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3제국 아돌프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이자 아리안 민족주의를
앞세워 유태인들을 학살한 악인이었다. 그러기에 독일인들에게 아리안이라는 민족명은
부끄러운 과거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부정적 이미지로 강하게 각인 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직접적 피해자인 이스라엘 그리고 유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미국도 독일과
아리안이 연결되어 생각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기에
독일 즉 게르만과 아리안을 동일선상에서 놓고 바라보는 것은 다소 위험해 보인다.
아리안은 다들 알 듯이 현재 인도인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또한 이란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란과도 관련이 깊다. 이란은 아리안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중앙아시아에서
존재했던 유목민족들을 이란계로 분류한다는 것은 그 들을 아리안으로 본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독일인을 아리안이라고 보았던 것일까? 히틀러의
과대망상에서 비롯된 착각이었을까? 다소 위험해 보이지만 역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 감히
접근해 본다.
훈족의 유럽침략의 첫 번째 희생자였던 고트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고트족은 동게르만
으로 분류되곤 한다. 다음의 글은 이 정희가 지은 '동유럽사' 27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한편, 최초의 거주지가 동부 스웨덴 지역이었던 고트(Goths)족들이 1세기경에 발트 해
안과 비슬라 강 유역으로 옮겨왔다. 이들은 슬라브 인과 바르타네 인들의 뒤를 따라서
로마 제국의 변경에까지 다다랐다. 다뉴브 강 하류 흑해 쪽으로 향하는, 원시 부족들의
끊이지 않는 이동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나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옛날 사가들은 유럽
의 진화 발전을 로마인의 관점에서 보아, 카르파티아 산맥을 꿰뚫을 수 없는 장벽처럼
여겼으나, 반유목 반농경적 집단의 이동에는 오히려 유리하기도 했던 지리적 특성을 고
려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특성은 러시아인과 발트해 연안인과의 상업적 교류가 가
능했던 러시아 평원의 수로였으며, 그리스 식민지들은 이 교역의 중개 상인이었던 것이
다. 그리스인들은 러시아 땅에서 활발히 상행위를 전개하여 러시아 수로를 따라 올라가
발트해까지 침투하였다.
저자가 지은 '동유럽사'가 슬라브 민족의 역사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고트족보다는 슬
라브족에 중점을 두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고트족이 북유럽에서 이동해온
민족이라는 점이다. 발트해와 흑해의 오래된 상업적 교통로를 따라 고트족이 이동해온 것으
로 저자는 보고 있다.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분명 흥미로운 분석이다. 이 책을
조금 더 읽어보기로 하자. 아래의 글은 이 정희가 지은 '동유럽사' 27 페이지 하단에 나오는
글이다.
슬라브 인들이 계속 남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강력한 고트 인들은 흑해 쪽으
로 내려와 세력을 팽창시켜, 마침내 3세기경 아조프(Azov)해 연안에까지 남러시아를 포
함하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평화롭게 이 지역으로 침투해온 슬라브 부족들은 다시 이
지역의 새 정복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슬라브 인들이 사르마티아 인의 영향을
고트 인의 영향보다 먼저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것은 6세기경의 저술가 조르다
네스(Jorbanes)와 프로코피우스(Procopius)의 증명에 따라 확인할 수 있다. 고트의 역
사가인 조르다네스는 이 나라의 일부가 드니에프르 강을 건너 키예프 지역 근방에서 당
시 도네츠(Donets)강 유역에 살고 있던 스팔리(Spali)를 공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들을 굴복시킨 후 고트인은 다시 아조프 해를 향해 크리미아 반도을 뚫고 갔다고 전
한다.
