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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
1990년 9월 20일 대한민국 보물 제1046호로 지정된〈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라는 것이 있다. 여기의 상단 산수화는 인조 21년(1643) 선조의 부마 동양위 신익성(東陽尉 申翊聖:1588∼1644)의 의뢰에 의하여 화가 이징(國工, 虛舟 李澄:1581∼?)이 그렸고, 하단의 글씨는 신익성의 자필이다. 세로 89㎝ 가로 56㎝인 이 그림에는 일두 정여창(一 鄭汝昌:1450∼1504) 선생의 섬진강시 절구(蟾津江詩:先生絶句)와 악양정시서(岳陽亭詩敍)·신익성의 발문, 그리고 아래와 같은 남명(南冥 曹植:1501∼1572) 선생의 글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남명선생이 명종 13년(1558)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유두류록(遊頭流錄)》의 4월 16일 조에 있는 말이다. 여기에서 말한 도탄(淘灘)에서 1리쯤 되는 지점은 정여창 선생이 함양으로부터 처자를 이끌고 와서 살던 곳이라는 뜻이다. 정여창 선생은 연산군 4년(1498)에 있은 무오사화 때 점필재 김종직(畢齋 金宗直:1431∼1492)의 문인이라 하여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다가 6년 후인 연산군 10년(1504) 4월 1일 적소(謫所)에서 사망하였는데, 이 해 9월에 다시 일어난 갑자사화 때 부관(剖棺)의 율을 당한 분이다. 그리고 경남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 분이기도 하다. 호는 일두(一),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일두 정선생의 행장에 의하면, 그는 섬진(蟾津)의 어귀에 "작은 정자를 얽어 악양정(岳陽亭)이라 편액하고, 몸을 감추어 닦으면서 글을 읽고 도의를 강론하며 시가를읊으면서 즐기었다"고 하였다. 선생은 함양군 개평 출신이지만, 그의 행장과 연보, 그리고 관련 사료 등을 종합해 보면, 성종 14년(1483) 진사시에 합격할 때에도 이곳에 살았고, 21년(1490)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에도 이곳에서 살았다. 그러면 일두 정여창 선생이 살았던 지점은 지금의 어느 곳일까. 그리고 악양정은 어느 곳에 있었을까. 무오사화 이후 4백 년이 지난 고종 33년(1896) 산석 김현옥(山石 金顯玉:1844∼1910)은 몇몇 동지와 더불어 소학강계(小學講契)를 베풀고, 하동부사 장두삼(張斗參)에게 청하여 남명선생이 언급한 도탄에서 1리쯤 되는 지점에 악양정을 복원코자 협의하였다. 이에 앞서 관포 어득강(灌圃 魚得江:1470∼1550)은 선생이 몰한 지 45년이 되는 명종 4년(1549) 쌍계사에 가서 팔영루 운(八詠樓 韻)을 짓고 일두선생의 옛 집에 들러 "죽림으로 반이 가렸다"는 시를 남겼고, 옥계 노진(玉溪 盧:1518∼1578)은 선조 4년(1571) 10월 쌍계사를 구경하고 일두선생의 유적을 살펴 "석양에 말을 세워 옛 터를 찾으니"라는 시를 남겼지만,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러했던 것이 ‘도탄에서 1리쯤’이라는 남명선생의 언급에 의하여 지금의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덕은동(德隱洞)으로 밝혀진 것이다. 4백 년의 세월 속에 악양정은 허물어져 흔적도 없었지만 뜰 앞에 심었다는 매죽(梅竹)이 확인됨으로써 입증된 것이다. 남명선생이 언급한 도탄은 화개장터 아래에 있는 섬진강 여울을 말하며, 덕은(德隱)이라는 말은 일두 정선생의 유덕이 갈무리되어 있다고 하여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고증되기 3년 후인 광무 3년(1899) 3월 향내 사림(士林)들의 발의에 의하여 하동군수 강영길(姜永吉)·박기창(朴基昌)의 지원과 후손들의 참여로 광무 5년(1901) 4월에 악양정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남유(南遊) 중이던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1833∼1906) 선생이 진주에서 쌍계사로 가던 중 악양정에 들려 「악양정중건기」를 찬하였고, 예조·이조판서를 역임한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1853∼1936)는 악양정이라는 현판과 주련의 섬진강 시를 썼다. 악양정 경내의 덕은사(德隱祠)에는 태사 휘국공 회암 주부자(太師徽國公晦菴朱夫子)·문경공 한훤당 김굉필(文敬公寒暄堂金宏弼)·문헌공 일두 정여창(文獻公一鄭汝昌)·문민공 탁영 김일손(文愍公濯纓金馹孫)·둔재 정여해(遯齋鄭汝諧) 등 다섯 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4월 15일에 석채의전을 받들고 있다.
악양정에는 남명선생의 두류록 중 일부를 기록하여〈악양정구적(岳陽亭舊蹟)〉이라는 제목으로 편액되어 있고, 1984년 김범수 편저 하동향교 발행의《악양정지》가 있다.
그리고 악양정은 악양정 정장 김상용·하동향교 전교 정한효·유도회 하동지부장 최재현·악양정지 편저자 김범수 등 4명의 문화재 지정신청에 의하여 1995년 5월 2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어 있다 |
[경상대학교] 향토사 연구가 고 김범수씨 소장 도서 1605권 기증
입력 2017-01-09 19:12:47
[쿠키뉴스 진주=강종효 기자] 경상대학교(총장 이상경)는 진주지역 향토사 연구가 고 김범수씨의 소장 도서가 아들 김동철씨에 의해 경상대학교 도서관에 전량 기증됐다고 9일 밝혔다.
