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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陜川) 이연서원(伊淵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
한강집(寒岡集) 정구(鄭逑)생년1543년(중종 38)몰년1620년(광해군 12)자도가(道可)호한강(寒岡), 사양병수(泗陽病叟)본관청주(淸州)시호문목(文穆)특기사항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
寒岡先生續集卷之八 / 書 / 答鄭生員 俊敏
近與士友輩議凈寫禮說。未寫前。須先正校。非左右。又無以辦此事。頃適有後生者。進于貴隣。爲作邀君書。具告以寫與校之由。請君必枉於十七八。十七昨昨也。十八昨日也。謂此事。非專是僕之私營。則想公必不靳一枉。苦俟兩日。竟未覩雅儀之枉。書或不傳否。公或有事否。皆未可知也。僕昨日力疾。來到檜淵。蓋取同事諸賢之宿食有便也。塊坐終日。只有鄭生秀民來會。公知此事。豈一老物一後生所能辦得也耶。
한강집 속집 제8권 / 서(書) / 정 생원(鄭生員) 준민(俊敏) 에게 답함
요즈음 사우(士友)들과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깨끗이 등사하자고 논의하였네. 등사하기에 앞서 반드시 먼저 오자와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야겠는데 그대가 아니고서는 이 일을 해낼 만한 사람이 없네. 저번에 마침 어떤 후생이 그대의 이웃 마을로 간다고 하기에 그대를 영접해 오는 글을 써서 보냈는데 그 내용은, 등사하고 교정하는 일이 있으니 반드시 17일이나 18일에 왕림해 달라는 것이었네. 그런데 17일은 그저께이고 18일은 어제 지나갔네. 이 일이 나 개인의 사적인 일만은 아니므로 그대가 반드시 한번 왕림해 주는 것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틀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그대는 끝내 오지 않았네. 내 편지가 혹시 전달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네.
나는 어제 병을 무릅쓰고 회연(檜淵)으로 왔는데 그 이유는 함께 작업하는 제현의 숙식에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네. 나는 종일토록 우두커니 앉아 있고 정생 수민(鄭生秀民)만 이곳에 와서 함께 있네. 그대는 이 작업이 과연 이 한 늙은이와 한 후생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보는가.
[주-D001] 정 생원(鄭生員) : 정준민(鄭俊敏)의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정윤복(鄭潤福)의 아들로 성주에 거주하였다. 작자보다 13년 연하이며 1582년(선조15)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3
寒岡先生文集卷之五 / 書 / 答鄭俊敏
得奉淸游於高明爽塏之地。摩挲舊蹟。塵土消落。亦浮世不易之幸事也。所恨老病之人。難於留滯。一宿匆匆。忽焉告別。奇賞未穩。佳會卽罷。寧不爲別後之追慨者乎。追遣賢胤。貺書問還。厚義之至。又非思慮所到。感愧之交。盈襟莫瀉。許接群朋。數日作擾。獲審邇來雅履淸勝。此間傾慰。又無以過此。雲山之勝。登覽之跡。宜不可以埋沒。而旣非拙筆所堪形容。則乞毋惜一場構思。以永其傳。幸豈啻千百也耶。况諸賢之辛勤營建之勞。尤不可使之泯泯。則城山記之作。恐老契不得以辭焉也。如何如何。寒月將傾。胤還告匆。所懷之多。不能縷縷。
한강집 제5권 / 서(書) / 정준민(鄭俊敏)에게 답함
높고 밝아 가슴이 탁 트이는 집에서 그대와 어울려 청아한 유람을 할 기회를 가져 지난날의 행적을 회상하매 세상의 잡념이 사라졌으니, 이 또한 헛된 세상에 얻기가 쉽지 않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네. 한스러운 것은, 이 늙고 병든 사람이 오래 머물러 있기 어려워 하룻밤만 넘기고서 바쁘게 작별함으로써 특별한 유람을 차분히 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모임이 그만 흩어지고 만 것이니, 어찌 헤어진 뒤에 줄곧 한스럽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곧 그대의 아들을 보내 내가 무사히 돌아왔는지에 대해 물어주었으니 그 지극한 후의는 미처 생각지 못한 일로서 고마움과 부끄러움이 가슴 가득 교차하여 이루 형언할 수가 없네. 여러 벗들과 어울려 며칠 동안 어수선하게 지내고 있는 이때 그대의 근황이 요즘 청아하고 여유롭다는 것을 알고 나니 지금 내 마음이 위안되는 것으로는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네.