북유럽에서 출발한 고트인들이 크리마아 반도를 지나 아조프 까지 다달았다는 것은 우리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 들은 과거 스키타이의 주 활동영역까지 진출한 것이다. 고트인
들이 오기 전에 사르마트에게 멸망당한 스키타이는 이후 동쪽으로 이동해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해 사카족이 되어 인도사에 등장하고 일부는 북으로 이동해 사하족이 된 것으로 보여진
다. 고트족의 이러한 이동은 결코 어느 한 순간 우연히 일어났던 것을 아닌 것 같다. 비슷한
예를 러시아의 역사에도 다시 볼 수 있다. 바로 '러시아 논쟁'이 그 것이다. 아래의 글은 김
학준이 지은 '러시아사' 29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노르만 학설
동슬라브족이 민족 이동을 끝내고 정착한 무렵인 9세기께, 대체로 오늘날 우리가 스칸
디나비아(Scandinavia)라고 부르는 북유럽에 근거지를 마련한 해양 민족인 노르만 사람
들이 유럽을 활발히 침입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흔히 바이킹(Viking)으로 불린 만인(蠻
人)들이었다. 그들은 노스맨(Norseman) 또는 바랑지안(Varangian)으로 불리기도 했는
데, 러시아어로는 바랴그라고 했다.
유럽의 많은 곳들을 정복한 이 해양 민족은 곧 동슬라브족도 그들의 지배아래 두었다.
그 때가 대체로 우리 역사의 후삼국 시대에 해당하는 9세기 중엽이었다. 바랴그의 수장
(首長)으로 이미 덴마크를 지배한 루리크(Rurik 또는 Riurik, 슬라브표기로는 Norse Hr
rekr)가 862년께 북방의 노브고로드에, 그의 부하인 아스콜리드(Askolid)와 디르(Dir)
는 남방의 키예프에, 각각 자리를 잡고 슬라브족을 괴롭혀 온 하자르족의 약탈을 막아
주면서 슬라브족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루리크가 죽은 뒤 그를 계승한 올레그(Oleg)는 882년에 아스콜리드와 디르를 죽이고 키
예프를 장악함과 동시에, 자신도 키예프로 옮겨 스스로 키예프 공후(公侯)라고 불렀다.
그는 키예프를 '루시의 모든 도시들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이 곳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
의 슬라브족들을 정복했다. 이 키예프 루시가 바로 러시아 국가의 시작이다. 여기서 말
하는 루시라는 이름은 15세기 후반까지 쓰였고, 그 뒤로는 러시아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면 루시 또는 러시아라는 말의 근원, 곧 어원(語源)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
답은 여럿이 있다. 서방 학계가 제시한 해답들 가운데 하나는, 러스(Rus)라는 말이 핀란
드어로 '노를 젓는 사람(those who rowed)'을 뜻하는 루오치(routsi)에서 나왔고 그것
은 해양 민족인 바이킹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바이킹들이 붉은 머리에
붉은 수염의 차림이어서 라틴어로 '붉다'라는 뜻의 러서스(russus)로 불리었다는 해석이
다. 두 해석 모두 러시아가 바이킹이 세운 나라라는 뜻을 담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키예프 루시가 북유럽으로부터 온 노르만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설명을 노르만 학설이라고 부르고, 그 학설을 제시하거나 옹호하는 학자들
을 노르만 학파라고 부른다. 독일의 역사학자인 바이에르(Gottlieb Siegfried Bayer)와
역시 독일의 역사학자인 슐뢰제(August Ludwig von Schl zer)등이 이 학파의 창시자
들로, 그들은 18세기에 이 이론을 내놓았다. 그들의 뒤를 이어 약 200년에 걸쳐 이 이론
을 뒷받침하고 발전시킨 학자들이 나타났으며, 그리하여 이 이론은 학계에서 통설로 받
아들여졌다.
반(反)노르만 학설
그러나 노르만 학설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특히 소련이 건국된 뒤에, 러시아 학자
들에 의해 강력히 부인됐다. 이들을 반(反)노르만 학파 또는 슬라브 학파라고 부른다.
