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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7 강 - 機緣品- 11
常이 聞偈已에 心意豁然하야
乃述偈曰
無端起知見하야 着相求菩提로다
情存一念悟하면 寧越昔時迷리오
自性覺源體는 隨照枉遷流하나니
不入祖師室이면 茫然趣兩頭로다
智常이 一日에 問師曰,
佛說三乘法하시고 又言最上乘하시니
弟子未解로소이다 願爲敎授하소서
師曰, 汝觀自本心하고 莫着外法相하라
法無四乘이언만 人心이 自有等差니
見聞轉誦은 是小乘이요
悟法解義는 是中乘이요
依法修行은 是大乘이요
萬法盡通하며 萬法具備로되
一切에 不染하고 離諸法相하야
一無所得하면 是名最上乘이니라
乘是行義라 不在口爭이니
汝須自修하고 莫問吾也어다
一切時中에 自性自如니라
常이
禮師執侍하야 終師之世하니라
***
常(상)이 聞偈已(문게이)에→
지상이라고 하는 스님이 게송을 듣고 나서
心意(심의)가 豁然(활연)이라→
마음이 툭 틔어 버렸어.
이 말씀 듣고는 그만 마음이 툭 틔어 버렸다.
그리고 이 분도 또 상당히 공부한 이지요.
乃述偈曰(내술게왈)→
이에 자기도 게송으로
자기의 깨달은 바를 피력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대개 “오도송” 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게송으로 자기의 어떤 심경을 이야기를 합니다.
[無端起知見(무단기지견)하야→
무단히, 이것을 우리가 흔히 쓰는 말하고 그대로입니다.
무단히, 까닭 없이 知와 見을 일으켜서 “안다. 본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보고 아는 것.' 전부 그것이지요.
그것을 일으켜서,
着相求菩提(착상구보리)로다→
어떤 형상에 着해서, 형상에 집착해서 도를 구했다.
보리를 구했다. 깨달음을 구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한계예요 그것이...
깨닫지 못한 사람의 한계입니다.
“그것이 한계면 그럼 깨닫지 못하겠네?”
이런 질문이 나올 수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부단히 하다보면
그것이 한계지만 着相.
우리는 어쩔 수 없이 相에 집착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것을 부단히 하다보면 상대가 끊어진
彼我(피아)가 끊어져 버리고
主客(주객)이 끊어져 버린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지 못해서 그렇지...
그래서 어떤 상대적인 상황 속에 놓여있던
석가모니도 오랜 정진과 명상 끝에,
정말 피아가 끊어지고 주객이 끊어지고,
모든 생각이 완전히 단절이 된
그런 경지를 맛보게 되고, 거기서
한 생각이 툭 트이게 된 것이지요.
거기서
한 생각 툭 트여야 그것이 진짜입니다.
禪(선)에서는 어떻게 보면
경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하고는 상당히
다른 입장으로 禪門(선문)에서는
이야기가 많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이 선에서는 그 부분.
불교 안에 그러한 부분만을 취해서,
거기에 어떤 취미를 느낀다고 할까요?
거기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그런 어떤 마음의 세계를 개발하고
또 발전시켜서 뭐라고 할까?
禪佛敎(선불교)가 됐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그 쪽 일변도로 이야기가 되지요. 그러나
通佛敎(통불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꼭 그것만이
불교 전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그런 부분도 있다는 것.
선이라는 것은 그렇게
“마음을 우리가 다스려 간다.”
고 하는 것. 불교는 내용을 가만히 보면 다양해요.
수행의 길이 아주 다양하고 많습니다.
情存一念悟(정존일념오)하면
寧越昔時迷(영월석시미)리오→
생각이 “한 순간에 깨닫는다.”고
하는 거기에 둔다. 이겁니다.
마음이 一念에 깨달아야지, 깨달아야지 하는
거기에 딱 매어있다. 存자는 그런 뜻입니다.
一念悟에 둘 것 같으면
寧越昔時迷리오?
어찌 옛날에 미혹했던 것을 뛰어 넘을 수 있겠는가?
앞의 이야기도 다 그래선 안 된다는 이야기.