산천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곳을 유람한 우리들의 자취는 마땅히 묻어 버릴 수 없기는 하지만 이미 미숙한 나의 필치로 형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바라건대 그대가 한번 생각을 얽어 후세에 길이 전해지도록 해 준다면 그 다행스러움이 과연 얼마나 크겠는가. 더구나 여러 벗들이 갖은 고생을 하며 집을 지은 노고를 더욱 헛되이 사라지게 할 수 없는 일이니, 성산기(城山記)를 짓는 일을 그대가 사양할 수는 없을 것 같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겨울철이 거의 지나가는 이때 그대 아들이 바쁘게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가슴에 품은 많은 사연을 일일이 다 쓰지 못하였네.
[주-D001] 정준민(鄭俊敏) : 정준민은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정윤복(鄭潤福)의 아들로 성주에 거주하였다. 작자보다 13년 연하이며 1582년(선조15)에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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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岡先生續集卷之八 / 書 / 答李以直 𥳕
伻來獲書。知近况平安。慰不可言。僕病不啻如昨。抑又加矣。憫極憫極。病旣如是。而又不能已焉。頃因二三後進之請。不能止焉。以君爲都有司。以子馨等四人爲別有司。以初十日會于泗上新齋。料理禮說。畧成頭緖。待春凈寫事爲約而出通文。來書。何無此語耶。無乃尙未見耶。可恠。僕以爲若初十日驟逢諸君之會。則病中難於頓酬。玆値鄭秀民之過。苦請暫留。欲暫爲經先整頓之計。半日力疾。則痛楚頑痺。極難堪支。半日而已如此。初十日諸君掃除萬故。飄然馳馬而來。各自秉筆而問。則其何以左答而右酢耶。此最不可說之悶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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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岡先生續集卷之八 / 書 / 與盧任仲 脊
逑曾有儀禮一書。旣燬於甲寅之火。
광해군 | 6 | 1614 | 갑인 | 萬曆 | 42 | 72 | 1월, 蘆谷精舍의 화재로 많은 저술이 불에 타다. ○ 泗濱으로 이사하다. ○ 여름, 불에 타고 남은 책을 수습하고 五先生禮說을 改撰하다. ○ 10월, 아들 鄭樟의 상을 당하다. |
不復得見者。今三載矣。
광해군 | 9 | 1617 | 정사 | 萬曆 | 45 | 75 | 7월, 東萊 溫泉에서 목욕을 하다. ○ 泗陽精舍를 짓고 泗陽病叟로 自號하다. ○ 五服沿革圖를 완성하다. ○ 一蠹鄭先生實記를 짓다. |
禮有所疑。莫由考據。玆幸借得於人。不久當還。積病將死之中。自不知溘然之遲速。而過慮或得少延。則未死之前。茫然窘鬱。復如前矣。用不他揣。輒謄本。近將請于諸士友。各寫一卷。敢又奉稟僉左右。願得可否之命。如蒙不外。許以惠助。則當卽將新舊本各一冊。筆墨各一把。以煩文史矣。猶不敢猥希强許。幸各詳思。或許或否。竝無所妨。
寒岡先生續集卷之八 / 書 / 答盧任中
