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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문학 범주의 탄력성과 가치 분석
이규배*
1.
저항(抵抗)은 어떤 힘이나 조건에 굽히지 아니하고 거역하거나 버팀을 뜻한다. 항일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면, 일제가 우리의 자유의지를 속박하며 정체성을 훼손하는 강압적 힘을 행사하는 상황이 전제되었을 때 생명 본래의 자연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민족적 저항의 가치는 자유와 해방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에 부응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누군가의 자유의지를 속박하는 힘과 조건은 매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정당화할 수 없으며, 이러한 힘이나 조건에 굽히지 않고 거역하거나 버티는 저항은 생명 본래의 자연성이면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으로 자유의지를 속박하는 상황이 주어진 초기에는 개인 차원의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저항 단계에 머무르지만, 전방위적 억압의 지속과 함께 이에 대한 저항은 점점 목적의식을 띤 조직적이고 투쟁적인 가치와 이성의 단계로 고양된다.
① 경술년 7월 변고 꿈일런가 참일런가
칼도 창도 못 써보고 이 지경이 되단말가
② 우리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길은 우리의 약소민족과 우리 무산자가 서로 한 뭉치로 굳게 단결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자본가 계급에게 맹렬히 싸워 승리를 얻는 그 길밖에는 없을 것을 단언합니다.
①은 경술국치 이후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양반 사족의 후예 김대락이 경술국치 직후 자연발생적 저항 의식을 표현한 1910년대 항일가사 「비탄가」의 부분이고, ②는 1934년 《조선청년》 창간호에 발표하려 했다가 일제의 검열로 전문이 삭제됐고 해방 후 개인 창작집에 실린 소영(素影) 박화성의 단편소설 「헐어진 청년회관」의 부분이다.김대락의 「비탄가」가 전통 장르인 가사(歌辭)의 형식으로 이 시기 창작된 대부분의 항일가사와 유사한 차원의 자연발생적 저항 감정을 표현한다면, 박화성의 「헐어진 청년회관」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라는 2단계 혁명론으로 무장한 ML당 당원 ‘오빠’의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 민족을 노예적 상태로 영구화하고자 하는 강압적 상황에 맞서서 자유와 해방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부응해 세계적 지지와 연대를 끌어낼 수 있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길”, 맹렬히 싸워 승리를 얻는 그 길밖에는 없을 것”이라는 목적의식을 띤 조직적인 저항 의식을 고양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항일문학도 문학작품이므로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형식미학으로서 수준이 있고,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 높은 격에 도달할수록 거기 비례해 가치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하면서 항일문학의 범주 확장의 탄력성과 그 가치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2023년에 창작된 시인 이동순의 “내가 홍범도다 우리 모두가 홍범도다 / 거리로 골목으로 나서서 / 나라 지키자 우리를 지키자”(_「내가 홍범도다」 부분, 『내가 홍범도다)』, 한길사, 2023년)와 같은 작품을 항일문학 범주에 넣어 다룰 수 있는지, 한반도가 아닌 미국이나 일본, 중국 영토를 배경으로 창작한 항일문학, 중국어나 일본어로 창작한 항일문학,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창작한 항일문학 등을 과연 포괄적 범주로, 물론 그 층위의 문제는 마땅히 구별하고 현미경적으로 들여다봐야겠지만, 과연 묶어서 다룰 수 있는지 첫째 시간 문제, 둘째 공간 문제, 셋째 언어 문제, 넷째 창작 주체의 문제 등과 관련해 일별해 보기로 한다.
2.
2023년 10월에 발간한 『내가 홍범도다)』(한길사) 시집 첫머리에서 이동순 시인은 “나는 홍범도 의병대의 의병 시인이다.”라고 썼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한 친일파들이 그 죗값을 치르지 않고 다시 득세해 오늘에 이어왔으며, 그 친일의 후예들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고 거리낌 없이 활보하며 대한민국의 민족적, 민주적인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어떤 변조된 친일 행동을 일본 극우파의 논리에 보조를 맞춰가며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사는 지난 16일부터 홍범도·김좌진 장군 등 항일 독립운동가 7인을 기리는 독립전쟁 영웅실의 철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교내 충무관 앞에 세워진 6명의 독립영웅 흉상 중 홍범도 장군 흉상의 학교 밖 이전도 강행한다.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이 모인 단체인 광복회는 23일 독립전쟁 영웅실 철거에 대해 “백선엽 장군의 국립현충원 친일 행적 기록 삭제, 독립영웅 흉상 철거에 이은 신종 매국 행위”라고 성토했다. 앞서 지난 20일 이종찬 광복회장은 우리 군의 뿌리는 일제강점기 독립군 무명용사라며 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반대 입장을 거듭 밝혔다.
