이를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온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형제자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먼 미래의 천국 입장권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 머무르는 삶입니다. 내가 용서할 때, 사랑할 때, 내어줄 때,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할 때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 이전에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서로 안에 머무시듯이, 우리도 그 사랑의 흐름 안에 참여할 때 영원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끝없이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오늘도 우리의 가장 평범한 관계 안에서 조용히 피어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앎, 그리고 내적 가난의 길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앎은 세상이 말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책을 많이 읽고 교리를 많이 외우며 신학을 많이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앎에 이르는 길은 높아지는 길이 아니라 낮아지는 길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길이 아니라 더 많이 비우는 길입니다. 더 많이 채우는 길이 아니라 더 많이 내어주는 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하느님을 아는 길을 내적 가난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들로 자신을 채웁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채우고, 자신의 옳음으로 채우고, 자신의 경험으로 채우고, 자신의 업적으로 채웁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득 찬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가득 찬 그릇에는 새로운 물이 담길 수 없듯이,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하느님이 머무실 자리가 없습니다. 내적 가난이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아는 상태입니다. 내가 가진 믿음도 내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진 재능도 내 것이 아니며, 내가 가진 시간과 생명조차 내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에 속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앎이 시작됩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하느님은 무너지고, 내가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은 더욱 깊은 신비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내가 붙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를 먼저 붙잡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내가 사랑해서 가까이 간 분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고 계셨기에 내가 그 사랑을 발견한 것뿐이라는 것을.
내적 가난은 그래서 무지의 고백이 아니라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아십니다."라는 신뢰입니다. "주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맡김입니다. "주님, 저는 비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으로 채워 주십시오."라는 열린 마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비움의 신비를 삶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부유함을 버렸지만 더 깊은 부요함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았지만 하느님의 뜻 안에서 참된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자신을 작게 만들었지만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앎은 머리에서 시작되지 않고 무릎에서 시작됩니다. 겸손하게 내려앉은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 자리는 패배의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공간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을 알려고 애쓰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알려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붙잡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를 찾고 계셨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어떤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 붙잡혀 살아가는 삶입니다. 형제를 만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보는 삶이고, 자신의 상처 안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하는 삶이며, 작은 꽃 한 송이와 바람 한 줄기 안에서도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는 삶입니다. 이 앎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끝없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생 하느님을 알아 가지만 결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무한한 신비가 우리를 더욱 가까이 부릅니다. 더 비우게 하고, 더 내려놓게 하고, 더 사랑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내적 가난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는 마침내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신 안에서 모든 것입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지만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당신께서 나를 아십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사랑의 흐름 안에서 모든 피조물과 형제가 되어 살아가는 삶. 그것이 프란치스칸이 걸어가는 내적 가난의 길이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품 안에서 끝없이 깊어지는 영원한 앎의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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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03 04:42
- 우리의 관계는?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우리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 우리의 관계는 어떻고 미래 우리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졌고 미래는 어때야 하는지도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관계는 성소 곧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형제들을 주셨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신앙인은 처음서부터 나와 관계 맺는 사람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셔서 맺게 됐다고 하거나 그때는 그것을 몰랐지만 이제라도 하느님께서 그를 내게 보내주셨고 관계를 맺게 됐다고 믿습니다.
저희 수도자들은 이런 면에서 뚜렷합니다. 제가 같이 사는 형제자매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우연이 모여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과 관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이 삶으로 불러주셨고, 이 삶을 같이 살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보내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을 주신 것처럼 형제자매를 주신 것이고, 결혼한 사람에게는 역시 관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배우자를 주셨고 그 관계를 통해서 자녀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신 모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관계는 관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맺어주신 거라는 믿음으로 서로를 보고 받아들여야 하고, 미래의 관계도 관계의 주인께서 새로 맺어주시는 대로 맺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의 바오로와 디모테오 관계가 우리의 모범입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디모테오와 영적인 부자 관계를 맺고 자신의 안수로 그가 받은 은사를 불태우라고 격려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그러므로 지금 내 옆에서 나와 같이 사는 분들에게 바오로 사도처럼 안수해줍시다. 서로 안수해줌으로써 서로를 성령으로 불타게 하고 거룩하게 살도록 해줍시다.