謹奉辱惠書。就審天寒雅履佳福。感慰無量。僕所患賤疾。入冬愈谻。委臥沈呻。日事痛楚。旁症多端。無計支吾。悶且奈何。兇人再搆之捏。幸蒙聖明洞燭。而猶未知前頭之復如何爾。高門亦疊有可虞之憂。天日孔昭。竝皆烟曉。深用向慰。
兒孫來致手札。辭意勤懇。披閱欣慰。如奉雅儀。因審天寒。侍奉有相。所履佳福。尤以爲喜。逑風痺兩歲。半體全枯。鍼藥未效。又妄信人言。至於遠浴寒椒。歸旣數月。痛楚依舊。杜門沈呻。與死爲隣耳。禮經之寫。深荷相愛。舊藏旣火之後。悶無由得見。敢生謄出之計。今且繕粧成帙。皆朋友之力也。病中慰幸。甚不自已。謬詢兩幅。不揆愚昧。輒伸妄報。雖出於有不敢辭。而慚悚則深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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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岡先生續集卷之七 / 書 / 與鄭參奉 秀民
獲披貺書。具悉淸夏。所履佳福。感慰俱至。僕經年宿痾。一向彌苦。杜門痛楚。惟死是隣耳。猶不計死。期欲謄寫儀禮。眞膏肓之癖。其無藥可醫。與僕今日所中無異也。
相愛之至。相望之遠。一書之來。感何可喩。霜寒。攝況佳福。尤以爲喜。僕不堪痛楚。千里遠浴。歸未得效。沈呻度日耳。今此禮經之寫。專荷士友之相助。而君亦力疾秉筆。所書亦頗佳矣。遙深感幸。謝何容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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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岡先生續集卷之七 / 書 / 與崔德久 恒慶
春事向盡。風日和煦。想調况快迪。體履輕安。甚慰甚慰。雖不能遠動十里。鞍馬猶可堪矣。而隔年阻思之苦。不能勝杜門靜居之樂。老物引領眼寒之望。何足道哉。此中方有禮說校勘之役。有切承敎之願。而何敢望乘興之枉哉。公雖不能來。賢胤士仰則暫許來訪。如何。前於檜淵。獲奉惠訪。得遂雅款。感荷多矣。卽日旱熱頗苦。淸况何似。向仰可堪。僕來時又患寒熱之痛。極苦還棲。閱旬餘毒尙未全除。又哭樂齋賢友。悲悼不自禁耳。似聞裴有隣姜檜年。皆被歲貢之抄。此兩生者。皆後生中謹愼之人。何緣遽罹此厄。僕皆愛護者。而聞有此事。病中不任務念。公須深體鄙意。許令圖免。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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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岡先生別集卷之一 / 書 / 答任卓爾 屹
昨因令姪來訪。仍奉盛札。欣悉近來天寒。靜養萬福。想所造亦日益深。感慰可量。僕衆怨羣謗之中。扶病僅支。氣象憒憒。他百皆不足道。人之有言。無非在我致得。直須自反深省。內訟而已。豈宜較量彼此得失。有所不平之意哉。來書所敎。無非相愛之至。而但少些深警切責之意。恐欠朋友相勉之道也。如何如何。每念左右好學之篤。求進之誠。未嘗不感歎而起懶也。謬詢一紙。留俟少靜未間。切祝調護益珍。
每見惠書。每有晩悟篤學之意。其視早有志老頹闒者。其如何哉。每不勝欣慕之至。仁敬兩錄。寧敢慳焉。早晩當一奉示。李先生禮疑答問。粗已畢寫。而類多乖舛。亦不無疎漏之處。似不足示人。奈何。先賢諸碣。關東地誌。果皆來在。而碣則未軸。誌在藁。皆不足播諸人眼矣。南丈禮裒時。無欲還之意。還亦自有人可專。不必奉勞盛伻之遠將也。