러시아의 기원에 대한 노르만 학설의 주장은 러시아 최초의 국가인 키예프 공국이 바이킹에
의해서 건국되었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러시아에 진출한 바이킹은 노르만족이었다 노르만
족은 북방 게르만족이다. 다시 말해서 노르만 학설은 러시아의 기원을 게르만족이 건국한
키예프 공국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이 주장은 러시아의 주류인 슬라브인
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학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 반노
르만 학설이 등장하기 전까지 노르만 학설이 통설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키예프
공국은 현재의 우크라이나지역 즉 흑해 북부에 존재했던 나라였다. 발트해의 노르만족 바이
킹이 키예프에 공국을 건국했다는 것은 그들이 흑해 북부 지역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수세기 이전의 고트족처럼 이들도 발트해 연안에서 흑해 북부 연안으로 이동 진출
한 것이다. 이처럼 북유럽의 게르만족이 흑해 북부 연안 지역까지 진출한 예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만도 두 차례나 있다.
우리는 유라시아 대륙의 유목민족을 이란계, 터어키계, 몽골계로 구분하곤 한다. 이러한 기
준으로 구분할 때 스키타이는 주로 이란계로 분류된다. 스키타이가 이란계로 분류된다는 것
은 그들을 유럽인 즉 인도유럽어족으로 본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이란이라는 의미가 아
리안의 나라라는 뜻이기에 이란계로 분류된다는 것의 의미는 스키타이가 아리안이라는 의미
도 될 것이다. 만약 스키타이가 아리안이었다면 과연 그들은 어디에서 이주해온 민족이었을
까? 처음부터 흑해 북부 지역에 살고 있었던 민족이었을까? 아니면 고트족이나 노르만족처
럼 북유럽에서 이주해온 민족이었을까? 아무도 그 답을 모르기에 더 더욱 궁금할 뿐이다.
고트족이 과거 스키타이의 영역이었던 아조프해 연안까지 진출했었다는 사실은 그러기에 더
욱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아래의 글은 정 병조가 지은 '인도사' 35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아리안(Aryan)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대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그 흔적이 나타난다. 원래 그들은 시베리아 남북과 투르케스탄(Turkestan)등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이었다. 기원전 17,8세기부터 민족 대이동을 시작하여, 기원전 15∼13세기경
에는 인도 대륙에 침입한 것으로 보인다. 유목 생활이기 때문에 목초지를 따라 끝없는
방랑을 거듭했던 것인데, 그 진로는 주로 서부 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일대를 관통했던
것이다.
아리안은 오늘날 서양인의 선조이다. 게르만, 앵글로색슨, 나아가서 슬라브에 이르기까
지 유럽을 지배한 서양인의 선조가 바로 이 아리안이었다. 아리안이 서양인의 선조라는
가설을 정형화시킨 이는 비교 종교학자였던 막스 뮐러(Max M ller)였다. 그는 고대 인
도의 언어였던 산스크리트(Sanskrit)가 영어의 어원임을 입증하였다. 종래 그리스
(Greek), 라틴 등의 어원에 대한 연원을 밝힌 셈이다. 실제로 고대 인도의 최고신인 천
신은 드야우스(Dyaus)라고 한다. 그리스의 제일신인 제우스(Jeus)와 동의어이다. 즉, 그
들은 동일한 민족이었으나, 신에 대한 견해의 차이 등으로 말미암아 둘로 나뉘게 되었
다. 그 일파는 중동,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갔고, 또 다른 일파는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 대륙으로 침입해 온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아리안은 피부가 희고 코가 높으며, 키가 큰 골격이다. 인도의 원주
민인 드라비다 인과의 혼혈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전형적인 인도인의 모습을 가지게 된
다. 실제로 현재 쓰고 있는 영어라는 문자에서는 놀랄 만큼 많은 산스크리트적 영향을
들 수 있다. 언어학자들은 이제 산스크리트가 영어의 어원이라는 사실을 정설로 받아들
이고 있다.