하지만 군과 여당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육군참모총장과 육사 교장은 23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이 생도들의 대적관을 흐리게 한다”며 독립운동 역사를 부정하는 궤변을 계속했다.
위에 인용한 한겨레신문의 사설이 과연 지금 대한민국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적 사건인지 국민은 너무나 의아해하며, 차라리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영화 ‘밀정’, ‘암살’, ‘봉오동 전투’, ‘각시탈’, ‘미스터 션샤인’ 등 항일영화‧항일드라마가 관객과 시청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며 사랑을 받으며 흥행 불패의 공식으로 된 것은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와 여기에서 새로운 변종으로 파생된 친일의 후예가 여전히 강력하게 득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일본 극우파의 지원을 받으며 기승을 부리고 있는 뉴라이트 세력이 교과서 왜곡을 다시 시도하는 상황은 심각한 사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진리 탐구가 목적이어야 할 학문을 친일파 후예들의 권력과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학문의 외피를 씌워 이것을 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재로 사용함은 자유, 정의, 평등, 박애 등 인류 보편 가치를 훼손하고 탈식민, 탈냉전, 민주주의 가치에 역행해 ‘폭력의 세기’로 회귀하고자 함과 다르지 않다. 일본이 식민주의, 강권주의, 침략주의를 기반으로 해 지난 20세기 초반 36년간 우리 민족에게 자행한 억압과 착취의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일본의 식민 지배가 우리 민족을 근대화했다는 외피를 씌워 정당화하고자 함은 네오나치즘의 친일적 변종으로서 이에 대한 문학적이고 미학적 작업을 통한 예술적 저항은 더욱 요청되며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면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민족과 동아시아 민족에게 저질렀던 폭력과 그것을 정당화했던 이념의 허구성을 파헤치고 자유, 정의, 평등, 박애 등 인류 보편 가치를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오늘날의 항일문학 창작과 연구는 새 생명을 획득해 문학의 격을 고양할 수 있다고 본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 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 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훈의 소설 『하얼빈』(2022)은 안중근 의사의 삶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일본 제국주의 주구 이토가 우리 민족과 동아시아 민족을 지배해 이득을 얻기 위해 저지른 침략 전쟁을 ‘문명개화’와 ‘동양 평화론’의 허구로써 미화하면서 살육을 자행함에 안중근 의사는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침략당하고 살육되는 동아시아 민족을 대표해서 권총 한 자루를 들고 이토를 저격해 처단한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처단한 이유가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우는 ‘문명개화와 대동아주의의 동양 평화론’이 날조된 허구임을 밝히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주적 동양 평화론’이 무엇인지 안중근 의사가 정립한 참된 평화론을 동아시아를 넘어서 전 세계인에게 발표하기 위함을 알 수 있다.
방현석의 소설 『범도』(2023)는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를 그려낸 소설로, 앞에서 언급한 이동순 시인의 시집 『내가 홍범도다)』와 같은 배경에서 창작된 21세기의 항일문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다음 말에 주목해 그 의미를 이해하고 가치를 따져 보자.
안중근과 홍범도가 필요한 시대는 절망의 시대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 한반도에 필요불가결한 상징적 존재였던 안중근 의사와 홍범도 장군이 21세기 한반도의 현실에서 필요한 존재라면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국난의 위기에 해당한다.
위에 인용한 말처럼 “안중근과 홍범도가 필요한 시대는 절망의 시대”이며 “21세기 한반도의 현실에서 안중근 의사와 홍범도 장군이 한반도에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국난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역설적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얼빈』, 『범도』와 같은 항일문학은 ‘폭력의 세기’로 회귀하고자 하는 세력의 불순함에 저항하면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스라엘의 하마스 기습 공격으로 확전되고 있는 중동의 전쟁 등을 통찰케 한다.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 미국과 일본과 남한의 대립이 격화함으로써 발발할 수 있는 한반도 전쟁을 사전에 단호하게 물리치고 진정한 의미의 동아시아 평화론을 방법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작품 외적 효과가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을사늑약, 정미늑약, 경술국치 시기를 포함해 일제 강점 36년간 창작된 항일문학의 여러 장르와 함께 해방 이후에서부터 21세기 초반 현재에 이르는 문학작품들을 포괄적 범주로 묶어 인류 보편의 주제적‧미학적 현재 가치에 부응하는 항일문학 작품 창작과 항일문학 연구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순환적 대화를 시도하는 범주 확장은 가능하며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3.