千里盛札。忽墜弊榻。急折疾讀。蘇感何勝。謹悉天寒。靜攝有相。味道益勝。尤甚欣賀。鄙人抱病杜門。日惟憒憒。只覺衰敗轉加。他不足言。每承謬問。不免妄報。常恐獲罪於知禮識道之君子。而頃者百餘之問。忽又驟至。展閱茫然。迨不知所以辨白。故不勝羞悶之私。敢陳分疎之辭。今者果蒙惠敎。不恕譴誨。不一奉讀。慚悚尤不知所謝。前留盛詢。謹置之巾篋中。近因寒疾久滯。且有進箚待命之事。不能暇及於細究矣。當竢春開日溫。謹奉詳而隨賤見錄報一二也。幸有以寬諒而不甚罪焉。則不勝幸甚。
前後謬問。積而成軸。緣病且多事。又緣身與書冊。每相各處。有不得輒考。因循遷就。累歲闕報逋慢罪深慚悚無裁。玆不免强留來使。至於三日之久。而新居僻阻。又無朋友之助寫。艱成草報。字不如樣。想有多未曉見處。豈合奉掛高眼。益增愧惕。無已無已。其所見矇謬處。想蒙矜原。不惜一一回誨。無任拜籲懇跂之至。逑四載沈痼之疾。轉益加苦。雖幸一息尙存。而元氣之敗。則有不可道。閉門昏呻。唯床蓐是守。他何說哉。書冊之功。全抛已久。本原埋沒。如鏡塵昏。顧省初心。未嘗不喟然太息耳。今又感冒日久。喘痢交發。憊臥痛楚。尤無以自振也。今承惠敎。且奉李君。蘇感雖深。而不能開張談說。益加浩歎。兩度問目。雖不敢又負。略塵其下。而廢學之久。言何或是。唯在高明酌處而已。
逑經年沈痛之苦。不足言。眩暈膈痰。交祟互盛。豈八十衰老人所堪支。吾病旣如此。而自不揣死期。深以得見禮說於旣燬三載之後爲幸。方謀謄本。措得紙筆。分諸士友而請寫。此又豈濱死隣鬼人所合經營事乎。亦竊自咍焉耳。欲資老兄分笑。謾幷及之。想一哂之餘。應憐愛書膏肓之癖。有甚於中風危篤之候矣。何由一奉相對敍說。而一慰一笑也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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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岡先生別集卷之一 / 書 / 答李茂伯 潤雨
狼狽還山。病患爲撓。心緖悶亂。殊無佳况。專价貺書。滿紙懃懇。翫復感荷。如奉晤語。不覺心開而目明也。但僕何能堪見敎鄭重之望耶。秪令人反省慙悚而已。然厚意何敢忘。惟相與勉之無懈。則僕亦敢不益自策勵。庶幾收得桑楡一分之效也耶。
近久不與人聞問。亦未知左右消息。意謂已發京行。今旣四五日矣。玆忽謹奉貺書。備悉示意。恩命又下。馹趨有旨。感慰之餘。又深爲世道有不寐之喜也。此時進退之難。果如所諭。公旣精思而不得其盡善。至於謬詢。况我老耄悲疚中。安能爲左右善爲之謀乎。反覆思惟。茫然而爲之愧歎也。第念公終非不仕之人。前日之不出。只緣一時不得已之勢。且今者旣决赴謝之計。亦將登途。而忽此遭遇。恐不當復拘形迹之嫌。唯在直趨拜命。到彼如有未安之勢。則亦可觀勢而爲之進退。自無所妨。崔申中途之辭。固不必援。亦不當避。惟省其在我者而已。區區之見如是。不知左右以爲如何。自餘所祝千萬自重。以道義自處。俾無一言行尤悔。以副拳拳相愛之望。
漆室之憂。自知誠不足道。而亦有不能自已者。豈非秉彜之本心哉。如有可聞者。便中乞勿惜示及也。只祝若時自珍。盡心奉職。以爲酬報鴻恩之地。不勝幸甚。
近來懷抱之惡。殊無以自慰。豈世間別離之苦。老而愈甚耶。昨者豚兒之進。亦未有一書。蓋書亦別無所言。而無言勝有言也耶。玆奉專人貺書。以道臨別未盡之懷。翫復感歎。益增慰賀。僕窮居無事。唯欲自勉於未死之前。而昏衰已甚。殆不能自振。是用憂懼。如無以自處耳。僕旣無自得之效。爲君雖欲拳拳以盡相愛之情。而亦何能有力耶。然不能自已所以前者之別。亦不免有所云云耳。唯君有以諒察焉。
李馨甫遽爾作古。尙忍聞哉。信實好古。留心此學。後來朋友中寧復有斯人耶。爲之痛惜不已。種不入土。六道皆然。哀我生靈。已不足道。國事將何所底止耶。况回祿之災。不惟都城之慘。兩都與麻浦惠山。皆受其禍。漆室之憂。其何紀極。禮說之寫。不可緩矣。而昨者公所出通文。旣無决末。又不處置。終乃置諸席上而行。僕躬自收拾。一旣失之。一置之冊裏。而忘不更得。近來士友間處事蓋如是。適有叔發歸便。聊用語及。所以警渠。而恐渠不省也。