위의 글을 보면 작가가 많이 고민하고 쓴 글이라는 것이 보인다. 아리안족의 출발지를 시베
리아 남북과 투르케스탄으로 본 것은 아마도 아파나시예보(Afanas'evo, B.C. 2500∼1700)
문화와 안드로노보(Andronovo, B.C. 1700∼1200)문화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투
르케스탄이라고 본 이유는 기원논쟁이 지나치게 확장되는 것을 경계한 것 같다. 그러나 이
러한 설명은 다소 모호하며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도 북쪽 어
디에선가 이주해온 아리안의 민족이동을 이해할 때 우리가 꼭 고려해야 할 두가지 있다. 바
로 우랄산맥과 카스피해이다. 우랄산맥은 오랜 기간 동서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었다. 만약
아리안족에게서 서양인의 흔적이 보인다면 그 들은 아마도 우랄산맥 서쪽에서 이주해왔을
것이다. 또한 카스피해의 서안(西岸)보다는 동안(東岸)을 거쳐 이주해왔을 가능성이 더 크
다. 만약 카스피해 서안을 거쳐 이주해왔다면 티그리스, 유프라스테스 강 상류를 거쳐 이동
해왔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접촉했을 것이고 그 들의 역사에 일
부라도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글은 다소 인도 중심적이다. 어느 역사서나 자국의 입장에서 세계사를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에 결코 잘잘못을 탓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상식을 가지고 봤
을 때 약간의 빈틈이 보이기에 이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작가는 아리안이 모든 유럽인의
기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위험한 발상이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2000년이 되어서야 인류
사에 등장하는 민족이다. 이 민족이 유럽인의 조상이라면 기원전 2000년 이전에는 유럽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서술했음이
분명해 보이지만 다소는 허술한 점도 엿보인다. 문화적 기원과 혈연적 기원을 다소 구분했
으면 한다. 다른 하나는 영어의 기원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찾는 것이다. 아마도 이를 부정하
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약간의 빈틈이 있다. 바로 문자와 언어의 구
분이다. 산스크리트어가 그리스어나 영어보다 먼저 생겨났다고 해서 유럽의 언어가 아리안
의 언어에서 파생되었다는 논리는 다소 빈약해 보인다. 양쪽의 상관관계를 부정하기는 어렵
지만 양쪽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보는 것은 다소 위험해 보인다. 아마도 히틀러가 게르만족
의 기원을 아리안에 찾은 근거도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북유럽에서 출발하여 흑해 연안을 거쳐 카스피해 북부를 지나 왔나 아니면 시베리아 남부에
서 기원하여 인도로 그리고 유럽으로 이주했는지 아리안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는 게르만족에게서 아리안족이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아리안족에게서 게르만족이 비
롯되었는지 하는 다소 유치한 이분법적 구분의 해답이 될 것이다.
참고가 될 것으로 보여 아래의 글을 옮긴다. 다음의 글은 세계사신문 편찬위원회가 지은 '세
계사신문 1권' 27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20세기 아리안인 원조 논쟁
<1935년 독일, 이란> 아리아인이 유라시아를 휩쓴 지 4천년이 지난 지금 유럽과 이란
사이에 난데없는 아리아인 원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논쟁은 제국주의 열강과 반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 벌어지고 있어 한층 뜨겁다. 양측의 주장을 소개한다.
●히틀러(독일 총통): "아리아인이란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백인종을 말하며 그 중
가장 순수한 혈통은 우리 게르만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을 지
니고 있다. 반면 가장 열등하고 해악적인 인종인 유대인은 아무리 환경을 개선하고 교
육을 실시해도 그 천성적인 열등성과 해악성이 개선되지 않는다. 가장 순수한 아리아인
인 우리 독일의 게르만인은 열등민족의 해악에 전염되는 해악에 전염되는 걸 막기 위해
서라도 그들을 격리하거나 절멸할 권리가 있다."
●레자 샤(이란 왕): "우리 아리아인이 고대문명을 재편하고 있을 때 변두리 야만인이던
게르만인은 순수 아리아인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생떼쓰는 그들이 가엽기도 하지만 그
저의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지금 유대인을 겨냥한 인종주의의 정체는 제국주의이
며 그 칼끝은 우리 서아시아를 포함한 비유럽세계를 난도질해왔다. 위대한 아리아인의
정통성은 우리 이란('아리아인의 나라')에 있으며 우리는 서아시아인들과 합심하여 사이
비 아리아 우월주의자들의 제국주의 음모를 분쇄해 나갈 것이다. (편집자 주: 이란은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로 부르지 말도록 세계에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