항일문학의 시간적 범주를 일제 강점 36년에서 그 이전과 그 이후를 포괄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탄력적으로 확장할 수 있듯이 한반도에서 발행한 매체 외에 중국, 미국, 일본 등에서 발행한 다양한 매체로 그 공간적 범주를 확장함 역시 가능하다. 이 글의 맨 앞에서 1934년 박화성의 「헐어진 청년회관」을 《조선청년》 창간호에 싣고자 했지만, 일제의 출판물 검열로 전면 삭제되고 말았음을 살펴봤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중국, 미국, 일본 등에서 발간한 매체에 수록된 항일문학작품들을 발굴해 정리하고 평가하는 연구 범위의 확장은 필요한 것인바, 이 작품들이 당대의 자료적 가치 외에 21세기 현재의 항일예술작품 창작과 평가에 유효한 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의 근대문학은 일제가 거미줄처럼 쳐놓은 각종의 탄압 법령 조항들이 날로 아메바식 분열을 거듭하여 가는 숨막히는 현실 속에서 극심한 영양실조와 빈혈증세를 보이면서 매우 힘들고 어렵게 전개해 왔다. (...) 때문에 항일독립투쟁의 내용을 담은 문학작품들이 발표되기가 무척 힘들었으며, 간혹 발표된다고 하더라도 투쟁의 내용을 직접 다룰 수 없어 대부분 암시나 상징, 기타의 간접적 표현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일제가 휘두르는 검열의 폭력이 미치지 못하는 망명지의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 폭압정치에 항거하는 독립투사들의 모습과 저항의지를 직접 그린 문학작품들이 발표되기 시작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에서 발간된 〈신한민보〉와 중국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은 귀중한 매체가 되었다. 여기에 실린 저항시가와 소설작품들은, 지나치게 서구 문예사조를 모방하여 문학적 기교만을 중시하거나 아니면 독자들의 통속적 흥미 유발에만 치중하던, 당시 국내에서 발표되던 많은 양의 문학작품들과는 그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매우 대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한마디로 국내에서 인기를 끌던 작품들이 대부분 현실문제를 외면하거나 체제 순응적인 발상으로 씌어진 데 반하여 위의 신문에 발표된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민족해방 운동 노선을 적극 수용하고 그 구체적인 투쟁양상을 보여주려는 입장에서 창작된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연구 결과처럼 미국, 중국 망명지에서 발간한 〈신한민보〉, 〈독립신문〉에 발표된 항일문학작품들은 “민족해방 운동 노선을 적극 수용하고 그 구체적인 투쟁양상을 보여주려는 입장에서 창작된 것”으로 당대 독립투사들을 “생동하는 성격을 지닌 구체적 인간”, “비범한 힘이나 능력을 지닌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번민과 갈등, 자존심과 수치심, 고통과 욕망을 함께 소유한 평범한 인간”,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투쟁적인 인물들”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뿐만 아니라 이 작품들을 통해서 서구 문예사조의 모방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발전하는 근대미학적 소설 문체를 연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양의 연구가 필요하고, 장려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으로 망명한 산암(山岩)이란 호를 쓰는 작가가 〈신한민보〉에 1913년 6월 23일에서 1914년 1월 8일까지 30회에 걸쳐 발표한 항일독립투쟁소설 「힘쓰면 될 것이라」의 부분을 살펴보자.