僕依舊拘病。埋首校勘之役。困苦孤懷。又誰說與。只自任之焉耳。方收入脫漏。又編入各門小敍。所以爲事勞而爲功不易也。承示晦間下山。此役若畢於其前。使君得撫成帙。亦足爲幸事。而唯恐有未及焉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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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岡先生別集卷之一 / 書 / 答李汝懋 厚慶
思欲與諸賢。講磨舊學。庶幾爲桑楡收拾之計。而新進好學者。固未得見。昔時相從之輩。亦未有不汨沒而安於自畫。此令人意思不佳。殊未有以自慰。可歎可歎。
汝濟衝風雪遠來相訪。留數日晤語。且得見兩君書。披翫感荷。其所以慰山中寥落之懷者。爲不小矣。第惟老夫。元氣之敗。比來轉甚。恒事呻痛。或至如不能終日者。其於書冊之役。亦不能自盡其心力者。其於收拾桑楡之計。何如也耶。秖劇憂懼。殊無佳况耳。想公等不能擺脫舊習。不免悠悠過了難得之日子。爲可歎也。振奮自力。更加自新也。
近思通讀之議。頃發於後生諸君。頗皆以爲好事。而科試之前。何暇爲此等事。似當待過試之後。而亦未知果有能擺脫而來與之相從者否耳。曾因書偶及。亦似非無意者。而公等不免爲宂務所縻。亦恐此處諸人之不能擺脫竝然耳。
禮說。幸已寫訖。而群聚荒茫。舛錯處脫漏處甚多。不免力疾躬核。苦無人伴。時或有如忘其病之在身者。可笑。
汝懋別紙示諭。感領厚義。言或不恕。情實相愛。何用至於追思而爲之瞿然耶。所謂事無一毫有違於義理者。信乎爲相警之至言也。第僕之所懼。事事違拂。非但一毫而已也。暮年經營之禁與定棲謝絶之云。尤荷藥石之誨。僕亦豈不欲留意於此。豈喜經營而惡謝絶者哉。惟患勢有所不然。而不能已焉耳。然爲君見誨。其不佩服矣乎。亦願君更加勉。益進不已。亦不終棄。益勤垂警。
昏不能自振者。正老夫所憂。公等亦以爲病。惟願黽勉奮迅。敦篤加功。常存心於豎立之地。以副老夫之望。老夫亦庶有以自勵也。
此地曾經君去年之見。江湖郊原之槩。想已領略之矣。第惟寬閑寂寞之切近。未有此比矣。兩別紙。領見之。人心世道。亦不足云。來書所謂脫落收拾磨礱成就云者。固其所願。而亦非無分人所得以遂之焉者也。奈何。吾見則杜門潛伏。不相聞於世俗爲好計也。如何如何。未涯相對。唯祈勉勵之哉。日思進造焉。且加自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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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思遠 | 1550 | 1615 | 達城 | 行甫 | 樂齋, 晩悟堂, 顧諟 |
寒岡先生文集卷之十二 / 祭文 / 祭徐行甫 思遠 文
寒岡病人鄭逑。以亡友樂齋先生徐公行甫再朞將盡於明日。不任悲迫之至。略將菲薄。令孫兒奉奠于靈前。公初厭世僅逾一朔。而忽遘風痺之疾。右一邊全枯。遂爲杜門長卧之人。賤蹤不獲近於几筵之側。濱死之中。惟有一念徒往來於平生追隨之樂。自此重逢於地下。固未卜其久近。而在世之日。則斷不得更覩儀刑而承講劘之幸矣。滿世相愛。零落已盡。惟公獨存。而公又至此。踽踽無與。病懷孤苦。已矣已矣。亦復何言。念公淸臞之容。樂易之質。勿勿之誠。休休之量。其復得見於斯世邪。孜孜力學。勉勉求道。淹貫羣書。雖甚病而猶不輟。聚徒講學。樂而忘憂。此爲公一生進修之功。而病生之所以欽想愛慕。願窮年相從而得資其警省者也。古人所謂病孰箴而過孰督者。寧不三復歎誦於今日。而爲失聲呼痛者邪。我遭回祿之厄。公嬰沈痼之疾。自力馳往。慰諭懇。至仍請移卜。必欲接隣。旣就新居。鳩巢未成。則力疾冒寒。不避村店之踈虛。日夜同其寢處。而又結小齋於傍近。爲永好不離之計。或採於山。或漁於江。尋芳野外。賞花林間。未嘗不同隨而共樂。又有東村莫逆之友。而爲我左右之契。孰謂一年未訖。而俱失左右。吾又落在半死之中。世間人事之不可期。果如是哉。潛思此理。亦不須長吁。而道不得同憂。學不得共講。其於未死之前。安得不爲之深悲而永歎也哉。病中口呼。辭不盡懷。山肴一笥。詎盡哀情。惟公不亡。尙鑑玆衷。
