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결론
국가와 그 하위집단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이다. 사회는 그 사회세포를 다시 찾고자 한다. 사회는 개인이 갖고 있는 권리의식과 그밖의 더 순수한 감정-자선, ‘사회 봉사’, 유대의 감정-이 혼합되어 있는 묘한 정신상태 속에서 개인을 찾아 보살핀다. 증여의 주제, 즉 증여 속에 들어 있는 자유와 의무, 후한 인심 그리고 주는 것이 이롭다는 주제가 마치 오랫동안 잊어버린 주요동기의 부활처럼 우리 사회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 우리는 저 ‘고귀한 지출’의 관습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또 그것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 부자들은 자발적으로 또 의무적으로도 자신들을 자기 동포들의 이른바 회계원이라고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대문명 중에는 50년절(jubile: 50년마다 한 번씩 치러지는데 이때 노예는 해방되고 매입된 토지는 본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준다. 이스라엘에서 유대교의 안식년 원칙을 연장한 것으로, 안식의 해라고도 불린다.-역주)이 있는 것도 있었고 공공봉사, 합창단원으로 일하기, 삼단노선 장비 유지의 의무, 연회 또는 조영관의 집정관의 의무적인 지출제도가 있는 것도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관습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어서 우리는 개인의 생명, 건강, 교육, 가족, 그리고 가족의 장래를 더 많이 배려할 필요가 있다. 고용 계약, 부동산 임대차 계약, 필수품의 매매 계약에는 더 많은 선의, 인정,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투기와 고리대금의 수익을 제한하는 수단도 찾지 않으면 안된다.
... 우리는 옛날로 또한 기본적인 것으로 돌아갈 수 있고 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도 많은 사회와 계급이 알고 있는 생활과 활동의 동기, 즉 공공연하게 주는 즐거움, 후하고 풍류가 있는 지출의 즐거움, 환대와 사적, 공적인 축제의 즐거움을 다시 발견할 것이다. 사회보험, 상호부조 조직, 협동조합, 직업단체 및 영국법에서 ‘공제조합’이라고 불리는 모든 법인에서의 배려는 귀족이 소작인에게 보장한 단순히 개인적인 보증보다도, 고용주가 지급하는 매일매일의 임금이 가져다 주는 빈약한 생계보다도, 심지어 변하기 쉬운 신용에만 의지하는 자본가의 저축보다도 더 낫다.
이와 같은 원리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수 있다. ... 그곳에서는 명예, 무사무욕, 집단적인 연대가 빈말이 아니며, 또한 그것들은 노동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 이것이야말로 ... 위대한 진보일 것이다. (256-257)
갖가지 종류의 사회...에서 물건을 순환시키는 것은 유용성 이외의 다른 것이다. 씨족, 연령집단 그리고 일반적으로 성별집단은-그들간의 접촉에서 생기는 다양한 관계 때문에- 끊임없는 경제적 흥분상태에 있으며, 게다가 이 흥분 자체에는 현실적인 것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그 흥분은 우리의 판매와 구입보다도, 노무의 고용보다도, 또는 증권투기보다도 훨씬 더 활기차다. (263)
순수한 지출 이외의 다른 지출 및 교환 방식이 있다는 것은 아마도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생각으로는, 가장 좋은 경제조처는 개인적인 욕구의 계산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 단순히 개인의 목적만 추구하는 것은 전체의 목적과 평화, 전체의 노동과 즐거움의 리듬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그 반작용에 따라 –개인 자신에게도 해롭다. ...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성실하게 수행한 노동에 의해서 평생 동안 정당하게 보답받는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보다 사람을 더 잘 일하게 만드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된다. 생산자=교환자는 자신이 생산물이나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것을 교환하고 있으며 그 자신의 어떤 것, 즉 그의 시간과 생명을 주고 있다고 또다시 느끼고 있다. ... 따라서 그는 이러한 증여에 대해서 적절하게 보상받기를 원한다. 그에게 이러한 보상을 주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태업을 하게 함으로써 생산성 저하로 이끈다. (272-273)
그들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두 집단이 만나는 경우, 그들은 서로 피하거나-경계심을 나타내거나 도전하는 경우에는 싸우거나-아니면 잘 거래할 수 밖에 없다. 우리와 매우 비슷한 법규범을 지녔을지라도, 또 우리와 별로 무관하지 않은 경제제도를 지녔을지라도, 언제나 이방인과는-비록 그와 동맹을 맺었을 떄에도-‘거래’가 행해진다.
트로브리안드 섬의 키리위나 사람들은 말리노프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부 섬 사람들은 우리처럼 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잔인하고 인육마저 먹습니다. 우리가 도부 섬에 도착할 때에는 그들을 경계합니다. 우리를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생강 뿌리를 씹어서 뱉으면 그들의 정신이 바뀝니다. 그들은 창을 버리고 우리를 환영합니다.“ 축제와 전쟁 간의 불안정한 관계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것은 없다. (280)
사회는 그 자체, 그 하위집단과 그 성원이 제공, 수용, 답례를 행하며 자신들의 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한도 내에서 발전해왔다. 교역을 개시하려면 먼저 창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씨족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부족간, 민족간 그리고 –특히- 개인간에서도 재화와 사람을 교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서로 이익을 만들어주고 충족시키며, 마침내는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그것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씨족, 부족, 민족은 서로 살육하지 않으면서 대립하고 또 서로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주는 법을 배웠다. ...문명적이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세계의 계급과 국가, 개인도 앞으로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지혜와 유대의 영원한 비밀 가운데 하나이다. (281)
오늘날에도 국민들은 강하고 부유해지며 또 행복하고 선량해질 수 있다. 민중, 계급, 가족, 개인은 부유해질 수는 있지만,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원탁의 기사들처럼 공동의 부 주위에 앉을 수 있을 때뿐이다. 선과 행복이 무엇인가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부과된 평화 속에 공공을 위한 노동과 개인을 위한 노동이 교대로 일어나는 리듬 속에, 또한 축적된 다음 재분배되는 부 속에 그리고 교육이 가르치는 서로 간의 존경과 서로 주고받는 후함 속에 있다. (282)
이 다양한 동기와 요인들의 합이 사회의 기초를 이루며 공동생활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 동기와 요인들의 의식적인 관리가 최고의 기술, 즉 그 말의 소크라테스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이다. (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