두 번째 구절도 그래선 안 된다는 이야기.
그 깨닫겠다고 하는 생각이 없으면 수행 안 하지요.
수행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수행에 들어갔을 때는,
깨닫겠다는 마음이 없어야 돼요.
선문에 보면 제일 그것을 큰 병으로 지적해 놨습니다.
“情存一念悟”
깨닫겠다는 마음.
깨닫겠다고 하는 마음이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궁극에 가서는...
아, 처음에야, 출발이야 깨닫겠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출발했지만, 정작 공부하는 순간에 들어가서는 깨닫겠다는
마음이 제일 장애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제일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꼭 한 꼴 넣겠다고 생각하면
그것 헛발질 한다고요.
맨 날 헛발질...
그냥 무심히 그냥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인연이 닿아서 들어갈 때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한 꼴 넣겠다고 차 봐야 그것이 아무데나
찬다고 들어가지나요?
부단히 그냥 차는 거예요. 열심히 그냥 무념으로...
무념이 될 때까지 그냥 열심히 차야 돼요.
그냥 공만 쫓아다니면서 그렇게 차다보면
언젠가 들어갈 때가 있어요.
부지런히 뛰다보면 언젠가는 넣을 때가 있어요.
깨닫겠다고 하는 그 마음이 제일 큰 병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들으면 상당히 이율배반적인 소리인데요.
“깨닫지 않으려면 뭐 하려고 공부하느냐?”
이런 말이 나올 법 한데요.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출발할 때는 그 일을 성공하려고, 이루려고 하지만,
딱 일단 출발 했으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그냥 일만
열심히 하는 것. 그 자체만 그저 즐겁게 열심히
하는 것. 그것이 결국은
“목표에 빨리 도달하는 길이다.”
하는 것입니다.
自性覺源體(자성각원체)는
隨照枉遷流(수조왕천류)하나니→
自性으로서 源體. 근본 체를 깨닫는다.
그것은 비춤을 따라서 그릇 흘러가는 것이다.
이것은 자성으로서
根本(근본). 根源(근원)적인 우리
實體(실체)를 깨닫는 것.
이것도 둘로 나눠지는 겁니다.
괜히 하나인데 두 조각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작 깨달으려는
그 순간에 가서는 하나가 되어야 돼요.
“내가 깨닫겠다.”
“깨달을 대상이 뭐다.”
“깨닫는 나는 뭐다.”
이것이 혼연이 하나가 될 때,
혼연이 하나가 될 때 깨달음이 오는 것이지,
‘내 마음을 깨달아야지’ 마음은 무엇이고
깨달으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이나 깨달으려고 하는 것이나 궁극에선 하나인데
그것이 나눠져 있는 것입니다. 나눠져 있는 동안은
제대로 못 깨닫는다. 이겁니다.
그것이 언젠가 하나가 될 때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自性으로서 源體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은
隨照枉遷流(수조왕천류)라.
비춤을 따라서 그릇 흘러가는 것이다.
“비춤을 따라서”
라는 것은 우리가 꽃을 보면,
내가 꽃에 마음이 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隨照”입니다.
내 마음이 사물을 볼 때, 그것을
“비춘다.”
그래요.
“마음이 사물을 본다.”고 하지 않고
“사물을 비춘다.” 듣는 것도 비추는 겁니다. 소리를 들을 때
“마음이 그 소리를 비춘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비춤을 따라서 그릇. 잘못 흘러가는 것입니다.
경계 쫓아가는 것이지요.
객관 쫓아가고 대상 쫓아가는 것입니다.
불교 공부는 뭣이지요?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返照(반조).
돌이켜서,
내가 꽃을 보면 꽃에 팔려 버리는 것이 아니고,
꽃을 보고 분별하고 좋아하는
“그 놈이 무엇인가?”
이렇게 되돌려서 생각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반류”라고도 하고,
“반조”라고도 하는데요. 꽃을 쫓아가면
그거는 정말 따라가는 것이지요. 그냥...
그것은 우리 일상생활 아닙니까?
보통 마음공부가 아니고 일상생활이라고요.