그리고 이렇게 같이 살다가 마침내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같이 들어갑시다. 그것은 현재의 모든 관계를 끝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부모 자식 관계를 이제 끝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현재의 부부 관계를 이제 끝내고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는, 지금의 형제자매가 그리스도의 형제자매가 되는 관계로 관계를 다시 맺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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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영근 님 성모님의 행복은 무엇일까?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3&id=2133078&menu=4770 최영근 [dimonz] 2026-06-02 ㅣNo.18992
** 성모님의 행복은 무엇일까? 기원 1세기, 고대이스라엘 나사렛 지방의 목공인 집안의 삶은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고 일상생활도 녹록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목공인으로서 요셉 성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열심히 노동을 하였을 것이고 성모님도 살림살이가 만만치는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성모님께서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기쁨, 슬픔, 즐거움, 분노 등의 감정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성모통고 기도" 는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기도 입니다 "성모칠락 기도" 는 성모님의 기쁨을 묵상합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살아가면서 느꼈던 행복은 무엇일까? 묵상해 봅니다 1)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함으로 얻는 행복 -------------------------------------------------- * 누가복음 1장 26절 ~ 38절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 누가복음 에는 아주 놀라운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 이 얼마나 놀라운 봉헌의 언어인가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들만이 느낄수있는 행복을 성모님께서는 충분히 만끽하셧을 것입니다 또한 성부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히 느끼셧을것 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데서 오는 고난이 있지만 하느님과 함께 동행하는 즐거움도 크다 생각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크리스찬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입니다 2) 성령님과 함께 하시는 행복 ------------------------------------------------ * 누가복음 1장 35절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 마태복음, 누가복음 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설명합니다 성령님께서 성모님과 함께 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시는데,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성모님에게 잉태되신다?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능력 이실까요? 나의 이성으로는 가늠이 안됩니다. 물론 나는 원죄없으신 동정녀의 잉태를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모님은 성령님의 배필 이라고 말합니다 깊은 통찰의 상징적이고 놀라운 말씀 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묵상해보면 신앙생활의 모범이라 할수있는 모습을 볼수있는데요 성모님의 인격도 훌륭하시지만, 성령님의 함께하심도 이유가 될것 같습니다 -------------------------------------------------------------------- * 사도행전 2장 1절 ~ 4절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사도행전에는 놀라운 공동체의 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강림으로 설명합니다 다락방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을때, 하늘에서 불꽃같은 것이 내려오며 갈라져 각 사람위에 머물렀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가장 강력한 불꽃이 성모님 위에 계셨으리라 생각됩니다. 3) 아들 예수님으로 인한 행복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으시고 키우신 분 입니다 예수를 낳으시고 아기 예수, 어린 예수, 소년 예수, 청년 예수, 성년 예수 등등 어린 생명이 한 위대한 인격체로 성장하고 나아가 구원을 위해 활동하고 희생하시는 모습을 직접 목격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위해 한없는 사랑과 희생을 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가톨릭에서 신앙생활을 한지 얼마 안되었을때는 " 하느님의 어머니 " 라는 말이 좀 낯설었습니다. 어렸을때 개신교 생활을 해서인지 하느님은 성부하느님 이시고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 라는 개념이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할수록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모님 공경이 참 아름다운 신심이라는 깨달음 입니다. 물론 성부 하느님께 대한 흠숭을 가장 고귀한 신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행복한 일은 자식을 낳고 키운것이라 말을 합니다 특별한 아들 예수로 인한 고난과 고통도 크셨겠지만 아들로 인한 행복과 기쁨이 더 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 ** 덧붙여서.. 하나) 성모님께서 기쁨을 느끼신 순간들도 묵상해 봅니다 -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 - 예수님 탄생 - 예수님 봉헌 -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으심 - 공생애 활동을 지원하심 - " 다 이루어졌다 "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것을 들으심 - " 어머니, 구원이 왔습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심 - 첫미사를 예수님의 집전으로 드리심 - 성령 강림, 교회 공동체의 탄생 - 교회 공동체의 성장을 목격하심 - 몽소승천 - 천상모후의 관을 받으심 물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데서 오는 고난, 특별한 아들 예수로 인한 마음고통도 크셨겠지만 성부 하느님의 사랑, 성자 예수님의 사랑, 성령님의 사랑을 모두 느끼신 성모님 이라 생각됩니다 둘) 성모발현의 메시지, 묵주기도 영광의신비 5단을 묵상해보면 성모님은 믿는 사람들의 어머니 되심에 행복해 하시는것 같습니다. 