宋遠器 | 1548 | 1615 | 冶爐 | 學懋 | 啞軒 |
寒岡先生文集卷之十二 / 祭文 / 祭宋學懋 遠器 文 丙辰
광해군 | 8 | 1616 | 병진 | 萬曆 | 44 | 74 | 7월, 榮川의 椒井에서 목욕을 하다. |
嗚呼。學懋而至是邪。吾病在床。今十朔矣。轉側不能自由。匙著必須於人。痛楚沈呻。如不能終日。公每見訪。未嘗不慼乎其悶焉。吾亦自謂必死而不爲獲保至今也。亦不謂公之康寧無恙。而乃反使我遽忽哭之也。事之不可期。理之不可知。其至是哉。自孩而壯而老。三卜隣竝。厚蒙知許。惠好已深。游從最久。磨礲相長。憂樂必同。唯期永世。寧知有今日邪。其爲痛惜之至。豈但古人靑春白首泛然之云哉。家庭孝友之行。實有古人之風。朋友相愛之誠。不以窮達而變。安於儉素。而不樂紛華。薄於榮利。而不肯冒進。臨事盡心。則雖難不辭。聞義必爲。則雖辱不避。此皆僕心所敬慕。而罕見於今世者也。今而後寧復有斯人也。去夏哭樂齋。今又哭夫公。垂死病中。情有可以自抑者邪。設使僕不卽死。而少延性命。將誰與晤語而有處世之樂哉。瞻望銘紼。一杯莫躬。忍疾敍懷。心焉如燬。嗚呼公乎。哀哉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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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岡先生別集卷之一 / 書 / 與李汝懋
禮說得繕寫裝帙。前二後三幷五冊矣。猶不免疎漏顚錯。必更料理精寫。而後方始粗完矣。相望之遠。不得會合。遂此共商整頓之願。歎復奈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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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岡先生別集卷之二 / 詩 / 挽李仲綏 福長
憶昔同鄰寓。重歡舊契深。每承編禮勸。時共瀉情斟。千里溪橋上。三年雲樹陰。忍題今日挽。衰淚滿衣襟
한강집 별집 제2권 / 시(詩) / 이중수(李仲綏) 복장(福長) 의 죽음을 애도한 만사
어릴 적 이웃에서 살던 우리가 / 憶昔同鄰寓
다시 만나 옛 정이 한결 깊었지 / 重歡舊契深
예서 편찬 권고를 항상 받으며 / 每承編禮勸
정 나누는 술자리 함께 가졌고 / 時共瀉情斟
천리 너머 시내의 다리 위에서 / 千里溪橋上
작별한 지 어느새 삼 년이로세 / 三年雲樹陰
오늘 만사 그 어찌 차마 쓸쏘냐 / 忍題今日挽
늘그막의 눈물이 옷에 흥건해 / 衰淚滿衣襟
[주-D001] 이중수(李仲綏)의 …… 만사 : 작자가 63세 때인 1605년(선조38)경에 쓴 것으로 보인다. 이복장(李福長)은 충청도 목천(木川)에 살았던 인물로 작자의 어릴 적 벗으로 사료된다. 작자가 61세 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사직하고 목천에서 5개월 동안 머무른 적이 있는데, 이때 권유로 송나라 정호(程顥), 정이(程頤), 사마광(司馬光), 장재(張載), 주희(朱熹) 등 다섯 명의 예설을 모아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를 편찬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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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 제1권 / 만사(挽詞) / 박 수재(朴秀才) 진휘(震輝) 의 죽음을 애도한 만사 2수