※
마음공부는 쫓아갈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을 봤으면
'내가 무엇이 들어서 저 사물을 보고
좋다 싫다 하는 그런 분별을 내는가?'
하고 그 생각이 일어난 그 곳을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다시 되돌아 와서...
다시 되돌아 와서 그 놈을. 한 생각 일으킨 그 자리.
생각이 일어난 그 자리를 어떻게 하던지 파고 들어가서
그 뿌리를 찾아내는 것인데요.
이것은 사물을 따라.
객관을 따라 가면
그릇 흘러가는 것이다. 하나니
不入祖師室(불입조사실)이면
茫然趣兩頭(망연취양두)로다→
祖師室에 들어오지 아니 했으면 망연히
兩頭에 나간다.
“祖師室”이라는 말은 여기서
“조사가 계시는 방”이라고 했지만,
“방”
을 보고 말 했겠습니까?
정말 한 생각 뚝 끊어진
“祖師(조사)의
境地(경지)”를 말한 것이지요. 조사의 경지!
조사의 경지를 말한 것이지,
조사스님이 계시는 나무로 흙으로 지어놓은 그 방이 아니지요.
조사의 경지에 들어가지 아니 하면 망연히 兩頭에 나아간다.
兩頭는 상대적인 것이지요.
전부가 상대로 이루어졌으니까요.
左右(좌우).
陰陽(음양).
主客(주객).
전체가 상대로 이루어져 있지요.
깨달음의 경지는
絶相對(절상대). 상대를 초월한.
“상대가 끊어진 경지다.”
우리가 대체적으로. 이론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지요.
들어서... 그러나 상대가 끊어진 그 경지가 대체 어딘지?
또 그 맛을 언젠가 우리가 볼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세상은 상대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그 상대가 뚝 끊어진 그
一念(일념)자리. 정말 진짜 無念(무념)자리. 그것이
“祖師室”이지요. 그 경지에 들어가기 전에는,
항상 둘로 나누어져 있는 어떤 상대적인 현상을
쫓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을 지상스님이
“祖師室”이라고 하면서
육조스님이 계시는 방. 또
육조스님과의 만남. 또
육조스님의 마음의 경지.
이 모든 것을 다 표현하고 있지요.
내가 육조스님을 못 만났으면
내가 어떻게 제대로 되었겠는가?
계속 이쪽저쪽 어떤 상대적인
경계를 쫓아가다가 세월을 보냈을 텐데,
참 다행히 나는 스님을 만나서
상대가 끊어진 바로 그
一念의 境地(경지)를 맛보았습니다.]
라고 하는 속뜻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智常(지상)이 一日(일일)에
問師曰(문사왈)→ 스님에게 물어 가로대,
佛說三乘法(불설삼승법)하시고→
부처님께서는 三乘法을 말씀하시고,
又言最上乘(우언최상승)하시니→ 또 最上乘을 말씀하시니
弟子未解(제자미해)로소이다→
弟子가 거기에 대해서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또 물었어요.
願爲敎授(원위교수)하소서→ 원컨대 敎授해 주십시오.
師曰(사왈)
汝觀自本心(여관자본심)하고→ 그대는 자기의 本心을 보고
莫着外法相(막착외법상)하라→
外法相. 밖에 나타나 있는 그런 어떤 대상. 경계.
이런 것에 집착하지 말라.
자기 本心만 잘 관찰하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 귀에 들리는 것들을 집착하지 말라.
法無四乘(법무사승)이언만→
법에는. 본래 진리에는 四乘이 없어.
삼승법 하고 최상승 하고 이것이 없어. 없는데
人心(인심)이→ 사람의 마음이
自有等差(자유등차)다→
차별을 두었다. 이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괜히 차별을 두었어요.
삼승하고 최상승 이것도 아주...
육조스님이
몰라서 이렇게 설명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사람의 근기에 맞추어서,
아주 자유자재로 보통 교리하고는 좀 다르게
아주 재미있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
삼승하면 聲聞(성문) · 緣覺(연각) · 菩薩(보살). 이렇게 하고,
최상승 하면 一佛乘(일불승).
이렇게 해서 사승을 말하는데,
여기 해석은 성문이니 연각이니 보살이니
뭐 부처니 하는 그런 말 없고...