저놈들이 달려들어 나를 무수히 난타하더니 방안에 등대를 매어 사람의 반 길쯤 되게 한 후에 위에다 널판을 가로막고 널판 위에 쇠고레를 박은 후에 사람을 그 아래에 들여세우고 머리끝을 그 쇠고레에 잡아맨 후에 나로 하여금 그 속에 들여 세우니 그 등대가 낮음으로 늘어서지도 못하고 머리끝을 달아매었음으로 앉지도 못하니 나의 정형은 엉거주춤하여 고난이 막심할 때에 벗은 발이 휘당 밖에 나가면 쇠몽둥이로 때리니 (...) 그러므로 기진맥진하여 몇 시 후에 벌컥 주저앉으매 고로쇠에 달아매었던 머리끝이 먼저 무너나며 꼭대기의 살은 문적 떼어 고로쇠에 달린 머리끝이 머릿살 한 조각을 묻혀가지고 달려 더령궁더령궁 흔들리며 나의 머리의 피는 솰솰 흘러 얼굴과 옷깃을 다 적시니 발뒤축까지 흘러내릴 때에
위의 「힘쓰면 될 것이라」의 독립투사의 고문 장면은 우리 국어의 다양한 어휘들을 동원해 긴 호흡의 만연체로 생생한 묘사를 끌어가고 있다. 1913년에 미국 망명지에서 발표한 이 소설의 가치는 주제적 측면뿐만이 아니라 소설 미학적 측면에서 박사학위논문 분량과 수준으로 여러 연구를 지속해서 수행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연구를 뒷받침할 자료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기초 작업 외에 적절한 연구 방법에 대한 논의 확장이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와 관련해 디아스포라 문학론과 항일문학론의 경계, 교차점, 융합 가능성 등 이론적 연구가 요구된다. 한국문학은 한국어로 창작돼야 한다는 점에서 일본어로 창작한 김사량이나 한설야 등의 문학작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일본어로 조선의 민족의식과 현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의식을 반영한 작품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작품론과 작가론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방법론을 이론적으로 심화해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망명지 중국에서 한국어로 창작한 항일문학 외에 중국어로 창작한 항일문학을 한국 문학사에서 어떻게 접근해 연구해야 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 중국의 이동매, 우림걸 두 연구자가 공동 발표한 논문을 참조하면 중국으로 망명한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과 관련해 발간한 신문, 잡지가 200여 종이며 시, 희곡, 비평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몇 백편의 문학작품이 발표되었고 당대 중국 지식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만큼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일제시기에 한국인은 중국에서 200여 종의 신문, 잡지를 발간하였다. 1913년 이시영, 이회영 형제가 창립한 신응학교에서 〈신응학우보〉가 졸업생에 의해 창간되었는데 이는 한국인이 창간한 최초의 매체로 보인다. 3‧1 운동의 발발에 따라 (...) 1919년에만 11종의 매체가 발간되고, 1920년대에는 70종 가량의 신문, 잡지가 창간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국인의 매체가 다시 집중적으로 창간되었다. 조선민족전선(1938), 조선의용대통신(1938), 동방전우(1939) 등이 대표적이다. (...)
200여 종의 매체가 한결같이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민족의 해방을 호소하며 온전한 항일의 공공영역을 구축했다. (...)
한국이나 중국의 항일 공론장에서 500편에 달하는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시, 산문, 희곡, 비평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된 이 작품들은 망국의 비애, 일본식민통치에 대한 폭로 및 비판, 항일운동의 현황 등을 다루었다. 항일현장에 쓰이고 항일정신이 넘친 이 작품들은 한국인의 항일문학의 실제로 볼 수 있다.
한국어로 창작된 중국 망명지의 항일문학 외에 중국어로 창작된 항일문학작품 500편에 관한 정리에서부터 한국 한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과 현대 중국어로 창작된 작품들을 분류해 그 가치를 논하는 작품론 연구가 필요하다. 작품 내용을 소개하는 낮은 차원의 연구를 넘어서 그 가치와 수준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작업 등으로 연구가 확장될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중국의 이동매, 우림걸 두 연구자의 문제 제기와 작품 정리는 귀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4.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창작한 항일문학이 한국문학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비교문학론의 관점에서 중국인이나 일본이 창작한 항일문학은 한국 항일문학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음 또한 분명하다.
중국은 한국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일본과 전쟁을 했으며, 한국 독립운동가와 독립군대와 함께 투쟁했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중국의 항일전쟁 시기에 창작된 중국의 항일문학은 그보다 앞선 한국의 항일문학, 특히 한문과 현대 중국어로 창작된 한국 항일문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국인의 매체가 다시 집중적으로 창간”되고 중국어로 한국인이 창작한 항일문학이 “한국이나 중국의 항일 공론장에서 500편에 달하는 문학작품이 발표”됐다는 사실을 근거로 구체적으로 증명돼 나갈 것이다.