묵주기도를 정성껏 드리면 좋을듯 합니다. 세상에서 살으셨을때는 예수님의 어머니로 행복하셨고 이제 천상모후의 관을 받으신 지금은 당신을 공경하는 사람들의 어머니 이신것에 행복하신듯 합니다. " 자애로우신 성모님, 저희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저희와 함께 걸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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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선 성경 이해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오직 모세오경(토라, 창세기~신명기)만을 권위 있는 계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들 안에는 부활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부활 신앙을 거부했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있던 성경 해석의 자세에 있어서도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티다. 그들은 성경을 매우 직접적이고 문자적으로만 해석했던 것입니다. 반면 바리사이들은 예언서와 성문서까지 포함하여 더 넓게 이해했지요. 이 차이 때문에 사두가이들은 천사, 영혼, 내세와 같은 교리를 부정했습니다. 세 번째로 사두가이들은 성전 사제 계층과 귀족 집단에 속해 있었고, 로마와의 정치적 관계 속에서 현실적 권력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내세나 부활 같은 교리는 그들의 권위와 질서에 불필요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세 번째 이유가 앞의 두 개의 이유에 대한 전제가 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매우 현세적인 것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결국 그들의 믿음에 있어 중심이 되었던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들이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해, 자기들의 권력과 부의 유지가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근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등에 등장하는 하느님 당신 자신에 대한 선언, 즉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선언을 이용하여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언뜻 보면 조금 궁색한 주장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의 선조들인 이 세 사람은 이미 죽은 이들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믿음의 핵심 포인트가 있습니다. 즉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도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자기들 믿음의 선조들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또한 그 믿음의 선조들인 이들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굳게 믿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존재의 원천이신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그분과 유사하게 창조된 우리 존재 역시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존재 역시 이 세상에서는 다른 모든 존재처럼 끝을 맞이해야 하지만 우리 존재 자체는 본래 하느님 안에서 천사들처럼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는 말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들 믿음의 선조들인 이 세 사람을 언급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이,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이 교묘한 질문, 속임수 같은 "왜?"를 던집니다. 질문이 언제나 중립적인 정보 요청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장면들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뒤의 삶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질문을 던지며, 그 신앙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죽은 이들은 하늘의 천사들과 같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대답도 언뜻 보기에는 앞뒤 논리가 잘 맞지 않는 궁색한 주장처럼 느껴집니다. 사두가이들은 천사의 존재도, 내세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불성실한 질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다면 자기 입장을 포기하지 말고, 뒤로 물러서지 말라는 권고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활 신앙을 붙들 수 있을까요? 단지 머리로만? 그렇다면 그것은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1662)이 말한 "큰 내기(le grand pari)"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내세를 믿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만약 죽은 뒤 삶이 있다면 실망하지 않을 것이고, 없다면 역시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망하려면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안전한 내기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고 하신 것은 부활에 대한 내기를 건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온 존재, 몸과 영혼을 아버지께 온전히 맡기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분처럼, 가능한 한 내 존재 전체를 하느님께 맡기려 하지 않는다면, 나는 사실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다른 누구의 부활도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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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gBn/2103 우리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 말미에 귀가 번쩍 뜨이는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랍니다. 바로 오늘 나를 위한 하느님, 나의 하느님이랍니다.