見聞轉誦(견문전송)은
是小乘(시소승)이요.→
보고 듣고 외우는 것.
우리가 경전을 보고, 강의를 듣고, 아~~
글이 좋다니까 그저 열심히 외우고,
우리 경을 대할 때 그러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소승이다. 이겁니다.
悟法解義(오법해의)는→
법을 깨닫고,
경전 안에 들어있는 뜻을. 도리를 아는 것.
법을 깨닫고 그 도리를 아는 것은,
是中乘(시중승)이다→ 중간 승이다.
悟法이라고 하는 이건
마음으로 이해만 하는 정도지요.
앞에 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앞에 見聞轉誦.
우리 지금 상태가 그렇다고 할까요?
좀 미안합니다마는 대개 그런 정도 수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그러니까요. 어쨌든
見聞轉誦(견문전송)은
小乘(소승)이고,
그 뜻을 알아서 그 속에 경전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는
깊은 이치를 아는 것은,
中乘이다. 중간 쯤 된다.
依法修行(의법수행)은→
법에 의지해서, 그 가르친 법에 의지해서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것. 몸으로 행동 하는 것. 그것은
是大乘(시대승)이다 이겁니다. 훨씬 낫지요?
아무리 잘 알고 있더라도 수행 아니하면
아무래도 좀 부족하지요. 그런데 최상승은 뭐냐?
萬法盡通(만법진통)하며
萬法具備(만법구비)로되
一切(일체)에 不染(불염)하고 離諸法相(이제법상)하야
一無所得(일무소득)하면 是名最上乘(시명최상승)이니라
萬法盡通(만법진통)이라→
모든 이치. 어떤 이치든지 간에,
萬法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어떤 도리든 간에 전부 다 통달해서,
싹 다 통달하고 그러면서,
萬法具備(만법구비)→
온갖 것을 다 자기가 갖추고 있어요.
어떤 이치든지 어디 안 통하는데 없어요.
세상의 이치든지 출세간의 이치든지 무엇이든지,
경전에 말씀이든지 논어 맹자든지 누구의 이야기든지 간에,
어떤 이치든지 사람이 살아가는데 대한 것을
전부 다 갖추고 있어요. 자기가... 그러면서,
一切不染(일체불염)이라→
어디에도 물들지 아니해.
우리는 뭣 좀 안다. 한다. 하면 전부 그냥 물들기 바쁘지요.
물들기 바쁘는 거예요.
一切不染이라. 잘 알지만 거기에 물들지 아니해. 그래서,
離諸法相(이제법상)이라→
온갖 존재의 相(상). 온갖 도리.
이 “法”이라는 것은
뭐 어떤 존재. 사물. 사건. 어떤 현상.
그리고 뭐 부처님의 가르침까지,
그것이 법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法”이 돼버려요. 사물 까지도...
그 사물의 구성. 변천 변화. 이런 것 까지도 전부
“法”이 되는데, 그런 법상을 떠나, 그것을 떠나서
一無所得(일무소득)하면→
하나도 얻은 바가 없어. 내 마음에,
그렇다고 뭐 멍청 해가지고 무슨 뭐 목석이나
이렇게 돼서 一無所得이 아니고,
萬法盡通하고 萬法具備해요. 그러면서
一切에 물들지 아니해요.
그래서
모든 마음으로부터 흔적이 다 떠나 있어요.
離諸法相이라.
마음에 일체 흔적이 없어요.
아주 뛰어나고 모르는 것 없고 못하는 것 없고,
온갖 능력 다 가지고 있으면서,
마음에는 아무것도 남아있는 흔적이 없어요.
一無所得 이예요. 반야심경도
以無所得(이무소득)입니다.
“무소득”
무소득이 요점 이예요.
“무소득” 얻을 바 없는 것. 뭔가 얻은 것이 있으면
그것은 아직도 덜된 상태라고 봅니다.
불교의 이론은 참 아주 명료해요.
얻은 것이 있으면 그것은 아직도 덜 됐다는
사실이 너무 분명합니다. 여기도
“無所得” 이라고 했지만, 반야심경도 역시
無所得. 그것이 핵심이거든요.