그러나 비교문학적 연구를 통해서 양국 문학의 영향 관계를 따져 우열을 논함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수주의적 시각에 갇혀 불필요한 논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의 항일문학 간에 이러한 비교문학적 연구는 거의 없다고 판단되는바, 항일문학의 가치가 전쟁과 살육, 지배와 착취에 반대하고 탈식민‧탈냉전의 평화와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미학적으로 고양함에 있음을 명백하게 하는 가운데 한국과 중국의 항일문학의 비교문학적 연구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일본 근현대문학사에서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지지하고 국제적 연대를 보낸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 등의 작품론과 작가론을 한국 항일문학론의 범주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항일문학론의 범주에서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 등의 작품론과 작가론을 분석해 본다는 것은 일방적 영향이나 우열 관계를 논함을 목적으로 둘 수 없다. 항일문학의 가치는 전쟁과 살육, 지배와 착취에 반대하고 탈식민‧탈냉전의 평화와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미학적으로 고양함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 중국, 일본 동아시아 3국은 오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삼국시대에는 중국 당나라와 신라연합군, 백제와 일본 연합군의 국제전쟁, 당나라와 고구려‧백제 유민과 연합한 신라 간의 국제전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원나라와 연합한 고려와 일본 간의 국제전쟁, 조선시대에는 중국 명나라와 연합한 조선과 일본의 국제전쟁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고 이어서 중국을 침략했을 때 한국의 독립군들과 중국이 연합해 일본과 전쟁을 벌였다.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국은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도와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은 멈췄으나 한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채 피를 나눈 가족 간에도 만나기는커녕 전화도 편지도 주고받을 수 없는 비인간적 상황과 언제라도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은 동아시아 패권을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과 일본을 동맹으로 묶으려 하고, 이에 위협을 느낀 북한, 중국, 러시아가 과거의 동맹으로 돌아가 한반도의 긴장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한반도와 동아시아 3국의 평화 체제를 공고하게 구축함은 절실하지 않을 수 없다.
동아시아는 침략 당사국이었던 일본이 과거사를 평화와 인도주의적인 원칙에서 정당하게 해결하지 않고서는 지금과 같은 불협화음이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 나올 수밖에 없다. (...)
문제의 초점인 과거사 청산이나 교과서 문제는 바로 동아시아 전 지역의 지식인과 문학예술인들이 진작 해결했어야 했던 너무나 묵은 과제라는 점에서 항일문학의 절박성이 등장한다. 과거사 청산의 주체는 곧 항일문학 정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주제는 결코 지나간 시절의 한가한 문학 담론이 아닌 현재와 미래의 동아시아 평화 정착을 위한 주춧돌임을 일깨워 준다.
위의 10년 전 상황 인식은 2024년 현재 더욱 절실해진바, 항일문학론의 동아시아 공통의 가치가 “현재와 미래의 동아시아 평화 정착을 위한 주춧돌”일 때 인류 보편의 가치로 빛날 수 있음을 새겨야 한다.
5.
한국의 항일문학 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남북 분단의 특수한 현실은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이 글에서는 ‘시간, 공간, 언어, 주체’라는 4개 범주에서 항일문학을 이해하고 가치를 논하는 탄력적 담론 수립에 일차적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북한문학사뿐만이 아니라 한국문학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항일문학작품들과 작가들을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논하기 어려웠다. 만약 이 글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된다면 한국문학사와 북한문학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보완돼야 할 것이며, 항일문학과 항일문학의 상대개념인 친일문학에 대한 남북한 문학사의 서술을 비교해 보고 이에 대한 논의를 한 번 더 보완함으로써 항일문학 범주의 탄력성과 가치에 관한 담론은 깊어지고 섬세하게 빛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민족의 문제는 엄밀하게 점검해야 할 것이다. 항일문학은 민족문학의 하위 범주이기 때문에 이과 관련해 민족주의, 민족, 민족문학 개념에 대한 점검은 피할 수 없다. 이 글을 맺기 전에 다음 글을 주목해 보자.
한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 ‘이 땅의 혼’을 찾으려는 노력들을 ‘민족주의’니 ‘국수주의’ 따위로 비판하고 폄하하는 한심한 비평가들이 뜻밖에 여전히 많다. 2000년대 초인가 이화여대에서 당시 한창 유행하던 '내 안의 파시즘'이란 주제로 학술모임이 있어 업서버로 참여한 바 있는데, 연사나 토론자들이 이 땅의 정체성 자주성 유서깊은 정신 세계를 공부하고 중시하는 것조차 민족주의니 국수주의 딱지를 붙이는 서구 유학파 반민족주의자들의 면모를 보고서 참담한 심경이 되었던 적이 있다. 기독교에선 淫心만 품어도 죄악이라더니, 이 땅의 정신과 영혼을 공부하는 마음조차 ‘내 안의 파시즘’, ‘민족주의’와 구별을 못 하니….
이 글에서 논한 ‘항일문학 담론과 그 범주의 탄력성과 가치’는 위의 ‘내 안의 파시즘’으로서 ‘민족주의’의 하위개념일 수 없다. 이에 관한 논의는 다른 자리를 마련해 보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