예수님 말씀 묵상하다보니 마음이 많이 여유로워졌습니다. 아무리 부끄럽고 부족해도 살아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그분 사랑받는 존재이며, 그분에게 소중한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지난 시절 돌아보니 참삶을 살지 못했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했고, 숨을 부단히 쉬고 있었고, 여기저기 걸어 다니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살아있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육체는 살아 있었지만 영혼이, 정신이 죽어버렸던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고,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다고 좌절하던 그 순간에서 하느님께서는 함께 하셨고, 나를 위해 존재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질에 대한 지속적 반성과 성찰입니다. 오늘 나는 참으로 살아있는가? 열심히 숨 쉬고 삼시 세끼 제때 밥 먹으며, 분명히 살아있지만, 이미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이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육체는 버젓이 살아있지만, 영혼이나 정신이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욱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들의 육체는 점점 노쇠해지고 소멸되겠지만, 우리들의 영혼과 정신은 더욱 견고해지고 강건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아무리 열악하고 비호의적이라 할지라도, 또 일어서고 또 넘어서겠노라고.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정신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주님 안에, 그분의 성령 안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내 앞에 펼쳐질 하루하루가 시련과 상처투성이뿐일지라도, 기꺼이 견뎌내고 이겨내면, 언젠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스런 부활의 삶에 직접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또다시 힘을 내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앞에 진정 살아있는 자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조차도 하느님 앞에 있다면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이 목적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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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gCX/1935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1)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는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의 이름을 하느님께서 품고 계신다는 뜻도 아니고, 기억하신다는 뜻도 아니고, 그들이 ‘실제로’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죽음이라는 것에게 당신의 자녀를 빼앗기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를 부활시켜서 영원히 살게 하시는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부활이 없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살리지 못하신다면,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닌 것이고, 전지전능하지 않다면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안 믿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희망 없이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만일에 내세는 없고 현세만 있다면 피조물 전체가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천지창조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2) 부활을 믿는다고 해도 누구든지 사두가이들이 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도, 지금의 인간관계들이 부활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지금의 모습 그대로, 또 지금의 인생 그대로, 부활 후에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부활하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의 자기 모습과 지금의 자기 인생에 만족하는 사람은 부활 후에도 변함없이 그렇게 살기를 바랄 텐데, 만일에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불공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부활 후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삶이다.”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라는 말씀은, 모든 욕심과 욕망에서 해방되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인생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어떤 갈등도 다툼도 원한도 없고, 지금의 인생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부활 후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부활 후의 인생은 지금의 인생이 연장되는 것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그리고 정말로 좋은 인생이기를 바라는 희망.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희망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희망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3) 그런데 우리는 ‘기억’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기억’은 어떻게 될까? 이쪽 세상에서 있었던 일들과 함께 지냈던 사람들을 모두 기억하게 될까? 아니면 모두 잊어버릴까? 기억한다면 아픔도 상처도 원한도 기억할까? 그런 나쁜 것들은 잊어버리고 좋은 것들만 기억할까?
만일에 이쪽 세상에서의 불행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하늘나라의 행복이 행복인 줄 모를 것입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진짜로 중요한 문제는 ‘성인의 통공’입니다.
이쪽 세상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하면,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지금’ 하늘나라에 있는 분들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아직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종말의 부활 후에는? 기억은 남아 있어도, 사랑과 기쁨만 가득할 것입니다. 미움과 원한은 잊어버리고, 사랑은 영원히 기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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