본래 다 갖춰져 있는데, 뭔가 얻었다는 것은
거기에 아직도 잘못됨이 많다는 것입니다.
능엄경 같은 데는 어느 정도로 표현하는가 하면,
‘머리위에 머리를 하나 더 얹어 놓은 거와 같이
그렇게 큰 허물이다.’ 아주 괴이하겠지요?
머리위에 머리를 하나 더 얹어 놓으면...
머리가 하나 있는 것이 정상인데,
거기다 머리를 하나 더 얹어 놓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도깨비거나 이상한 짐승이거나 그렇게 되겠지요?
불교 안에서는 소득을 그렇게 봅니다.
“머리위에 머리 하나를 더 얹은 것이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무소득”
이 좋은 것이지요.
무소득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마는,
어쨌든 불교의 궁극은 “無所得”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是名最上乘
(시명최상승)이다→
이것이 최고로 높은 것이다. 그랬습니다.
乘是行義(승시행의)라→
“乘”
이라는 것. 이것은 탈 乘(승)자 지요? 또
“法”이라고 하는 것도 되고 그래요. 이것은
車(차). 승용차. 그런 것들도 전부 “승”인데요.
탈 것이지요. 탈 것. 그것은
行義. 실천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한다는 데에
그 “乘”의 의미가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앞에서는
見聞轉誦(견문전송). 글이나 보고 듣고 읽고 외우는
그것도 행동이지요?
悟法解義(오법해의)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그
“行義가 어떠하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乘是行義(승시행의)라.
“乘” 이라고 는 것은 실천한다는 뜻이다.
不在口爭(부재구쟁)이니→
입으로 이러고저러고 다투고,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어느 이론이 옳으니 어느 이론이 높느니,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口爭.
입으로 다툼이 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汝須自修(여수자수)하고→
그대는 모름지기 스스로 수행하고,
莫問吾也(막문오야)하라→
이제 더 이상 나한테 묻지 마라.
一切時中(일체시중)에
自性自如(자성자여)니라→
살다보면 一切時中에. 온갖 우리의 생활 현상 속에
그대의 그 마음이. 自性이, 그대의 자성이 저절로
거기에 있어.
自性이 自如하다. 스스로 여여 하다. 이 말입니다.
너의 마음이 스스로 여여 하게 그 자리에 있다.
一切時中에.
보고 듣고 웃고 울고 온갖 희로애락.
거기에 그대의 마음이 한 번도 떠난 적 없이
그 자리에 있다.
“自如”라는 말을 이 이상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네요.
자성자리가 저절로 거기에 그렇게 있다.
“如”
라고 하는 말을 불교에서는 아주 좋아하고 잘 쓰는데요.
본래 그대로인 것. 그런 뜻이지요.
如= 본래 그대로인 것.
자성이 너의 一切 일상 속에.
모든 일상 속에 너의 마음이
본래 그대로 거기에 그렇게 있어.
본래 그대로 거기에 그렇게 있으면서
너의 일상이 운위 되는 것이지요.
너의 일상이 거기서 살려 나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이제 自性自如 입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뭐 “마음” “마음”해서 찾으려면 참 안 찾아지지만,
그러나 우리 자신을 한 순간. 1분 1초도 떠나있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정작 잡으려고 하면 또한 잡히지
않는 것이 자성이고, 그것이
一切時中에 自性自如다.
常(상)이
禮師執侍(예사집시)하야
終師之世(종사지세)하니라→
이 인연으로 스님한테 예배를 하고, 56강에서,
제가 조주스님이 자기 나이 60 이 될 때까지
은사스님이 살아계셔서 60 이 될 때까지도
시봉을 하고, 뭐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계속 하다가
스승이 돌아가시니까 비로소 그 때야 걸망지고
나들이를 나갔다는 조주스님말씀을 드렸는데...
이 분이.
이 지상이라고 하는 이가 이 인연으로
육조스님의 시봉을 하기 시작해서
육조스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終師之世.
스님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했다.
과거부터 아주 깊은 인연이 있었든지
이렇게 해서 아마 임종을 하게 됐던 제자였던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