고향 땅 많은 후생 접해 본 이 몸이라 / 多少鄕閭閱後生
그대 부음 듣고서 너무도 마음 아팠네 / 自聞君訃最傷情
어머니 뒤를 따라 저승으로 돌아가니 / 萱堂隨引歸長夜
자식 잃은 부친 아픔 위로할 말 없어라 / 春府無辭慰喪明
오현이 남긴 예설 한데 모아 책 만들 제 / 五賢禮說集爲書
고마워라 우리 그대 자주 나를 일깨웠지 / 共事多君屢起余
애석하다 수문랑(修文郞) 어이 그리 다급했나 / 惜也修文何太遽
교정 손질 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오 / 每因編校淚沾裾
[주-D001] 오현(五賢)이 …… 만들 제 : 작자가 61세 때인 1603년(선조36)에 충청도 목천(木川)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의 벗 이복장(李福長)의 권유로 송나라 정호(程顥), 정이(程頤), 사마광(司馬光), 장재(張載) 등 다섯 명의 예설을 모아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를 편찬한 일을 말한다. 이 책은 필사본 형태로 작자의 집에 보관하고 있던 중, 1614년에 불이 나 기타 많은 책과 함께 불타 버렸다. 이것을 문인들과 함께 다시 편찬하여 1618년(광해군10)에 출간하였다. 《寒岡集別集 卷2 五先生禮說分類跋》[주-D002] 수문랑(修文郞) …… 다급했나 : 진(晉)나라 때 중모 영(中牟令)을 지낸 소소(蘇韶)가 죽은 뒤에 그의 6촌 아우 소절(蘇節)에게 모습을 나타내어 말하기를 “안연(顔淵)과 복상(卜商)이 지금 지하에서 수문랑 벼슬을 하고 있는데 수문랑은 모두 여덟 명으로 귀신들 중에 성인이다. 나도 지금 그 벼슬을 하고 있다.” 했다는 데서 나온 말로, 문인이 죽은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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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岡先生別集卷之二 / 雜著 / 五先生禮說分類跋
余於癸卯春。
선조 | 36 | 1603 | 계묘 | 萬曆 | 31 | 61 | 3월, 洪州 牧使가 되었으나 呈辭하고 木川에 우거하다. ○ 9월, 환향하다. ○ 寒岡 북쪽 夙夜齋가 완성되다. ○ 五先生禮說分類와 心經發揮 등을 편찬하다. ○ 鄭仁弘과 절교하다. |
在湖西之木州。亡友李福長仲綏勸令類輯諸先生論禮。以便觀覽。且招呼旁近士子十五餘員。乘筆助役。纔半月而草本成焉。仲綏又欲爲之入梓。余以此事。本爲老病便考。何至刊刻傳播。且草率苟簡。尤不合輕出。力止而停之。投置巾衍中。未幾。余還嶺南。而仲綏下世。辛亥秋。
광해군 | 3 | 1611 | 신해 | 萬曆 | 39 | 69 | 三經 經文의 口訣을 釐整하다. |
星山士友輩。請遂凈寫。余仍敍顚末而弁其首。甲寅春。