이번에 기증된 도서는 조선왕조실록 등 한적 영인본 도서와 진주지역의 각종 향토사 자료 등 1605권이다.
마호섭 도서관장은 지난 6일 기증자를 초청해 도서 기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 기증 도서의 활용계획을 설명했다.
고 김범수씨는 다년간 진주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면서 ‘의기 논개’라는 책을 발간해 논개는 장수 태생이 아니라 진주 출신임을 주장했다.
또한 ‘악양정지’, ‘촉석루 창건고’, ‘진주지명사’, ‘진주누정지’, ‘논개의 역사는 바로잡아야 한다’ 등을 발간하는 등 지역 역사 연구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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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상
2022년 10월 30일 오전 04:00
«老栢軒»
辛卯年(一八九一) 老栢軒 鄭載奎는 河東 岳陽亭에 벗과 후학들을 데리고 왔다。小學童子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小學 講會를 마련하고 각기 『小學』 一장씩을 읽고 술 한 잔씩을 마셨다。그리고 함께 좌석한 金豊五라는 이가 一蠹의 「岳陽」시를 먼저 노래로 부르고 濯纓의 「小學詩」로 마쳤다。이러한 경과를 老栢軒이 「岳陽亭 會遊記」『老栢軒集』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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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헌집(老柏軒集) 정재규(鄭載圭)생년1843년(헌종 9)몰년1911년자영오(英五), 후윤(厚允)호애산(艾山), 노백헌(老柏軒), 회송(晦松)본관초계(草溪)특기사항기정진(奇正鎭)의 문인. 김석귀(金錫龜), 정의림(鄭義林), 기우만(奇宇萬), 허유(許愈), 곽종석(郭鍾錫) 등과 교유
老柏軒先生文集卷之三十四 / 記 / 岳陽亭會遊記
一蠧先生看盡頭流千萬疊。孤舟又下大江流一絶。知德者以爲人欲淨盡。天理流行。嘗竊味之。蓋與沂雩風詠。發聖人吾與之嘆者。同一氣象。然曾氏得聖人爲之依歸。自身涵濡於太和元氣之中。舍瑟之對。固其所也。若先生生於絶學之後。倡明肇自己身。誰從啓發。只一同德之友。有寒暄先生者。其得之之難。賢於曾氏遠矣。且曾氏狂者也。行有不掩。若先生。夷考其行。孝弟通於神明。踐履中於規矩。然則先生孤舟大江。意象之悠然。得之資深居安之餘。而非直天資是爾也。嗚呼盛矣。先生所以資所以居。果惡在乎。朱先生所編小學一書。敬之如父母。信之如神明。魯齋以後。未之有聞。惟寒暄皓首蓮纓。自稱小學童子。謂光風霽月。不外是矣。先生與寒暄志同道合。當時有大猷唱之伯勖和之之稱。是則先生之所以資之深居之安者。亦不可外小學而求之。亭在頭流之南蟾江之上。號以岳陽。因地名也。先生自天嶺與濯纓金公上頭流順蟾江而下。孤舟大江之句。乃其時酬唱也。愛其山水之勝。因寓於岳陽之縣。築亭以居之。後値陽九。亭爲墟今幾四百年。亭墟而地就僻。遺風之猶存。亭楣之嗣葺。已無議爲。至於行過是墟。寓高山景行之思者。南冥所歎千頃水一月。十層峯一玉之外。亦無聞焉。嗚呼唏矣。載圭與湖南友人鄭季方。有蕭寺之約。過岳陽。金君豐五偕焉。豐五嘗寓於是。與居人朴生濟翊,劉生啓承,李生炳憲,炳郁,鄭生基洙議。掃遺墟修講契。以致地荒井廢之感。而以余過是。置酒相邀。設小學講會。會者數十人。各誦一章。酒一廵而止。豐五遂歌孤舟大江之句。亂之以寒暄小學詩一絶。因曰亭廢之後。不知甚人於此處講此事。繼此而修而張大之。又有甚人。是在朴李劉鄭諸君自勉之如何耳。又曰不有以唱之。孰有和之者。吾子之今日聽講於此。或將爲諸君和之之資歟。子盍記之以待焉。余逡廵沉吟。有所感於心者。先生余朝暮遇者也。而今又周旋於考槃之遺墟。可謂目擊道存。而古人所謂吟風弄月以歸。有吾與點也之意者。於我有絲毫彷彿者歟。方且愧縮之不暇。而又文之耶。姑擧先生所以資焉居焉者。爲諸君一道之。辛卯秋八月下澣。八溪鄭載圭記。
고종 | 28 | 1891 | 신묘 | 光緖 | 17 | 49 | 8월, 河東 岳陽亭 강회에서 「小學」을 강하다. ○ 정의림과 求禮의 華嚴寺 강회에서 강론하다. ○ 12월, 물계리 옛집으로 돌아오다. |
老柏軒先生文集附錄卷之一 / 年譜
二十八年辛卯 先生四十九歲。
八月。會講小學于河東之岳陽亭。
亭一蠧先生講道之所。會者數十人。有會遊記。記見文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