광해군 | 6 | 1614 | 갑인 | 萬曆 | 42 | 72 | 1월, 蘆谷精舍의 화재로 많은 저술이 불에 타다. ○ 泗濱으로 이사하다. ○ 여름, 불에 타고 남은 책을 수습하고 五先生禮說을 改撰하다. ○ 10월, 아들 鄭樟의 상을 당하다. |
家僮失火。滿架書冊。盡入灰燼。而此書亦不保。徐思遠行甫宋遠器學懋共勉重輯。而余旣遭長子之喪。又遘風痺之疾。憊臥床蓐。與死爲鄰。然而一念猶未忘也。朋徒往來。或寫或校。至于累年而功今始訖。此禮設編次之前後曲折也。辛勤則已甚。而取舍之舛則恐不免焉。豈不爲可懼。而回思癸卯。忽已十有六載矣。仲綏行甫學懋皆不及覩。俯仰之間。悲感亦係之矣。玆用追記。以備後日之有攷云。戊午秋九月丁酉。逑。識。
광해군 | 10 | 1618 | 무오 | 萬曆 | 46 | 76 | 河洛圖書屛을 만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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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岡先生文集卷之十 / 序 / 五先生禮說分類序
節文乎天理。而儀則乎人事。散之爲三百三千之有秩。統之爲一身一心之所幹。未嘗斯須去乎君子之身。道德仁義以之而成。君臣父子兄弟以之而定。所以古之人。自視聽言動之近。達之家鄕邦國之遠。無所不用其誠敬焉。然而常禮惟一。變禮萬殊。雖在音博識之上。尙未免臨機滋惑。是非相眩。議論多歧。聚訟構嫌。至於擧天下而莫辨。積世代而留疑。其精微之難審。眞是之莫睹。果如是哉。天相斯文。五星重明。有若兩程先生,涑氷先生,橫渠先生與夫晦菴朱先生輩出迭興。大道以闡。宣揭人文。以禮爲本。隨事剖析。如指諸掌。大而宏章巨論。約而片言單辭。無非一循乎天則。曲盡乎人情。精深懇到。明白昭晰。其所以開牖乎後學之耳目者。豈但爲車之指南。燭之炳幽乎。惟是散編於文集語錄等書及諸經傳註。雖有意於尋考。渺然若滄海之求珠。倉卒急遽之際。其何能徧閱而拈出也。一旣放過而差了。則雖或追而有得。亦莫及於己誤矣。況或至於終始罔覺。率意做錯。明白定論。自昭昭於方冊之中。而我乃漠然。與之背馳而不省。豈不爲不幸哉。近世或有採摭成帙者。有曰喪祭禮錄。有曰朱門問禮焉。而皆只取朱子之書。亦不備焉。且門類不分。間見雜出。猶夫舊汗漫也。此余所以輒不敢自揣而。有此類輯之役。庶機或有一分之助。而溫公書儀與本集。旣不得見。又僻處窮山。他書多不能廣考。其所分而門焉者。亦安能秩秩各從其類。得不爲具眼者所誚乎。至於旁採前後諸賢所論。間或附入。且於各門題下。略證古禮。或暫記事審。以便考據。亦未必盡然而有闕之者焉。初不敢爲廣播遠傳計。只爲我老境臨疑考證之便。而精力衰耗。取舍紊舛。則亦其勢之所不免也。書成近十年。置在亂稿中。近有士友輩圖欲淨寫。旣不敢辭。因敍其所爲本末。僭題首簡。若能深體五先生折衷之本意。而取正於朱黃通解之書。有以仰泝周孔之大原。則所以爲義之實。可以自得。所以本於太一者。可以黙會。而三綱五常之大體。其斯立矣。萬曆辛亥夏四月任午。後學西原鄭逑序。
五先生禮說。旣訖類輯。人有見而問之者曰。爲五先生禮說焉。而朱子家禮。尙不在編中。寧有說邪。諸先生之語。率多一時隨事門答。初非爲行禮節次。有爲而施敎。故或重複而繁蔓。或闕漏而疏脫。若使家禮隨門類入。則節目咸備。次第靡闕。亦可以據而行之。豈不爲禮家之完書哉。余謂言固然矣。余亦初有是意。亦嘗試入於冠昏等禮矣。旣又思之。所以爲此書者。實非有求多於古人。只緣諸書散載之言。殊不便於倉卒之考閱。故今故爲抄集便覽地。若家禮之書。夫旣盛行於當世矣。家無不有。人無不講。今復取而編入。則豈不爲重複而煩猥者哉。況家禮旣爲一部成書。此書當不過考證羽翼而已。尤不合破彼而補此。此所以欲入而還之者也。今亦不敢强從人言。復慮他人之見而疑之。有司前詰。故輒錄其語。以見鄙意云。逑謹識。
[주-D001] 司 : 同